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들어 선유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약지 위의 은반지에 시선이 꽂혔다. 눈빛에는 근심이 서려 있었다.그러나 이내 자신이 너무 많은 생각을 한다고 느꼈다.그저 엉뚱한 악몽일 뿐이다.아마 최근에 너무 많은 일들이 있어 휴식하지 않은 탓에 헛된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배현수가 어떻게 다른 사람과 결혼할 수 있겠는가?이성적이든 감성적이든 그는 절대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SY그룹, 회장실.서정호는 다리에 모터가 달린 듯 태블릿을 들고 급히 달려왔다.“배 대표님, 엄씨 집안의 외동딸 엄환희와 약혼한다는 기사가 떴는데 뉴스 본문에 첨부된 사진은 백소미... 원고를 보낸 사람이 잘못 알고 있는 것 아닙니까? 제가 바로 홍보팀에 기사를 내리라고 얘기하겠습니다.”이 기사를 보고 배현수가 화가 치밀어 백소미나 엄씨 집안에 따지지는 않을까 걱정이었다. 그러나 배현수는 아주 덤덤한 얼굴로 한마디 했다.“그럴 필요 없어.” 순간 대표님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서정호는 조심스럽게 귀띔했다.“그런데 조유진 씨가 이 뉴스를 보면 오해하지 않을까요?”배현수는 어두운 눈빛으로 시계를 힐끗 바라봤다.지금쯤 조유진과 선유가 탄 비행기는 이미 출발했을 것이다.물론 이 기사는 배현수가 외부에 뿌리라고 한 것이 아니다.다만 백소미와 약속하자마자 저쪽에서는 지체 없이 기사를 낼 줄 몰랐다. 보아하니 백소미가 그보다 더 빨리 해독제를 얻고 싶어 하는 것 같다.여기까지 생각한 배현수는 한마디 지시했다.“성행 그룹과 백소미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이상한 점이 있으면 보고해.”서정호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배 대표님, 백소미와 진짜로 약혼하실 겁니까? 그러다가 혹시라도 조유진 씨가 알면...”조유진의 외유내강인 성격상 이 일을 안다면 아무리 배현수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곁에 계속 있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배현수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어두운 눈빛으로 말했다.“우선 해독제를 얻는 것이 제일 급해.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아.”해독제를 얻어야만 그와
조유진과 선유는 해외에 왔지만 배현수는 모든 것을 매우 적절하고 주도면밀하게 준비했다.중년쯤 되어 보이는 집사 셀리나는 조유진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사모님, 배 대표님이 미리 저에게 다 얘기했습니다. 한식을 좋아한다고 해서 한식 요리사를 배치했고요. 배가 고프면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언제든지 배가 고프면 바로 알려 주세요. 요리사에게 마침 상을 차리라고 얘기했는데 입맛에 맞는지 드셔보실래요? 맞지 않으면 다른 요리사를 찾겠습니다.”늦은 시간이라 조유진도 많이 피곤한 상태였다.“비행기 안에서 기내식 먹었어요. 준비 안 해도 됩니다.”“알겠습니다. 방은 이미 제가 다 깨끗이 치웠어요. 오시느라 피곤했을 텐데 욕조에 몸 좀 담그세요. 방금 하인에게 뜨거운 물을 받아 놓으라고 했습니다. 좋아하는 오일이 있으면 알려 주세요. 바로 준비하겠습니다.”조유진은 사실 그렇게 까다로운 편이 아니다.“셀리나, 오늘은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번거롭게 준비할 필요 없어요.”셀리나는 공손히 말했다. “스위스에 오시면 초반에 적응하기 어려우실 거라고 배 대표님이 저희에게 신신당부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선 사모님이 주인입니다. 우리가 모시는 게 당연하고요. 요청 사항이 있으시면 얼마든지 말씀하세요. 저희가 개선하겠습니다.”집 안에 들어서니 실외에서 느꼈던 한기가 싹 가시고 금세 몸이 따뜻해졌다.잠시 휴식을 취한 뒤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욕실에는 하인이 이미 뜨거운 물을 받아 놓았고 조유진이 옷을 벗는 것을 도우려 하고 있었다.불편함을 느낀 조유진은 바로 말했다.“괜찮아요. 제가 하면 돼요. 나가보세요.”하녀는 공손하게 웃으며 말했다.“사모님, 무슨 일 있으면 다시 불러주세요.”“네.”하녀가 나가고 나서야 조유진은 옷을 벗고 욕조에 몸을 담갔다.비행기를 10시간 넘게 탄 탓에 피곤했는지 욕조에 기대어 잠이 들 뻔했다.선유가 휴대전화를 들고 그녀를 목청껏 부르며 달려왔다.“엄마! 아빠에게서 영상통화가 왔어!”조유진은 아직 욕조에 몸을 담근
“혼자 가지러 갈 수 있어.”선유는 순진한 작은 얼굴로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엄마, 할 수 있어?”조유진은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선유가 욕실을 나간 후에야 그나마 난감한 기색이 줄었다.“일단 일어나서 몸 좀 닦고 다시 영상통화 할게요.”휴대전화를 내려놓으려고 할 때 배현수의 목소리가 들렸다.“그냥 이대로 해.”영상 너머 배현수는 책상에 앉아 회사 일을 하고 있는 듯 가끔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휴대전화 영상 속 조유진을 보기도 했다.진지하고 금욕적인 모습이었지만 그 말에 조유진의 얼굴은 빨개졌고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유진아, 화면이 비뚤어졌어.”조유진 헛웃음을 지었다. 일부러 삐뚤게 논 거라고 말해도 될까?이렇게 놓지 않으면 완전히 노출된다.그녀는 핑계를 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물이 좀 차가워요, 일어나야겠어요.”핸드폰을 욕조 위에 ‘탁’하고 놓았다. 배현수 쪽 영상에는 순식간에 커다란 천장만 보였다.조유진은 옆에 서서 몸의 물기를 닦았다.휴대전화 너머로 남자의 나지막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가 농담하듯 들려왔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영상통화 했는데 천장만 보여줄 거야?”조유진은 잠깐 멈칫했지만 이내 웃으며 말했다.“천장을 안 보면 뭘 보고 싶은데요?”“애기야, 너도 알잖아.”알고 싶지 않다.하지만 ‘애기’라는 말에 저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렸다.조유진은 잠옷을 입은 뒤에야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얼굴로 마주 보며 말했다.“이제 봐도 돼요.”배현수는 입꼬리를 올렸다. 눈빛에는 조롱이 가득했지만 그녀를 놀리지 않았다.“필요한 게 있으면 셀리나에게 얘기해. 알아서 해줄 거야.”조유진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생활에서 필요한 것은 만족시켜줄 수 있겠죠. 하지만 어떤 것들은 충족시키지 못하죠.”배현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필요한 게 있어?”조유진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이렇게 많은 사람을 시켜 나와 선유를 챙겨주는 것보다 차라리 직접 우리 옆에 있는 게 어때요?”
배현수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마음이 급해진 조유진은 뭔가 확인하려는 듯 다시 물었다.“혹시 다른 사람과 결혼할 거예요? 현수 씨가 다른 사람과 결혼반지를 끼는 꿈을 꿨어요.”배현수는 겉으로는 덤덤한 얼굴로 오른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커플링까지 하고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과 결혼하겠어?”길쭉한 약지에 확실히 은반지를 끼고 있었다.밤새 마음이 불안했던 조유진도 드디어 한시름 놓았다.그러고는 오른손을 들어 약지의 은반지를 눈앞에 흔들었다. “나도 끼고 있어요. 그런데 이 은반지를 너무 오랫동안 껴서 다 산화된 것 같아요. 바디워시로 깨끗하게 안 씻기고요. 치약으로는 좀 깨끗하게 닦을 수 있을까요?”“종이 호일에 소금 한 숟가락을 넣고 끓인 물을 부어 잠시 담가두면 표면의 산화물이 사라질 거야.”조유진은 처음 듣는 방법이었다.“정말요?”배현수는 계속 말을 이었다.“응, 전기화학 반응이야. 호일에 소금을 넣으면 알루미늄이 좋은 촉진제가 되거든, 그러면 소금이 제공하는 전해질 환경에서 산화은을 은으로 환원시켜. 그리고 뜨거운 물은 실험 속도를 가속화할 수 있어. 세척하고 나면 은반지가 광택이 날 거야.”조유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배 대표님은 교과서 지식을 생활 팁으로 잘 사용하시네요.”하지만 이 은반지는 너무 낡았다.당초 배현수가 선물한 것이라 조유진은 계속 소중히 여겼던 것이다.하지만 높은 지위에 있는 지금의 배현수에게 약지에 낀 은반지는 왠지 그의 신분에 맞지 않는 것 같았다.조유진은 컬러가 변하지 않는 플래티넘 반지를 사서 커플링으로 선물할까 생각 중이었다.백금은 금속의 성질이 안정적이기 때문에 색이 변하거나 산화가 되지 않는다. 꼭 마치 그들의 감정처럼 말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색이 바래지 않는 은반지처럼 좋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머릿속의 생각이었지만 어느새 입이 먼저 움직였다.“나와 선유를 보러 스위스에 오면 선물 하나 줄게요.”“무슨 선물?”밀당하는 조유진도 꽤 오랜만이다.“일단 비밀이에요. 나중에
배현수는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미안한 듯 말했다.“스위스가 아침일 때 여기는 오후야. 오후엔 내가 제일 바빠. 유진아.”“그럼 어떡해요?”배현수는 너무 미안했지만 최대한 감추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앞으로 매일 전화할 수 없을지도 몰라. 시간이 있을 때마다 영상통화 할게. 응?”“그러니까... 그 말은 나더러 하지 말라는 거예요?”“해도 돼.” 잠시 멈칫했던 배현수는 다시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가 못 받을 수 있어.”조유진은 다소 서운했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그래요, 그런데... 언제 나와 선유를 보러 스위스에 올 거예요?”“요즘은 안 될 것 같아.”“그럼 며칠에 한 번 전화할 거예요?”“일주일에 한 번, 괜찮아?”조유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이렇게 오래요?”다른 사람들은 장거리 연애를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 전화하거나 영상통화 하는 것은 너무 적지 않을까?아니면 스위스에 오면 정말 이 정도로 사람이 달라진단 말인가?배현수는 연락을 끊을 작정일까?조유진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눈에 띄게 다운된 모습이었다.배현수는 어쩔 수 없이 달랬다.“유진아, 내 말 좀 들어봐. 지금 여기 일들만 처리하면 너와 선유를 보러 스위스로 갈게.”이렇게 얘기하는데 조유진 입장에서 안 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이렇게 낮은 자세로 그녀를 달래니 말이다.조유진도 자꾸 투정 부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일이 정말 바쁜 것을 보니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응’이라고 대답했다.그러자 배현수가 다시 재촉했다.“빨리 자, 늦었어.”보아하니 그도 급한 일이 있어서 통화를 빨리 끝내야 하는 것 같았다.충분히 눈치가 있는 조유진이었지만 애틋한 마음도 사실이었다.“현수 씨.”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전화를 끊기 싫어서이다.배현수는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심호흡하고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늦은 시간인데 아직도 안 졸려?”조유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비행기에서 잠을
배현수가 다시 깨어났을 때 심장은 마치 짓밟혔다가 다시 붙어버린 것처럼 아팠다.조금만 움직여도 누군가가 잡아당기듯 아파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송하진은 그의 어깨를 짓누르며 말했다.“움직이지 말고 누워서 푹 쉬어요. 이런 몸으로 뭐하려고요?”배현수는 침대 머리맡에 몸을 기댄 채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여긴 웬일이세요?”“하, 내가 안 왔더라면 저승사자가 진작 데려갔을 거예요. 쓰러진 후, 아주머니가 저에게 전화했어요.”장은숙은 송하진이 배현수의 개인 주치의라고만 생각할 뿐, 다른 상황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배현수는 손을 뻗어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을 움켜쥐더니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얼마나 더 살 수 있어요?”송하진은 호통을 쳤다.“왜 조금이라도 더 살려고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자신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배현수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송하진 씨, 저에게 남은 시간은 이제 별로 없어요.”“전에 처방해드렸던 약이 독의 진행 속도를 늦추기는 했지만 오늘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요. 저도 이제 얼마 남았는지 확답을 드릴 수 없어요. 하지만 최대한 늦춰보도록 노력할게요. 해독제를 찾으면 저에게 먼저 주세요. 어떤 성분인지 분석해 볼게요. 만약 희소성분이 아니면 약재를 찾기 쉬우니 제가 빠른 시일 내에 해독제를 복제할 수 있어요. 하지만 모든 것을 하기 전에 배현수 씨는 꼭 살아 있어야 해요.”송하진의 말은 진실 반, 거짓 반, 위로 반, 사실 반이었다.해독제를 얻어서 성분을 테스트하고 약을 복제한다고 해도 저승사자와의 싸움에서 이길 확률이 매우 낮았다.배현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독성을 지연할 수 있는 약이 있나요?”송하진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또 먹으려고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약은 독의 진행을 지연시킬 수 있지만 먹고 나서 다시 독이 발작할 때 더 아플 거예요. 독이 더 심하게 발작할 거고요. 그저 겉으로만 발병을 지연시킬 뿐 근본적인 치료법은 아니에요.”“괜찮아요,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하루라
그리고 실제로 스위스로 날아간다고 해도 전용기 항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여객기를 타고 가면 출입국 정보가 있을 것이고 드래곤 파에게 바로 들킬 것이다. 그러면 백소미와의 약혼 소식이 거짓이라고 의심하게 될 것이다.그동안 인터넷에서 한 모든 일은 드래곤 파 사람들에게 조유진과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조유진을 곁에서 쫓아냈다. 하지만 조유진은 절대 그의 약점이 아니었다.백소미가 엄씨 집안의 외동딸이 된 후, 드래곤 파 사람들은 진짜 외동딸을 찾는 것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하게 되었다. 어젯밤, 성행 그룹은 최신 속보를 발표했다.엄준의 딸 엄환희가 순조롭게 그룹 이사회에 들어가 그룹 업무를 주관할 것이다....대제주시 블루브릿지 바에서 강이찬이 테이블을 잡아 술을 마셨다.얼굴이 시뻘게진 그는 분명 많이 취했지만 정신은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마지막 잔을 들고 원샷을 하려고 할 때 다른 한 손이 그의 잔을 낚아챘다.낯선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은 슬플 때일수록 취하기 어려워요. 취하려고 하면 할수록 정신은 더 또렷해질 거예요.”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전혀 모르는 낯선 얼굴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나를 알아요?”상대방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SY그룹 강 사장님, 맞으시죠? 당연히 알다마다요.”강이찬은 입꼬리를 가볍게 잡아당기며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SY 그룹에서 진작에 나왔어요. 이제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 과찬 받아들이기 어렵네요.”말을 마치자마자 벗어 놓은 양복 외투를 들고 일어나 가려고 했다.그러자 뒤에 있던 사람은 오른손으로 왼손가락에 있는 암룡반지를 돌리며 말했다.“SY그룹과 배현수와의 관계를 그렇게 끊고 싶으시다면 저에게 주식을 팔지 않을래요? 가격은 당신이 말하는 대로 줄게요.”강이찬은 이 사람이 SY그룹의 라이벌임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지분을 인수해 배현수에게 대항하려는 것이다.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내가 생각하는 금액이 워낙 높아서요.”그러자 그 사람
강이찬이 블루브릿지 바에서 비틀거리며 걸어나왔다. 바깥에는 이미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12월의 대제주시는 진작 추운 겨울로 접어들었다.찬바람이 살을 에는 듯 추웠다.눈보라 속에 서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어깨에 눈이 수북이 쌓였다.휴대폰이 울리자 발신인도 보지 않고 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전화에서 날카로운 욕설이 들려왔다.“강이찬 씨, 내 딸과 언제 이혼할 거예요? 당신 여동생 때문에 우리 미경이 배 속의 아이까지 잃었는데 어떻게 여동생만 감쌀 수 있어요. 재벌 집 사모님? 안 하면 그만이에요! 눈치 좀 챙기고 빨리 우리 미경이와 이혼하세요! 안 그러면 당장 대제주시로 가서 모든 사람에게 당신과 당신 여동생의 악행을 고발할 거니까!”조윤미이다. 심미경을 위해 불평하고 있었다.술을 잔뜩 마신 강이찬은 온몸에 술기운이 돌았고 목소리도 약간 취해 있었다.그는 실소를 터뜨리며 말했다.“이혼 안 하면 어떡할 건데요? 항상 다른 사람 먼저 배려했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원하는 것만 하려고요. 절대 헤어지지 않을 거예요.”조윤미가 다시 말하기 전에 그는 이미 전화를 끊었다.강이진은 이미 죽었다.그의 유일한 친척은 이제 심미경뿐이다.심미경은 그의 반쪽이자 배우자이며 아내이다. 두 번 다시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강이찬은 휘날리는 눈을 무릅쓰고 성큼성큼 나정 아파트로 걸어갔다. 이곳에는 심미경이 세 들어 살고 있었다.아파트 근처로 가기도 전에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강이찬은 순간 걸음을 멈췄다. 심미경도 그를 보았다.두 사람은 눈 속에 선 채 서로를 바라봤다.며칠 못 본 사이 강이찬은 많이 야위고 초췌해졌다.비참하게 죽은 강이진이 그에게 큰 타격을 준 것 같다.길 가다가 만난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었다.심미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나 찾으러 온 거예요?”이곳은 천우 별장과 그의 회사 모두 꽤 거리가 있었다.강이찬은 그녀 앞에 다가가 손에 든 슈퍼마켓 쇼핑백을 받아 들더니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무거워요. 내가 들게요.”심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