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현수는 소름이 돋았다.“난 그런 스타일 좋아하지 않아.”그는 전혀 관심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잠시 멈춘 후, 그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지며 말했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면, 오늘 밤에 다시 한 번 몸소 체험하게 해서 내가 어떤 성향인지 확실히 알려줄 수 있어.”그의 어조는 전혀 농담 같지 않았다.조유진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녀는 SY의 공식 계정이 유설영의 개인 스튜디오 설립 소식을 리트윗한 것을 보고 의아해하며 물었다. “유설영 씨가 SY와 협업하나 봐요?”배현수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연예계와 영화 업계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아마도 유설영의 스튜디오와 SY 아래 매니지먼트 회사가 어떤 협력 관계가 있나 보네. 왜,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무슨 일 있어?”조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에요.”유설영과 문제가 있는 건 남초윤이었다.하지만 설사 문제가 있다 해도 일은 일이고, 사적인 원한은 사적인 원한일 뿐이었다.배현수가 한마디 덧붙였다. “그 사람 지금 지율이 고객이야.”“고객이요?”조유진이 약간 놀랐다.“지율이는 이제 SY의 경영진에서 물러났어. 유설영은 지금 그의 로펌의 큰 고객이지.”“하지만 유설영 씨는 전 여자 친구잖아요. 관계가 너무 어색하지 않나요?”“당사자들이 어색해하지 않으면 어색할 게 없어. 지금은 단지 의뢰인 관계일 뿐이야. 지율이가 나쁜 놈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절대 개인적인 감정을 일에 끌어들이지 않아. 상대방이 충분히 지불만 한다면, 설령 인간쓰레기라도 그는 소송을 맡을 거야. 그는 오직 변호사의 직업 윤리만 따르지, 인간성의 도덕은 그다지 따르지 않아.”정확히 말하자면, 상위 계층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도덕적 기준이 낮다.원시 자본의 축적은 강탈과 약탈이 바탕이 되는 거였으니까.......한편, 소정 별장에서.육지율은 본가에서 온 전화를 받았다.육성일은 그를 개처럼 욕했다. “이혼할 거면 빨리 해. 질질 끌어봤자 누구에게도 좋을 게 없어
남초윤이 숙취에서 깨어나자 품에 가방 하나를 안고 있는 걸 발견했다. 바로 그 연한 녹색의 악어가죽 켈리 미니 백이었다.진 씨 아주머니가 숙취 해소 차를 들고 올라오며 말했다. “사모님, 어젯밤에 어쩌다 그렇게 취하셨어요? 두 번이나 토하셨는데, 계속 도련님이 돌봐주셨어요.”육지율이라고? 그 사람이 누굴 돌볼 수 있다고?남초윤은 뭔가를 깨닫고 고개를 숙여 보니, 깨끗한 실크 잠옷을 입고 있었다.팔을 들어 냄새를 맡아보니 상쾌한 과일 향 샤워젤 냄새가 났고, 술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다.남초윤은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아주머니, 어젯밤에 아주머니가 저를 씻겨주셨나요?”진 씨 아주머니는 솔직히 대답했다. “원래는 제가 사모님을 돌봐드려야 했는데, 사모님이 너무 취하셔서 제가 도저히 감당을 못했어요. 그래서 나중에 도련님이 저보고 쉬라고 하시더니, 직접 사모님을 씻기고 옷도 갈아입혀 주셨어요.”남초윤의 귓불이 빨개졌다. “그럼... 이 가방은 어떻게 된 거예요?”숙취 때문에 머리가 깨질 것 같고, 기억이 거의 나지 않았다.그녀는 어젯밤 조유진과 함께 술집에서 울고 떠들며 육지율을 나쁜 놈이라고 욕한 것까지만 기억났고, 그 이후의 일은 기억나지 않았다.진 아주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잘 모르겠어요. 어젯밤에 도련님이 사모님을 안고 돌아오셨을 때, 사모님이 계속 이 가방을 꼭 붙들고 놓지 않으셨어요. 제가 한 번 빼앗으려고 하니까 또 울고 소리치셨죠. 나중에 도련님이 한참 달래고 나서야 사모님이 내려놓으셨어요.”“...”진 씨 아주머니가 덧붙였다. “사모님, 취하시면 정말 다루기 힘드세요. 도련님이 사모님을 씻길 때, 사모님이 막 움직여서 도련님 얼굴을 할퀼 뻔했대요.”“...”남초윤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주사가 이렇게 심했나?진 아주머니는 숙취 해소 차를 내려놓으며 일렀다. “사모님, 세수하시고 나서 이 차 꼭 드세요.”“알겠어요.”진 씨 아주머니가 막 나가려다 참지 못하고 몇 마디 더 했다. “이 가방은 아마 도
그의 질문하는 어조는 차갑고 딱딱했으며, 어떤 온기도 없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강한 의심이 깃들어 있었고, 그 탐구하는 듯한 시선은 사랑이나 질투가 아닌, 습관적인 심문과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육지율은 겉으로는 무심한 듯 누구와도 농담 몇 마디 주고받을 수 있었지만, 내면은 정말 차가웠다.아무리 끓는 물을 부어도 순식간에 얼어버릴 정도로 말이다.결혼 첫 해 그녀의 생일에, 육지율은 누군가에게 부탁해 거의 3미터 높이의 거대한 생일 케이크를 만들어 그녀에게 선물했다.그날 밤, 그는 그녀 뒤에 서서 그녀를 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육씨 가문 사모님, 생일 축하해요.”육지율 같은 남자는 정말 잘생기고 돈도 많아서, 조금만 적극적으로 나서고 돈을 좀 써서 낭만을 만들어내면, 어떤 여자가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는가?남초윤은 평범한 사람이었고, 육지율은 그녀의 취향에 완벽하게 부합했으며, 또 재력도 좋았다. 마음이 흔들리는 건 인지상정이고, 오히려 흔들리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그때 그녀도 문명희의 말을 듣고 그와 잘 지내보려고 생각했다. 육지율과 시간이 지나면서 정이 들어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하지만 다음 날, 그가 뉴욕으로 날아가 유명 주얼리 디자이너를 데리고 고급 사립 병원에서 검진을 받는 모습이 파파라치에 찍혔다.물론, 그 가십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지도 않았고, 심지어 공개되지도 않았다.남초윤은 연예계에서 일하는 사람이라 국내외의 모든 소식을, 크고 작은 것 할 것 없이 거의 최전선에서 접했다.그 주얼리 디자이너의 이름은 미네티, 중국 이름으로는 하주연이라고 했다. 디자인 재능이 뛰어난 신진 디자이너로, 해외에서 많은 디자인 대상을 수상한 사람이었다.그렇게 화려하고 빛나는 직업여성이 기꺼이 제3자가 되어, 심지어 육지율의 아이까지 임신하려 한다는 걸 상상도 못했다.남초윤은 이 3년간의 무사랑 결혼 생활 동안 육지율이라는 달콤한 사탕수수 같은 남자에게 여러 번 마음이 흔들렸다는 걸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육지율이 막 나가자마자 남초윤은 남씨 가문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문명희가 전화를 걸어왔다.“딸, 곧 설날이잖아. 올해 섣달 그믐날에 너랑 지율이랑 같이 우리 집에 와서 점심 좀 먹자. 지난번에 지율이가 우리 집에 와서 밥 먹을 때 단호박 수프를 좋아했잖아? 올해 네 아빠가 고향 친척들한테서 직접 기른 호박을 좀 가져왔는데, 내가 먹어봤더니 아주 달고 찰져. 단호박 수프 끓이면 지율이가 분명 좋아할 거야. 꼭 같이 와서 점심 먹고, 오후에 지율이랑 같이 육씨 가문 본가로 가서 섣달 그믐날 밤에 할아버지랑 잘 보내.”문명희는 혼자서 한참을 말했다.남초윤은 반쯤 듣고 반쯤 딴생각을 하다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전화 너머로 문명희가 다시 불렀다.“딸, 들었어?”남초윤은 마음이 텅 비어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고, 그저 비꼬는 듯한 느낌만 들었다.“엄마, 육지율 씨가 우리 집에 몇 번이나 밥 먹으러 왔다고요? 그가 단호박 수프가 맛있다고 한 것도 그저 예의상 한 말이고 대충 맞춰준 거일 뿐인데 엄마랑 아빠는 진심으로 받아들이셨어요?”육지율 같은 명문가 출신이 어렸을 때부터 무슨 진귀한 음식과 유명 셰프의 요리를 안 먹어봤을까?그런 평범한 단호박 수프에 매력을 느낄 리가 있나?문명희는 간곡히 말했다. “그가 정말 좋아하든 아니든, 이건 그저 우리의 진심일 뿐이야. 둘이 결혼했으니 우리는 한 가족이잖아. 우리 회사에 얼마나 많은 돈을 투자했는지 너도 잘 알잖아. 딸, 지율이랑 계속 다투지 말고, 나랑 네 아빠랑도 다투지 마. 우리는 다 너를 위해서 그러는 거야. 네가 그와 결혼해서 매달 쓰는 돈이 얼만데, 지율이가 한 마디라도 했니?”남초윤은 가슴이 답답해져 깊이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제가 돈 쓰는 걸 탓하지 않는 건 맞아요. 하지만 엄마, 잊지 마세요. 그 사람이 지금은 절 부양할 수 있지만, 언젠가 정말 지겨워지면 쓰레기 버리듯이 절 버릴 수도 있어요. 그때가 되면 당신과 아빠가 무릎 꿇고 빈다 해도, 그는 여전히
“엄마도 네가 잘 지내길 바라. 만약 이혼하면 고객사들은 두 번 다시 너의 아빠와 사업을 하지 않으려 할 거야. 그러다가 회사 상황이 더 나빠지면 우리 셋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본 적 있어? 그러면 너의 아버지는 너를 키울 수도 없고 너도 우리 두 노인을 부양할 수 없을 거야.”말이 점점 뒤로 갈수록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확연히 변했다.“내가 한 말 잘 생각해 봐.”문명희는 흐느끼는 목소리로 울며 겨자 먹기로 이렇게 말했다. 분명 강요하는 말투가 아니었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는 마치 칼날처럼 남초윤의 가슴을 무차별하게 찔렀다. 찌르자마자 피가 나는 듯했다.사실 문명희는 남재원보다 더 대단하다. 항상 자기 딸인 남초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다.물론 문명희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이혼하는 순간 고생길이 열린다.전화를 끊은 후, 남초윤은 옷방 바닥에 앉아 부동산중개인에게 연락했다.이혼 얘기를 쉽게 꺼내지 않는 육지율이었지만 일단 꺼낸 이상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다는 뜻이다.정말 막다른 목에 이르면 먼저 소정 별장을 떠나 자력갱생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원래 아파트와 차는 남재원이 사준 것이기에 만약 남재원이 그녀가 육지율과 이혼한 것을 안다면 분명 집과 차를 회수할 것이다.집을 찾고 지하철을 타고 값싼 음식을 먹는 것... 남초윤은 자신이 버틸 수 있을지 그리고 얼마나 오랫동안 버틸 수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첫걸음을 떼지 않으면 영원히 불가능하다....한편 배현수는 조유진을 데리고 요양원에 왔다.예지은은 조유진을 보자마자 겁에 질려 배현수의 뒤로 숨어버리더니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쟤는 안정희의 딸이야. 나는 만나고 싶지 않아. 아들아, 저 애를 보내. 보내라고...”배현수는 들썩이는 예지은의 어깨를 움켜쥐며 말했다.“안정희의 친딸이 아니라 수양딸이에요. 우리 집안과 원한이 없다고요.”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젓는 예지은은 정신이 확실히 현저히 통제 불능이 된 듯했다.“아니야. 복수하러 왔어. 우리에게 복수
분위기는 순간 정체되었다.배현수의 도도한 얼굴에 예지은의 손톱에 긁힌 옅은 핏자국이 두 줄 나 있었다.너무 깜짝 놀란 예지은은 당황하며 중얼거렸다.“내가 그런 거 아니야. 정말 내가 그런 거 아니야. 너희 다 가, 모두 가!”예지은은 제정신이 아니지만 조유진을 두려워하는 것은 분명했다. 자신이 그녀를 해치지 않았다고 거듭 강조했고 복수하러 온 것일까 봐 많이 두려운 듯했다. 만약 예지은이 말한 ‘원한'이 안정희와 무관하다면... 그럼 예지은의 ‘복수'는 무슨 복수일까?의심이 든 조유진은 예지은에게 무심코 물었다.“어머니, 혹시 이전부터 제가 누군지 아셨어요?”예지은은 머리를 감싸 쥐더니 울며 애원했다.“옥패를 돌려줄 테니 더 이상 찾아오지 마. 내가 잘못했어. 내 아들을 탓하지 마. 이 아이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옥패요?”조유진은 예지은에게 다가가 확실하게 물어보려고 했다.배현수의 미간은 벌떡벌떡 뛰고 있었지만 얼굴빛은 흔들리지 않은 얼굴로 조유진을 끌어당기며 말했다.“잠깐 밖에서 기다려. 감정이 불안정해서 또 다칠 수 있으니 멀리 떨어져 있어.”조유진은 배현수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더 이상 묻지 않고 대꾸했다.“네, 나가서 기다릴게요.”조유진은 밖으로 나간 뒤 더 이상 병실로 돌아가지 않고 차에 올라탔다.예지은이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옥패를 돌려주겠다고 한 건 어떻게 된 일일까?배현수도 뭔가 숨기고 있는 듯했다.문득 연말에 진주시로 출장 갔을 때 배현수가 진주시까지 와서 함께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 사이 간병인이 전화를 걸어와 실수로 예지은의 옥패를 부쉈다고 했고 그 말을 들은 배현수의 표정은 곤란한 일이 생긴 것처럼 복잡해 보였다.그때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배현수는 대충 에둘러댔다.단지 배현수의 친어머니와 관련된 일이기에 걱정하는 것이라 생각해 더 이상 묻지 않았다.그러나 오늘 일어난 사소한 것들을 연결해 보면... 그 옥패는 본인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설마 다른 사람이 조유진을 데리고 갈 때 목
조유진은 깜짝 놀랐지만 그가 드디어 무슨 말이라도 털어놓으려는 줄 알았다.하지만 배현수는 그녀의 귀에 입을 맞추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어젯밤에 네가 잠들었을 때, 손가락으로 너에게 약을 발라주다가 그만 또 통제력을 잃었어.”귀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조유진은 배현수를 노려보며 말했다.“나에게 말할 게 이것뿐이에요?”배현수의 눈빛은 어두웠지만 평온한 안색으로 예전처럼, 심지어 장난까지 섞어서 말했다.“뭘 더 설명하라는 거야? 통제 불능한 뒤 어떻게 했는지 설명할까?”조유진은 입술을 달싹이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배현수는 그녀의 손을 잡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너는 나와 결혼하는 것이지 우리 어머니와 결혼하는 게 아니잖아. 우리 어머니가 싫으면 앞으로 그곳에 안 데려갈게. 오늘 너를 놀라게 한 것은 확실히 어머니가 잘못했어. 나도 생각이 짧았고.”“놀라지는 않았어요. 그냥 궁금해요. 옥패를 돌려주겠다고 하는 것이...”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유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엄씨 사택에서 전화한 것이다.걸려온 전화를 본 조유진은 잠시 멍해진 채 바로 받지 않았다.그러자 옆에 있는 배현수가 말했다.“엄 어르신이 섣달 그믐날 오라고 전화한 것 같은데 왜 안 받아?”조유진은 더 이상 옥패를 묻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배현수가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조유진도 더 이상 캐묻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고문을 해도 소용없을 것이다.조유진은 감정을 억누르며 일부러 한마디 했다.“아버지가 섣달 그믐날 성남으로 내려오래요. 친어머니 제사를 지내자고요. 특별히 한마디 했는데 호적에 없는 사람은 데려오지 말라고 했어요.”섣달 그믐날 바로 내일이다.그런데 배현수는 반박하기는커녕 바로 찬성했다.“그럼 내일 공항까지 데려다줄게. 성남으로 가서 엄 어르신과 선유랑 설 잘 보내.”그럼 그는?남아서 예지은과 함께 섣달 그믐날을 보낼 것인가? 아니면 그녀가 대제주시에서 머물다가 예지은에 대해 뭔가를 알아낼까 봐 두려운 것일까?그날 밤, 서로 걱정이 많았는지
조유진은 요양원에서 예지은을 만난 후, 다시 산성 별장으로 갔다.배현수는 이미 회사로 출근한 터라 집에 아무도 없었다. 지문 인식으로 집안에 들어온 뒤, 곧장 2층 서재로 향했다.조유진의 추궁에 예지은은 깨진 옥패가 그녀의 손에 있지 않지만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배현수가 그 옥패의 출처를 알고 숨겨둔 것으로 조유진은 추측했다.그의 서재에는 두 개의 금고와 비밀번호 키가 있는 서랍이 하나 있다.이전까지 그녀는 함부로 배현수의 개인 물건을 들춰내지 않는다.하지만 이번에는 배현수가 두 사람 사이의 약속을 어겼다. 조유진은 그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알아야 했다.배현수가 설정한 비밀번호는 어차피 그 몇 가지 날짜뿐이다.그녀의 생일을 입력하니 두 개의 금고가 모두 열렸지만 금고에서는 깨진 옥패가 없었다.다시 그녀의 생일을 입력하여 잠긴 서랍을 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배현수가 이 서랍의 비밀번호 변경했다.하지만 배현수는 절대 비밀번호를 쉽게 바꾸는 사람이 아니다.비밀번호를 바꾸게 된 동기는 아마 한 가지이다. 바로 이 서랍 안에 그녀가 알 수 없는 중요한 것을 넣었다는 것이다.두 번째로 배현수의 생일을 입력했더니 비밀번호가 틀렸다고 나왔다.세 번째로 선유의 생일을 입력했지만 역시 틀렸다.이 비밀번호 잠금장치는 세 번 잘못 입력하면 다시 열지 못하도록 설정이 되어 있다.잡친 기분에 힘이 빠져있는 사이 아래층 마당에서 엔진소리가 들렸다.순간, 조유진은 깜짝 놀랐다. 탁 트인 서재에는 숨을 곳이 없었다.서재를 나서려 할 때, 배현수가 막 위층으로 올라갔다.두 사람은 정면으로 부딪쳤다.잠시 멍해 있던 조유진은 더 이상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회사에 간 거 아니에요? 왜 갑자기 돌아왔어요?”한쪽에 서 있는 배현수의 눈매는 차갑고 침울했고 검은 눈동자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배현수는 담담하게 웃었다.“그 말은 내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유진아, 왜 다시 왔어?”조유진은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솔직하게 말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