배현수가 차에 올라타자 백소미의 목소리가 들렸다.“해군, 육군, 공군과 같이 주위를 다 찾아봤는데 아무런 단서가 없어요. 예지은 씨, 아직 대제주시에 있을 거예요.”하지만 3시간째 뒤지고 있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배현수는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그 어떤 정보가 나와도 내선으로 연락하지 마세요.”백소미는 순간 멈칫했다.“배 대표님, 무슨 말씀이세요?”배현수는 한마디만 했다.“귀신이 있어요.”게다가 국내에서 레벨이 있는 사람이다.드래곤 파가 719부대에 내부 간첩을 두었다면 예지은이라는 쓸모없는 인간을 잡아간 목적은 무엇일까.예지은으로 배현수를 견제할 수 없다. 차라리 조유진을 잡는 게 훨씬 가성비가 있을 것이다.그들이 조유진을 잡지 않는 것은 지난번 스페인 기지의 폭파로 드래곤 파가 크게 다쳤기 때문이다.하지만 예지은을 잡아가는 것은 적어도 배현수에게 위협은 될 수 있다. 설마 도발하는 것일까?...오후 8시 성남컨벤션센터.조유진은 드레스를 입고 엄창민의 팔짱을 낀 채 들어왔다.몇몇 비즈니스 지인들이 엄창민에게 인사를 하러 왔다.“지난번에 엄 이사님께 여자친구를 소개시켜 드리겠다고 했는데 거절하시더니 이렇게 예쁜 여자친구가 있어서였네요.”조유진의 정체가 공식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이들이 이렇게 오해하는 것은 당연했다.엄창민은 웃으며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조 대표님, 농담도 참. 여동생인데 회사에 들어온 지는 꽤 됐어요. 앞으로 같이 일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니 만나게 될 겁니다.”조유진은 당당한 모습으로 디너백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건넸다.“조 대표님, 제 명함입니다.”조 대표는 당연히 거절할 리가 없었다. 리셉션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모두 명함을 주고받으며 인맥을 넓혔다.“네, 네. 나중에 같이 일할 기회가 있으면 다시 연락하죠.”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이에 엄명월이 샴페인 한 잔을 들고 그들에게 다가왔다.조유진 곁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그 대표님은요?”조유
그와 한바탕 따지려 했지만 돌아선 얼굴에 엄명월은 어리둥절했다.김씨는 생김새가 옹골찬 편이지만 사악하고 제멋대로인 눈앞의 사람은 한눈에 봐도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두 눈이 마주친 순간 엄명월은 약간 어리둥절했고 맞은편에 있는 그 사람의 눈빛은 매우 공격적이었다.눈빛에 어색함을 느낀 엄명월은 헛기침하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사람을 잘못 봤어요. 그 인간인 줄 알았습니다.”재웅은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그 인간? 저를 욕하는 것인가요?”엄명월은 맞은편의 사람을 몇 번 더 훑어본 후 말했다.“그건 아닙니다. 전에 뵌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성남 사람들은 대부분 얼굴이 익숙한데 그쪽은 아니어서요.”재웅은 샴페인을 들며 말했다.“바다가 크니 낯선 얼굴이 있는 게 이상할 것은 없잖아요.”이곳에 온 사람들은 모두 비즈니스를 하러 온 사람들이라 어느 정도 인맥이 있다.엄명월은 잠깐 생각하다 물었다.“혹시 성함이 어떻게 될까요? 성남에는 어떻게 오게 된 거예요?”재웅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조롱이 섞인 눈빛으로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성은 재, 이름은 오라고 합니다. 재오요. 실례지만 아가씨의 성함은 어떻게 됩니까?”엄명월은 가볍게 웃더니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저요? 제 성은 이, 이름은 사예요. 이사.”재웅의 얼굴에 눈웃음까지 더해졌다.“이사 씨, 이름이 매우 특이하네요.”“그쪽도요.”...한편 반대편에서 조유진은 연회장 내 사람들과 한 바퀴 돌며 인사했다. 십여 장의 명함을 주고받은 뒤 하얀 모피 조끼를 두르고 맨 위층 스카이라운지로 향했다.스카이라운지는 하늘과 별을 볼 수 있는 라운지이다.조유진은 휴대전화를 들고 사진을 여러 장 찍어 선유에게 보내려다 즐겨찾기에 있는 카톡 메시지에 눈길을 돌렸다.[대답 좀?]이게 지금 반성하는 태도란 말인가?오후에 선유가 배현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지금은 오히려 조유진의 휴대폰에 배현수의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걸려왔다. 하지만 늘 방해금지 모드로 되어
지금 이런 상황에 강이찬은 현실감이 없었다.한때 조유진에게 마음이 뺏겼던 적이 있다. 같이 불꽃놀이를 본다는 것은 그때의 그에게 아름답지만 멀기만 했다.하지만 지금은 조유진과 함께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서 있다.그리고 마음속에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다.한참이 지나자 강이찬은 창밖의 눈송이를 바라보며 물었다.“스코틀랜드에는 지금 눈이 내리고 있을까?”그녀에게 묻는 것 같기도 하고 자신에게 묻는 것 같기도 했다.조유진이 자리를 뜨려 했지만 옥상 통로가 잠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강이찬이 걸어와 손잡이를 몇 번이나 비틀었지만 열리지 않았다.“아마 누군가 우리 둘을 여기에 가두고 하룻밤을 같이 있게 만들려고 한 것 같아.”이 말에 조유진은 눈살을 찌푸렸다.몸도 이상하고 답답한 가슴 때문에 점점 목이 메었다.조유진은 어깨에 걸친 모피 조끼를 여미고 휴대전화를 꺼내 엄명월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다시 엄창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빠, 저 옥상에 갇혔어요.”엄창민은 사람들을 데리고 재빨리 도착했다.조유진의 얼굴은 이미 비정상적인 홍조를 띠고 있었고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엄창민은 조유진을 부축해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엄창민이 이날 밤 조유진과 같이 검은 우산을 쓴 사진이 검색어에 올랐다.사진 속 엄창민은 한 손으로는 검은 우산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뒷좌석 문을 열고 있었다.한 손으로 가슴을 누르고 있는 조유진은 짧고 하얀 모피 조끼를 입고 있었다. 청초하고 예쁜 얼굴을 살짝 숙일 때마다 큰 웨이브 펌을 한 머리는 그녀의 얼굴을 반쯤 가렸다. 차 밖으로 하얀 눈이 흩날리는 사진 속 풍경은 더욱 운치를 더했다.한 사람은 우산을 들고 신사 같은 모습으로 차 지붕에 손을 올려 그녀가 차에 부딪히지 않도록 했다. 여자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 가슴 앞 드레스를 누르며 허리를 굽혀 차에 오르고 있다.스킨십은 없었지만 많은 상상을 하게 했다.특히 조유진의 목덜미와 볼은 연한 연지빛을 띠고 있어 썸을 타는 듯했다.누리꾼들은
침대 사진? ?이 세 글자는 배현수를 완전히 화나게 했다.남자의 시커먼 눈동자는 잔뜩 움츠러들었고 가슴팍에 쌓인 울화통 때문에 숨이 점점 더 가빠졌다.예지은의 갑작스런 실종만으로도 충분히 화가 나 있는 상태인 데다 조유진마저 다시 성남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배현수는 하루 종일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무릎 위에 늘어뜨린 손은 어느새 주먹을 꽉 쥐었고 눈꺼풀은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배현수는 눈을 감고 불편한 느낌을 억지로 누르며 네티즌의 말에 답장하지 않고 대신 조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몇 번이나 전화했지만 조유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한숨을 내쉬며 어쩔 수 없이 제일 아니꼽게 여기던 엄창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한참 동안 울린 후에야 연결되었다.전화기 너머의 엄창민이 통화 버튼을 누르고 ‘여보세요’라고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조유진의 고통스러워하는 소리가 들렸다.“창민 오빠... 나 너무 괴로워요...”엄창민도 전화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이 조유진에게 집중했다.“힘들어? 어디가 아파?”“온몸이 간지러워요...”온몸에 천만 마리의 개미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조유진은 무의식적으로 목덜미,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손끝에 힘을 주자 하얀 피부에 금세 핏자국이 하나둘씩 잡혔다.엄창민은 황급히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환희야, 함부로 긁지 마!”“못 참겠어요...”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부드럽고 온화하며 아름다운 것이 마치 비 오는 밤에 수양버들이 하늘하늘 날리는 것 같았다.이 목소리는... 평소 계곡의 맑은 샘물처럼 청량한 목소리와는 사뭇 달랐다.휴대전화를 손에 쥐고 있는 배현수의 얼굴은 점점 차가워졌고 검은 눈동자는 더더욱 두꺼운 얼음으로 얼어붙은 것 같았다.“엄.창.민. 대체 유진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남자의 얼음장 같은 매서운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차갑게 전해졌다.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검정색 벤틀리 차 안.엄창민은 마구잡이로 움직이는 손을 잡으며 배현수에게 말했다.“내가 환이에게 뭘 할 수
마음이 너무 아픈 엄준은 엉겁결에 엄창민을 바라보았다.“안 되면 너라도...”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었기에 엄준도 어쩔 수 없었다.엄창민은 난처해하며 실소를 터뜨렸다.“아버지, 진짜로 내가 나서면 내일 아침 환희가 저를 칼로 찔러 죽이지 않을까요?”엄준은 급한 마음에 주저하며 왔다 갔다 했다.이때 마당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이어 누군가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집안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도 집사의 눈이 번쩍이더니 이내 소리쳤다.“어르신, 도둑놈 사위가 왔어요!”너무 감격스러운 나머지 그만 사실대로 말해버렸다.입이 방정이지... 도 집사는 손을 들어 자기 뺨을 세게 때렸다.황급히 배현수를 위층으로 안내하며 말했다.“드디어 오셨네요! 아가씨가 곧 얼어 죽을 것 같아요!”배현수는 밤새 운전해 성남으로 왔다. 밖에 눈이 내리고 있어 코트에는 아직도 겨울밤의 매서운 추위가 감돌고 있었다.얼굴빛은 더욱 어두웠다.“누가 몸을 담그라고 했습니까!”엄창민이 대답했다.“환희 스스로 요구한 거야.”배현수는 엄준에게 인사할 틈도 없이 욕실로 뛰어들었다.조유진은 옷을 입은 채 욕조에 앉아 온몸을 웅크린 채 추위에 떨고 있었다.배현수는 그녀를 찬물에서 번쩍 안아 올렸다.옆에 있는 하녀를 한번 쳐다보고는 말했다.“문 닫고 나가세요. 내가 돌볼 테니.”“네...”하인이 나가 욕실 문을 닫자 문밖에 있던 엄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도둑놈 사위가 그래도 제때 와서 다행이야.”...욕실 안에서 배현수는 젖은 조유진의 차가운 셔츠를 전부 벗겼다.의식을 잃을 정도로 차가웠던 피부에 뜨거운 기운이 느껴지자 조유진은 움츠러들었다.온몸이 너무 차가워서 뜨거운 물로 직접 샤워할 수 없다. 조금씩 열을 올려야 했다.배현수는 두껍고 건조한 커다란 목욕타올을 잡아당겨 그녀의 몸을 감싼 뒤 그녀를 안고 침실 침대로 옮겼다.3시간 가까이 찬물에 몸을 담근 조유진은 지금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 제정신이 아니다.방안에는 부드럽고 따뜻한 오렌지
성남컨벤션센터에서 진행된 술자리는 방금 끝났다.재웅이 차에 앉자 스페인에서 걸려온 암호화된 전화번호가 휴대폰에 걸려왔다.이어 전화기에서 웅장하고 위엄 있는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웅아, 내일이 섣달그믐이라 아버지가 너를 위해 큰 선물을 준비했어.”재웅이 입꼬리를 올렸다.“가주님이 무슨 큰 선물을 준비하셨을까요?”“너의 원수인 예지은. 아직 살려뒀으니까 네가 와서 처리해.”깜짝 놀란 재웅은 눈을 부릅뜨더니 억지웃음을 지었다.“가주님의 큰 선물, 너무 감사합니다.”통화를 끝낸 재웅은 휴대폰을 옆에 던지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교활한 늙은이 같으니라고!”이 늙은이가 예지은을 잡은 이유가 그에게 섣달 그믐날의 선물을 주기 위한 것임을 믿지 않았다.하지만 늙은이가 이렇게 경솔하게 행동하는 이유가 무엇일까?가속 페달을 밟자 검은 차가 어두운 밤을 헤쳐나갔다....대제주시.검은색 쿨리넌은 소정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육지율은 별장에 들어간 후 차 키를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다.오늘은 설날이다.남초윤의 야식으로 만두를 빚던 진씨 아주머니가 육지율을 보고 물었다.“도련님, 만두 좀 드시겠습니까?”육지율이 안 먹겠다고 말하려 할 때, 남초윤이 마침 위층에서 내려왔다.문명희의 말을 떠올린 남초윤은 결국 타협하는 태도로 물었다.“엄마가 내일 점심에 밥 먹으러 오래요, 가기 싫으면 거절할게요.”육지율이 가기 싫다고 하면 문명희도 뭐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육지율은 눈꺼풀을 치켜올리더니 희미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눈빛은 희로애락을 알 수 없었다.“당신이 가고 싶지 않은 거야, 아니면 내가 가지 않기를 바라는 거야?”남초윤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고 서 있었다.그러자 육지율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그녀 옆을 스쳐지나며 말했다.“내일 점심에 당신 부모님 댁에 먼저 갔다가 저녁에 우리 본가로 가서 저녁 먹어.”육지율이 이렇게 흔쾌히 대답할 줄 몰랐던 남초윤은 순간 어리둥절했다.육지율이 위층으로 올라간 후, 남초윤은 식탁에
남초윤은 괜히 찔렸다.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본인이 왜 주눅이 들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밖에서 함부로 몸을 놀린 사람은 육지율이다.주눅이 든 마음이 이내 사라졌고 대신 솔직하게 말했다.“네, 나가려고요. 이혼 후 생활에 미리 적응해야죠. 육 대표님의 블랙카드는 육씨 집안 사모님에게 쓰는 것이지 남초윤이라는 사람에게 쓰는 게 아니잖아요. 이런 상황에 내 미래를 미리 준비하는 것은 당연한 거 아니에요?”육지율은 화를 내는 대신 피식 웃었다.“그래요. 너무 당연하죠. 나가서 이 사회가 얼마나 험난한지 겪어보면 알겠죠.”육지율은 다시 한번 귀띔했다.“대제주시에 남이 살던 집을 내놓은 매물도 많으니 사기당하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집 구할 때 친구 같이 다녀요. 친구가 경험이 있으니 더 잘 알 거예요.”정말 고맙다고 말해야 하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가슴에 남아있던 작은 미련은 대신 큰 손으로 변해 그녀의 얼굴을 세게 때렸다.남초윤이 잠자코 가만히 있자 육지율은 그녀가 본인 결정에 생각이 바뀌어 이사 나가지 않기로 한 줄 알고 말했다.“남초윤 씨와 육씨 집안 사모님이 되는 것에서 굳이 하나를 선택할 필요는 없으니 나에게 화나서 일부러 이사까지 가면서 고생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김성혁 씨 일은 내가 오해했어요. 요즘 설 연휴라 8, 9일 정도 휴가가 있는데 작년 겨울에 스위스의 그린드와르 마을에 다시 가고 싶다고 했잖아요? 1월 1일 티켓을 예약했는데 같이 기분 전환하러 갈래요?”남초윤은 주저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설마 그녀를 달래는 것인가?“가... 가고 싶지 않아요.”육지율은 모처럼 인내심 있게 행동했고 그녀가 거절당해도 안 좋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아니면 오로라를 보러 갈까요? 빙하도 보고?”얼굴을 숙이고 그녀를 바라보는 육지율의 말투는 너무 부드러워 사람을 달래는 것 같았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혼을 벼르던 두 사람이 지금은 어디로 여행을 가서 기분 전환을 할지 의논하고
남초윤은 주먹을 쥐고 스스로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말했다.“김성혁 인터뷰를 가지 않은 건 당신 때문이 아니에요.”이 말을 들은 남자는 잠시 멍해졌지만 이내 무심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상관없어요. 별일 없었으니까 됐어요.”이유 따위 육지율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결과에만 신경을 썼다.육씨 집안 사모님이 누구인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육지율 씨, 왜 유설영과 결혼하지 않았어요?”육지율은 심플하게 대답했다.“할아버지가 싫어해서요.”“그럼 나는요?”육성일이 유설영을 싫어하면 남초윤은 좋아하나?하지만 남초윤은 육씨 집안에 갈 때마다 어른들과 겉치레뿐인 인사만 주고받았을 뿐, 다른 것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권위가 높은 육성일은 당연히 아랫사람을 괴롭히는 데 힘을 쏟지 않는다. 게다가 그녀는 육지율의 아내인 만큼 어느 정도 체면을 줘야 한다.남초윤의 체면을 세워주는 것은 단지 육지율의 체면을 세워주는 것뿐이다.하지만 그런 친절함은 영원히 겉치레뿐이고 육지율처럼 육씨 집안 전체에 대해 소외감이 느껴졌다.높은 자리에 오래 있었던 사람이 다 그런지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높은 곳에 오래 있으면 자연스레 가면을 쓴 채 사람들과 어울리는 버릇이 생기게 된다.사랑을 말하고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억지스러운 것처럼 보인다.육지율의 대답은 여전히 진심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심플했다.“적어도 유설영만큼 당신을 싫어하지는 않아. 당신은 나와 결혼한 것이지 할아버지와 결혼하는 것이 아니잖아. 할아버지 생각에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없어. 우리는 이미 부부이고 할아버지가 아무리 내키지 않아 하셔도 우리 앞에서는 참아야겠죠, 어떻게 할 수 없잖아요.”말이 끝날 때쯤, 그는 짜증이 난 듯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남초윤 씨, 하루 종일 허튼 생각만 하지 마세요.”남초윤은 눈앞이 점점 흐려지는 듯했다. 어찌 된 일인지 더 이상 깊이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내일 저녁, 같이 육씨 가문에 가서 저녁 먹는 것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