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초윤은 괜히 찔렸다.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본인이 왜 주눅이 들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밖에서 함부로 몸을 놀린 사람은 육지율이다.주눅이 든 마음이 이내 사라졌고 대신 솔직하게 말했다.“네, 나가려고요. 이혼 후 생활에 미리 적응해야죠. 육 대표님의 블랙카드는 육씨 집안 사모님에게 쓰는 것이지 남초윤이라는 사람에게 쓰는 게 아니잖아요. 이런 상황에 내 미래를 미리 준비하는 것은 당연한 거 아니에요?”육지율은 화를 내는 대신 피식 웃었다.“그래요. 너무 당연하죠. 나가서 이 사회가 얼마나 험난한지 겪어보면 알겠죠.”육지율은 다시 한번 귀띔했다.“대제주시에 남이 살던 집을 내놓은 매물도 많으니 사기당하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집 구할 때 친구 같이 다녀요. 친구가 경험이 있으니 더 잘 알 거예요.”정말 고맙다고 말해야 하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가슴에 남아있던 작은 미련은 대신 큰 손으로 변해 그녀의 얼굴을 세게 때렸다.남초윤이 잠자코 가만히 있자 육지율은 그녀가 본인 결정에 생각이 바뀌어 이사 나가지 않기로 한 줄 알고 말했다.“남초윤 씨와 육씨 집안 사모님이 되는 것에서 굳이 하나를 선택할 필요는 없으니 나에게 화나서 일부러 이사까지 가면서 고생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김성혁 씨 일은 내가 오해했어요. 요즘 설 연휴라 8, 9일 정도 휴가가 있는데 작년 겨울에 스위스의 그린드와르 마을에 다시 가고 싶다고 했잖아요? 1월 1일 티켓을 예약했는데 같이 기분 전환하러 갈래요?”남초윤은 주저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설마 그녀를 달래는 것인가?“가... 가고 싶지 않아요.”육지율은 모처럼 인내심 있게 행동했고 그녀가 거절당해도 안 좋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아니면 오로라를 보러 갈까요? 빙하도 보고?”얼굴을 숙이고 그녀를 바라보는 육지율의 말투는 너무 부드러워 사람을 달래는 것 같았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혼을 벼르던 두 사람이 지금은 어디로 여행을 가서 기분 전환을 할지 의논하고
남초윤은 주먹을 쥐고 스스로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말했다.“김성혁 인터뷰를 가지 않은 건 당신 때문이 아니에요.”이 말을 들은 남자는 잠시 멍해졌지만 이내 무심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상관없어요. 별일 없었으니까 됐어요.”이유 따위 육지율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결과에만 신경을 썼다.육씨 집안 사모님이 누구인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육지율 씨, 왜 유설영과 결혼하지 않았어요?”육지율은 심플하게 대답했다.“할아버지가 싫어해서요.”“그럼 나는요?”육성일이 유설영을 싫어하면 남초윤은 좋아하나?하지만 남초윤은 육씨 집안에 갈 때마다 어른들과 겉치레뿐인 인사만 주고받았을 뿐, 다른 것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권위가 높은 육성일은 당연히 아랫사람을 괴롭히는 데 힘을 쏟지 않는다. 게다가 그녀는 육지율의 아내인 만큼 어느 정도 체면을 줘야 한다.남초윤의 체면을 세워주는 것은 단지 육지율의 체면을 세워주는 것뿐이다.하지만 그런 친절함은 영원히 겉치레뿐이고 육지율처럼 육씨 집안 전체에 대해 소외감이 느껴졌다.높은 자리에 오래 있었던 사람이 다 그런지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높은 곳에 오래 있으면 자연스레 가면을 쓴 채 사람들과 어울리는 버릇이 생기게 된다.사랑을 말하고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억지스러운 것처럼 보인다.육지율의 대답은 여전히 진심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심플했다.“적어도 유설영만큼 당신을 싫어하지는 않아. 당신은 나와 결혼한 것이지 할아버지와 결혼하는 것이 아니잖아. 할아버지 생각에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없어. 우리는 이미 부부이고 할아버지가 아무리 내키지 않아 하셔도 우리 앞에서는 참아야겠죠, 어떻게 할 수 없잖아요.”말이 끝날 때쯤, 그는 짜증이 난 듯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남초윤 씨, 하루 종일 허튼 생각만 하지 마세요.”남초윤은 눈앞이 점점 흐려지는 듯했다. 어찌 된 일인지 더 이상 깊이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내일 저녁, 같이 육씨 가문에 가서 저녁 먹는 것
성남, 엄씨 사택.안방 온도는 점점 높아졌다.차갑게 얼어붙었던 조유진의 피부는 점점 불타오르는 듯했다.마시지 말아야 할 음료수를 마신 그녀는 온몸이 들끓고 있다. 가는 팔로 배현수의 목을 감싼 채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현수 씨가... 필요해.”남자는 그녀의 목덜미를 잡더니 고개를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알면서도 물었다.“유진아, 뭐가 필요한데?”깊고 부드러운 키스가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하지만 더 이상의 진도는 나가지 않았다.배현수는 일부러 조롱하며 말했다.“여보라고 불러봐, 그럼 줄게.”조유진은 두 다리로 그의 몸을 감싸더니 시뻘게진 눈으로 그의 팔을 잡았다.잠깐이었지만 그녀가 참고 있는 것을 배현수는 느낄 수 있었다. 더 이상 그녀를 난처하게 하지 않게 하려고 할 때, 조유진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를 악물고 말했다.“여보...”아주 가볍고 낮은 목소리였지만 배현수의 마음을 크게 흔들었다.그녀와 깍지를 끼고 한 번 또 한 번 고조에 치달아다....다음 날 아침, 엄씨 사택의 분위기는 아주 화기애애했다.오늘은 섣달 그믐날이다.도 집사는 선유를 불러 집안에 설맞이 데코레이션을 진행했다.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선유는 어젯밤 자기 전에 특별히 도 집사에게 아침 일찍 깨워달라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데코레이션을 같이 하겠다고 했다.하지만 키가 작은 선유는 데코레이션을 하는 데 힘이 많이 드는지 이내 멈추고는 부엌에 붙여야 할 것을 들고 말했다.“흥! 가서 사다리 갖고 올게요.”녀석은 씩씩거리며 사다리를 갖고 왔다.이 모습을 본 엄준은 호탕하게 웃었다.“사다리가 왜 필요해. 이 할아버지가 안아줄게. 네가 붙여.”눈 깜짝할 사이에 선유를 어깨에 태웠고 선유는 풀을 들고 문에 데코레이션 종이를 붙였다. 그러면서 계속 외쳤다.“할아버지, 조금만 더 높이!”엄준은 녀석을 높이 들어 올렸다.“됐어?”“됐어요! 됐어요!”도 집사는 가슴을 졸이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어르신, 괜찮으
배현수가 말했다.“어젯밤 찬물에 몸을 담근 탓에 새벽에 미열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괜찮은데 아직 깨어나지 않았어요.”그 말을 들은 엄준은 걱정된 듯 도 집사에게 지시했다.“도 집사, 의사를 불러서 환희 상태 좀 체크해 봐. 괜히 설에 아프면 안 되잖아.”“네, 바로 전화해서 오라고 하겠습니다.”선유는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기 위해 어젯밤에 일찍 잤다. 배현수가 성남에 온 줄도 모르고 조유진이 왜 갑자기 아픈지도 모르기에 의아한 듯 관심조로 물었다.“엄마 왜 열이 나요?”배현수가 대답했다.“어린애는 몰라도 돼. 넌 데코레이션이나 계속해.”선유는 바닥에 있는 솔을 주워 풀 반죽을 묻히며 어이없는 듯 말했다.“할아버지가 안아주지 않으면 손이 안 닿아요!”배현수는 꼬마를 번쩍 들어 올리며 차갑게 말했다.“얼른 붙여.”선유는 그의 어깨에 걸터앉아 득의양양한 얼굴로 말했다.“아빠, 재촉하지 마요! 재촉하면 붙이다가 삐뚤어지니까!”배현수가 녀석의 속셈을 어떻게 알겠는가?“그렇게 굼뜨게 할 거면 붙이지 마.”다 붙인 후, 선유가 배현수의 어깨에서 내리며 새하얀 두 손바닥을 불쑥 내밀었다.배현수는 차가운 눈빛으로 힐끗 봤다.“왜?”선유는 웃으며 말했다.“아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용돈 주세요!”새해 인사도 하고 세뱃돈도 받을 셈이었다.성남에 있을수록 아이가 점점 안 좋은 버릇이 든 것 같다.배현수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세뱃돈 없어.”선유는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실망한 듯 말했다.“아빠, 정말 재미없어.”녀석이 풀이 죽어 고개를 푹 숙인 모습에 배현수는 피식 웃었다.“곧 생일인데 선물 줄까?”그 말에 선유는 신이 나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뭔데요?!”“비밀이야, 내일 깨면 알겠지. 뭐.”“설마 돈 봉투는 아니죠?”배현수는 하찮은 얼굴로 말했다.“그렇게 촌스러운 거 아니야.”오전 내내 엄씨 사택에서는 주방에서는 설날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 등 섣달 그믐날을 보낼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점심까지 잔 조
어젯밤 스캔들이 실검을 도배했을 때, 조유진은 찬물에 몸을 담그고 있어 인터넷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갑작스러운 배현수의 질문에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뭐라고요?”남자가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자 분위기는 몇 초 동안 경색되었다.배현수는 거대한 파도가 소용돌이치듯 어두운 눈빛으로 조유진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어젯밤 엄창민과 함께 우산을 썼잖아.”조유진은 잠시 멍해졌다.어젯밤의 상황을 힘껏 회상해 보니 그런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다.하지만...“밖에 눈이 오고 있었고 또 약에 중독되어 창민 오빠의 차에 탄 거예요. 오빠는 최대한 젠틀하게 나를 배려해 준 것이고요. 창민 오빠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그렇다고 엄창민이 그녀를 거기에 둔 채 다른 사람이 해코지하길 기다릴 수는 없지 않은가?사람이라면 다 아는 기본도리이다.하지만 같이 우산을 썼다는 것은 배현수에게 아주 사적인 행동으로 커플과 부부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행동이다.애당초 조유진이 엄창민과 사귄다는 오해를 한 것처럼 말이다.그때 성남에 와서 조유진과 엄창민의 뒤를 밟고 그들이 고깃집을 가고 마트도 함께 가는 것을 보며... 이런 행동들이 극히 평범한 커플처럼 느껴졌기에 오해했을 뿐이다.지금 돌이켜봐도 너무 질투가 나 당장 심장이 불타오를 것 같다.배현수는 입술을 달싹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온몸으로 ‘나 좀 달래봐’라는 뜻을 풍기고 있었다.이 뜻을 알아챈 조유진은 문득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가 왜 혼자 성남으로 먼저 돌아왔는지 잊었단 말인가?아직 전에 화가 난 것도 따지지 않았기에 절대 그를 달랠 리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진지하게 말했다.“창민 오빠와 우산을 같이 쓴 것은 어제 상황이 특수했던 것도 있지만 평범한 친구들 사이도 우산을 같이 쓰잖아요.”배현수도 똑같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나는 내게 마음이 있는 여자와 우산을 같이 쓰지 않아.”어젯밤은 특수한 상황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배현수가 겨우 입을 열었다.“너희 엄마가 나를 모함하는 거잖아.”이 말은 선유에게 대답한 것이기도 했지만 조유진을 보고 한 말이기도 했다.조유진은 어리둥절해 하며 선유에게 말했다.“엄마도 생일선물 준비했어. 평안을 기원하는 자물쇠야. 새 옷도 한 벌 샀는데 이따가 마음에 드는지 입어 봐.”선유는 앙증맞게 고개를 끄덕였다.“응응! 엄마가 사주는 건 다 좋아!”잠시 후 위층에서 내려온 엄창민의 손에는 선물세트가 들려 있었다.“선유야, 너의 생일이니까 나도 선물 준비했어! 열어봐.”지체없이 선물세트를 뜯은 선유는 작은 손으로 박스 안에서 작은 왕관을 들고 나왔다. 특이한 것은 왕관은 순금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왕관 위에는 알록달록한 보석이 박혀 반짝반짝 빛났다.선유는 깜짝 놀라 외쳤다.“와! 너무 예뻐요!”엄창민은 선유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공주님, 한번 써보세요.”녀석은 작은 왕관을 들고 자신의 머리에 올렸지만 삐뚤어지자 조유진이 손을 들어 몇 번 조정해줬다.선유는 작은 입을 벌리며 말했다.“창민 아저씨, 선물 고마워요! 마음에 들어요!”그 말에 엄창민이 대답했다.“그렇게 좋으면 앞으로 아저씨라고 부르지 마.”이해하지 못한 선유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럼 뭐라고 불러요? 아버지께서 엄창민이라고 부르는데 그럼 나도 엄창민이라고 불러도 돼요?”엄창민은 하하 웃으며 말했다.“삼촌이라고 불러봐!”선유는 바로 말했다.“삼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녀석은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하며 엄창민의 비위를 맞췄다.의자에 기대어 있던 친아버지는 순간 마음이 편치 않았다.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작은 선물에 조카딸 하나 공짜로 얻었네.”선유는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아빠, 삼촌이 엄마에게 얼마나 잘해주는데요. 아빠가 없을 때 삼촌이 우리를 돌봐 줬어요!”어린아이들이 거짓말을 못한다고는 하지만 지금 이 말은 불 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
찬물을 끼얹은 듯한 배현수의 말에 선유는 아우성을 치며 단번에 화를 냈다.“아빠, 보는 눈이 없어요!”보석이 많이 박힌 이 왕관은 보기만 해도 매우 아름답다.엄마 말이 맞다. 아빠는 보는 눈이 없다.배현수는 못마땅해하며 눈살을 찌푸렸다.“보는 눈이 없는데 어떻게 엄마를 아내로 맞이하겠어?”“하지만 엄마가 아직 아내가 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잖아요!”선유가 마음먹고 대들면 감당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디스를 당한 배현수는 하마터면 ‘X발’이라고 외칠 뻔했다.조유진은 녀석을 잡아당기더니 머리를 빗겨주며 말했다.“삼촌이 선물한 왕관을 쓰니까 너무 예뻐. 아빠 말은 들을 필요 없어.”선유는 가슴을 치며 작은 손을 내저었다.“됐어요. 아빠랑 따지지 않을래요. 엄마, 사진 좀 찍어줘!”조유진은 휴대전화를 꺼내 왕관을 쓴 녀석에게 사진을 몇 장 찍어주려던 참이었다.이때 배현수가 또 입을 열었다.“어느 집 꼬맹이가 한 근짜리 황금을 머리에 쓰고 있어? 키도 다 안 컸는데 경추에 안 좋아.”선유가 대답했다.“아빠, 본인이 좋은 사람 아니라고 일부러 떠벌리고 다니고 싶은 거예요?”선유는 한참 동안 왕관을 들고 있더니 다시 왕관을 쓰고 엄준에게 다가갔다.“할아버지, 삼촌이 선물한 왕관 정말 멋지죠?”엄준은 녀석 때문에 웃음이 떠날 날이 없었다.“와! 선유야, 할아버지도 생일선물 준비했는데 뭔지 맞춰볼래?”“장난감이요!”엄준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장난감이 맞긴 해.”다만 장난감이 좀 크다.선유는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할아버지, 무슨 장난감인데요? 너무 궁금해요!”아빠 혼자만 뜸을 들이는 것으로 충분했다. 할아버지까지 뜸을 들이면 녀석은 어쩌면 오늘 밤에 잠을 설칠 수도 있다.엄준이 인자한 얼굴로 말했다.“할아버지는 핑크색 승용차를 준비했어.”“어디에 있는데요!”선유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찾지 못하자 엄준이 웃으며 말했다.“마당에 있어. 할아버지에게 없어! 나가서 찾아봐.”재빨리 마당으로 달려가
조유진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선유야, 할아버지에게 고맙다고 인사해야지.”선유는 얼른 다가가 말했다.“할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래오래 백년해로하세요!”엄준은 고개를 숙여 다리 옆에 있는 녀석을 내려다보며 말했다.“우리 선유가 커서 꼬마 선유가 태어나는 것도 봐야지. 그러면 나도 증조할아버지가 될 수 있잖아.”선유가 배현수를 올려다보자 배현수가 차갑게 물었다.“왜 날 쳐다봐?”선유는 손가락을 조물딱거리며 말했다.“엄마, 삼촌, 할아버지의 선물이 뭔지는 다 알았어요. 하지만 아빠는 도대체 무슨 선물을 준비한 건데요? 왜 이렇게 감추고 있어요?”“내가 주는 선물은 돈으로 살 수 없어.”선유는 기대와 함께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그렇게 대단한 거예요? 설마 직접 문제집을 내주고 그런 건 아니죠?”도대체 녀석은 아빠를 얼마나 안 좋게 생각하는 것일까?...오후 5시, 엄명월이 엄씨 사택에 도착하지 않자 조유진이 전화를 걸어 물었다.엄명월은 전화기 너머로 불평을 토로했다.“오늘 재수가 없는지 운전하는데 누가 뒤에서 부딪혔어요. 경찰이 와서 처리하길 기다리고 있어요. 나는 기다릴 필요 없어요. 언제 도착할지 몰라요.”조유진은 깜짝 놀랐다.“상황이 심각해요?”“심각하지는 않아요. 범퍼가 조금 눌렸을 뿐이에요.”한편 엄명월이 차창 밖으로 머리를 내민 순간 이상하면서도 낯익은 그림자가 눈에 띄었다.휴대폰을 귓가에서 내려놓고 물었다.“또 당신이에요?”상대방은 미소를 짓더니 흉측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이사 씨, 또 만났네요. 우리 둘은 인연이 아주 깊은 것 같아요.”엄명월이 뒤를 돌아보니 멈춰 서 있는 검은색 허머차의 앞 범퍼는 조금도 손상되지 않고 멀쩡했다.“그쪽이 내 차를 들이받은 거예요?”상대방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눈 오는 날이라 길이 미끄러워 차가 통제가 안 되더라고요.”“운전면허 다시 따세요.”엄명월이 한마디 쏘아붙였다.이윽고 경찰이 와서 조사했다.“운전면허증 좀 보여주세요.”엄명월이 경찰에게 건넨 운전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