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지 않은 곳의 한 구석.조유진은 도둑처럼 벽 뒤에 숨어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녀는 배현수가 허리를 숙여 아이스크림을 조선유에게 건네는 모습을 보았다.그리고 사랑스럽게 조선유의 머리를 쓰다듬는 모습까지 보았다.함께 줄 서서 아이스크림을 사고, 도넛 가방을 메고 힘들면 배현수의 다리에 기대는 모습은 마치 아빠와 딸이 쇼핑하는 모습이었다.자신이 나타나면 이 아름다운 장면이 깨질까 두려워 차마 다가가지 못했다.‘만약 현수 씨가 내가 선유 엄마라는 걸 알게 되면 선유를 딸로 받아줄까?’‘선유를 빼앗아 가 못 만나게 하는 건 아니겠지?’조유진은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배현수는 평소에 누구도 다가가지 못할 정도로 차가운 사람이었다.하지만 조선유와 휴게실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 여기저기 묻히면서 아이스크림을 먹고있는 조선유를 부드럽게 바라보는 모습은 너무도 다정해 보였다.‘얼마 만에 보는 모습인가?’잊힐 정도로 아주 오래전에 보았던 모습이었다.6년 동안, 조유진은 배현수와 조선유가 서로 만나는 날을 기대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정작 눈앞에서 본 이 화면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아름다웠다.입을 막고 있던 조유진의 눈가에는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이때, 배현수가 시간을 확인했다.“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아저씨는 가봐야 해서 여기서 가만히 아이스크림 먹고 있어. 엄마 오시면 말씀 전해주고.”입가에 온통 아이스크림을 묻힌 조선유는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말했다.“근데 아저씨, 아직 저희 엄마 보지 못했잖아요.”배현수는 습관적으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말했다.“다음에.”“다음에 언제요? 아저씨 거짓말쟁이.”남아일언 중전금이라고 했다.“아저씨가 내준 문제를 풀게 되면 다시 만나.”아쉬운 표정의 조선유는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그래요. 아저씨, 안녕.”“안녕.”배현수의 뒷모습이 흐릿하게 조유진의 시선에서 점점 멀어져갔고, 끝내 사라졌다.조유진은 감정을 가다듬고 다시 조선유의 곁으로 갔다.“선유야.”“엄마
조선유는 조유진의 손을 꼭 잡더니 말했다.“엄마, 우리 이제 집에 가자.”조유진은 그제야 생각났는지 물었다.“선유야, 아저씨를 어떻게 알게 된 거야?”“입원했을 때 초윤이 이모가 사준 간식 주머니에 잡지 하나 있었는데 그 잡지 모델이 바로 아저씨였어! 혼자 심심해서 병실에서 나왔다가 딱 아저씨를 마주쳤어.”“왜 병원에 가셨대?”“아저씨 아빠도 편찮으셔서 병문안 왔다고 했어.”“그럼, 무슨 얘기를 했는데?”딸기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던 조선유는 눈을 빙그르르 돌리더니 한참 생각한 뒤 말했다.“아무것도 말 안 했어. 그저 이름을 알려드렸더니 듣기 좋다고 칭찬해 주셨어!”조유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선유야, 잠시 아저씨랑 너무 친하게 지내지 않겠다고 엄마랑 약속할 수 있어?”“왜?”“누구인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도 모르잖아. 엄마가 걱정되어서 그래.”너무 갑작스러웠다.조유진은 어떻게 이 상황을 설명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조선유와 함께 배현수를 피해다닐 수밖에 없었다.조선유는 실망했지만 그래도 엄마가 한 말이 맞는다고 생각했다.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근데 아저씨 정말 좋은 사람이야!”조유진은 멈칫했다.조선유를 바라보면서 잠깐 생각에 잠겼다.‘알게 된 지 고작 한 달밖에 안 되었는데 현수 씨를 이렇게나 좋아하다니.’그때 신준우도 조유진에게 무척 잘해주었지만, 배현수만큼 좋아하지 않았다.‘설마, 피는 못 속이는 건가?’친 부모 자식이라 처음 본 순간부터 서로 끌렸다....오늘은 배희봉이 퇴원하는 날이었다.병원에 도착한 서정호는 퇴원 수속을 밟고 있었다.배현수는 직접 배희봉의 짐을 싸고 있었다.배희봉은 쑥스러워하면서 말했다.“바쁠 텐데 직접 데리러 오고. 진작에 나아서 혼자서도 집에 갈 수 있어.”“작은 수술이 아니에요. 집에 돌아가셔서도 회복 잘하셔야 해요. 이참에 아버지 집 말고 우리 집에서 한동안 지내는 거 어때요?”“아니야, 습관이 안 돼. 그 큰 집 주위에 이웃 하나 없
그때 육씨 가문과 거래가 있었던 조씨 가문에서 기사를 하던 배희봉은 육성준의 보살핌을 받았다.마음씨가 착한 배희봉은 갓 태어난 아이를 차마 보육원에 보내지 못해 직접 키우게 되었다.그 아이가 바로 배현수였다.배현수의 성씨는 실제로 육 씨였다.배현수가 만 18세가 되던 해에야 진짜 신분을 알려주었다.예지은의 말이 나오자, 배현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아버지 집에 모셔다드리고 보러 갈 거예요.”“그래, 사모님한테 안부 인사 전해주고.”...차 번호가 99가9999인 블랙 마이바흐가 대 제주시 교외의 한 요양원을 향했다.배현수는 과일바구니와 하얀 장미를 들고 갔다.병실은 텅 비어있었고 예지은은 보이지 않았다.배현수가 물건을 내려놓고 찾아보려고 할 때, 예지은은 간호사에 의해 끌려왔다.아주 흥분된 상태였다.“거짓말 아니라니까? 원수를 보았다고. 그년 남편이 우리 남편을 죽였어! 여기서 쫓아내야 한다고! 그 집은 온 가족 모두 나쁜 사람들이야! 나쁜 사람! 쫓아내야 해!”간호사는 그녀를 토닥토닥 달래주었다.“알았어요, 사모님. 이따 그 나쁜 사람 쫓아낼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해드릴게요.”“그래, 그래.”간호사는 고개를 들었다가 배현수가 병실 입구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대표님, 오셨어요? 어머님이 사람을 잘 못 봐서 흥분하신 거 같아요. 이야기를 나누시다 보면 진정하실 거예요.”예지은은 배현수를 보자마자 그의 옷깃을 잡으면서 말했다.“성준 씨, 저 보러 온 거예요? 왜 그동안 보러오지 않았어요? 많이 바빴어요?”간호사는 한숨을 내쉬었다.‘사모님 상태를 봐서는 가망이 없겠네.’‘아까까지만 해도 남편이 죽었다고 하더니 지금은 또 아드님이 남편인 줄 아시고.’“대표님이 오셨으니 저는 두 분 방해되지 않게 이만 물러가겠습니다.”배현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곧이어 간호사는 이곳을 떠났다.배현수는 예지은의 손을 잡고 병실로 들어갔다.예지은은 침대 머리맡에 놓인 하얀 장미를 보더니 미소를
조유진이 10살 되던 해, 온정희는 조범의 실수로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식물인간이 되었다.배현수는 조유진과 연애할 때 몇 번 온정희를 보러온 적이 있었다.그때 온정희는 아직 의식이 없을 때였고 이 요양원에도 있지 않았다.사실 온정희는 배현수 실물을 처음 보는 것이었다.그녀는 배현수에게 가까이하더니 웃으면서 말했다.“맞네, 내가 사람을 잘못 봤는 줄 알았네.”온정희는 조유진의 핸드폰에서 배현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배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정희가 물었다.“가족 만나러 온 거예요?”“어머님, 별일 없으시면 이만 가보겠습니다.”별로 할 말이 없다는 뜻으로 들렸다.배현수는 옛정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차갑기만 했다.“현수 씨한테 줄 물건이 있어요.”온정희는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더니 그에게 건넸다.배현수는 멈칫하고 말았다.“이 반지가 왜 어머님께 있는 거예요?”온정희는 사실대로 말했다.“저번에 유진이가 저 보러왔을 때 현수 씨한테 이미 약혼녀가 생겨서 이 반지를 다시 낄 자격이 없다면서 잔디밭에 버렸어요. 나중에 후회할까 봐 잔디를 깎으시는 직원분한테 부탁해서 찾아달라고 했어요. 이제 주인한테 돌려주려고요.”...블랙 마이바흐 차 안.뒷좌석에 앉은 배현수는 이미 닳고 닳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반지 안에는 S & Y라는 이니셜이 박혀있었다.이 커플 반지는 배현수와 조유진이 함께한 첫날 한 반지 가게에서 특수제작한 반지였다. S & Y 이니셜도 배현수가 직접 새겨넣은 것이다.그때까지만 해도 둘은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맞이하게 될 줄 몰랐다.온정희가 한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6년 전, 유진이가 일부러 배신한 거 아니에요. 조범 씨가 저를 이용해서 유진이한테 거짓 증언을 해달라고 협박했어요. 현수 씨, 탓하려면 저를 탓하세요. 유진이는 진심이었어요. 만약 복수하고 싶다면 저한테 하시고 제발 유진이는 놓아주세요. 몇 년간 너무 고통스러워했어요.”“이 반지는 유진이가 잃어버렸지만 돌고 돌아 다시 현수 씨 손에 갔으니 현수
조유진은 서정호의 연락을 받고 급히 산성 별장으로 향했다.비록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예의상 초인종을 눌렀다.문이 열리고, 조유진과 배희봉은 서로를 마주한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배희봉이 먼저 반응하면서 말했다.“아가씨... 어, 어떻게 오셨어요? 현수가 불렀어요?”배희봉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배현수가 드디어 조유진을 이미 용서했는 줄 알았다.배희봉은 얼른 그녀를 맞이했다.“아가씨, 서 있지 말고 얼른 들어오세요. 밖이 더워요.”배희봉은 예전처럼 반갑게 맞이했다.집에 들어선 조유진은 왠지 모르게 죄책감이 들었다.“아저씨, 저 조씨 가문에서 나온 지도 오래됐는데 아가씨라고 부르지 않으셔도 돼요.”“아가씨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부터 조씨 가문에서 일했어요. 아가씨가 크는 것도 옆에서 지켜봤죠. 아가씨만은 착하셔서 저희 하인들한테 잘해주셨죠. 여름에 시원한 음료수도 챙겨주시면서요. 한번은 제가 아파서 조 시장님 스케줄이 지연되어 저를 해고하려던 것을 아가씨께서 막아주셨죠.”조유진은 더욱 미안했다.“사소한 일인데요, 뭐. 저 때문에 현수 씨가 감옥까지 갔다 왔는데 아저씨는 저 원망스럽지 않으세요?”“저는 아가씨한테 말 못 할 사정이 있다고 믿어요. 아가씨처럼 착하신 분이 변한다고 해도 어디 쉽게 변하겠어요? 입장을 바꿔서 저였다면, 혹은 현수였다면 아가씨보다 더 잘 해내지도 못했을 거예요.”“아저씨, 잘못한 건 잘못한 거예요. 제 편을 들어주지 않으셔도 돼요.”오히려 자신을 미워했으면 했다.배희봉이 이해하려고 할수록 더 죄책감이 들어 자신을 미워하게 되었다.어떻게 해야 지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지 도무지 몰랐다.“아가씨...”배희봉이 무언가 더 말하려고 할 때, 문이 갑자기 열렸다.두 사람의 시선은 입구로 향했다.집으로 돌아온 배현수는 다가가지 못할 정도로 차가웠다.“밥하러 오라고 했지 수다 떨러 오라고 한 건 아니야.”조유진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배희봉에게 물었다.“아저씨, 저녁에 뭐 드시고 싶으세요?
오픈식 주방에서 밥하고 있던 조유진은 이 말을 듣고 동작을 멈추었다.예전에 같이 바다를 보러 가기로 약속했었다. 인천 앞바다도 보고, 동해도 보고, 대부도도 보러 가기로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과 달랐다.“잘못 기억하신 것 같아요. 저는 그런 말 한 적 없어요.”배현수는 굳은 표정으로 2층 서재로 향했다.조유진은 고개를 들어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배희봉이 조유진을 위로했다.“아가씨, 현수가 고집이 세서 말만 저렇게 하는 것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조유진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아저씨, 저희 둘 엮느라고 애쓰지 마세요. 이미 약혼녀도 있고, 현수 씨는... 이제 저를 좋아하지도 않아요.”“약혼녀요? 저는 모르는 사실인데요? 아가씨한테 거짓말한 거 아니에요?”조유진은 진상을 파헤치고 싶지 않았다.송인아가 약혼녀든 아니든 배현수와 더는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다.배희봉은 어느 정도 눈치 있는 사람이었다.“아가씨도 그렇고 현수도 그렇고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왜 감정을 어렵게 대하는 거예요? 만약 약혼녀가 있었다면 아가씨를 집으로 불렀겠어요? 만약 정말 미워한다면 보기도 싫은 마당에 집까지 불렀겠어요?”조유진은 침묵했다.배희봉은 주방에 가서 과일 접시를 그녀의 손에 쥐어주더니 말했다.“저는 나이를 먹어서인지 혈당이 높아서 이런 과일 먹지도 못해요. 현수가 멜론 좋아하는데 얼른 가져다주세요.”조유진은 머뭇거렸다.그러자 배희봉이 재촉했다.“얼른요. 말은 저렇게 해도 달래면 곧 풀려요.”...손에 멜론이 담긴 접시를 든 조유진은 2층 서재 문을 두드렸다.“들어오세요.”그녀는 문을 열었다.“과일 좀 깎았는데 아저씨는 혈당이 높으셔서 못 드신다고 해서 현수 씨한테...”“아버지 저혈당이야. 고혈당 앓으신 적 없어.”“...”입구에서 들어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었다.“아저씨께서 현수 씨 멜론 좋아한다고 하셔서...”“나 단 거 싫어하는 거 알잖아. 날 알고 지낸 지 하루 이틀이야?”배현수는 쌀쌀맞게
조유진이 멈칫했다.“어... 어떻게 반지가 현수 씨한테 있어요? 분명...”“분명 버린 거라고?”배현수는 비웃듯이 말했다.“어디서 찾았어요?”“의미 없는 반지나 찾고 있을 시간이 없어. 요양원에 친척분 만나러 갔다가 어머님 만났어. 이 반지는 어머님이 직원분한테 찾아달라고 한 거야.”배현수는 뒤돌아 다시 자리에 앉더니 반지를 툭 책상에 던졌다.쓰레기 취급하듯이 말이다.조유진은 입술을 깨물었다.“대표님께서 이 반지가 아무 의미 없다고 하셔서 버린 건데, 뭐 잘못되었나요?”“잘못된 거 하나도 없어. 이 쓰레기 챙겨서 나가.”배현수는 컴퓨터 모니터를 보면서 그녀에게 전혀 시선을 주지 않았다.말투는 아무 감정이 없을 정도로 차가웠다.그가 말한 쓰레기는 바로 그 반지였다.조유진은 반지를 꼭 쥐더니 서재를 떠났다.책상 앞에 앉아있던 배현수는 손에 펜을 쥐고 있었다.조유진이 문을 닫은 순간, 그는 아무 표정도 없이 처참히 그 펜을 부러뜨렸다.눈빛은 어둡기만 했다.마치 조유진의 목을 부러뜨린 것만 같았다....조유진은 남초윤에게 조선유를 맡겼다.둘째 날 아침, 배현수와 함께 인천으로 향했다.4시간의 운전 끝에 인천의 한끝에 도착했다.인천은 바다와 가까워 하늘이 푸르렀다.블랙 마이바흐는 해상 고가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뒷좌석에 앉아있던 조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이 풍에 시선이 끌렸다.이때는 오후라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있었다.오후, 반짝반짝 빛나는 햇빛이 푸르른 해면을 비추고 있어 그 물색은 비단결처럼 고왔다.그녀는 차창 밖으로 바다를 내다보았다.배현수는 그런 그녀를 쳐다보았다.6년 전 생일날, 조유진은 소원을 빈 적이 있었다.바로 배현수와 같이 바다를 보러 가는 것이었다.그때 배현수는 방학이 되면 그녀와 같이 인천에 놀러 오기로 했다.하지만 그 후로... 이번이 처음 같이 바다를 보러 온 것이었다.앞에서 운전하던 서정호는 아름다운 바다 경치에 창문을 내렸다.습한 바닷바람이 열기와 함께 차 안까지 불어왔다.조유진은
그녀는 의식적으로 어두컴컴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을 입구는 많이 좁아 보였다.“여기 어디예요? 뭐 하러 온 거예요?”배현수가 말했다.“차에 있어. 잠깐 서 비서와 일 해결하고 올게.”배현수와 서정호는 차에서 내려 마을로 들어갔다.조유진은 차창에 기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더니 왠지 모르게 불안감이 엄습했다.‘출장이라고 하더니 왜 이런 인적 드문 마을로 온 거지?’이 마을은 가로등마저 어두웠고 불을 밝히고 있는 집이 몇 집 없을 정도로 이곳에서 사는 사람이 적어 보였다.배현수의 핸드폰이 차에 남겨졌다.조유진은 안심되지 않아 그의 핸드폰을 들고 차에서 내려 그들의 뒤를 따랐다....배현수와 서정호는 마을 끝자락에 있는 한 집 앞에 도착했다.“대표님, 바로 여깁니다. 여정민이 사는 곳입니다.”배현수가 문을 두드렸을 때, 안에서는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조유진은 헐레벌떡 문 앞까지 쫓아왔다.“대표님, 여기 핸드폰...”문이 열리고, 날카로운 비수가 어둠 속에서 반짝이면서 배현수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조심해요!”조유진은 배현수의 앞을 막아섰다.날카로운 비수가 조유진의 살을 푹 찔렀다.그대로 왼쪽 가슴에 박히고 말았다.고개를 숙여 내려다보았을 때 왼쪽 가슴에서는 피가 철철 넘쳐흐르고 있었다.배현수는 긴 다리를 뻗어 습객을 발로 차버렸다.습객은 반응이 빨라 벌떡 일어나더니 밖을 향해 뛰쳐나갔다.서정호가 뒤쫓으려고 하자 배현수가 말렸다.“여정민도 다쳤어! 사람부터 구해!”집 안, 여정민은 온몸이 피범벅이 된 채 바닥에 쓰려져있었다.서정호는 바로 기절한 여정민을 부축했다.배현수도 품속에 있는 조유진을 번쩍 들어서 안았다.“병원으로 가!”...블랙 마이바흐는 고속도로를 타고 제일 가까운 중구 병원으로 향했다.왼쪽 가슴에 비수가 꽂힌 조유진은 온몸이 피투성이였다.여정민 역시 여러 군데 칼에 찔려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중구 병원은 이런 환자를 살려낼 자신이 없었다.구급차로 바로 시 병원으로 옮겨졌다.배현수는 조유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