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되었다.납치 당했다가 풀려난지 얼마 안 된 선유를 보는 조유진의 마음은 조마조마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녀석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지만 걱정된 조유진은 선유와 한방에서 잤다. 잠자리에 들기 전, 녀석은 눈을 깜빡이며 조유진에게 물었다.“엄마, 우리 스위스에 꼭 가야 해? 아빠는 왜 우리와 함께 가지 않는 건데? 다른 이모와 결혼하는 거야?”조유진은 피식 웃으며 선유의 코를 톡 쳤다.“어린애가 하루 종일 무슨 생각하는 거야? 아빠가 다른 이모와 결혼했으면 좋겠어?”녀석은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아니! 새엄마 싫어. 아빠가 바람둥이일까 봐 그러지. 엄마, 우리 반에 아빠 엄마가 이혼한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조유진은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요즘 젊은 사람들의 감정은 확실히 그렇게 견고하지 않다. 이혼율도 높으며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것은 너무 평범한 일이다.많은 배우자들은 인생의 반을 함께 할 뿐 실제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백년해로하기는 정말 쉽지 않다.하지만 그녀는 배현수를 믿는다.“아빠는 바람둥이가 아니야. 선유야, 우리는 아빠를 믿어야 해.”선유는 고개를 끄덕였다.“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빠가 좀 무섭기는 하지만 나에게 정말 잘해주시거든!”말을 마친 녀석은 한쪽에 있는 작은 가방에서 정교한 바비 인형을 꺼냈다.녀석을 껴안은 조유진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오기 전에 살림살이를 많이 챙겨왔네.”녀석은 작은 입으로 헤헤 웃으며 말했다.“이것은 아빠가 나에게 선물한 거야. 물론 내가 인형에 옷 입힌 거 보고 유치하다고 불평했지만 인형도 사주고 옷도 가득 사줬어. 엄마, 우리 스위스 갈 때 예삐도 같이 가면 좋을 텐데... 그치? 예삐 혼자 집에서 많이 심심할 거야.”“예삐까지 데려가면 따로 짐도 부쳐야 해서 좀 번거로워. 어차피 아예 돌아오지 않을 것도 아니고 아빠도 집에 있을 텐데 예삐까지 데려가면 아빠 혼자 심심하지 않겠어?”선유는 작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하긴! 그럼 예삐는 그냥 집에 있
조유진의 품에 엎드린 선유는 이내 바로 잠이 들었다.잠이 든 어린 녀석의 등을 토닥이고 있는 조유진은 녀석의 얼굴을 아무리 바라봐도 잠이 오지 않았다.낮에 일어난 너무 갑작스러운 납치사건을 진정하고 다시 생각해보니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드래곤 파의 사람들이 선유를 납치한 거라면 선유는 절대 무사히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물론 선유가 조금이라도 다치지 않기를 바라지만 돌이켜보면 수상쩍은 납치사건이 아닐 수 없다.하지만 조유진은 머리를 쥐어짜도 납치사건의 진짜 주범이 누구인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이번에는 운수가 좋아 선유가 무사한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어른들의 이익과 원한에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아이까지 고통을 받는다는 생각에 너무 큰 죄책감이 들었다.배현수에게 조금 더 일찍 스위스로 가겠다고 약속하고 덜 말썽을 피웠더라면 선유가 납치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해성시의 어느 고급 비즈니스 클럽.새벽 두 시까지 손님을 모신 강이진은 얼굴이 굳어질 지경이었다.그녀는 돼지 같은 인간들의 손에서 겨우 벗어나 가까스로 룸에서 나왔다. 그러고는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받은 팁을 셌다.여러 번 세어봐도 200만 원 밖에 되지 않았다.속으로 울화가 치밀어 올라 발을 들어 힘껏 바닥을 내리 찼다.“깍쟁이들! 저런 징그러운 인간들 그렇게 상대해도 겨우 요만큼밖에 못 벌다니!”강이찬이 교통사고의 진상을 알게 된 후, 혹시라도 마음이 바꿔 그녀더러 자수하라고 할까 봐 늘 전전긍긍했다. 그래서 밤새 짐을 싸서 대선국으로 돌아가려고 했다.하지만 늘 강이찬의 돈으로 먹고 자고 놀던 강이진이다.그리고 얼마 전에 대형 트럭 운전사의 아내 장순자의 협박으로 강이진은 가지고 있던 명품을 전부 팔아치웠다. 그 돈은 그렇게 밑 빠진 독처럼 모두 장춘리의 호주머니에 들어가고 말았다.지금 강이찬은 그녀의 카드를 전부 정지시켰다. 그러다 보니 돈이 들어올 곳이 전혀 없는 강이진은 대선국은 고사하고 그곳에 갈 푯값도 부족했다.평소 술친구들에게 전화
매니저는 욕설을 퍼붓고 가버렸다.강이진은 자리에 서서 팁 뭉치를 꽉 쥔 채 화가 나서 울음을 터뜨렸다. 가슴에 가득 찬 설움은 당장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이와 동시에 가슴에서 한 맺힌 격렬한 분노가 끓어올랐다.심미경!심미경, 그 천한 년 때문에 이 꼴이 이렇게 되었다. 그 년이 오빠 옆에서 입만 함부로 놀리지 않았어도 남 때문에 자기 생활비를 끊고 대제주시에서 내쫓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오빠는 그녀를 감옥에 보내려 했다. 이게 사람을 죽이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어릴 때부터 호의호식하는 나날을 보내던 강이진은 이깟 돈 때문에 온갖 설움을 견뎌내며 구렁텅이에 빠진 생활을 해야 했다. 이것은 절대 그녀에게 적합한 생활이 아니다.휴대전화를 꽉 쥔 채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우선 그녀가 생각하는 이른바 '절친'인 안승호에게 전화를 걸었다.빠른 전화 연결에 강이진의 눈빛이 번쩍였다. 그 불량배 친구들은 거의 전화를 안 받았는데 안승호는 이렇게 빨리 받으니 말이다! 좌절감으로 가득 찼던 자신감도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안승호, 너...”전화기 너머로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렸다."강이진이야? 왜 전화했어?”강이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체면을 차리고 싶었지만 이런 궁핍한 상황에 더 이상 물불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한참 고민한 끝에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나 2천만 원만 빌려주면 안 돼? 걱정하지 마, 나중에 꼭 갚을 거니까.”그러자 안승호의 낄낄 웃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우리 이 바닥에서 네가 오빠에게 쫓겨난 거 누가 몰라? 강이진, 너 지금 블랙리스트야. 누가 너에게 돈을 빌려주겠어. 돌을 던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해.”강이진은 필사적으로 해명했다. "나 오빠와 진짜로 사이가 나빠진 것이 아니야. 우리 오빠가 내가 제멋대로라고 혼내는 것뿐이라니까? 나 좀 고생 좀 해보라고 그러는 거야. 그런데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친동생인데 우리 오빠가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 있겠어. 내가 아무리 큰 잘못을 저
강이진은 온몸을 떨며 애원했다.“안승호, 나 좀 도와줘. 우리 친구잖아. 한 번만 도와줘, 마지막이야! 이 고비만 넘기면 내가 꼭 보상할게.”안승호는 어쩔 수 없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도망쳐, 강이진. 대제주시는 다시 올 생각하지 말고, 오면 죽음이니까. 내가 너를 의리를 지키지 않는 게 아니라 너의 오빠여도 너를 돕지는 못할 거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으니까 기도 많이 하고!”말이 끝나자마자 전화기 너머에서 통화 기계음이 뚜뚜 하고 들렸다.전화가 끊어졌다.강이진은 두 팔로 자신을 꼭 껴안은 채 두려움에 눈물을 금치 못했다.온몸을 웅크리고 입술을 깨물며 오열하기 시작했다.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눈물도 닦지 않은 채 강이찬에게 전화를 걸어 다시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이제 오빠만 자기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빠가 현수 오빠에게 사정하면 분명 기회가 있을 것이다.한참 만에 전화가 드디어 연결되었다.강이진은 감격에 겨워 하마터면 실성할 뻔했다.“오빠...”참지 못하고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이진이야? 너 지금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오빠, 나...”해성시에 있다고 말하려다가 안승호의 말이 떠올라 멈췄다.강이찬은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조유진 어머니 죽음, 너와 상관이 있어? 네가 그런 거야?”강이진은 엉겁결에 변명했다.“나 아니야, 오빠. 제발 믿어줘. 심미경이 현수 오빠 앞에 가서 혀를 나불거린 거야? 오빠, 나 대신 현수 오빠에게 잘 설명해줘. 조유진 어머니의 죽음은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어. 오빠마저 나를 도와주지 않으면 나 진짜 죽을지도 모른단 말이야.”강이찬은 더 이상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실망스러운 어조로 말했다.“이진아, 또 거짓말하는 거야. 정말 구제 불능이구나.”“오빠, 설마 심미경 그 년에게 홀린 거야? 오빠마저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이거지? 그래! 그럼 여동생 시신 수습이나 기다려. 강이찬! 너무해! 아무리 그래도 난 오빠 동생이야! 그런데 어떻게 나에게 이럴
강이진에게 붙잡힌 중년 남자는 비꼬는 눈빛으로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하룻밤에 2천만 원? 당신이 이 클럽의 넘버 원이라고 해도 그런 값은 없어!”강이진은 이를 갈며 말했다.“1천 8백만 원!”“거침이 없네? 이런 일 처음이야? 그나마 괜찮게 생겼으니 많이 쳐 줄게. 2백만 원. 싫으면 말고!”어차피 몸 팔러 나온 여자 주제에 가격을 그렇게 높게 부르다니? 본인이 뭐 공주인 줄 아나? 강이진은 께름칙한 얼굴로 말했다.“고작 2백만 원이요?!”“적어? 적으면 하지 말든가.”남자는 딱 잘라 말한 후 강이진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치고 떠나려 했다.이런 장소에 드나들며 룸의 아가씨들과 자려는 남자들에게 사실 권력과 세력이 있을 리 없다. 기껏해야 아내를 속이고 비상금을 숨겨놨을 뿐이다.실제 재벌들은 이런 술집 아가씨들과 함부로 하룻밤을 보내지 않는다. 첫째는 어느 정도 자제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병에 걸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그 사람들은 여자 연예인과 여자 모델들과 어울린다. 아무리 못해도 청순한 여대생을 곁에 두지 술집 아가씨들은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눈앞에 있는 ‘2백만 원’이 떠나려 할 때 또다시 안승호의 귀띔이 생각났다.“도망쳐, 강이진. 대제주시는 다시 올 생각하지 말고, 오면 죽음이니까.”배현수의 살벌한 눈빛이 떠올라 저도 마르게 온몸이 심하게 떨렸다.배현수의 사람에게 잡혀간다면 어떤 결과가 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강이진은 그 중년 남자를 덥석 잡았다.붉어진 두 눈시울을 보니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하다.“그래요! 2백만 원! 하지만 세 번 이상은 안 돼요!”중년 남자는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몸 팔러 나온 주제에 무슨 요구가 이렇게 많아. 처녀가 맞긴 한 거야? 아니면 천만 원밖에 못 줘! 백만 원도 체면 많이 쳐준 거니까! 이 바닥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봐. 하룻밤에 얼마인지.”대선국에 유학할 당시 남자 친구를 몇 명 사귄 강이진은 잠자리 경험도 있었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하지만 2백만 원을
강이진은 손을 들어 남자의 얼굴을 잡았다. 그리고 날카로운 손톱으로 상대방의 얼굴을 할퀴었다. 순간 몇 줄의 핏자국이 그려졌다.“가난한 거지 주제에 나와서 여자 찾을 생각 하고 있어! 정말 꼴불견이야!”남자도 화를 벌컥 냈다. 얼굴에 이런 자국이 남았으니 집에 가면 분명 아내가 물을 것이다. 밖에서 바람을 피우고 싶었지만 가족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았다. 모든 불똥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바로 손을 들어 강이진의 얼굴을 후려갈겼다.“개 같은 년! 감히 내 얼굴을 건드리다니! 꺼져!”너무 세게 내리친 뺨에 강이진은 머리가 윙윙거리며 이명이 들렸다. 입가에 상처가 나 피가 흘렀다.혼돈 속에서 남자는 차 문을 당겨 그녀를 끌고 나가 바닥에 내동댕이쳤다.남자는 차에 올라탄 후, 창문을 열어 그녀의 몸에 침을 뱉었다. “퉤! 싸구려 같으니라고!”욕설을 내뱉은 뒤 검은 산타나를 타고 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졌다.먼지 속에 넘어진 강이진은 손으로 땅을 짚고 주먹을 꽉 쥐었다. 바닥에 긁힌 손톱은 당장이라도 피가 날 것 같았다.눈물이 한 방울 한 방울 바닥에 떨어졌다.예전에 대제주시에서 고급 쇼핑몰을 드나들며 사고 싶은 것 마음껏 샀다. 수천만 원 하는 가방 하나도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바로 샀다.그런데 지금은 2백만 원을 위해 품위 없는 중년 남자에게 짓밟혔다.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그녀도 몰랐다. 분명 오빠의 큰 나무 아래에서 보호받으며 잘 살던 공주였다. ‘심미경만 없었다면 오빠가 나를 대제주시에서 쫓아내지 않았을 거야. 조유진만 없었다면 현수 오빠도 나를 미워하지 않았을 거야.’옛날에 오빠도 현수 오빠도 그녀를 그토록 예뻐했었는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것일까? 강이진은 휴대전화를 잡고 일어나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갔다.밖에서는 보슬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12월의 겨울비는 당장이라도 살을 에는 듯 유난히 추웠다.한겨울이었지만 강이진은 클럽 공주 패션에 호피 무늬 민소매, 검은색 가죽 미니스커트, 망사 스타킹, 검은색 롱부
서정호는 강이진을 쳐다보며 휴대전화를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배 대표님, 강이진 씨 찾았습니다. 대제주시로 데려갈까요, 아니면 이 자리에서 처리할까요?”전화기 너머의 남자가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모른다.서정호는 전화를 끊은 뒤 경호원에게 눈짓했다.경호원은 바로 알아채고 강이진의 어깨를 짓누르며 차 쪽으로 걸어갔다.차가운 빗줄기 속에서 강이진의 얼굴은 잿빛으로 변했다. 그녀는 입술을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대체 어쩌려는 것인데? 이거 놔! 내가 저지른 잘못은 내가 알아서 자수할 거야. 너희들이 억압할 필요 없다고!”시끄러운 소리에 서정호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경멸스러운 얼굴로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운이 좋은 줄 알아. 배 대표가 직접 나선다고 하니 오늘 밤은 살 수 있을 거야. 개처럼 계속 짖는 것보다 어떤 유언을 남길지 잘 생각해봐. 아니면 어떻게 사죄를 해야 덜 고통스럽게 죽을지 고민해 보든가.”강이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이튿날 아침.성남, 엄씨 사택.배현수는 조유진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왔다.“유진아, 나는 이만 대제주시로 돌아갈게.”조유진은 자기를 성남으로 데려다준 후, 며칠 동안 같이 머물면서 배현수의 스케줄과 일들이 많이 밀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정작 떠난다고 하니 여전히 아쉬울 뿐이었다.하얀 손으로 그의 트렌치코트 소매를 움켜쥐며 말했다.“며칠 뒤 선유와 스위스에 가는데 우리를 배웅해 줄 거예요?”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배현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녀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더 이상 속이고 싶지도 않았다.“잘 모르겠어. 회사 일이 어떻게 될지... 너무 바쁘면 아마 시간 낼 수가 없을 것 같아.”대제주시로 돌아간 후, 우선 강이진부터 처리해야 했다. 최근 밀린 회사 일도 산더미처럼 쌓였다. 몇몇 세력들은 SY그룹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오늘 아침 주식시장이 열리자마자 SY그룹의 주가가 또 출렁였다.분명 배후에 있는 세력이 일을 꾸미고 있는 것
조유진은 폐가 좋지 않아 그녀 앞에서는 거의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하지만 매번 그에게서 담배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배현수는 웃으며 말했다.“알았어.”아래층, 도 집사가 외쳤다.“배 대표님, 차가 준비됐으니 이제 공항으로 출발하실까요?”배현수는 그녀의 얼굴을 조물락 거리고 말했다.“가요.”막 뒤로 돌았을 때 그녀의 손이 또다시 그의 소매를 잡았다.뒤를 돌아보니 조유진이 아쉬운 얼굴로 그를 쉽게 놓아주지 못하고 있었다.눈동자에는 옅은 이슬이 고여 있었다.평소에 치근덕거리기 싫어하고 독립적인 사람이었지만 요즘은 어찌 된 일인지 먼 스위스에 갈 생각만 하면 자신이 없어졌다.맑은 눈물 한줄기가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배현수는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 맑은 눈물이 마치 그의 가슴을 찌르는 듯 심장이 아팠다. 다시 돌아서서 그녀 얼굴의 눈물 자국을 닦았다. 그러고는 그녀와 머리를 맞대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나도 너와 같이 가고 싶어. 같이 밥 먹고 일하고 자고... 한 발자국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 하지만 그러면 금방 질리지 않을까?”조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양손에 그의 옷깃을 쥐고 고개를 숙이라는 듯 잡아당겼다.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바로 알아차린 배현수는 얼굴을 숙이고 입술을 갖다 댔다.조유진이 고개를 드는 순간 두 사람의 입술이 서로 엉겨 붙었다.남자는 큰 손으로 그녀의 등을 끌어안고 깊은 입맞춤을 이어갔다.한참 동안 입을 맞추고 있을 때 위층으로 올라온 선유가 갑자기 외쳤다. “아, 부끄러워!”녀석은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조유진은 배현수를 살짝 밀었다. 선유에게 키스하는 장면이 들킨 것이 다소 쑥스러워 귀가 빨개졌다.하지만 배현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얼굴을 숙인 채 깊은 눈빛으로 조유진을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그녀의 뒤통수를 문지르며 입꼬리를 올리고 말했다.“키스 다 했으면 이제 나 좀 보내줄래?”이렇게 말하는데 조유진이 안 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손을 놓으며 말했다.“알았어, 조심히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