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유진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선유야, 할아버지에게 고맙다고 인사해야지.”선유는 얼른 다가가 말했다.“할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래오래 백년해로하세요!”엄준은 고개를 숙여 다리 옆에 있는 녀석을 내려다보며 말했다.“우리 선유가 커서 꼬마 선유가 태어나는 것도 봐야지. 그러면 나도 증조할아버지가 될 수 있잖아.”선유가 배현수를 올려다보자 배현수가 차갑게 물었다.“왜 날 쳐다봐?”선유는 손가락을 조물딱거리며 말했다.“엄마, 삼촌, 할아버지의 선물이 뭔지는 다 알았어요. 하지만 아빠는 도대체 무슨 선물을 준비한 건데요? 왜 이렇게 감추고 있어요?”“내가 주는 선물은 돈으로 살 수 없어.”선유는 기대와 함께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그렇게 대단한 거예요? 설마 직접 문제집을 내주고 그런 건 아니죠?”도대체 녀석은 아빠를 얼마나 안 좋게 생각하는 것일까?...오후 5시, 엄명월이 엄씨 사택에 도착하지 않자 조유진이 전화를 걸어 물었다.엄명월은 전화기 너머로 불평을 토로했다.“오늘 재수가 없는지 운전하는데 누가 뒤에서 부딪혔어요. 경찰이 와서 처리하길 기다리고 있어요. 나는 기다릴 필요 없어요. 언제 도착할지 몰라요.”조유진은 깜짝 놀랐다.“상황이 심각해요?”“심각하지는 않아요. 범퍼가 조금 눌렸을 뿐이에요.”한편 엄명월이 차창 밖으로 머리를 내민 순간 이상하면서도 낯익은 그림자가 눈에 띄었다.휴대폰을 귓가에서 내려놓고 물었다.“또 당신이에요?”상대방은 미소를 짓더니 흉측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이사 씨, 또 만났네요. 우리 둘은 인연이 아주 깊은 것 같아요.”엄명월이 뒤를 돌아보니 멈춰 서 있는 검은색 허머차의 앞 범퍼는 조금도 손상되지 않고 멀쩡했다.“그쪽이 내 차를 들이받은 거예요?”상대방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눈 오는 날이라 길이 미끄러워 차가 통제가 안 되더라고요.”“운전면허 다시 따세요.”엄명월이 한마디 쏘아붙였다.이윽고 경찰이 와서 조사했다.“운전면허증 좀 보여주세요.”엄명월이 경찰에게 건넨 운전
선유가 작은 손을 뻗어 하나 집어 들려고 하자 남자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녀석의 손을 바라봤다.하지만 예민하지 못한 선유는 전혀 느끼지 못하고 한 조각씩 집어들어 먹어치웠다.잠시 후, 엄창민은 소장하고 있던 술 두 병을 가져와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최근 난방 때문에 건조하던 찰나 테이블에 오렌지가 한 접시 놓여있는 것을 언뜻 보고는 그도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먹고 나서 맛이 괜찮았는지 또 손을 뻗으려 했다.조유진을 달래기 위해 오렌지를 준비했던 배현수는 코앞에서 그 오렌지가 선유와 엄창민에게 먹히는 것을 지켜봤다.마지막 한 조각이 남았을 때 참다못한 배현수는 과일 접시를 뺏어서 조유진에게 건네며 한마디 했다.“먹어.”그녀가 먹지 않으면 배현수는 어이가 없어 잠을 설칠 것이다.조유진은 그의 체면을 지켜주기 위해 마지막 조각을 집어먹었다.엄명월이 도착하자 설날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테이블에서 엄준, 엄창민, 엄명월은 모두 술을 마셨다.‘자격이 없는 사위' 배현수도 당연히 술을 마셔야 했다.오늘 밤 안 마시면 조유진과 구청의 문턱을 넘을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설날 저녁 식사를 한 젓가락 집기도 전에 엄창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술을 들더니 각자 앞에 있는 150cc 디켄터를 가득 채웠다.엄명월이 조유진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오늘 밤은 삼 대 일인 거예요? 배 대표가 술 너무 많이 먹는다고 마음이 아프거나 하진 않겠죠?”조유진은 조롱하며 말했다.“아프지 않으니까 얼마든지 마셔요. 나중에 엄명월 씨가 남자를 데려와도 똑같을 거예요.”배현수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디켄터를 들고 앞에 있는 술잔에 술을 한 잔 따른 후 고개를 숙여 조유진의 귀에 대고 말했다.“내가 진짜로 취하면 사모님이 케어해 주세요.”엄준은 잔을 들어 첫 시작을 알렸다.“그래, 이번 설에 드디어 다 모였구나.”말을 마친 뒤 엄창민과 엄명월을 바라보며 두 마디를 더 했다.“두 사람도 힘내서 내년에 꼭 다른 사람을 데려오길 바라!”엄명월이 대꾸했다.“술이나
엄창민이 배현수를 여러 번 흔들었다.한 번 흔들어 움직이지 않으면 두 번 흔들고 또 세 번 흔들고...엄창민은 이상하다는 얼굴로 말했다.“나도 안 취했는데 이 사람이 취했다고?”배현수가 그보다 주량이 약할 리는 없다. 밑바닥부터 장사를 시작한 사람이라면 이런 술자리 문화를 많이 경험했을 것이다.엄창민은 일부러 심술궂게 굴며 말했다.“술잔에 있는 술을 다 마시지 않으면 조유진과 결혼 못 할 거예요?”하지만 엎드려 있는 남자는 여전히 꼼짝하지 않았다.정말 취한 것 같았다.선유가 달려가 의자에 꿇어앉더니 작은 손으로 배현수의 팔을 잡고 힘껏 흔들었다.“아빠, 얼른 일어나서 술 마셔요!”‘다 마시지 않으면 삼촌이 엄마와 아빠의 결혼을 반대할지도 몰라요.’이것보다 더 안 좋은 결과는 없다!상황이 심상치 않자 조유진이 남자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배현수 씨?”엄준이 한마디 끼어들었다.“3대1로 마셔서 진짜로 취해 쓰러진 건 아니겠지? 선유야, 네 아빠가 아직 숨쉬고 있는지 확인해 봐. 진짜로 쓰러지면 안 되니까!”이 말에 조유진은 깜짝 놀랐다.선유는 테이블 위쪽으로 올라가 배현수의 코 위에 작은 손을 갖다 대더니 말했다.“아직 숨은 붙어 있어요.”엄명월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우리 넷이 술 네 병도 다 못 마셨어요. 다들 주량이 얼마나 센데 사람이 죽겠어요?”잠시 멈첫한 엄명월은 이내 장난기 섞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아버지, 배현수가 아직 사위도 아닌데 벌써 마음이 아픈 거예요?”조유진은 마지막 술병을 흔들었다. 보아하지 아직 3분의 1이 남았다.즉 그들 네 명은 술 네 병을 거의 다 마셨고 배현수 혼자서 적어도 한 병을 다 마셨다는 것이다.진짜로 취한 것이든 아니면 취한 척하는 것이든 쓰러질 때가 됐다.“아빠, 이만 이 사람 데리고 올라가 쉴게요. 그만 마시고 밥이나 좀 드세요.”엄준은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도 집사, 환희와 같이 배현수 좀 부축해 주세요.”조유진과 도 집사는 배현수
착한 선유는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넌 그냥 닥치고 있으면 돼.”그 말에 선유가 중얼거렸다.“참지 못하면요?”배현수는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그럼 내일 생일 선물은 없어.”“네...”선물을 위해서 녀석은 입을 다물어야 했다.이틀 밤이나 아빠의 선물이 궁금해 죽을 지경이다.안방 문이 ‘딸깍’소리를 내며 열리자 배현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눈을 감았다.선유는 고개를 돌려 조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방금 아빠가 잠꼬대했어!”조유진이 다가와 물었다.“무슨 잠꼬대?”큰 눈을 껌벅이는 녀석의 작은 얼굴은 천진난만해 보였다.“아빠가 엄마 이름을 불렀어. 안 취했다면서 더 마실 수 있다고 했어.”조유진은 얼떨떨한 눈빛으로 술에 취한 배현수를 바라보다 뜨거운 수건으로 그의 손을 닦아주며 말했다.“인사불성이 된 사람이 더 마실 수 있다고?”선유는 턱을 끄덕였다.“응응! 아빠는 엄마와 너무 결혼하고 싶대!”조유진은 침대 옆에 앉아 선유를 바라보며 말했다.“선유야, 엄마가 질문 하나 할게.”선유는 어린 나이지만 늘 애어른처럼 어른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어른들이 곤혹스러워하는 일이 어쩌면 어린아이에게 물어보면 쉽게 풀릴 수도 있다.아이들은 순진하고 그들의 세상은 간단하기에 외부의 방해 없이 깔끔하게 문제를 직시할 수 있다.“엄마, 무슨 질문인데? 엄마도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조유진이 물었다.“가장 친한 친구가 너를 두 번 속였다면 넌 그 친구와 계속 놀 거야?”선유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아빠가 엄마를 속였어?”이렇게 티가 났나?조유진은 사실대로 말했다.“그렇지. 아빠가 엄마를 속이는 게 엄마는 너무 싫거든.”조유진은 배현수에게서 등을 돌린 채 선유와 얼굴을 맞대고 말하고 있었다.이 말을 들은 침대 위의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심장마저 답답한 듯했다.선유는 한참을 고민하다 대책을 내놓았다.“그럼 엄마도 아빠를 속여서 얼마나 잘못한 건지 알게 해줘요.”참 ‘좋은’ 생각이다.조유진은 더 이상 꼬맹
조유진이 이렇게 반문하자 배현수는 눈에 띄게 얼어붙었다.그는 조유진의 어깨를 짓누르더니 부드럽고 향긋한 목덜미에 얼굴을 깊숙이 묻으며 말했다.“어쩔 수 없어, 개처럼 따라다녀야 해. 네가 언젠가 돌아봐 주기를 기다리면서.”답답하게 들리는 그의 목소리가 조유진의 심장을 찔렀다.왠지 모르게 배현수가 성남까지 와서 그녀와 엄창민을 몰래 따라다녔던 기억이 났다.목구멍이 점점 시큰거린 조유진은 실소를 터뜨렸다.“내가 무시해도 참을 수 있어요?”“몰라.”그의 대답에 가식이 없었다.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두 손은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그런 그의 신체적인 반응이 조유진은 낯설지 않았다.배현수의 손을 살짝 헤집고 돌아서서 그를 보려고 했으나 점점 더 강하게 그의 허리를 조였고 남자의 손등에 핏줄마저 선명히 드러났다.손을 뗄 마음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조유진은 살짝 흐느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려 말했다.“몸이 왜 이렇게 반응해요? 송지연이 엉터리 심리상담사예요?배현수는 어이없는 듯 말했다.“송지연이 엉터리 의사가 아니라 내가... 너 없으면 못 살아.”조유진과 헤어져 있는 동안 손에 입은 화상흉터는 아물지 않았고 새 상처가 낡은 상처를 덮어도 엄지손가락에는 옅은 흉터가 남아 있었다.조유진은 눈시울을 살짝 적셨다.“배현수 씨, 불쌍한 척하는 거예요?”아직도 척할 필요가 있을까?지금도 충분히 유기견처럼 보이지 않냐 말이다.한참을 묵묵히 있던 배현수가 말했다.“예지은의 일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네가 대제주시를 떠난 뒤 갑자기 실종됐어.”조유진은 순간 심장이 멎는 듯했다.“그럼 찾았어요? 내가 그날 찾아간 것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아직 찾고 있어. 너와 상관없어.”조유진은 예지은에 대해 복잡한 마음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조씨 집안으로 데려온 사실을 안 후부터 절대 좋은 감정이 있을 수 없었다.하지만 예지은은 배현수의 친어머니이기에 미워할 수 없었다.두 모자가 비록 정이 깊지는 않지만 혈연관계가 있는 것은
안방의 불빛은 매우 어두워 배현수는 미처 그녀의 안색을 보지 못했다.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더니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손도 안 댔는데 벌써 아파? 유진아, 지금 아픈 건 나야.”아파서 죽을 지경이다.조유진은 가는 팔로 그의 팔뚝을 잡더니 굳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아니... 나 생리 온 것 같아요.”...대제주시.육지율은 남초윤을 데리고 저택에서 설날 저녁 식사를 한 뒤 교외의 강변으로 드라이브를 갔다.며칠째 눈이 계속 내려 강에 얼음이 두껍게 얼어있었다.육지율이 차에서 내리려고 할 때 휴대폰이 울려 고개를 돌렸더니 발신자 표시에는 ‘유’자가 떠 있었다.조수석에 타고 있던 남초윤도 당연히 봤다.얼마나 신경을 쓰면 상대방의 풀네임도 저장하지 않았을까? 오직 ‘유’자로만 저장을 한다고?남초윤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받고 싶으면 받아요.”육지율의 이런 상황이 한두 번도 아니었기에 남초윤은 익숙해졌다.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가시가 박힌 것처럼 아팠다.육지율은 진짜로 그녀의 말대로 전화를 받았지만 스피커폰으로 받았다.아름다운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부드럽게 들려왔다.“지율 씨, 새해 복 많이 받아.”육지율은 편안한 자세로 운전석에 기대 있었다. 잘생긴 사납고 건방진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모습으로 덤덤하게 대답했다.“응, 새해 복 많이 받아.”유설영은 바로 물었다.“아직도 육씨 저택에 가서 설날 저녁을 먹어?”“다 먹었어.”그 말에 유설영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그럼 놀러 나올래? KK클럽으로 내가 사람들을 불렀는데 고등학교 동창들도 여럿 있어.”남초윤의 가슴은 저도 모르게 철렁 내려앉았다.육지율은 핸들에 손을 얹은 채 남초윤을 쳐다보다가 한마디 툭 내뱉었다.“가족과 같이 나왔어. 난 안 갈 테니 너희들끼리 놀아.”유설영은 조롱 섞인 어조로 말했다.“가족? 가족이 있어? 할아버지와 같이 불꽃놀이 보러 나간 거야?”망신스러운 육지율의 결혼이었기에 남초윤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육지율은 이 말을 인정할 수 없다.“결혼하기 전에 정상적인 연애를 하는 것마저 안 되면 당신과 김성혁이 예전에 연애했던 것은요? 그럼 그것도 함부로 논 거겠네요?”남초윤의 과거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분명 말했다.과거의 사람은 과거에서 끝내야지 현재의 삶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옛사랑을 다시 언급하는 일은 재미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더 큰 걸림돌이 될 것이며 과거는 바꿀 수 없다.육지율이라는 사람은 철저한 현실주의자로 영원히 현재에 포인트를 두고 살아가고 있으며 누가 더 소중하고 누구와 멀리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이 세상 남녀 사이는 조건만 나쁘지 않으면 결혼 전에 몇 번 감정이 있을 수 있고 아주 정상적이다.하물며 육지율은 피라미드 꼭대기에 서 있는 남자이다.유설영과 사귀었던 것이 뭐 어때서? 결혼하기 전에 누구와 연애를 하든 모두 그의 자유이다.남초윤은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내가 지금 예전의 일을 말하는 거예요? 나 과거를 들추어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아요.”그 당시 그들은 결혼도 하지 않았고 그녀 또한 육지율의 배우자리스트에 없었다. 심지어 서로 알지도 못했는데 무슨 자격으로 그에게 이런 요구를 하겠는가?육지율은 그녀를 흘겨보더니 모처럼 정색을 하고는 말했다.“결혼 후 한 번도 결혼생활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이 없어요.”바람피우는 일은 육지율에게 저급하기 그지없다.장난이 심하지만 아무나 만나지 않는다. 예전에 연애하다가 질릴 것 같으면 상대방에게 확실하게 말하고 빨리 헤어지고 깨끗하게 연락을 끊었다.상대방이 정말로 죽기 살기로 쫓아오면 경제적으로 약간의 보상을 해줬다.물론 다른 것은 더 이상 줄 수 없다.이 사람과 앞으로의 미래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건드리면 정말 무책임하다.양다리, 환승연애, 바람... 이런 천한 일은 여태껏 해 본 적이 없다.안 좋게 얘기하면 이런 일은 자제력 없는 사람들이 자극을 찾거나 존재감을 찾기 위해 하는 것이다. 지루하고 저속한 감정에서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
육지율의 손에는 폭죽, 요술봉, 선녀봉... 없는 것 없이 전부 들려 있었다.마술봉 하나를 남초윤의 손에 쥐여 주며 말했다.“들고 있어요.”그리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남초윤이 폭죽을 잡은 채 멍을 때리고 있을 때 어느새 불꽃이 일더니 하늘로 치솟기 시작했다.육지율은 양미간을 찌푸리더니 그녀의 뒤로 가서 그녀의 손을 잡고는 얼어붙은 강가에 폭죽을 갖다 댔다.“내가 아무리 미워도 내 얼굴에 폭죽을 갖다 대면 안 되지 않을까요?”옅은 농담이 담겨 있는 목소리에 남초윤도 얼른 대꾸했다.“더 좋지 않아요? 괜히 밖에 나가 딴짓할 걱정도 없고.”육지율은 고개를 내려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바람날까 봐 그렇게 두려워요?”남초윤은 차가운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원래 바람둥이니까.”육지율은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고 대신 고개를 그녀 옆으로 떨구며 말했다.“내가 왜 바람둥이예요. 솔직히 얘기해 봐요. 내가 잘해주지 않아요?”그녀에게 준 블랙카드는 한도가 무제한이다.들고 있는 가방은 희귀 가죽 플래티넘 가방이고 옷도 최고급이다. 어디로 여행을 가고 싶은지 말만 하면 전용기를 준비해 맞춤형 여행을 준비했다.다른 사람이 1년 동안 예약하지 못한 미슐랭 식당을 그는 바로 해결해 주었다.남재원이 사준 차 색깔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다시 차 한 대를 사주겠다고 했지만 남초윤이 거절햇다.남편으로서 의식주에 있어서 그녀를 홀대한 적이 없었다.전에 육지율 앞에서 그녀는 김성혁과 눈앞에서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육지율이 성깔이라도 부렸었던가?남초윤은 육씨 집안 사모님으로서 육지율의 눈에 합격이라고 말할 수 없을뿐더러 심지어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하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결혼도 다 했는데 이혼은 정말 번거롭고 육씨 집안에 미치는 영향은 정말 크다.그녀와 김성혁이 결혼 존속 기간 동안 진짜로 원칙적인 잘못을 저질렀다면 더 이상 그녀를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대꾸했다.“바람둥이도 아닌데 전 여자친구의 번호를 저장하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