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귀염둥이?이 단어를 들은 조유진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마치 7년 전으로 돌아간 이 느낌... 7년 전의 배현수만이 그녀를 이렇게 불렀었다.조유진은 그의 품에 안겨 고개를 들어 물었다.“뭐라고요?”그녀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는지 배현수는 아닌 척 헛기침을 하고는 그녀를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아니야, 가자. 밀크티 사러 갈까, 아니면 가방 사러 갈래?”조유진은 배현수의 귀까지 빨개진 것을 발견했다. 사실 그가 이렇게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아주 이례적이다. 이 사람도 부끄러운 줄 안다고?!쇼핑몰에는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배현수와 조유진, 눈에 띄는 피지컬을 자랑하는 두 남녀가 서로 달래며 질척거리는 모습에 주위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두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남자는 잘생긴 외모에 카리스마가 넘치고 도도했고 여자는 재벌 집 딸 같은 청아한 외모에 청순함까지 갖추고 있었다.행인들은 남자가 여자를 괴롭힌다고 생각해 찌질한 남자라고 눈으로 욕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몰랐다. 바로 이 장면이 파파라치에게 찍혀 내일 아침 뉴스 메인 페이지를 장식할 줄은... [비즈니스계의 거물과 버려진 못된 첫사랑][첫사랑, 후회의 눈물]사진을 다 찍은 파파라치는 유유히 사라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아니꼬운 시선을 알아차린 조유진은 뒤늦게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손등으로 다급히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밀크티도 가방도 다 필요 없어요.”늘 인내심 있게 조유진을 대하는 배현수는 전혀 귀찮아하는 기색이 없었다.“그럼 뭐 하고 싶은데?”배현수는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말했다.사실 이런 인내심과 사랑은 선유를 향해서도 없었다.조유진은 전에 남초윤과 이 쇼핑몰을 구경하러 온 적이 있었다. 길 건너편에 거대한 역사 기념관이 있다는 것이 기억나 그곳에 가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고 그녀가 신은 하이힐 바닥은 양가죽 재질이라 물에 닿으면 안 되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쇼핑몰
엄창민은 조유진이 원하는 그 어떤 것도 다 들어줄 것이다. 조유진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배현수를 보며 물었다.“선유는 현수 씨의 딸이에요. 개인 과외할 선생님을 구하는 일을 왜 창민 오빠에게 부탁해요?”그동안 배현수는 엄창민과 엮이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그런데 지금은 먼저 엄창민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도 선유에게 할 개인 과외 같은 ‘집안일’을 말이다. 조유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지만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생각을 바로 눈치챈 배현수는 이내 고개를 옆으로 돌려 말했다.“어차피 엄창민에게 관심이 없잖아? 그저 오빠라고 생각한 거 아니었어?”조유진은 입술을 달싹이더니 일부러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그건 모르죠? 언제 마음이 변할지. 어쨌든 미혼인 남자와 여자잖아요. 안 그래요? 배 대표님?”마지막 한 마디는 일부러 배현수의 귀에 대고 또박또박 말했다. 그 말에 그녀를 받쳐주던 큰 손은 일부러 복수라도 하려는 듯 힘을 살짝 풀었다. 깜짝 놀란 조유진은 얼른 그의 목을 껴안고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뭐 하는 거예요?”“방금 뭐라고 불렀어?”조유진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배 대표라고?”조유진이 일부러 이렇게 말한다는 것을 배현수도 알고 있었기에 담담한 목소리로 협박했다.“손 놓을까?”조유진은 그의 목을 힘껏 끌어안으며 말했다.“안 돼요.”가을비가 내리는 밖은 습하고 추웠다. 비도 생각보다 많이 오고 있었다.물이 흥건히 고여 있는 길가에 발이 닿기만 하면 하이힐은 바로 망가질 것이다.눈썹을 치켜세운 배현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녀를 보며 말했다.“그럼 예쁘게 불러봐.”“배현수.”퉁명스럽고 어린아이 같은 말투는 마치 협박을 받는 사람 같았다. 배현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내가 너를 납치라도 했어?”뭐랄까... 협박한 것은 맞으니까... 목소리를 가다듬은 조유진은 조금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배현수?”‘이 정도면 되겠지?’입꼬리를 살짝 올린 배현수는 야유하는 듯
강이진은 못마땅한 얼굴로 손에 들고 있던 선물을 옆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오빠, 이것은 오빠와 새언니를 위해 특별히 고른 커플 컵이야. 평생 두 사람이 헤어지지 말라는 의미도 있고. 그동안 오빠가 조유진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최대한 오빠를 도우려고 했어. 그런데 오빠가 싫다고 하니 뭐, 어쩔 수 없지. 오빠는 조유진을 좋아하는 게 현수 오빠와의 우정을 배신하는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내 눈에 현수 오빠는 그저 남이야. 오빠는 내 친오빠이고. 나는 당연히 오빠 편이고. 그래서 오빠가 조유진과 잘되기를 바랐어. 그런데 오빠는 내가 오히려 방해만 한다고 하니… 나는 오빠가 너무 안타까워. 하지만 이미 심미경과 결혼했으니 진심으로 축복할 수밖에.”안도의 한숨을 내쉰 강이찬은 인상을 더욱 찌푸렸다.“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우리가 친남매이기 때문에 네가 더더욱 자수하기를 바라. 이진아, 그렇게 자꾸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안 돼.”“오빠, 내가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아. 하지만 잊었어? 몇 년 전, 우리가 고향에 돌아갔을 때, 갑자기 지진이 일어났던 날, 나는 오빠를 구하기 위해 콘크리트 기둥에 깔려 다리가 부러졌어! 그때 구조대원들에게 오빠를 먼저 살려달라고 부탁했고! 오빠, 이 세상 그 누구도 나를 안 좋게 말할 수 있지만 오빠는 안 돼!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오빠와 내 손을 잡고 말했잖아. 이 세상에 우리 둘만이 피를 나눈 가족이라고, 앞으로 서로 잘 도우며 살아야 한다고. 나는 최선을 다해 오빠를 도왔어. 그런데 오빠는? 나를 위해 한 게 뭐가 있는데?”한바탕 호소를 퍼부은 강이진은 억울한 듯 눈물을 흘렸다.강이찬은 고개를 숙인 채 정색한 얼굴로 서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고개를 들어 하나뿐인 여동생을 쳐다보는 강이찬의 눈빛에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온 이유가 고작 가족의 사랑에 대해 말하려고 온 거야? 이진아, 네가 어떤 짓을 했는지 알기나 해?”
강이찬은 고개를 위로 젖히고 눈을 꼭 감았다. 그는 주먹을 쥔 손에 힘을 꽉 주고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이진아, 꼭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야 해?”“오빠, 몰아붙이는 건 오빠야. 현수 오빠도 감옥에 갔다 왔잖아. 가서 물어봐. 3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나 정말 들어가고 싶지 않아. 그런 곳에 일단 들어가면 인생은 끝장이야! 감옥에 가느니 차라리 여기서 그냥 죽을게!”다시 뒤돌아선 강이찬은 눈이 시뻘게져 있었다. “그 칼 내려놔.”강이진은 울면서 미친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소란 피우는 거 싫어한다는 거 알아. 오빠, 마지막으로 한 번만 도와줘. 오빠와 심미경의 결혼식이 끝나면 바로 외국으로 나갈게.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게. 두 번 다시 소란 피우지 않을게. 오빠... 제발 한 번만 도와줘. 우리가 피를 나눈 친남매인 걸 봐서라도... 부모님의 체면도 있잖아. 예전에 오빠를 구하려고 내가 다리를 다칠 뻔한 것을 봐서라도 제발...”강이찬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런 그의 표정은 애석하면서도 무감각해 보였다.강이찬이 계속 아무 말을 하지 않자 날카로운 칼을 들고 있던 강이진의 손은 점점 더 목 가까이 들이밀었다. 벗겨진 그녀의 피부에서는 피까지 흘러나왔다.애원하는 강이진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떨리고 있었다.“오빠, 나 정말 감옥에 가고 싶지 않아. 오빠가 계속 이러면 나는 정말 죽을 수밖에 없어.”“미경 씨가 죽지 않았으니까 죄가 심각하지는 않을 거야. 게다가 자수하면 기껏해야 4, 5년이겠지. 이진아, 4, 5년 뒤라고 해도 너 겨우 서른 살이야. 감옥에서 잘 보이면 가석방될 수도 있고...”강이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참고 있던 강이진이 비명을 질렀다.“4, 5년? 그 후에 나오면 폐인이나 다름없는데 여기서 누가 나를 받아주겠어? 그때는 취직도 안 돼. 오빠, 어떻게 심미경 때문에 내 인생을 망치려 해? 그래, 차라리 내가 죽을게. 죽으면 그만이니까!”칼을 들고 있는 강이진은 당장이라도 목을 찌르려
전화기 너머로 옥상의 윙윙거리는 바람 소리가 들렸고 통화하는 사람의 목소리도 매우 급해 보였다.이내 정신을 차린 강이찬은 휴대전화를 꽉 잡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일단 조금만 더 잡고 있어 주세요. 바로 갈게요.”이 전화 소리에 옆에서 자고 있던 심미경까지 깼다.옆에 있던 심미경은 그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무슨 일이에요?”“강이진이 또 미친 짓을 하네요. 잠깐 나갔다 올게요.”심미경은 흠칫 놀랐다.“이진이가 왜요? 나도 같이 갈까요?”“아니요. 괜찮아요. 먼저 쉬어요. 나 기다리지 말고.”심미경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운전 조심하고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요.”“네, 알겠어요.”...쌀쌀한 초겨울 밤, 찬바람이 살을 에는 듯 추웠다.옥상에 서 있는 강이진은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강이찬이 도착했을 때, 옥상에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었다.“젊은 아가씨가 대체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이러는 거예요?”“빨리 내려오세요. 무슨 일이 있든 일단 내려와서 얘기해요!”중년을 훌쩍 넘긴 아저씨와 아줌마들은 열심히 그녀를 타이르고 있었다.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강이진에게 다가간 강이찬은 차가운 얼굴로 호통쳤다.“너 이제 어린애 아니야. 잘못했으면 벌을 받을 생각 해야지! 어떻게 그 죄가 두렵다고 자살할 생각만 하는 거야? 내려와! 사람들이 비웃어!”하지만 강이진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는 눈물범벅인 얼굴로 고집을 피우며 말했다.“거기에 들어가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일단 내려와서 얘기해!”강이진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오빠, 내가 여기서 뛰어내리면 나를 용서해 줄 거야?”“이진아, 그렇게 제멋대로 굴지 마! 더 이상 나에게 강요하지도 말고!”강이진이 정말 뛰어내리면 강이찬은 평생 죄책감 속에서 살 것이다.강이진은 앞으로 한 발 내디뎠다. 감옥에 가는 것보다 차라리 이렇게 죽는시늉으로 강이찬의 마음을 되돌리고 싶었다. 강이찬은 조급한 마음을 가다듬고 외쳤다.“강이진! 내려와! 더 이상 소
“트럭 기사를 사주해 교통사고를 낸 이유가 뭐야? 미경 씨가 미워서? 이진아, 너 이렇게 못된 애였어?”강이진은 계속 억울하다며 호소했다. 강이찬이 생각을 바꿀 기미가 보이자 이제 아예 대놓고 불쌍한 척했다.“아니야, 오빠... 심미경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잖아. 지난번에 우리가 서재에서 다투면서 했던 말을 들었나 봐. 조유진의 어머니를 내가 죽였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조유진에게 잘 보이려고 고자질하러 가는 거 있지? 오빠, 그때는 너무 무서워서 그랬어. 오빠도 알잖아. 조유진과 배현수가 어떤 사람인지. 심미경이 진짜로 이간질해서 내가 범인이라고 말한다면 정말 끝장이야. 현수 오빠의 성격에 참을 수 있겠어? 아마 당장 나를 죽이려 했을 거야. 게다가...”여기까지 말한 강이진은 다시 한번 침을 꿀꺽 삼켰다. 배현수가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나올지 생각만 해도 살이 떨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을 이었다.“안 그래도 현수 오빠는 안정희를 죽인 사람이 자기 엄마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어. 이런 상황에 심미경이 가서 그 범인이 나라고 하면 바로 믿겠지. 설령 그게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도 나에게 덮어씌우려 할 거야! 조유진과 함께 있으려면 희생양을 찾아야 하니까! 오빠, 사람은 이기적인 동물이야. 심미경의 소원은 오빠와 결혼하는 거고 그 소원이 곧 이루어질 거야. 오빠가 나를 강제로 감옥에 보내면 일만 더 꼬여. 오빠도 내가 죽는 것을 바라지 않잖아. 내가 잘 뉘우쳐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기를 바라는 거잖아. 나 이제 내 잘못을 알아. 깊이 뉘우치고 있고. 그런데 이런 일들을 만약 현수 오빠가 알아봐? 내 설명 따위 들으려고 하지 않을 거야. 내가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사람은 모두 득과 실을 따지는 동물이다. 이익을 추구하고 해를 피하는 것 또한 인간의 본성이다.소파에 기댄 강이찬은 눈을 감고 조용히 숨을 돌렸다.강이진의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었고 그녀는 마치 상갓집 개처럼 강이찬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녀는
이렇게 예쁜 웨딩드레스를 누가 싫어하겠는가?“마음에 들면 사자. 그런데 지금은 문을 닫았으니 내일 같이 사러 올까?”배현수의 가벼운 말투는 장 보는 것처럼 경솔해 보였다. 드레스의 아래에 몇백억이라는 가격표가 놓여 있었다. 조유진은 옆에 있던 배현수를 올려다보며 피식 웃었다.“웨딩드레스는 결혼할 때 입는 거예요. 우리는 지금 결혼도 안 했고요.”게다가 대부분 웨딩드레스는 결혼식에 한 번만 입기에 임대를 선택하는 사람이 많다. 일부 연예인들마저도 결혼식의 웨딩드레스는 직접 돈 내고 사는 것이 아니라 협찬을 받는다.일 년 내내 연예인들의 기사를 쓰는 남초윤이 말하길 연예인들이 입는 턱시도 또한 대부분 빌린 것이라 했다. 이름이 좀 알려진 연예인들은 협찬을 많이 받는다고 했다. 누가 돈이 그렇게 많아서 행사에 갈 때마다 디자인이 다른 고급 드레스를 사 입겠는가?배현수는 사랑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따뜻하게 바라보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좋아하는 거 아니었어?”“너무 비싸요.”평소에도 입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장식용으로만 사기에는 돈이 너무 아까웠다.그녀가 이것저것 너무 많은 것들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제일 부족하지 않은 게 돈이야.”그 말에 조유진은 장난기 섞인 얼굴로 물었다.“전에 나더러 돈 갚으라고 했잖아요?”그 3천억은 조유진이 살면서 진 가장 큰 빚이었다.신용카드로 3천만 원을 빚진 것도 무서워 마음을 졸이던 그녀였다. 그런데 3천억이라니... 아마 수십 번 다시 태어나도 이 돈은 절대 못 갚을 것이다.배현수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헛기침을 한 번 했다.“그때 너보고 돈 갚지 말라고 했으면 도망쳤겠지?”말을 하는 그의 까만 눈동자는 한없이 진지했고 농담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귀가 빨개진 조유진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도망 안 가요. 선유가 옆에 있는데 어떻게 도망가요.”그땐 그저 어떻게 배현수를 대해야 할지 몰랐다. 어떻게 화해해야 할지는 더더욱 감이 잡히지 않았으니까...배현수는 시선을 내려 그
하지만 서로의 뜨거운 숨결은 아직도 두 사람의 주위를 맴돌았다.배현수는 그녀와 이마를 맞댄 채 물었다.“원하는 게 뭔데?”줄 수 있는 것이라면 반드시 전부 다 내줄 것이다.조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배현수를 보며 말했다.“배현수, 난 오롯이 당신만을 원해요.”목소리는 차가웠지만 부드럽고 단호했다.이 말을 들은 배현수는 순간 멍해졌다.한참이나 그녀를 쳐다본 배현수는 이 한마디가 너무 버겁다고 느껴졌다. 그는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그녀를 이끌고 차로 향했다.“밖이 너무 추워. 내가 필요하면 차 안에서 줄게.”“그런 뜻이 아니에요.”배현수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조롱하는 말투로 물었다.“그럼 네가 말한 게 뭔데?”“싫어요.”“싫다고?”얼굴이 살짝 달아오른 조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그런 건 필요 없어요.”일부러 조롱하는 배현수 때문에 조유진은 점점 더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그녀의 허리를 잡고 차 안으로 들어간 배현수는 큰 그림자로 그녀를 가렸다. 차가운 카리스마와 타고난 강한 풍채는 상위자의 기세를 그대로 내뿜고 있었다.하지만 몸을 숙이고 있는 배현수는 여느 때보다 더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에 키스했다. 그는 그녀를 유혹하듯 달래는 말투로 물었다.“왜 필요 없는데? 불편해? 아니면 아팠어?”조유진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배현수는 쉰 목소리로 그녀의 귀에 진지하게 말했다.“유진아, 최근 몇 번은 별로 힘을 안 줬어.”조유진은 그의 말이 어이가 없었지만 얼굴은 이미 빨갛게 달아올랐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네요. 내 말은 그 뜻이 아니에요.”배현수는 그녀의 살짝 벌어진 입술을 응시하며 말했다.“방금 그 키스가 나에게 보내는 신호인 줄 알았어.”타이밍이 어쩌면 이렇게 기가 막힐까...조유진이 반박하려 하자 그의 빨간 입술이 그녀의 입을 막아 버렸다.배현수는 다리 위에 그녀를 앉힌 후, 한 손으로는 그녀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리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