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봐봐, 현수 씨. 제가 다시 현수 씨 품에 돌아왔잖아요.”“왈츠를 원무곡이라고도 부른대요. 원무곡의 의미가 뭔지 아세요?”“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잠시 헤어진다고 해도 돌고 돌아 다시 만나 가슴이 뛰기 시작하면서 원만한 관계를 이룬다는 뜻이래요.”“현수 씨, 사랑해요. 영원히.”지금의 배현수는 이 달콤한 말들이 그저 조유진이 생각난 대로 말한 것이라고 생각했다.진심이 전혀 없었다고 생각했다.영원히 사랑한다고 해놓고 뒤돌아 배신했기 때문이다.배신한 사람은 지옥에 가야 마땅했다.이때 음악이 멈췄다.아름다운 추억은 그대로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배현수는 차갑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조유진, 친구를 이용해 나랑 춤추면서 꼬셔보려는 수작이야?”“대표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저는 더는 할 말이 없습니다.”조유진은 확실히 수혜자였기 때문에 억울하지는 않았다.인파 속으로 점점 멀어져가는 배현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조유진의 오른쪽 눈에서는 눈물 한 방울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그러고는 고개를 쳐들고 손으로 쓱 닦았다.뜨거운 파티 현장 분위기 때문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그녀는 치맛자락을 정리하더니 무대를 떠나 테라스에서 바람을 좀 쐬려고 했다.하지만 소방 통로를 지나치다 송인아가 젊은 남성과 뜨겁게 키스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서다 누군가와 부딪히고 말았다.뒤돌아서자, 자신을 차갑게 쳐다보고 있는 배현수를 발견했다.조유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두 눈을 막더니 말했다.“보지 마세요!”배현수는 미간을 찌푸렸다.“또 무슨 수작이야?”조유진은 입술을 꽉 깨물더니 화제를 돌렸다.“내가 누구게?”“...”‘정말 내가 눈이 먼 줄 아나?’송인아에게 놀아나고 있었으니 정말 눈이 먼 것이나 다름없었다. 짜증이 난 배현수가 얼굴에서 그녀의 손을 떼려고 했을 때, 입술이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부드러운 입술이 그의 입술로 다가왔다.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던 조유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눈 감
배현수의 가슴과 벽 사이에 꼼짝없이 갇힌 조유진은 온몸을 떨고 있었다.귓가에서 느껴지는 따스하고 짜릿한 느낌을 도무지 무시할 수가 없었다.조유진은 신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지금 송인아 씨한테 복수하는 거예요?”조유진은 배현수가 이런 방식으로 송인아한테 복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배현수의 손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그녀의 몸은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고 배현수는 고개를 숙이더니 차갑게 말했다.“그러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떤데?”“여기서 이러시면...’문 하나를 사이에 둔 송인아는 충분히 문밖에서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쑥스러움이 많았던 조유진은 배현수처럼 약혼녀가 젊은 남성과 몰래 키스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고도 차분해질 수가 없었다.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송인아는 소방 통로 안에, 배현수와 조유진은 소방 통로 밖에 있었다.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은 가끔 화장실에 가기는 했었지만, 이 통로끝까지 오는 사람은 적었다. 조유진은 사람들이 이 방향으로 보았는지, 배현수와 자신을 알아보았는지 확실치 않았다.하지만 다행히도 배현수가 그들을 등지고 있었고 그녀는 그의 넓은 가슴에 파묻혀 있었다.사람들이 호기심에 이쪽으로 본다고 해도 열애 중인 젊은 남녀가 뜨겁게 사랑을 나누고 있는 줄 알고 별로 신경 쓰는 사람도 없었다.조유진은 긴장되는지 누가 볼까 봐 배현수의 셔츠에 파묻힌 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태연하게 그녀를 바라보던 배현수의 한마디에 조유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안에서 먼저 끝날까 아니면 우리가 먼저 끝날까?”“...”조유진은 얼어붙고 말았다.이때 통로 안.송인아가 재촉했다.“됐어.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워서 가봐야 해.”“누나, 이대로 가게요? 대표님이 고자라면서 돌아가서 뭐 해요? 오늘 그냥 제 차를 타고 함께 갈래요? 어차피 파티 재미도 없잖아요.”“내가 자리를 오래 비운 사이 조유진 그년이 우리 대표님을 꼬시고 있을지도 몰라! 내가 지켜보지 않으면 사모님 자리를 뺏길 수도 있어. 내가
“...”조유진은 침묵에 잠겼다.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송인아가 실수로 그랬다고 해도 그녀는 용서받을 약간의 가능성도 있었다.하지만 조유진이 지은 죄는 배현수가 이미 사형을 내린 거나 다름없었다....조유진은 전기제어실에서 한참이나 쭈그려 앉아있어서야 이내 감정을 추슬렀다.그리고 테라스로 갔을 때, 불꽃 축제가 열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거대한 불꽃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테라스 난간에 기대고 있을 때,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발신자는 강이찬이었다.“유진 씨, 생일 축하해요.”“감사해요, 강 사장님.”“어디 있어요? 현수가 안 보이길래 혹시... 같이 있어요?”“아, 저는 지금 테라스에 있어요. 불꽃축제 하고 있길래요. 대표님과 함께 있지 않습니다.”강이찬은 한숨을 돌리더니 말했다.“불꽃축제요?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곧 갈게요.”하늘로 솟아올라 마치 꽃처럼 활짝 핀 불꽃은 전체 하늘을 밝혔다.알록달록 가지각색이었다.그녀는 2층에, 배현수는 1층에 있었다.배현수는 침향목을 담배에 끼워 불을 붙였다.핸드폰이 울리고, 카톡으로 메시지가 왔다.학교 가기 싫어 님이 문자를 보내왔다.「아저씨, 저 그 문제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내일 저희 엄마 좀 만나보시면 안 돼요?」문자 뒤에는 대성통곡이라는 이모티콘이 함께했다.배현수는 한 손에는 담배를 쥐고 있어 한 손으로 문자 보냈다.「엄마를 만나보라고?」「네! 사실 오늘 저희 엄마 생일인데 건강이 좀 안 좋으세요. 잡지를 통해 아저씨를 알게 되었는데 엄마가 우상이라고 했어요! 받고 싶은 선물이 바로 아저씨랑 만나는 거라고 했고요. 아저씨랑 만날 수만 있다면 평생 여한이 없을 거라고 하셨어요!」‘이런 우연이. 유진이랑 생일이 같네.’「그러면 엄마한테 생일 축하한다고 전해줘.」「아저씨, 제발 만나주세요! 저희 엄마 아저씨를 정말 존경한단 말이에요!」「엄마가... 질병을 앓고 계신다고?」녀석의 말투를 봐서는 오래 살지 못할 것처럼 느껴졌다.「아저씨, 저
다음날 토요일 점심.점심을 먹고 난 후 조선유는 조유진을 데리고 백화점으로 향했다.백화점에는 대형 서점이 있었다.조선유가 만화책이 보고 싶다고 해서 조유진은 별다른 생각하지 않고 서점으로 데려갔다.서점에 도착하고, 조선유는 계속 시간을 확인했다.배고프다면서 케익을 먹고 싶다고 했다가, 또 목이 마르다면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고 했다.조유진이 음식 사러 간 사이, 조선유는 2층 손잡이에 기대어 1층 상황을 살폈다.“아저씨 왜 아직 안 오는 거야!”조선유가 미간을 찌푸리고 두리번거리던 중 훤칠하고 익숙한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조선유는 반가운 마음에 1층을 향해 손을 저으면서 소리 질렀다.“아저씨! 저 여기 있어요!”아이스크림 대기 줄에 서 있던 조유진이 멈칫했다.“선유야, 누구 부르는 거야?”조선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손가락으로 1층을 짚었다.“엄마, 내가 오늘 밖에 나오자고 한 건 친구를 소개해 주기 위해서야! 엄청 멋있고 엄마와도 잘 어울리는 분이야!”“친구? 어떤 친구?”‘선유가 언제 친구 같은 삼촌을 알게 된 거지?’조유진은 조선유가 짚은 곳을 바라보았다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현, 현수 씨 아니야?’급히 시선을 거두고 조선유의 어깨를 잡더니 확인차 물었다.“선유야, 네가 말한 아저씨가 저 검은 셔츠를 입은 키 크고 멋있는 아저씨를 말하는 거야?”“응! 엄마도 키 크고 멋지다고 생각해?”“...”조유진은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어지러운 느낌이 들었다.“저... 저 아저씨 너 누구 딸인 줄 알아?”조선유는 고개를 흔들었다.“아니. 엄마한테 소개해 주려고. 엄마, 저 아저씨 알고 싶지 않아?”배현수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오고 있었다.배현수는 아직 조선유가 누구의 딸인 줄은 몰랐다.조유진은 갑자기 드는 생각이 있었다.“선유야, 여기 가만히 있어. 엄마 잠깐 화장실 다녀올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일 있으면 엄마한테 전화해.”“근데 엄마, 아저씨 10분밖에 시간이 안 된다고 했
멀지 않은 곳의 한 구석.조유진은 도둑처럼 벽 뒤에 숨어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녀는 배현수가 허리를 숙여 아이스크림을 조선유에게 건네는 모습을 보았다.그리고 사랑스럽게 조선유의 머리를 쓰다듬는 모습까지 보았다.함께 줄 서서 아이스크림을 사고, 도넛 가방을 메고 힘들면 배현수의 다리에 기대는 모습은 마치 아빠와 딸이 쇼핑하는 모습이었다.자신이 나타나면 이 아름다운 장면이 깨질까 두려워 차마 다가가지 못했다.‘만약 현수 씨가 내가 선유 엄마라는 걸 알게 되면 선유를 딸로 받아줄까?’‘선유를 빼앗아 가 못 만나게 하는 건 아니겠지?’조유진은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배현수는 평소에 누구도 다가가지 못할 정도로 차가운 사람이었다.하지만 조선유와 휴게실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 여기저기 묻히면서 아이스크림을 먹고있는 조선유를 부드럽게 바라보는 모습은 너무도 다정해 보였다.‘얼마 만에 보는 모습인가?’잊힐 정도로 아주 오래전에 보았던 모습이었다.6년 동안, 조유진은 배현수와 조선유가 서로 만나는 날을 기대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정작 눈앞에서 본 이 화면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아름다웠다.입을 막고 있던 조유진의 눈가에는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이때, 배현수가 시간을 확인했다.“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아저씨는 가봐야 해서 여기서 가만히 아이스크림 먹고 있어. 엄마 오시면 말씀 전해주고.”입가에 온통 아이스크림을 묻힌 조선유는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말했다.“근데 아저씨, 아직 저희 엄마 보지 못했잖아요.”배현수는 습관적으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말했다.“다음에.”“다음에 언제요? 아저씨 거짓말쟁이.”남아일언 중전금이라고 했다.“아저씨가 내준 문제를 풀게 되면 다시 만나.”아쉬운 표정의 조선유는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그래요. 아저씨, 안녕.”“안녕.”배현수의 뒷모습이 흐릿하게 조유진의 시선에서 점점 멀어져갔고, 끝내 사라졌다.조유진은 감정을 가다듬고 다시 조선유의 곁으로 갔다.“선유야.”“엄마
조선유는 조유진의 손을 꼭 잡더니 말했다.“엄마, 우리 이제 집에 가자.”조유진은 그제야 생각났는지 물었다.“선유야, 아저씨를 어떻게 알게 된 거야?”“입원했을 때 초윤이 이모가 사준 간식 주머니에 잡지 하나 있었는데 그 잡지 모델이 바로 아저씨였어! 혼자 심심해서 병실에서 나왔다가 딱 아저씨를 마주쳤어.”“왜 병원에 가셨대?”“아저씨 아빠도 편찮으셔서 병문안 왔다고 했어.”“그럼, 무슨 얘기를 했는데?”딸기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던 조선유는 눈을 빙그르르 돌리더니 한참 생각한 뒤 말했다.“아무것도 말 안 했어. 그저 이름을 알려드렸더니 듣기 좋다고 칭찬해 주셨어!”조유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선유야, 잠시 아저씨랑 너무 친하게 지내지 않겠다고 엄마랑 약속할 수 있어?”“왜?”“누구인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도 모르잖아. 엄마가 걱정되어서 그래.”너무 갑작스러웠다.조유진은 어떻게 이 상황을 설명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조선유와 함께 배현수를 피해다닐 수밖에 없었다.조선유는 실망했지만 그래도 엄마가 한 말이 맞는다고 생각했다.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근데 아저씨 정말 좋은 사람이야!”조유진은 멈칫했다.조선유를 바라보면서 잠깐 생각에 잠겼다.‘알게 된 지 고작 한 달밖에 안 되었는데 현수 씨를 이렇게나 좋아하다니.’그때 신준우도 조유진에게 무척 잘해주었지만, 배현수만큼 좋아하지 않았다.‘설마, 피는 못 속이는 건가?’친 부모 자식이라 처음 본 순간부터 서로 끌렸다....오늘은 배희봉이 퇴원하는 날이었다.병원에 도착한 서정호는 퇴원 수속을 밟고 있었다.배현수는 직접 배희봉의 짐을 싸고 있었다.배희봉은 쑥스러워하면서 말했다.“바쁠 텐데 직접 데리러 오고. 진작에 나아서 혼자서도 집에 갈 수 있어.”“작은 수술이 아니에요. 집에 돌아가셔서도 회복 잘하셔야 해요. 이참에 아버지 집 말고 우리 집에서 한동안 지내는 거 어때요?”“아니야, 습관이 안 돼. 그 큰 집 주위에 이웃 하나 없
그때 육씨 가문과 거래가 있었던 조씨 가문에서 기사를 하던 배희봉은 육성준의 보살핌을 받았다.마음씨가 착한 배희봉은 갓 태어난 아이를 차마 보육원에 보내지 못해 직접 키우게 되었다.그 아이가 바로 배현수였다.배현수의 성씨는 실제로 육 씨였다.배현수가 만 18세가 되던 해에야 진짜 신분을 알려주었다.예지은의 말이 나오자, 배현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아버지 집에 모셔다드리고 보러 갈 거예요.”“그래, 사모님한테 안부 인사 전해주고.”...차 번호가 99가9999인 블랙 마이바흐가 대 제주시 교외의 한 요양원을 향했다.배현수는 과일바구니와 하얀 장미를 들고 갔다.병실은 텅 비어있었고 예지은은 보이지 않았다.배현수가 물건을 내려놓고 찾아보려고 할 때, 예지은은 간호사에 의해 끌려왔다.아주 흥분된 상태였다.“거짓말 아니라니까? 원수를 보았다고. 그년 남편이 우리 남편을 죽였어! 여기서 쫓아내야 한다고! 그 집은 온 가족 모두 나쁜 사람들이야! 나쁜 사람! 쫓아내야 해!”간호사는 그녀를 토닥토닥 달래주었다.“알았어요, 사모님. 이따 그 나쁜 사람 쫓아낼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해드릴게요.”“그래, 그래.”간호사는 고개를 들었다가 배현수가 병실 입구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대표님, 오셨어요? 어머님이 사람을 잘 못 봐서 흥분하신 거 같아요. 이야기를 나누시다 보면 진정하실 거예요.”예지은은 배현수를 보자마자 그의 옷깃을 잡으면서 말했다.“성준 씨, 저 보러 온 거예요? 왜 그동안 보러오지 않았어요? 많이 바빴어요?”간호사는 한숨을 내쉬었다.‘사모님 상태를 봐서는 가망이 없겠네.’‘아까까지만 해도 남편이 죽었다고 하더니 지금은 또 아드님이 남편인 줄 아시고.’“대표님이 오셨으니 저는 두 분 방해되지 않게 이만 물러가겠습니다.”배현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곧이어 간호사는 이곳을 떠났다.배현수는 예지은의 손을 잡고 병실로 들어갔다.예지은은 침대 머리맡에 놓인 하얀 장미를 보더니 미소를
조유진이 10살 되던 해, 온정희는 조범의 실수로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식물인간이 되었다.배현수는 조유진과 연애할 때 몇 번 온정희를 보러온 적이 있었다.그때 온정희는 아직 의식이 없을 때였고 이 요양원에도 있지 않았다.사실 온정희는 배현수 실물을 처음 보는 것이었다.그녀는 배현수에게 가까이하더니 웃으면서 말했다.“맞네, 내가 사람을 잘못 봤는 줄 알았네.”온정희는 조유진의 핸드폰에서 배현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배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정희가 물었다.“가족 만나러 온 거예요?”“어머님, 별일 없으시면 이만 가보겠습니다.”별로 할 말이 없다는 뜻으로 들렸다.배현수는 옛정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차갑기만 했다.“현수 씨한테 줄 물건이 있어요.”온정희는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더니 그에게 건넸다.배현수는 멈칫하고 말았다.“이 반지가 왜 어머님께 있는 거예요?”온정희는 사실대로 말했다.“저번에 유진이가 저 보러왔을 때 현수 씨한테 이미 약혼녀가 생겨서 이 반지를 다시 낄 자격이 없다면서 잔디밭에 버렸어요. 나중에 후회할까 봐 잔디를 깎으시는 직원분한테 부탁해서 찾아달라고 했어요. 이제 주인한테 돌려주려고요.”...블랙 마이바흐 차 안.뒷좌석에 앉은 배현수는 이미 닳고 닳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반지 안에는 S & Y라는 이니셜이 박혀있었다.이 커플 반지는 배현수와 조유진이 함께한 첫날 한 반지 가게에서 특수제작한 반지였다. S & Y 이니셜도 배현수가 직접 새겨넣은 것이다.그때까지만 해도 둘은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맞이하게 될 줄 몰랐다.온정희가 한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6년 전, 유진이가 일부러 배신한 거 아니에요. 조범 씨가 저를 이용해서 유진이한테 거짓 증언을 해달라고 협박했어요. 현수 씨, 탓하려면 저를 탓하세요. 유진이는 진심이었어요. 만약 복수하고 싶다면 저한테 하시고 제발 유진이는 놓아주세요. 몇 년간 너무 고통스러워했어요.”“이 반지는 유진이가 잃어버렸지만 돌고 돌아 다시 현수 씨 손에 갔으니 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