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응, 지금 바로 이체해줘. 당장 헤어지자고 말할게.”방시아는 자연스럽게 군말 없이 조유진에게 돈을 보냈다.돈을 받은 조유진은 바로 배현수를 찾아가 200만 원을 건넸다.“현수 씨, 우리 헤어집시다.”그녀는 이 말을 녹음했다.그러자 배현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고작 400만 원 때문에 나를 팔았어?”조유진은 다급히 설명했다.“헤어지자고 말할 거라고 했어요. 헤어질 거라고 약속은 하지 않았다고요? 거짓말한 거 아니잖아요. 여기 400만 원이면 1년 동안 식비는 해결할 수 있잖아요. 그럼 칭찬해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 1년 치 식비를 벌었는데.”배현수는 그녀를 보며 냉소를 금치 못했다.“너를 사기죄로 고소하면?”조유진은 그의 팔을 덥석 껴안고 말했다.“내 남자친구가 법을 배우잖아요. 나를 협박하여 돈을 돌려달라고 고소한다면 어떻게 할 거예요?”배현수는 너무 화가 나 얼굴이 까맣게 변했다. 조유진의 팔짱을 낀 손을 비틀며 일부러 말했다.“방법은 있어. 나랑 거리를 둬.”당시 조유진은 너무 억울했다.이렇게 일주일 동안 냉전을 벌였다.방시아조차도 그들이 정말 헤어졌다고 생각했다.그리고 컴퓨터과의 선배가 조유진에게 여자친구가 되어달라고 고백했다.배현수는 갑자기 조유진의 뒤에 나타나 굳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조.유.진. 양다리를 걸치니까 어때?”조유진은 계속 뾰로통했다.“거리를 두라면서요?”게다가 다른 사람이 그녀에게 고백했다. 미처 거절하기도 전에 그는 그녀의 뒤에 서서 사람을 놀라게 했다.배현수는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고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끌고 갔다.그날 밤, 그녀를 데리고 살고 있는 집으로 가서 침대에 눕히고 키스를 퍼부으며 여러 번 물었다.“잘못한 거 이제 알았어?”조유진은 주먹을 쥐며 쥐고 억울한 얼굴로 되물었다.“내가 뭘 잘못했는데요?”배현수는 그녀의 귓불을 깨물며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400만 원에 나를 팔았잖아. 계속 까먹
진주시에서 성남으로 돌아왔다.차가 엄씨 사택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선유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 나왔다.“엄마!”조유진이 차에서 내리자 녀석이 그녀의 허벅지를 들이받았다.조유진은 몸을 웅크리고 앉아 선유를 안았다. 그리고 녀석의 뱃살을 꼬집으며 말했다.“선유야, 며칠 안 본 사이에 안기도 힘들어졌어? ”선유는 득의양양한 얼굴로 말했다.“정말? 그럼 곧 키가 크겠네? 어른이 되겠네? 어른이 되면 더 이상 숙제를 할 필요가 없어!”조유진이 웃음을 터뜨리며 작은 볼을 꼬집었다.엄준과 도 집사도 방에서 나왔다.조유진은 선유의 손을 잡고 걸어갔다.“아빠, 도 집사님.”엄준이 웃으며 말했다.“마당이 추우니까 빨리 들어가.”방안은 봄날처럼 따뜻했다.선유는 분홍색 스웨터만 입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조유진의 품에 웅크린 채 최근 자신의 작품을 자랑하고 있었다.“엄마, 나 그림 잘 그렸지!”수채화이다.조유진이 물었다.“수채화를 배우기 시작한 거야?”선유는 작은 턱을 끄덕였다.“할아버지가 찾아주신 선생님이야.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혼자 스펀지밥과 원숭이를 그려보려고 했는데 너무 못 그려서 할아버지가 선생님을 찾아주셨어.”조유진은 어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수채화를 열심히 봤다.“배운 지 보름밖에 안 됐는데 그림을 이렇게 잘 그리다니.”선유는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엄마, 나 짱이지?”“우리 선유가 제일 짱이야! 좀 이따 엄마가 인터넷에서 액자 몇 개를 사줄 테니까 이 그림들을 네 방에 걸어놓는 게 어때?”“좋아! 좋아! 다음에 아빠가 오면 아빠한테도 보여줄 거야!”배현수를 언급하자 소파에 앉아 있던 엄준이 조유진을 쳐다보며 말했다.“배현수는 지금 어떻게 할 계획이래?”조유진이 어리둥절했다.“대제주시로 돌아가 식당을 할 거라는 얘기는 하지 않았어요.”엄준은 낮은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대제주시로 돌아가면 선유도 같이 갈 거야?”조유진은 엄준이 선유를 많이 좋아한다는 것을 안다.선유에 대한 총애가 하늘을 찌를 정도이다.조
이 말에 조유진은 어리둥절해다.“과외선생님이 어린애한테 이런 큰 도리를 말씀하셨어?”선유는 작은 입을 삐죽거렸다.“어린애가 뭐 어때서, 아이도 큰 도리를 알아들을 수 있어!”개인 선생님 얘기에 엄준이 한마디 했다.“개인 선생님이 잘하기도 하지만 선유도 수업을 잘 따라가고 있어. 하지만 설이 지나고 나서 학교에 보내는 게 어때. 아이들은 단체생활을 체험해 보는 게 맞다고 생각해.”조유진은 별 이견이 없었다.“선유야, 설 쇠고 나면 정말 엄마와 대제주시 안 갈 거야?”선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진지하게 말했다.“여기 남아서 호강하고 싶어.”엄준은 호탕하게 웃었다.“하하! 이 꼬맹이!”정말 어른아이가 따로 없다.조유진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아빠, 너무 예뻐하지 마세요. 나중에 힘들어져요.”배현수의 가벼운 압박 교육이 다 맞다고는 못 하지만 그래도 가장 안전했다.엄준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나도 속셈이 있어. 이 녀석, 절대 버릇없는 아이가 되지는 않을 거야. 선유야, 할아버지가 이렇게 잘해 주는데 앞으로 할아버지 회사 관리 좀 도와줄래?”선유가 목을 젖히며 물었다.“당연히 도와드려야죠!”“회사 관리하는 게 힘들어. 숙제하는 것보다 더 힘들 거야!”선유는 어른스럽게 엄준의 손을 토닥이며 말했다.“할아버지, 저에게 이렇게 잘해 주시니 아빠 회사는 몰라도 할아버지 회사는 꼭 신경 쓸게요. 걱정 마세요!”조유진은 피식 웃었다.“선유야, 아빠가 그런 말 들으면 때릴걸?”선유는 얼굴을 찡그리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할아버지가 아빠보다 나이가 많아. 나중에 할아버지가 먼저 하늘나라로 가실 건데 내가 챙기지 않으면 누가 챙겨? 우리 할아버지 너무 불쌍해.”조유진과 엄준은 어이가 없었다.효도가 지극한 녀석이 아닐 수 없다....저녁, 조유진은 어린 선유를 목욕시킨 후 방에 왔다.녀석이 잠든 후 조유진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발신 번호를 보니 배현수이다.조유진은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대제주시 주변의 작은 도시, 강성의 어느 작은 마을.때아닌 오래된 집 앞에 선 검은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낡은 마을 거리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서정호는 운전석에 앉아 손목에 있는 시계를 봤다.“세 시간이 넘었는데 더 기다릴까요?”앞서 서정호는 98년 6월 6일 저녁, 병원 산부인과 당직자 명단을 확보했다.배현수는 명단에 있는 예지수라는 간호사를 중점적으로 조사하라고 지시했다.어렵게 그녀의 주소를 알아냈지만 오늘 직접 찾아보니 기다린 지 3시간이 넘었는데도 보이지 않았다.서정호가 걱정하듯 물었다.“벌써 이사 간 거 아닐까요?”“조금만 더 기다려 봐.”말이 끝나기 무섭게 백미러에 가냘프고 수척한 중년 여인의 모습이 들어왔다.이 여자는 수수한 옷차림이었지만 세련되어 보였다. 늙어 얼굴에 주름살이 져도 젊은 시절의 청아한 그림자가 어렴풋이 비치고 있었다.예지은과 용모가 어느 정도 닮았다.배현수와 서정호라는 낯선 얼굴이 예지수 앞에 나타나자 의아한 듯 물었다.“두 분은?”배현수는 직접 말했다.“예지은의 아들 배현수예요.”예지수는 얼떨떨한 게 분명했다.그녀는 멍하니 앞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네가... 네가 정말 내 사촌 언니의 아들이야?”몇 마디 인사를 나눈 후 예지수는 그들을 집으로 초대했다.그리고 물 두 잔을 따라 가지고 왔다.“집이 누추하니 소파에 앉아.”배현수는 고개를 약간 끄덕이며 말했다.“괜찮아요. 오늘 온 이유는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예요.”예지수는 자리에 앉아 배현수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눈 깜짝할 사이에 네가 이렇게 컸어. 그때 마지막으로 너를 본 것이 기억나. 네가 겨우 이만큼 컸을 때야. 아직 세상 물정도 몰랐고. 너는 내가 기억나지 않지?”어른이 된 사람들은 보통 네댓 살 이전의 기억이 없다.배현수는 당연히 예지수를 기억하지 못했다.예지수는 그를 보며 말했다.“아버지 젊었을 때와 많이 닮았네. 요 몇 년 동안 어머니는 잘 있어?”배현수는 솔직하게 말했다.
“뭐라고?”...산성 별장에서 조유진은 예삐에게 사료를 먹인 뒤 예삐를 안고 소파에 누워 잡지를 뒤적였다.대제주시의 겨울밤 하늘은 어둡다.시간을 보니 6시가 넘었다.예삐를 어루만지며 말했다.“혼자 놀고 있어. 샤워 좀 하고 올게.”조유진은 짐을 들고 2층 침실로 올라가 캐리어를 열었다. 그제야 잠옷을 두고 온 것을 발견했다.옷장을 열어 부드럽고 편안한 소재의 남성 셔츠를 골랐다.샤워하고 잠깐 자려고 침대에 누웠을 때 휴대폰 카톡에서 친구 추가 메시지가 떴다.메시지창에는 ‘주명은’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주명은은 대학 룸메이트로 당시만 해도 사이가 좋았지만 이후 너무 많은 일이 벌어져 나중에 연락이 끊어졌다.내일 개교기념일에 참석하면 십중팔구 주명은과 마주칠 것 같아 친구 추가를 수락했다.이내 주명은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조유진? 정말 너야?]조유진도 답장했다.[응, 오랜만이야.][날 기억하다니, 기억 못 하는 줄 알았어.][그럴 리가. 돈까지 빌려줬잖아. 기억나.]당시 조유진은 생활비가 늘 빠듯했다. 주명은의 집안은 부자는 아니지만 생활비는 넉넉한 편이어서 가끔 조유진에게 밥값으로 4만 원을 빌려주기도 했다.정설혜가 호의를 베풀어 조유진에게 생활비를 보내주면 이내 주명은에게 돈을 갚았다.물론 밥값을 빌리는 일은 배현수와 연애하고 나서 다시는 없었다.당시 주명은은 배현수가 그녀를 ‘양육'한다며 놀리기도 했다.주명은에게서 답장이 왔다.[그때 배 선배와 오래오래 사귈 줄 알았어. 결혼까지 갈 줄 알았거든. 아쉽네.]조유진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오랫동안 연락을 끊은 친구들은 사실 오래전에 서로의 생활 범위밖에 있다. 그러다 보니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다시 모여 이야기할 것은 추억뿐일 것 같다.조유진은 이런 알면서도 ‘낯선' 관계에 제일 약하다. 친숙한 듯 낯선 듯하면서도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난감했다.한참 동안 답장을 하지 못했다.주명은에게서 또 메시지가 왔다.[방금 동
한편, 강성의 어느 작은 마을.예지수가 말했다.“그때 조범이 너의 아버지를 죽였어. 그래서 너의 어머니가 조범을 미워했어. 안정희를 찾아가서 증언을 해 달라고 했지만 안정희는 그때 임신 중이었고 곧 출산을 앞두고 있었어. 안정희는 너의 어머니가 안타까웠지만 사람은 그 누구나 이기적인 부분이 있잖아.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 이익이 먼저니까. 조범이 아무리 나빠도 남편이고 뱃속 아이의 아버지야. 그래서 너의 어머니가 부탁하러 갔을 때 물론 흔들렸지만 거절했어.”배현수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래서 어머니가 안정희까지 미워서 안정희의 아이를 바꿔치기한 거예요?”예지수는 더 이상 숨길 수 없자 순순히 인정했다.지난 일을 생각하는 그녀의 눈빛에는 왠지 쓸쓸함과 부끄러움이 비쳤다.“그때 너의 어머니가 복수심에 불타 안정희의 출산 예정일을 알아보라고 했어. 원래는 안정희의 아이를 데려가려고 했어. 아이를 잃은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해주려고 말이야. 나는 그때 시립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어. 처음에는 너의 어머니의 생각을 바로 거절했어. 안정희가 아무리 잘못했다고 해도 아이는 죄가 없으니까. 하지만 너의 어머니가 무릎까지 꿇으며 도와달라고 해서... 나와 너의 어머니는 비록 사촌 자매이지만 집안 조건이 차이가 많이 났어. 너의 어머니는 너의 아버지와 결혼한 후 더욱 행복하게 살았어. 하지만 내 아버지는 도박과 여자에게 재산을 탕진했어. 내 대학 등록금까지 다 날렸지. 그때, 너의 어머니가 돈을 대줬어. 만약 너의 어머니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시립병원에 취직할 수 없었을 거야. 예전에는 병원에 취직한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거든. 그래서 나에게 너의 어머니는 언니이자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해준 부모와 같은 존재야. 그런 언니가 나한테 부탁을 하고 무릎 꿇고 애걸복걸하니 내가 어떻게...”배현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그럼 안정희의 수양딸은 우리 어머니가 데려온 거예요?”예지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고개를 가로저었다.“너의 어머니와 얘기한 후 나는 이 모든
예지수는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너의 어머니는 다른 사람이 건드리지 않으면 본인도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아. 뼛속은 선량하지만 조범이 너무 나빴어. 그리고 너의 아버지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오롯이 복수의 칼날만 다듬었지.”배현수는 주먹을 쥐고 말했다.“그럼 안정희의 아들은요? 죽었어요?“처음에는 안정희의 아들을 너의 어머니께 줬어. 아이를 목 졸라 죽이려고 했는데 막상 손을 대려니 안 되겠다고 생각했나 봐. 아이를 빗속에 던져버렸어... 이젠 오랜 세월이 흘렀어. 나와 너의 어머니 외에는 아무도 이 일을 몰라. 안정희는 죽을 때까지도 몰랐다. 애초에 낳은 것이 아들이었다는 것을... 이것도 본인의 업보라고 할 수밖에... 업보는 조범이 너의 아버지를 죽이게 내버려 둔 것이야. 나중에는 조범이 아들만 중시하는 바람에 조범에게 배신당하여 잘 지내지 못했어. 평생 자기 아들을 만나지도 못하고 인생이 끝이 났지. 모든 사람은 잘못을 저지르면 그에 상응한 대가를 치러야 해. 안정희도 그렇고 너의 어머니도 그렇고... 너의 어머니는 이 일을 끝낸 후, 아마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거야. 좋은 사람이 아주 나쁜 일을 저질렀으니 많이 힘들었을 거야.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는 얘기를 들었어.”예지수의 말을 들은 배현수는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얼굴은 극도로 어두웠다.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이모님, 육씨 집안과 우리 어머니에게 원한이 있는 집안 중에 엄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어요?”“아니, 들어본 적 없어. 왜 그러는데?”배현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아무것도 아닙니다. 단지 어머니가 당시 안정희의 수양딸을 어떻게 만났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데려온 그 여자아이를 말하는 거야?”“네.”“그건 나도 잘 모르겠지만 주워왔다고만 했어. 진짜로 주워온 것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어. 너의 어머니만 알겠지. 하지만 지금은 정신이 오락가락하니 물어도 네가 원하는 대답을 얻기는 어려울 거야.”
밤 10시가 넘은 시각.산성 별장에 불이 켜지지 않아 어두컴컴했다.배현수가 밖에서 술을 마신 탓에 서정호가 차로 데려다주었다.집에 들어서자마자 예삐가 계속 울었다.하지만 예지수의 입에서 과거의 원한에 대해 알게 된 후, 마음이 무거웠다. 입구에 여자 신발이 놓여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손을 들어 넥타이를 풀고 우는 예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두컴컴한 거실을 지나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의 센서 등이 켜졌다.문을 밀고 안방으로 들어간 후 문을 휙 닫았다. 센서 등의 희미한 빛은 문에 의해 철저히 차단되었다.모든 감정이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배현수는 온몸으로 우울한 감정을 내뿜고 있었다. 알코올이 몸속에서 소용돌이쳤다. 관자놀이가 따끔거렸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잡아당기려는 순간 손이 멈췄다.뼛속 깊이 새겨져 있는 경각심 때문에 어둠 속에서도 상대의 연약한 목을 단숨에 움켜쥐었다.“누구야?”“웁... 나예요.”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자던 조유진은 깜짝 놀랐다.본능적인 삶의 욕구가 그녀의 목을 조른 배현수의 손을 힘껏 잡아당겼다.배현수는 놀라서 얼른 손을 떼었다.딸깍.침대 머리맡에 무드등이 켜지자 따뜻한 오렌지색 빛이 안방 전체를 비추었다.조유진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몸은 이미 그 팔에 안겨 있었다.배현수는 고개를 숙이고 물었다.“아파?”그녀의 하얀 목덜미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다. 단지 약간의 홍조만 있을 뿐이다. 방금 배현수가 힘주어 꽉 쥔 자리이다. 곧 가라앉을 것이다.조유진이 괜찮은 것을 본 배현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왜 갑자기 대제주시로 돌아온 거야? 나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방금 난 또...”조유진은 정신을 차렸다. 졸음이 싹 가시고 정신이 맑아졌다.눈빛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또 뭐요? 나 말고 다른 여자가 이 침대에 누워 잤단 말이에요?”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과민반응이 이토록 심할 수 있을까?배현수의 팽팽했던 신경은 완전히 풀렸다.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살인자가 집에 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