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유진은 요양원에서 예지은을 만난 후, 다시 산성 별장으로 갔다.배현수는 이미 회사로 출근한 터라 집에 아무도 없었다. 지문 인식으로 집안에 들어온 뒤, 곧장 2층 서재로 향했다.조유진의 추궁에 예지은은 깨진 옥패가 그녀의 손에 있지 않지만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배현수가 그 옥패의 출처를 알고 숨겨둔 것으로 조유진은 추측했다.그의 서재에는 두 개의 금고와 비밀번호 키가 있는 서랍이 하나 있다.이전까지 그녀는 함부로 배현수의 개인 물건을 들춰내지 않는다.하지만 이번에는 배현수가 두 사람 사이의 약속을 어겼다. 조유진은 그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알아야 했다.배현수가 설정한 비밀번호는 어차피 그 몇 가지 날짜뿐이다.그녀의 생일을 입력하니 두 개의 금고가 모두 열렸지만 금고에서는 깨진 옥패가 없었다.다시 그녀의 생일을 입력하여 잠긴 서랍을 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배현수가 이 서랍의 비밀번호 변경했다.하지만 배현수는 절대 비밀번호를 쉽게 바꾸는 사람이 아니다.비밀번호를 바꾸게 된 동기는 아마 한 가지이다. 바로 이 서랍 안에 그녀가 알 수 없는 중요한 것을 넣었다는 것이다.두 번째로 배현수의 생일을 입력했더니 비밀번호가 틀렸다고 나왔다.세 번째로 선유의 생일을 입력했지만 역시 틀렸다.이 비밀번호 잠금장치는 세 번 잘못 입력하면 다시 열지 못하도록 설정이 되어 있다.잡친 기분에 힘이 빠져있는 사이 아래층 마당에서 엔진소리가 들렸다.순간, 조유진은 깜짝 놀랐다. 탁 트인 서재에는 숨을 곳이 없었다.서재를 나서려 할 때, 배현수가 막 위층으로 올라갔다.두 사람은 정면으로 부딪쳤다.잠시 멍해 있던 조유진은 더 이상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회사에 간 거 아니에요? 왜 갑자기 돌아왔어요?”한쪽에 서 있는 배현수의 눈매는 차갑고 침울했고 검은 눈동자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배현수는 담담하게 웃었다.“그 말은 내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유진아, 왜 다시 왔어?”조유진은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솔직하게 말
조유진은 심장이 두근거렸다.“나를 엄씨 사택에서 데리고 나온 사람이 예지은이에요?”그녀의 직설적인 물음에 배현수도 숨기지 않았다.“예지은과 육씨 가문은 엄씨 가문과 아무런 인연도 원한도 없어. 누가 엄씨 사택에서 너를 데려갔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너를 조씨 가문으로 데리고 간 것은 예지은의 소행이야.”만약 애초에 엄환희가 조씨 집에 가지 않았다면 엄씨 집안에서 그녀를 빨리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조유진으로 살지 않았다면 지금의 만신창이 같은 인생을 살 필요도 없었다.이런 우연이 없었다면 그녀는 평생 엄환희로 살았을 것이고 엄준의 보배였을 것이며 조씨 가문에서 억울하게 고생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엄환희는 이름처럼 평생토록 평안하고 행복하게 사는 아리따운 공주가 되었을 것이다.그러면... 조유진이란 사람은 없다.엄환희의 신분으로 배현수를 만날 리도 없고 배현수와 사랑할 리도 없다.조유진은 코를 훌쩍이며 눈시울을 붉혔다.“스위스에서 돌아온 후, 말했잖아요. 더 이상 아무것도 숨기지 않겠다고. 현수 씨, 왜 또 나를 속이는 것인데요?”일이든 말이든 같은 실수는 세 번을 넘기면 안 된다고 했다.하지만 이번이 벌써 두 번째이다. 처음 한 번의 실수에서 교훈을 받지 못했단 말인가?이때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 엄창민을 보고 조유진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엄창민이 물었다.“환희야, 도착했어? 지금 너 픽업하러 공항으로 가는 중이야.”“아직이요. 항공권을 바꾸는 바람에 오후 두 시쯤 되어야 성남에 도착할 것 같아요.”“알았어. 그럼 내가 아버지에게 얘기할게. 그 시간 맞춰 공항 픽업 갈 테니까 그때 봐.”조유진은 알겠다고 대답한 후 전화를 끊고 돌아서려 했다.그러자 배현수가 조유진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유진아, 너에게 숨긴 건 내가 잘못했어.”조유진은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지난번에도 약속했잖아요. 다시 한번 더 나를 믿지 않고 숨긴다면 이제 현수 씨가 필요 없을 것이라고. 나는 현수 씨를 너무 믿지만 현수 씨는
조유진은 어이가 없는 듯 말했다.“아빠, 뭘 찾으세요?”엄준은 아쉬운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무것도 아니야.”시집도 안 간 사위가 왜 안 따라왔지?이때 엄창민이 바로 입을 열었다.“아버지, 찾지 마세요. 도둑놈 매부 안 왔어요.”선유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더러운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삼촌, 도둑놈 매부가 누구예요?”엄창민은 바로 대답했다.“너의 아빠.”“우리 아빠가 왜 도둑놈이에요?”아빠가 그렇게 부자인데 도둑질할 리가 없지 않은가!엄창민은 녀석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더니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장난을 쳤다.“너의 엄마를 데려갔으니 도둑놈이지.”꼬마 녀석은 바로 알아채고 대답했다.“어... 알겠다! 삼촌도 우리 엄마를 좋아하지만 우리 엄마가 우리 아빠를 좋아하기 때문에 우리 아빠가 도둑놈이라고 생각하는 거군요!”조유진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선유야, 헛소리하지 마.”하지만 엄창민은 바로 인정하며 녀석을 칭찬했다.“꼬마 친구, 아주 똑똑하네.”조유진도 손을 씻고 테이블에 앉아 만두를 빚기 시작했다.주방 셰프가 냉이 돼지고기, 표고 돼지고기, 새우 옥수수 등 여러 개의 소를 미리 준비했다.보물섬을 다 지은 선유는 조유진의 모습을 보고 같이 만두를 빚기 시작했다.“엄마, 아빠는 어떤 만두소를 좋아해? 내가 많이 만들어서 아빠에게 줄게.”녀석이 빚은 만두는 정말 못생겼지만 아빠를 생각하는 효심은 자랑할 만 했다.녀석은 만두를 빚다가도 또 작은 손으로 코를 후볐다.그 모습에 조유진이 말했다.“네가 빚은 것은 네가 먹어.”선유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왜요? 아빠 혼자 대제주시에서 설을 쇠는데 불쌍하잖아요. 아빠에게 잘 해줘야죠!”엄준이 녀석을 칭찬했다.“우리 선유의 효성이 아주 지극하네.”칭찬을 받은 선유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할아버지에게도 몇 개 빚어 드릴게요. 못생기긴 했지만 맛있을 거예요!”정말 고마워서 눈물이 앞을 가릴 지경이다.집안 분위기는
전화가 오랫동안 울렸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선유는 작은 손에 큼직한 휴대전화를 들고 귓가에 붙였다 떼기를 반복하더니 미간을 찌푸리면서 모니터에 대고 말했다.“나쁜 아빠, 왜 전화 안 받아!”조유진의 눈빛이 다시 한번 멈칫했다.설마 그를 버리고 성남으로 돌아간 것 때문에 화가 난 것일까?하지만 먼저 숨긴 사람은 배현수이다.화낼 사람은 오히려 그녀이다.깊은 눈빛으로 조유진을 지켜보던 엄준은 그녀의 눈빛에 스친 못마땅한 감정을 읽어냈다.“그 자식과 싸웠어?”“아니요.”조유진은 혹시라도 엄준이 그 옥패에 대해 알게 될까 봐, 그녀를 조씨 가문으로 데려간 사람이 예지은이라는 것을 알아챌까 봐 말을 아꼈다.그녀는 배현수가 숨긴 것을 용서할 수 있지만 엄준은 가능할까?예지은이 정말 그녀를 엄씨 사택에서 데려간 사람이라면 엄준이 배현수를 지금처럼 받아줄 수 있을까?조유진에게 예지은은 예지은이고 배현수는 배현수이다.그러나 엄준에게는 당시 엄환희를 엄씨 사택에서 데려간 유괴범이고 그의 아내 신희수를 간접적으로 죽인 살인범이다.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러도 엄준이 재혼하지 않은 것을 보며 신희수에 대한 감정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었다.조유진은 이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할 수 없었다. 그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돌려서 물었다.“아빠, 그때 복수하기 위해 나를 데려간 사람이 혹시 누군지 짐작이 가요?”엄준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내가 성남에서 사업을 했어. 사업이 커지면서 자연히 많은 사람이 이익을 해치게 되었어. 그 시절 사업 인맥은 복잡하게 얽혀 있어. 파트너이자 경쟁자인 사람도 많고.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추측하기 어려워. 20여 년 전 건축자재를 주로 만들던 더안이라는 회사가 있었는데 당시 성행 그룹과 경쟁이 치열했어. 하지만 재료에 발암물질이 포함돼 있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얼마 안 지나 부실운영까지 겹쳐 파산했고 창업자는 사라진 지 오래야.”조유진은 더안이라는 회사 이름이 왠지 귀에 익숙했다.“더안과 지금의
배현수가 차에 올라타자 백소미의 목소리가 들렸다.“해군, 육군, 공군과 같이 주위를 다 찾아봤는데 아무런 단서가 없어요. 예지은 씨, 아직 대제주시에 있을 거예요.”하지만 3시간째 뒤지고 있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배현수는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그 어떤 정보가 나와도 내선으로 연락하지 마세요.”백소미는 순간 멈칫했다.“배 대표님, 무슨 말씀이세요?”배현수는 한마디만 했다.“귀신이 있어요.”게다가 국내에서 레벨이 있는 사람이다.드래곤 파가 719부대에 내부 간첩을 두었다면 예지은이라는 쓸모없는 인간을 잡아간 목적은 무엇일까.예지은으로 배현수를 견제할 수 없다. 차라리 조유진을 잡는 게 훨씬 가성비가 있을 것이다.그들이 조유진을 잡지 않는 것은 지난번 스페인 기지의 폭파로 드래곤 파가 크게 다쳤기 때문이다.하지만 예지은을 잡아가는 것은 적어도 배현수에게 위협은 될 수 있다. 설마 도발하는 것일까?...오후 8시 성남컨벤션센터.조유진은 드레스를 입고 엄창민의 팔짱을 낀 채 들어왔다.몇몇 비즈니스 지인들이 엄창민에게 인사를 하러 왔다.“지난번에 엄 이사님께 여자친구를 소개시켜 드리겠다고 했는데 거절하시더니 이렇게 예쁜 여자친구가 있어서였네요.”조유진의 정체가 공식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이들이 이렇게 오해하는 것은 당연했다.엄창민은 웃으며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조 대표님, 농담도 참. 여동생인데 회사에 들어온 지는 꽤 됐어요. 앞으로 같이 일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니 만나게 될 겁니다.”조유진은 당당한 모습으로 디너백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건넸다.“조 대표님, 제 명함입니다.”조 대표는 당연히 거절할 리가 없었다. 리셉션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모두 명함을 주고받으며 인맥을 넓혔다.“네, 네. 나중에 같이 일할 기회가 있으면 다시 연락하죠.”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이에 엄명월이 샴페인 한 잔을 들고 그들에게 다가왔다.조유진 곁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그 대표님은요?”조유
그와 한바탕 따지려 했지만 돌아선 얼굴에 엄명월은 어리둥절했다.김씨는 생김새가 옹골찬 편이지만 사악하고 제멋대로인 눈앞의 사람은 한눈에 봐도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두 눈이 마주친 순간 엄명월은 약간 어리둥절했고 맞은편에 있는 그 사람의 눈빛은 매우 공격적이었다.눈빛에 어색함을 느낀 엄명월은 헛기침하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사람을 잘못 봤어요. 그 인간인 줄 알았습니다.”재웅은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그 인간? 저를 욕하는 것인가요?”엄명월은 맞은편의 사람을 몇 번 더 훑어본 후 말했다.“그건 아닙니다. 전에 뵌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성남 사람들은 대부분 얼굴이 익숙한데 그쪽은 아니어서요.”재웅은 샴페인을 들며 말했다.“바다가 크니 낯선 얼굴이 있는 게 이상할 것은 없잖아요.”이곳에 온 사람들은 모두 비즈니스를 하러 온 사람들이라 어느 정도 인맥이 있다.엄명월은 잠깐 생각하다 물었다.“혹시 성함이 어떻게 될까요? 성남에는 어떻게 오게 된 거예요?”재웅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조롱이 섞인 눈빛으로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성은 재, 이름은 오라고 합니다. 재오요. 실례지만 아가씨의 성함은 어떻게 됩니까?”엄명월은 가볍게 웃더니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저요? 제 성은 이, 이름은 사예요. 이사.”재웅의 얼굴에 눈웃음까지 더해졌다.“이사 씨, 이름이 매우 특이하네요.”“그쪽도요.”...한편 반대편에서 조유진은 연회장 내 사람들과 한 바퀴 돌며 인사했다. 십여 장의 명함을 주고받은 뒤 하얀 모피 조끼를 두르고 맨 위층 스카이라운지로 향했다.스카이라운지는 하늘과 별을 볼 수 있는 라운지이다.조유진은 휴대전화를 들고 사진을 여러 장 찍어 선유에게 보내려다 즐겨찾기에 있는 카톡 메시지에 눈길을 돌렸다.[대답 좀?]이게 지금 반성하는 태도란 말인가?오후에 선유가 배현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지금은 오히려 조유진의 휴대폰에 배현수의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걸려왔다. 하지만 늘 방해금지 모드로 되어
지금 이런 상황에 강이찬은 현실감이 없었다.한때 조유진에게 마음이 뺏겼던 적이 있다. 같이 불꽃놀이를 본다는 것은 그때의 그에게 아름답지만 멀기만 했다.하지만 지금은 조유진과 함께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서 있다.그리고 마음속에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다.한참이 지나자 강이찬은 창밖의 눈송이를 바라보며 물었다.“스코틀랜드에는 지금 눈이 내리고 있을까?”그녀에게 묻는 것 같기도 하고 자신에게 묻는 것 같기도 했다.조유진이 자리를 뜨려 했지만 옥상 통로가 잠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강이찬이 걸어와 손잡이를 몇 번이나 비틀었지만 열리지 않았다.“아마 누군가 우리 둘을 여기에 가두고 하룻밤을 같이 있게 만들려고 한 것 같아.”이 말에 조유진은 눈살을 찌푸렸다.몸도 이상하고 답답한 가슴 때문에 점점 목이 메었다.조유진은 어깨에 걸친 모피 조끼를 여미고 휴대전화를 꺼내 엄명월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다시 엄창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빠, 저 옥상에 갇혔어요.”엄창민은 사람들을 데리고 재빨리 도착했다.조유진의 얼굴은 이미 비정상적인 홍조를 띠고 있었고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엄창민은 조유진을 부축해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엄창민이 이날 밤 조유진과 같이 검은 우산을 쓴 사진이 검색어에 올랐다.사진 속 엄창민은 한 손으로는 검은 우산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뒷좌석 문을 열고 있었다.한 손으로 가슴을 누르고 있는 조유진은 짧고 하얀 모피 조끼를 입고 있었다. 청초하고 예쁜 얼굴을 살짝 숙일 때마다 큰 웨이브 펌을 한 머리는 그녀의 얼굴을 반쯤 가렸다. 차 밖으로 하얀 눈이 흩날리는 사진 속 풍경은 더욱 운치를 더했다.한 사람은 우산을 들고 신사 같은 모습으로 차 지붕에 손을 올려 그녀가 차에 부딪히지 않도록 했다. 여자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 가슴 앞 드레스를 누르며 허리를 굽혀 차에 오르고 있다.스킨십은 없었지만 많은 상상을 하게 했다.특히 조유진의 목덜미와 볼은 연한 연지빛을 띠고 있어 썸을 타는 듯했다.누리꾼들은
침대 사진? ?이 세 글자는 배현수를 완전히 화나게 했다.남자의 시커먼 눈동자는 잔뜩 움츠러들었고 가슴팍에 쌓인 울화통 때문에 숨이 점점 더 가빠졌다.예지은의 갑작스런 실종만으로도 충분히 화가 나 있는 상태인 데다 조유진마저 다시 성남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배현수는 하루 종일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무릎 위에 늘어뜨린 손은 어느새 주먹을 꽉 쥐었고 눈꺼풀은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배현수는 눈을 감고 불편한 느낌을 억지로 누르며 네티즌의 말에 답장하지 않고 대신 조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몇 번이나 전화했지만 조유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한숨을 내쉬며 어쩔 수 없이 제일 아니꼽게 여기던 엄창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한참 동안 울린 후에야 연결되었다.전화기 너머의 엄창민이 통화 버튼을 누르고 ‘여보세요’라고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조유진의 고통스러워하는 소리가 들렸다.“창민 오빠... 나 너무 괴로워요...”엄창민도 전화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이 조유진에게 집중했다.“힘들어? 어디가 아파?”“온몸이 간지러워요...”온몸에 천만 마리의 개미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조유진은 무의식적으로 목덜미,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손끝에 힘을 주자 하얀 피부에 금세 핏자국이 하나둘씩 잡혔다.엄창민은 황급히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환희야, 함부로 긁지 마!”“못 참겠어요...”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부드럽고 온화하며 아름다운 것이 마치 비 오는 밤에 수양버들이 하늘하늘 날리는 것 같았다.이 목소리는... 평소 계곡의 맑은 샘물처럼 청량한 목소리와는 사뭇 달랐다.휴대전화를 손에 쥐고 있는 배현수의 얼굴은 점점 차가워졌고 검은 눈동자는 더더욱 두꺼운 얼음으로 얼어붙은 것 같았다.“엄.창.민. 대체 유진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남자의 얼음장 같은 매서운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차갑게 전해졌다.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검정색 벤틀리 차 안.엄창민은 마구잡이로 움직이는 손을 잡으며 배현수에게 말했다.“내가 환이에게 뭘 할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