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현수는 몸을 돌려 위층으로 올라갔다.주명은은 하이힐을 밟고 쫓아와 가방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건넸다.“배 선배, 제 명함이에요!”배현수의 걸음이 멈췄다.주명은은 눈을 반짝였다. 무슨 말을 할지 기대하는 눈빛이었다.배현수는 뒤를 돌아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방금 유진이의 룸메이트라고 했나요?”“네, 저 기억나시죠?”배현수는 당연히 기억하지 못했다. 단지 조유진을 봐서 그 명함을 받았다.하지만 반응은 쌀쌀했다.주명은에게 고개만 끄덕였다. 인사를 한 셈이다.배현수는 문을 밀고 룸으로 들어갔다.자리에 서 있는 주명은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자신의 명함을 마침내 배 선배에게 건넸다.배 선배가 처음으로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하긴, 그녀는 더 이상 예전의 그 못생긴 여자가 아니다. 지금의 주명은은 예쁘고 자신만만하다.배 선배도 결국은 정상적인 남자이다.남자들이란 그녀와 같은 미녀에게 눈길이 많이 가는 법이다.여기까지 생각한 주명은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들끓었다.팩트 케이스와 립스틱을 꺼내 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쳤다.메이크업에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후, 손을 들어 몸에 딱 달라붙게 입은 니트의 윗단추 두 개를 풀었다.글래머러스한 몸이라 열린 코트 안으로 그녀의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 단추 두 개를 풀자 허리를 굽히면 안까지 희미하게 보인다.하이힐을 신은 채 의기양양하게 룸 안으로 들어갔다.여기에 온 목적은 간단했다. 엘리트를 사귀기 위해서이다.배 선배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이다.꼬시고 싶지만 급해서는 안 된다.조금 전, 배 선배와 처음 만났다. 이제 두 번째, 세 번째가 있을 것이다.주명은은 방시아 뒤를 따라 들어갔다.방시아와 그녀의 구청장 아빠는 다른 테이블로 불려가 앉았고 그녀는 구석에 있는 테이블의 빈자리에 배치되었다.잠시 생각한 후 조유진에게 위챗을 보냈다......한편, 안쪽 테이블에서 배현수는 코코넛 밀크 두 병을 사서 조유진 컵에 한 병을 따랐다.조유진이 웃으며 말했다.“이것 사러 간 거
조유진은 테라스 쪽에 기대어 신선한 공기를 마셨다.선유에게 음성메시지를 몇 통 보냈다.녀석은 영상을 여러 개 찍어서 보내왔다. 할아버지가 재밌는 곳을 데리고 갔고 놀러도 많이 가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어 할아버지가 점점 더 좋다고 했다.전화기 너머로 이 메시지를 본 조유진은 녀석이 귀여워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휴대전화를 거두자마자 옆에서 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어? 이게 누구야? 우리 기수 퀸카 아니야? 조유진 학생, 누구와 문자 보내기에 이렇게 달콤하게 웃어.”조유진은 고개를 들었다. 한참 동안 기억을 더듬은 뒤 그제야 사람이 누군지 어렴풋이 떠올랐다.예전에 동기들 단톡방에서 그녀를 '공격'한 적이 있는 것 같다.이름이... 지항준?그는 1년 가까이 조유진을 쫓아다니며 매일 아침밥을 챙겨줬다. 조유진이 거듭 거절했지만 끈질기게 매달렸다.그 후, 그녀와 배현수가 어쩔 수 없이 헤어진 후, 지항준은 다시 한번 그녀에게 대시했다. 그때 조유진은 인생의 암흑기를 걷고 있었다. 그래서 지항준에게는 더욱 냉담했다.배현수와 헤어지면 받아줄 줄 알았던 지항준은 조유진의 도도하고 무뚝뚝한 모습에 격노했다.맹추격해도 받아주지 않자 화를 벌컥 냈다. 그 후로는 사랑이 원한으로 변했고 최대한 조유진을 괴롭혔다.지항준은 술을 많이 마신 게 분명했다. 강한 술기운에 조유진에게 하는 말투도 조롱이 잔뜩 섞여 있었다.조유진은 담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내가 누구한테 메시지를 보내는지 알려줄 필요는 없잖아.”그 말에 지항준은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 담배 하나에 불을 붙였다.“아직 결혼 안 했지? 하긴, 그 당시 네가 좀 너무하긴 했지. 평판이 나빠서 아무리 얼굴이 예쁘다고 해도 아무도 너를 원하지 않을 거야?”“차라리 나와 만나는 게 어때?”지항준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이상한 웃음을 내비치며 그녀를 쳐다봤다. 인간쓰레기 같은 눈빛으로 말이다.조유진은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일부러 조롱했다.“나 눈이 꽤 높아.
지항준은 조유진이 일부러 비싼 척한다고 생각했다.“2백만 원 더 추가해 줄게. 2천 2백만 원. 너와 결혼해주겠다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너도 네가 어떤 상황인지 잘 알잖아. 집안에서는 체면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을 원해. 너를 집에 들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야.”조유진은 피식 웃었다.“그럼 지항준 학생 집안은 체면이 필요 없나 봐?”자기에게 욕설을 퍼붓는 것을 알아차린 지항준은 이내 정색했다.하지만 사내대장부가 여자와 싸워서 되겠는가? 교육하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조유진, 지금 너 자신을 봐봐. 매달 2천 2백만 원을 주면서 너를 아내로 맞이하겠다는데 이미 충분히 너의 체면을 세워주는 것이야. 나도 내 젊은 시절의 약속을 저는 젊음을 위해 돈을 내는 것이다. 하지만 결혼하고 매달 돈만 챙겨. 내가 밖에서 무슨 짓을 하든 상관하지 말고.”조유진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매달 2천 2백만 원이 너무 적어."“뭐라고?”조유진이 말했다.“누군가 한도 없는 블랙카드를 줬어. 잘 생기고 키도 너보다 커. 너보다 똑똑하고 제일 중요한 것은 밖에서 함부로 몸을 굴리지 않아. 나에게 언제든지 보고하고.”잠시 말을 멈춘 뒤 진지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지항준 학생, 보아하니 경쟁력이 없네. 비켜줄래?”조유진의 목소리는 깨끗하고 평화로웠다.하지만 지항준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지항준은 코웃음을 쳤다.“조유진, 지금 낮이야! 아직도 무슨 헛된 꿈을 꾸고 있는 거야? 너 같은 여자는 매달 2천 2백만 원이면 충분해. 아직도 비싼 척하네!”찰싹!조유진은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때렸다.지항준은 화를 내기보다 충격에 휩싸였다.“감히 나를 때려?”조유진이 말했다.“응, 맞아. 너를 때렸어. 우리 학교에 어떻게 너 같은 망나니가 나왔지?”“뭐? 망나니? 너 같은 망나니가 감히 나를 망나니라고 욕해? 너!”조유진이 떠나려 하자 지항준은 그녀의 팔을 덥석 잡았다.조유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힐끗 바라봤다.“뺨 한 대로 부족한가 봐
방시아가 말했다.“지항준이 너를 오랫동안 그리워했어. 집안 형편도 좋아졌으니 조유진, 도도한 척하지 마. 더 이상 고집부리면 보기 안 좋아.”주명은은 진심 어린 말투로 조언했다.“유진아, 축하해. 지항준 같은 남자친구를 만나다니. 언제 결혼할 계획이야?”조유진은 애당초 마음에 들지 않아 하던 사람과 결혼했다.주명은은 너무 통쾌했다. 조유진을 드디어 도도한 퀸카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게 되었다.지항준? 하, 그저 돈이 조금 있을 뿐이다.본인도 지항준을 못마땅해하는 마당에 조유진이 지항준에게 시집가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조유진은 팔을 들어 지항준과 거리를 뒀다.“곧 결혼을 앞둔 것은 맞는데 얘는 아니야.”지항준은 아예 믿지 않았다.“아까 말한 한도 없는 블랙카드를 주고 나보다 키도 크고 잘생기고 밖에서 함부로 몸을 굴리지 않는다는 그 사람 말하는 거야?”조유진의 얼굴에 장난기가 전혀 없다.지항준은 계속 조롱했다.“조유진, 그동안 너무 비참하게 살아서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거야? 네가 말하는 그런 신분의 사람이 너와 결혼하고 싶어 할 것 같아?”조유진의 말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다.“그 사람이 원해.”지항준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너는 거울도 안 보니? 네가 가당키나 해? 조유진, 스스로를 속이지 마. 너를 첩으로 두려는 거겠지.”방시아와 주명은은 더욱 믿지 않았다.방시아는 조롱하는 말투로 말했다.“조유진, 어리석게 굴지 마. 비록 내가 너를 좋아하지 않지만 네가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아. 지항준 같은 좋은 남자가 놓치면 두 번 다시 차려지지 않아.”조유진은 짜증도 화도 내지 않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지항준이 그렇게 좋으면 너에게 양보할게. 둘이 잘 어울리는 것 같네. 나는 못나서.”방시아가 말을 하려 할 때 지항준이 거절했다.“방시아 같은 못생긴 여자는 필요 없어. 너만 필요해. 쓸데없이 엮지 마!”방시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지항준! 그게 무슨 말이야! 누가 못생겼어!”지항준은
방시아는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너 괜찮아? 배현수? 너 때문에 3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도 너랑 결혼할 생각을 할까? 게다가 그 사람은 지금 어떤 신분이고 너는 어떤 신분인데? 아니, 조유진 너 진짜 너무 억지 부리지 마!”주명은도 아예 안 믿었다.“조유진, 우리 모두 배 선배에게 약혼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러니 더 이상 집착하지 마.”조유진은 덤덤하게 말했다.“못 믿겠으면 말고. 결혼할 때 청첩장 보내 줄게.”지항준은 조유진을 붙잡고 다독였다.“그래, 그래. 우리 결혼할 때 청첩장 보내자.”“놔!”조유진이 그의 말에 따르지 않을수록 지항준은 신이 났다.옛 동창들 앞에서 남자의 나쁜 근성과 정복하려는 마음이 더욱 강해졌다.방시아는 조유진에게 절대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는다.그들은 조유진이 지항준을 따르기를 바랐다.지항준이 조유진을 원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기준을 낮춘 것으로 생각했다. 조유진이 응당 이 은혜에 감사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항준이 미녀를 희롱하는 것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그 사이로 귀에 익은 나지막한 남자 목소리가 뒤에서 울려 퍼졌다.“유진아.”조유진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봤다.배현수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그녀에게 다가왔다.지항준은 배현수의 모습을 보고 어리둥절해 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도 배현수가 조유진을 찾아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아마도 조유진에게 한바탕 모욕을 주러 온 건 아닐까라고 여겼다.방시아와 주명은은 모두 멍해졌다. 배현수가 갑자기 나타날 줄은 몰랐다.긴 기럭지의 남자가 힘찬 모습으로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방시아와 주명은의 심장은 심하게 두근거렸다.배현수는 조유진에게 다가가 자기 옆으로 잡아당기더니 고개를 숙여 물었다.“얘가 괴롭혔어?”조유진은 솔직하게 대답했다.“자기에게 시집오라고 조르더라고요.”방시아도 얼른 말했다.“아니에요. 조유진이 지항준을 꼬시는 걸 제가 다 봤어요.”지항준도 당연히 그 말에 응했다. 자기의 체면을 세
술을 잔뜩 마신 지항준은 진작 많이 취했다.한 남자가 과거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모함한 여자와 결혼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배현수가 말한 ‘별을 준 것'은 그저 그녀를 위해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별을 주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그러니까요! 조유진, 왜 배 선배가 달을 선물한 것을 말하지 않았어?”배현수는 조유진을 내려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유진이 말이 틀렸어. 나는 블랙 카드 하나를 준 게 아니야.”지항준이 한마디 했다.“조유진, 이제 어떻게 잘난 척하나 보자!”방시아도 배현수의 말이 의외라고 생각하지 않았다.“조유진, 거짓말한 거 들통났지.”배현수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조유진에게 물었다.“블랙카드 세 장 줬잖아. 그중 한 장은 네가 잘랐고.”그녀에게 처음으로 블랙카드를 줬을 때, 그 당시 그들의 관계는 여전히 껄끄러웠다. 조유진은 성남으로 돌아가기 전, 블랙카드를 그에게 돌려주었다.배현수는 그때 경계성 인격장애를 앓고 있어 조울증이 심했다. 그 블랙 카드를 아예 버렸다.두 번째 블랙카드는 그녀가 스위스에 있을 때, 배현수가 다른 사람과 약혼한다는 뉴스에 화가 나서 블랙카드를 자르고 다이아몬드 반지도 같이 버렸다.세 번째 블랙 카드는 최근 그녀에게 줬다. 이번에는 잘리지 않았고 아직 그녀의 손에 있다.하지만 나중에 싸우면 그녀는 언제든지 다시 자를 수 있다.방시아와 지항준 모두 깜짝 놀랐다.“뭐라고?”주명은은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다.배현수가 오른손으로 조유진의 허리를 감싸 안았을 뿐 아니라 왼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주무르는 등 애정이 넘치고 소유욕인 행동을 계속하고 있었다.조유진의 왼손은 배현수의 손바닥 위에 올려져 있다.럭셔리하고 눈에 띄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그녀의 약지에 끼어있다.전에 인스타 스토리에 올린 다이아몬드 반지와 똑같다.배현수 약혼녀는...그렇다... 조유진이다!주명은은 깜짝 놀라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이때 배현수가 입을 열었다.“유진이에게 프
주명은은 조유진이 제일 어려울 때 밥값을 빌려줬다. 주명은이 어떤 사람이든 간에 지금 다시 만났고 가는 길에 잠깐 태워주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때의 신세를 갚은 셈이 된다.조유진은 거절하지 않고 바로 말했다.“타.”주명은은 빙그레 웃으며 뒷좌석 문을 잡아당겨 차에 탔다.“유진아, 고마워.”저녁에 술 한잔한 배현수는 여유롭게 조수석에 몸을 기댔다.조유진은 차를 몰며 물었다.“몇 호선 타는 거야?”주명은이 대답했다.“3호선 타.”조유진은 내비게이션을 힐끗 바라봤다. 3호선 지하철역이 여기서 꽤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집이 어디야? 집까지 데려다줄게.”“정말? 그럼 너무 고맙지.”주명은은 바로 아파트 주소를 불렀다.조유진은 운전에 집중했다.주말 저녁의 시내는 길이 매우 막혔다. 빨강 신호등을 여러 번 기다렸다.빨강 신호등을 기다릴 때, 조수석의 남자가 갑자기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조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뜻이지?’눈빛은 뒤에 사람이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그래서 손을 뻗어 잡지 않았다.그러나 배현수는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더니 자기 관자놀이에 대고 문질렀다.“머리가 아파.”조유진이 막 입을 열며 말하려고 할 때, 뒷좌석의 주명은이 먼저 한마디 했다.“배 선배. 오늘 저녁 얼마나 마셨어요?”배현수는 말대꾸하지 않았다. 못 들은 것처럼 말이다.조유진도 얼마나 마셨는지 알고 싶었다.“묻잖아요.”남자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반 근 정도, 반 교장과 주 교수님과 많이 마셨어.”그들 테이블에는 도수 높은 술이 있었다. 반 근이면 배현수에게 있어서 정상 주량이라고 할 수 있다. 약간 반응은 있을 수 있지만 전혀 취하지 않았다.파란불이 켜졌다.조유진이 손을 빼서 핸들을 잡았다.“현수 씨 주량으로는 반 근 정도면 머리가 아플 리가 없잖아요.”배현수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응, 와이프가 있으니까 주량이 좀 안되네.”조유진은 멍해졌다. 가슴이 쿵쾅거렸다.힐끗 그를 본 순간 하마터면
조유진과 배현수는 사람에게 천천히 다가가는 스타일이다. 낯선 친구와 빨리 친해지는 타입이 아니다.특히, 이 사람은 친구라고 할 수 없다.배현수와 주명은은 어떠한 친분도 없다.조유진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배현수를 힐끗 쳐다봤다.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확실히 내키지 않는 모양이다.“다음에 시간 될 때 봐. 현수 씨가 다음 주에 석식이 있어서.”주명은은 약간 아쉬워하며 입꼬리를 올렸다.“배 선배님, 정말 바쁘시네요. 그럼 유진아, 너는? 지금 일을 하지 않으니 시간 나면 밥 먹고 쇼핑할 수 있잖아?”조유진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배현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유진이도 시간이 없어요. 나와 같이 있어야 해서.”주명은은 아무 생각 없이 말했다.“유진아, 너 왜 이렇게 딱 달라붙어 다녀? 하긴, 지금은 사람의 마음이 제일 무섭다니까? 목적을 갖고 접근하는 사람이 너무 많잖아. 그러니까 너도 잘 지켜보고 있어. 안 그러면...”배현수는 미온적인 어조로 그 말을 끊었다.“뭔가 잘 못 알고 있는 것 같아요. 유진이와 떨어지려 하지 않는 사람은 나에요.”주명은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그렇군요... 선배처럼 좋은 남자 별로 없어. 유진아, 소중히 여겨야 해요.”배현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짜증이 난 듯 조유진에게 말했다.“앞 잘 보고 운전해. 조금 잘 테니까 도착하면 불러.”그 말뜻은 모두 닥치라는 것이다.이 사람은 성격이 정말 별로이다.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아무 말 없이 운전을 계속했다.차 안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한참을 침묵하던 주명은은 참지 못하고 뒷좌석에서 앞으로 몸을 기울여 차를 몰고 있는 조유진에게 물었다.“유진아, 손가락에 낀 다이아몬드 반지가 너무 크네. 아주 비싸지? 얼마야?”조유진도 사실 정확한 가격은 모른다.“잘 모르겠어. 아는 사람이 이미 자고 있네.”주명은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궁금하지 않아?”“응, 별로.”일부러 잘난 척하는 게 아니라 지금 배현수로서는 얼마든지 살 수 있다. 그저 공이 몇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