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가 오랫동안 울렸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선유는 작은 손에 큼직한 휴대전화를 들고 귓가에 붙였다 떼기를 반복하더니 미간을 찌푸리면서 모니터에 대고 말했다.“나쁜 아빠, 왜 전화 안 받아!”조유진의 눈빛이 다시 한번 멈칫했다.설마 그를 버리고 성남으로 돌아간 것 때문에 화가 난 것일까?하지만 먼저 숨긴 사람은 배현수이다.화낼 사람은 오히려 그녀이다.깊은 눈빛으로 조유진을 지켜보던 엄준은 그녀의 눈빛에 스친 못마땅한 감정을 읽어냈다.“그 자식과 싸웠어?”“아니요.”조유진은 혹시라도 엄준이 그 옥패에 대해 알게 될까 봐, 그녀를 조씨 가문으로 데려간 사람이 예지은이라는 것을 알아챌까 봐 말을 아꼈다.그녀는 배현수가 숨긴 것을 용서할 수 있지만 엄준은 가능할까?예지은이 정말 그녀를 엄씨 사택에서 데려간 사람이라면 엄준이 배현수를 지금처럼 받아줄 수 있을까?조유진에게 예지은은 예지은이고 배현수는 배현수이다.그러나 엄준에게는 당시 엄환희를 엄씨 사택에서 데려간 유괴범이고 그의 아내 신희수를 간접적으로 죽인 살인범이다.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러도 엄준이 재혼하지 않은 것을 보며 신희수에 대한 감정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었다.조유진은 이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할 수 없었다. 그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돌려서 물었다.“아빠, 그때 복수하기 위해 나를 데려간 사람이 혹시 누군지 짐작이 가요?”엄준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내가 성남에서 사업을 했어. 사업이 커지면서 자연히 많은 사람이 이익을 해치게 되었어. 그 시절 사업 인맥은 복잡하게 얽혀 있어. 파트너이자 경쟁자인 사람도 많고.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추측하기 어려워. 20여 년 전 건축자재를 주로 만들던 더안이라는 회사가 있었는데 당시 성행 그룹과 경쟁이 치열했어. 하지만 재료에 발암물질이 포함돼 있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얼마 안 지나 부실운영까지 겹쳐 파산했고 창업자는 사라진 지 오래야.”조유진은 더안이라는 회사 이름이 왠지 귀에 익숙했다.“더안과 지금의
배현수가 차에 올라타자 백소미의 목소리가 들렸다.“해군, 육군, 공군과 같이 주위를 다 찾아봤는데 아무런 단서가 없어요. 예지은 씨, 아직 대제주시에 있을 거예요.”하지만 3시간째 뒤지고 있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배현수는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그 어떤 정보가 나와도 내선으로 연락하지 마세요.”백소미는 순간 멈칫했다.“배 대표님, 무슨 말씀이세요?”배현수는 한마디만 했다.“귀신이 있어요.”게다가 국내에서 레벨이 있는 사람이다.드래곤 파가 719부대에 내부 간첩을 두었다면 예지은이라는 쓸모없는 인간을 잡아간 목적은 무엇일까.예지은으로 배현수를 견제할 수 없다. 차라리 조유진을 잡는 게 훨씬 가성비가 있을 것이다.그들이 조유진을 잡지 않는 것은 지난번 스페인 기지의 폭파로 드래곤 파가 크게 다쳤기 때문이다.하지만 예지은을 잡아가는 것은 적어도 배현수에게 위협은 될 수 있다. 설마 도발하는 것일까?...오후 8시 성남컨벤션센터.조유진은 드레스를 입고 엄창민의 팔짱을 낀 채 들어왔다.몇몇 비즈니스 지인들이 엄창민에게 인사를 하러 왔다.“지난번에 엄 이사님께 여자친구를 소개시켜 드리겠다고 했는데 거절하시더니 이렇게 예쁜 여자친구가 있어서였네요.”조유진의 정체가 공식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이들이 이렇게 오해하는 것은 당연했다.엄창민은 웃으며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조 대표님, 농담도 참. 여동생인데 회사에 들어온 지는 꽤 됐어요. 앞으로 같이 일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니 만나게 될 겁니다.”조유진은 당당한 모습으로 디너백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건넸다.“조 대표님, 제 명함입니다.”조 대표는 당연히 거절할 리가 없었다. 리셉션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모두 명함을 주고받으며 인맥을 넓혔다.“네, 네. 나중에 같이 일할 기회가 있으면 다시 연락하죠.”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이에 엄명월이 샴페인 한 잔을 들고 그들에게 다가왔다.조유진 곁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그 대표님은요?”조유
그와 한바탕 따지려 했지만 돌아선 얼굴에 엄명월은 어리둥절했다.김씨는 생김새가 옹골찬 편이지만 사악하고 제멋대로인 눈앞의 사람은 한눈에 봐도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두 눈이 마주친 순간 엄명월은 약간 어리둥절했고 맞은편에 있는 그 사람의 눈빛은 매우 공격적이었다.눈빛에 어색함을 느낀 엄명월은 헛기침하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사람을 잘못 봤어요. 그 인간인 줄 알았습니다.”재웅은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그 인간? 저를 욕하는 것인가요?”엄명월은 맞은편의 사람을 몇 번 더 훑어본 후 말했다.“그건 아닙니다. 전에 뵌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성남 사람들은 대부분 얼굴이 익숙한데 그쪽은 아니어서요.”재웅은 샴페인을 들며 말했다.“바다가 크니 낯선 얼굴이 있는 게 이상할 것은 없잖아요.”이곳에 온 사람들은 모두 비즈니스를 하러 온 사람들이라 어느 정도 인맥이 있다.엄명월은 잠깐 생각하다 물었다.“혹시 성함이 어떻게 될까요? 성남에는 어떻게 오게 된 거예요?”재웅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조롱이 섞인 눈빛으로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성은 재, 이름은 오라고 합니다. 재오요. 실례지만 아가씨의 성함은 어떻게 됩니까?”엄명월은 가볍게 웃더니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저요? 제 성은 이, 이름은 사예요. 이사.”재웅의 얼굴에 눈웃음까지 더해졌다.“이사 씨, 이름이 매우 특이하네요.”“그쪽도요.”...한편 반대편에서 조유진은 연회장 내 사람들과 한 바퀴 돌며 인사했다. 십여 장의 명함을 주고받은 뒤 하얀 모피 조끼를 두르고 맨 위층 스카이라운지로 향했다.스카이라운지는 하늘과 별을 볼 수 있는 라운지이다.조유진은 휴대전화를 들고 사진을 여러 장 찍어 선유에게 보내려다 즐겨찾기에 있는 카톡 메시지에 눈길을 돌렸다.[대답 좀?]이게 지금 반성하는 태도란 말인가?오후에 선유가 배현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지금은 오히려 조유진의 휴대폰에 배현수의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걸려왔다. 하지만 늘 방해금지 모드로 되어
지금 이런 상황에 강이찬은 현실감이 없었다.한때 조유진에게 마음이 뺏겼던 적이 있다. 같이 불꽃놀이를 본다는 것은 그때의 그에게 아름답지만 멀기만 했다.하지만 지금은 조유진과 함께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서 있다.그리고 마음속에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다.한참이 지나자 강이찬은 창밖의 눈송이를 바라보며 물었다.“스코틀랜드에는 지금 눈이 내리고 있을까?”그녀에게 묻는 것 같기도 하고 자신에게 묻는 것 같기도 했다.조유진이 자리를 뜨려 했지만 옥상 통로가 잠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강이찬이 걸어와 손잡이를 몇 번이나 비틀었지만 열리지 않았다.“아마 누군가 우리 둘을 여기에 가두고 하룻밤을 같이 있게 만들려고 한 것 같아.”이 말에 조유진은 눈살을 찌푸렸다.몸도 이상하고 답답한 가슴 때문에 점점 목이 메었다.조유진은 어깨에 걸친 모피 조끼를 여미고 휴대전화를 꺼내 엄명월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다시 엄창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빠, 저 옥상에 갇혔어요.”엄창민은 사람들을 데리고 재빨리 도착했다.조유진의 얼굴은 이미 비정상적인 홍조를 띠고 있었고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엄창민은 조유진을 부축해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엄창민이 이날 밤 조유진과 같이 검은 우산을 쓴 사진이 검색어에 올랐다.사진 속 엄창민은 한 손으로는 검은 우산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뒷좌석 문을 열고 있었다.한 손으로 가슴을 누르고 있는 조유진은 짧고 하얀 모피 조끼를 입고 있었다. 청초하고 예쁜 얼굴을 살짝 숙일 때마다 큰 웨이브 펌을 한 머리는 그녀의 얼굴을 반쯤 가렸다. 차 밖으로 하얀 눈이 흩날리는 사진 속 풍경은 더욱 운치를 더했다.한 사람은 우산을 들고 신사 같은 모습으로 차 지붕에 손을 올려 그녀가 차에 부딪히지 않도록 했다. 여자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 가슴 앞 드레스를 누르며 허리를 굽혀 차에 오르고 있다.스킨십은 없었지만 많은 상상을 하게 했다.특히 조유진의 목덜미와 볼은 연한 연지빛을 띠고 있어 썸을 타는 듯했다.누리꾼들은
침대 사진? ?이 세 글자는 배현수를 완전히 화나게 했다.남자의 시커먼 눈동자는 잔뜩 움츠러들었고 가슴팍에 쌓인 울화통 때문에 숨이 점점 더 가빠졌다.예지은의 갑작스런 실종만으로도 충분히 화가 나 있는 상태인 데다 조유진마저 다시 성남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배현수는 하루 종일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무릎 위에 늘어뜨린 손은 어느새 주먹을 꽉 쥐었고 눈꺼풀은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배현수는 눈을 감고 불편한 느낌을 억지로 누르며 네티즌의 말에 답장하지 않고 대신 조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몇 번이나 전화했지만 조유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한숨을 내쉬며 어쩔 수 없이 제일 아니꼽게 여기던 엄창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한참 동안 울린 후에야 연결되었다.전화기 너머의 엄창민이 통화 버튼을 누르고 ‘여보세요’라고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조유진의 고통스러워하는 소리가 들렸다.“창민 오빠... 나 너무 괴로워요...”엄창민도 전화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이 조유진에게 집중했다.“힘들어? 어디가 아파?”“온몸이 간지러워요...”온몸에 천만 마리의 개미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조유진은 무의식적으로 목덜미,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손끝에 힘을 주자 하얀 피부에 금세 핏자국이 하나둘씩 잡혔다.엄창민은 황급히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환희야, 함부로 긁지 마!”“못 참겠어요...”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부드럽고 온화하며 아름다운 것이 마치 비 오는 밤에 수양버들이 하늘하늘 날리는 것 같았다.이 목소리는... 평소 계곡의 맑은 샘물처럼 청량한 목소리와는 사뭇 달랐다.휴대전화를 손에 쥐고 있는 배현수의 얼굴은 점점 차가워졌고 검은 눈동자는 더더욱 두꺼운 얼음으로 얼어붙은 것 같았다.“엄.창.민. 대체 유진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남자의 얼음장 같은 매서운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차갑게 전해졌다.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검정색 벤틀리 차 안.엄창민은 마구잡이로 움직이는 손을 잡으며 배현수에게 말했다.“내가 환이에게 뭘 할 수
마음이 너무 아픈 엄준은 엉겁결에 엄창민을 바라보았다.“안 되면 너라도...”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었기에 엄준도 어쩔 수 없었다.엄창민은 난처해하며 실소를 터뜨렸다.“아버지, 진짜로 내가 나서면 내일 아침 환희가 저를 칼로 찔러 죽이지 않을까요?”엄준은 급한 마음에 주저하며 왔다 갔다 했다.이때 마당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이어 누군가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집안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도 집사의 눈이 번쩍이더니 이내 소리쳤다.“어르신, 도둑놈 사위가 왔어요!”너무 감격스러운 나머지 그만 사실대로 말해버렸다.입이 방정이지... 도 집사는 손을 들어 자기 뺨을 세게 때렸다.황급히 배현수를 위층으로 안내하며 말했다.“드디어 오셨네요! 아가씨가 곧 얼어 죽을 것 같아요!”배현수는 밤새 운전해 성남으로 왔다. 밖에 눈이 내리고 있어 코트에는 아직도 겨울밤의 매서운 추위가 감돌고 있었다.얼굴빛은 더욱 어두웠다.“누가 몸을 담그라고 했습니까!”엄창민이 대답했다.“환희 스스로 요구한 거야.”배현수는 엄준에게 인사할 틈도 없이 욕실로 뛰어들었다.조유진은 옷을 입은 채 욕조에 앉아 온몸을 웅크린 채 추위에 떨고 있었다.배현수는 그녀를 찬물에서 번쩍 안아 올렸다.옆에 있는 하녀를 한번 쳐다보고는 말했다.“문 닫고 나가세요. 내가 돌볼 테니.”“네...”하인이 나가 욕실 문을 닫자 문밖에 있던 엄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도둑놈 사위가 그래도 제때 와서 다행이야.”...욕실 안에서 배현수는 젖은 조유진의 차가운 셔츠를 전부 벗겼다.의식을 잃을 정도로 차가웠던 피부에 뜨거운 기운이 느껴지자 조유진은 움츠러들었다.온몸이 너무 차가워서 뜨거운 물로 직접 샤워할 수 없다. 조금씩 열을 올려야 했다.배현수는 두껍고 건조한 커다란 목욕타올을 잡아당겨 그녀의 몸을 감싼 뒤 그녀를 안고 침실 침대로 옮겼다.3시간 가까이 찬물에 몸을 담근 조유진은 지금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 제정신이 아니다.방안에는 부드럽고 따뜻한 오렌지
성남컨벤션센터에서 진행된 술자리는 방금 끝났다.재웅이 차에 앉자 스페인에서 걸려온 암호화된 전화번호가 휴대폰에 걸려왔다.이어 전화기에서 웅장하고 위엄 있는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웅아, 내일이 섣달그믐이라 아버지가 너를 위해 큰 선물을 준비했어.”재웅이 입꼬리를 올렸다.“가주님이 무슨 큰 선물을 준비하셨을까요?”“너의 원수인 예지은. 아직 살려뒀으니까 네가 와서 처리해.”깜짝 놀란 재웅은 눈을 부릅뜨더니 억지웃음을 지었다.“가주님의 큰 선물, 너무 감사합니다.”통화를 끝낸 재웅은 휴대폰을 옆에 던지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교활한 늙은이 같으니라고!”이 늙은이가 예지은을 잡은 이유가 그에게 섣달 그믐날의 선물을 주기 위한 것임을 믿지 않았다.하지만 늙은이가 이렇게 경솔하게 행동하는 이유가 무엇일까?가속 페달을 밟자 검은 차가 어두운 밤을 헤쳐나갔다....대제주시.검은색 쿨리넌은 소정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육지율은 별장에 들어간 후 차 키를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다.오늘은 설날이다.남초윤의 야식으로 만두를 빚던 진씨 아주머니가 육지율을 보고 물었다.“도련님, 만두 좀 드시겠습니까?”육지율이 안 먹겠다고 말하려 할 때, 남초윤이 마침 위층에서 내려왔다.문명희의 말을 떠올린 남초윤은 결국 타협하는 태도로 물었다.“엄마가 내일 점심에 밥 먹으러 오래요, 가기 싫으면 거절할게요.”육지율이 가기 싫다고 하면 문명희도 뭐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육지율은 눈꺼풀을 치켜올리더니 희미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눈빛은 희로애락을 알 수 없었다.“당신이 가고 싶지 않은 거야, 아니면 내가 가지 않기를 바라는 거야?”남초윤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고 서 있었다.그러자 육지율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그녀 옆을 스쳐지나며 말했다.“내일 점심에 당신 부모님 댁에 먼저 갔다가 저녁에 우리 본가로 가서 저녁 먹어.”육지율이 이렇게 흔쾌히 대답할 줄 몰랐던 남초윤은 순간 어리둥절했다.육지율이 위층으로 올라간 후, 남초윤은 식탁에
남초윤은 괜히 찔렸다.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본인이 왜 주눅이 들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밖에서 함부로 몸을 놀린 사람은 육지율이다.주눅이 든 마음이 이내 사라졌고 대신 솔직하게 말했다.“네, 나가려고요. 이혼 후 생활에 미리 적응해야죠. 육 대표님의 블랙카드는 육씨 집안 사모님에게 쓰는 것이지 남초윤이라는 사람에게 쓰는 게 아니잖아요. 이런 상황에 내 미래를 미리 준비하는 것은 당연한 거 아니에요?”육지율은 화를 내는 대신 피식 웃었다.“그래요. 너무 당연하죠. 나가서 이 사회가 얼마나 험난한지 겪어보면 알겠죠.”육지율은 다시 한번 귀띔했다.“대제주시에 남이 살던 집을 내놓은 매물도 많으니 사기당하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집 구할 때 친구 같이 다녀요. 친구가 경험이 있으니 더 잘 알 거예요.”정말 고맙다고 말해야 하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가슴에 남아있던 작은 미련은 대신 큰 손으로 변해 그녀의 얼굴을 세게 때렸다.남초윤이 잠자코 가만히 있자 육지율은 그녀가 본인 결정에 생각이 바뀌어 이사 나가지 않기로 한 줄 알고 말했다.“남초윤 씨와 육씨 집안 사모님이 되는 것에서 굳이 하나를 선택할 필요는 없으니 나에게 화나서 일부러 이사까지 가면서 고생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김성혁 씨 일은 내가 오해했어요. 요즘 설 연휴라 8, 9일 정도 휴가가 있는데 작년 겨울에 스위스의 그린드와르 마을에 다시 가고 싶다고 했잖아요? 1월 1일 티켓을 예약했는데 같이 기분 전환하러 갈래요?”남초윤은 주저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설마 그녀를 달래는 것인가?“가... 가고 싶지 않아요.”육지율은 모처럼 인내심 있게 행동했고 그녀가 거절당해도 안 좋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아니면 오로라를 보러 갈까요? 빙하도 보고?”얼굴을 숙이고 그녀를 바라보는 육지율의 말투는 너무 부드러워 사람을 달래는 것 같았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혼을 벼르던 두 사람이 지금은 어디로 여행을 가서 기분 전환을 할지 의논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