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서로의 뜨거운 숨결은 아직도 두 사람의 주위를 맴돌았다.배현수는 그녀와 이마를 맞댄 채 물었다.“원하는 게 뭔데?”줄 수 있는 것이라면 반드시 전부 다 내줄 것이다.조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배현수를 보며 말했다.“배현수, 난 오롯이 당신만을 원해요.”목소리는 차가웠지만 부드럽고 단호했다.이 말을 들은 배현수는 순간 멍해졌다.한참이나 그녀를 쳐다본 배현수는 이 한마디가 너무 버겁다고 느껴졌다. 그는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그녀를 이끌고 차로 향했다.“밖이 너무 추워. 내가 필요하면 차 안에서 줄게.”“그런 뜻이 아니에요.”배현수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조롱하는 말투로 물었다.“그럼 네가 말한 게 뭔데?”“싫어요.”“싫다고?”얼굴이 살짝 달아오른 조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그런 건 필요 없어요.”일부러 조롱하는 배현수 때문에 조유진은 점점 더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그녀의 허리를 잡고 차 안으로 들어간 배현수는 큰 그림자로 그녀를 가렸다. 차가운 카리스마와 타고난 강한 풍채는 상위자의 기세를 그대로 내뿜고 있었다.하지만 몸을 숙이고 있는 배현수는 여느 때보다 더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에 키스했다. 그는 그녀를 유혹하듯 달래는 말투로 물었다.“왜 필요 없는데? 불편해? 아니면 아팠어?”조유진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배현수는 쉰 목소리로 그녀의 귀에 진지하게 말했다.“유진아, 최근 몇 번은 별로 힘을 안 줬어.”조유진은 그의 말이 어이가 없었지만 얼굴은 이미 빨갛게 달아올랐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네요. 내 말은 그 뜻이 아니에요.”배현수는 그녀의 살짝 벌어진 입술을 응시하며 말했다.“방금 그 키스가 나에게 보내는 신호인 줄 알았어.”타이밍이 어쩌면 이렇게 기가 막힐까...조유진이 반박하려 하자 그의 빨간 입술이 그녀의 입을 막아 버렸다.배현수는 다리 위에 그녀를 앉힌 후, 한 손으로는 그녀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리
당황한 조유진은 배현수를 옆으로 밀치고 안쪽 진열대로 들어갔다.진열대 맨 아래 줄에는 정말 각양각색의 꽃 향 콘돔이 있었다. 장미, 재스민, 오렌지 등...조유진은 진열된 것 중에 한 박스를 들더니 조롱 섞인 말투로 물었다.“이제 이런 물건은 겉 포장이 껌과 거의 비슷해지는 것 같아요. 설마 두리안 향까지 있는 것은 아니겠죠?”상인들은 사람의 눈길을 끌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이다.두리안 향 콘돔뿐이겠는가? 두리안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이상, 그에 따른 두리안 맛의 기생 용품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녀를 힐끗 흘겨본 배현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두리안 향 좋아해?”“뭐, 싫어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아요. 많이 먹으면 질려요.”조유진은 남초윤이 두리안을 즐겨 먹던 것이 생각났다. 대학교에 다닐 때, 남초윤은 큰 두리안을 통째로 사서 먹곤 했다. 육즙이 그대로 보이는 두리안은 살짝 건조된 상태라 아삭한 맛이 날 때도 있었다. 품질이 좋은 두리안은 정말 맛있었다.“다 한 번 맛보면 되지.”순간 멈칫한 조유진은 그제야 배현수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그녀에게 물어본 것은 두리안 맛 과일이 아니라...그녀를 보는 배현수의 눈빛은 조롱이 섞여 있으면서도 의미심장했다.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오른 조유진은 손에 있는 장미 향의 콘돔마저 너무 뜨거워 손이 데일 것 같았다.배현수의 따가운 시선과 마주친 조유진은 저도 모르게 발끈하며 말했다.“두리안, 안 좋아해요!”배현수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더니 한 걸음 다가가 뼈마디가 분명한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에 쥐어진 콘돔을 가져갔다. 그러고는 조롱 섞인 말투로 말했다.“장미 향도 괜찮지. 다 한 번 맛보면 되지.”그는 진열대를 훑어보며 진지하게 고르고 있었다.“또 어떤 향을 좋아해? 내 기억에는 네가 오렌지를 좋아했던 것 같은데?”한참 후, 그는 다섯 가지 맛을 골랐다. 장미, 오렌지, 딸기, 재스민, 레몬.결제하러 가는 배현수의 뒷모습을 보던 조유진은 혹시 가게에 키오스크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배현수는 이미 입으로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그러고는 한참이나 조수석에 그녀를 가두고 키스를 퍼부었다.마지막 이 시간을 즐기기로 마음먹은 후부터 배현수는 더 없이 걷잡을 수 없어졌다....다음 날 오전.잠에서 깬 조유진은 아래층에서 울려 퍼지는 선유의 외침 소리를 들었다.“엄마!”그녀는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서둘러 가운을 두르고 아래층 거실로 급히 내려갔다. 아래층에 가 보니 오피스룩을 입은 두 명의 여성 가이드가 럭셔리한 웨딩드레스를 안으로 들여놓는 것이 보였다.“조유진 씨, 이것은 우리 가게에서 주문한 웨딩드레스입니다. 사이즈는 조유진 씨의 사이즈에 맞게 수선했어요. 한번 입어보신 다음에 사인하실래요?”순간 얼떨떨해진 조유진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웨딩드레스를 산 적이 없는데 혹시 배송이 잘 못 된 게 아닐까요?”“배현수 씨가 아침 일찍 전화해서 주문한 거예요. 여기 맞습니다, 조유진 씨.”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려던 선유는 깜짝 놀라 눈을 똑바로 뜨고 말했다.“엄마! 아빠가 설마 프러포즈하려고 주문한 거 아니에요? 웨딩드레스가 너무 예쁜 것 같아요. 위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도 아주 많아요.”녀석은 작은 손을 뻗어 웨딩드레스 치맛자락의 다이아몬드를 만졌다.자세히 보니 어젯밤 조유진이 매장 앞에 서서 마음에 들어 했던 웨딩드레스였다.그런데 배현수가 이렇게 바로 사 올 줄은... 이 사람에게 웨딩드레스의 구매는 정말 장 보는 것과 다름없는 것 같았다.조유진이 멍하니 서 있을 때, 깔끔한 정장으로 차려입은 배현수가 위층에서 내려왔다.“드레스를 진짜로 사 오면 어떡해요? 어젯밤에는 그냥 생각 없이 한 말이란 말이에요.”옆에 서 있던 매장 직원은 아부하는 듯한 얼굴로 청산유수처럼 말하기 시작했다.“조유진 씨가 생각 없이 한 말까지도 배현수 씨가 이렇게 기억하고 있는 거 보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증명하는 거 아니겠어요. 그러니 당연히 비싼 드레스를 받을 만하죠.”배현수는 조유진의 어깨를
조유진이 미처 답장하기도 전에 남초윤에게서 음성통화가 걸려왔다.“여보세요? 유진아. 배현수가 너에게 웨딩드레스까지 사줬는데 왜 실검에는 네가 배현수에게 차였다는 기사가 떴어? 어떻게 된 거야? 안 그래도 물어보려고 했어. 어젯밤에 배현수가 괴롭혔어?”순간 조유진은 어리둥절했다. 괴롭혔다고?관계를 갖는 게 괴롭힘이라고 하면... 어젯밤 그는 정말 심각하게 그녀를 괴롭혔다. 장미 향의 콘돔이 아직도 머릿속에 또렷이 남을 정도로...남초윤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아침 일찍 실검에 들어가 보니 네가 배현수에게 차여서 울면서 붙잡는 사진이 있더라고.”순간 조유진은 가슴이 두근거렸다.“그럼... 그 사적인 스킨십 장면도 다 찍혔어?”그 말에 남초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떤 스킨십인데? 수위가...?”“어떻게 배현수와 관계 갖는 사진까지 찍을 수 있어? 그것도 SNS에 올렸다고?”몇 초 동안 멍하니 있던 남초윤은 그제야 그녀의 말을 알아들었다.“야, 무슨 말을 하는 거야?”아직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조유진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이런 게 사생활 침해 아니야? 고소할 수 있지?”사무실에 있는 남초윤은 하마터면 배를 끌어안고 폭소를 터뜨릴 뻔했다.“그러니까 실검에서 배현수가 너를 찼다는 게 가짜란 말이지? 어제 꽤 뜨거운 밤을 보냈나 봐?”배현수가 조유진을 울렸다고?조유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누가 누구에게 차였다는 거야? 도대체 무슨 말인데?”남초윤은 계속 웃으며 말했다.“네가 직접 실검에 들어가서 봐봐. 그런데 유진아, 그동안 네가 아주 순수하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엉큼하네?”음성통화를 끊은 후, SNS에 들어간 조유진은 배현수와 관련된 연관 검색어를 여러 개 발견했다.[SY그룹 배현수 대표. 글로벌 하버에 깜짝 등장, 사망 소식 허위 확인][SY 주가가 하루아침에 폭등][배현수, 첫사랑과 결별]앞의 두 검색어는 사실이었기에 이상한 점이 없었다. 어젯밤, 두 사람이 데이트를 나가기 전, 배현수가
[두 사람은 헤어져라! 배 대표님은 송인아 씨와 다시 만납시다! 우리 송인아 씨는 절대 남자 친구를 감옥에 보내지 않을 거예요! 비즈니스 거물 vs 여자 톱스타! 세기의 결혼! 추진! 추진!]...넋을 잃은 채 악플을 보고 있던 조유진은 남초윤이 보낸 메시지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지금 누리꾼들 정말 오지랖이 넓어. 남의 일까지 다 참견하고! 배현수가 누구와 있든 본인들과 무슨 상관인데? 송인아 씨 팬들도 웃기네? 이참에 배현수와 다시 어떻게 해보려는 심산인데? 유진아. 너의 SNS 계정에 웨딩드레스 사진을 올려버려! 팬들이 열 받아 죽게!]조유진은 한숨을 푹 내쉰 후, 전화기를 들어 답장했다.[안 그래도 인터넷에 평판이 안 좋은 마당에 웨딩드레스 사진까지 올려봐? 내가 배현수와 재결합했다고 하면 송인아의 팬들이 가만히 있겠어? 분명 배현수에게 화풀이하면서 SY그룹에까지 피해를 주겠지.][그럼 송인아의 팬들이 너를 욕하는 거 보고만 있을 거야? 보니까 이런 악플들 대다수가 송인아의 뇌절 팬들이 쓴 것 같던데. 송인아가 뭔데? 본인이 진짜로 배현수의 약혼녀인 줄 아는 거야? 깨진 거울을 다시 붙인다고? 깨질 거울이라도 있긴 있어? 시작도 끝도 없었는데 다시 만난다는 얘기는 또 뭐야? 열 받아 죽겠네!]조유진은 휴대전화를 손에 쥔 채 잠시 침묵에 빠졌다.이런 악플에 조금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솔직히 말해서 배현수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웨딩드레스를 선물했지만 프러포즈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적어도 당분간, 배현수는 그녀와 결혼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조유진도 이 부분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사실 이 점이 제일 의아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남초윤에게 물었다.[내 친구가 있는데... 전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대. 두 사람 다 결혼할 나이가 됐는데 남자가 결혼할 생각이 없는 것 같대. 여자를 떠보려는 걸까?][??? 배현수가 너를 울렸는데도 너와 결혼하지 않겠대? 완전히 쓰레기네?!][..
SY그룹, 회의실 안.팽팽한 분위기 속에서 임원 회의가 방금 끝났다.어떤 사람은 배현수의 능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배현수가 실종 당시, 사람들은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홍보팀에서는 최대한 외부에 소식이 퍼지지 않도록 막으려 했다. 하지만 배후에서 움직이는 그 상대를 통해 밝혀지는 바람에 얼마 전 SY의 주가는 한동안 바닥을 쳤다.조유진이 회사 일에 개입하자 불만을 품고 있던 대주주들은 주식이 바닥을 치기 전, 아예 팔아치워 버렸다.그러다 보니 그 지분은 예외 없이 배현수에게 돌아갔다.이런 수법은 월가에서 자주 사용하는 수법이었다.마지막까지 주식을 꼭 쥐고 있다가 팔지 않은 대주주들은 손에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배현수가 사고 나기 전, 그의 명의로 되어 있는 주식은 45% 정도였다. 하지만 한차례의 큰 풍파가 지나가자 그의 주식은 55%로 늘었다. 그중 10%가 넘는 주식은 사람들이 헐값에 매각하면서 사들인 것이었다. 어젯밤, 조유진과 글로벌 하버에서의 데이트 사진이 공개된 후, 회사 홍보팀에서는 각 매체를 통해 배현수가 죽지 않았다는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그러다 보니 오늘 아침 SY그룹의 주가는 무려 9포인트나 반등했다.어떤 임원들은 배현수가 의도적으로 그런 것 아니냐고 추측하기도 했다. 홍보팀 팀장 박상민은 어젯밤 각 언론 매체들과 한바탕 여론 전쟁을 치른 자신에게 만족하고 있었다.“배 대표님, 이런 기사가 한 번 더 나와주면 주가가 10%는 더 뛸 수 있을 것 같아요.”고개를 들어 배현수의 안색을 살피던 서정호는 박상민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박 팀장님, 어제 홍보팀에서 언론 기자들과 여론전을 펼치느라 너무 수고했어요.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왔네요. 점심시간이 다 되었으니 얼른 점심 드시고 좀 쉬세요. 그래야 다시 정신을 바짝 차려 일하죠.”하지만 한창 신이 난 박상민은 서정호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안 그래도 지금 여론이 한창 좋을 때인데 생각이 없는 송인아는 트위터에 다이아몬드 반지 사진까지 올렸더라고요
만약 사실이라면 박상민은 정말 이 기회를 잘 이용하려고 할 것이다.옆에 있던 서정호는 배현수를 힐끗 바라봤다.남자의 눈빛은 음험하기 짝이 없었고 얼음장같이 차가운 기운마저 잔뜩 감돌았다.서정호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박상민 이 인간은 기사화될 좋은 건수들도 많은데 하필이면 배 대표의 사생활 감정을 이용하려 하고 있으니... 그러다 보니 조유진까지 여론에 오르내리게 되었고 사람들의 표적이 되었다.배현수의 눈에 차갑고 경멸스러운 감정이 가득 감돌았다. 그런 도도한 눈빛은 저도 모르게 주위 사람을 압박했다.“조햇살을 이용해 사이버폭력을 가하는 것도 박 팀장이 계획한 여론 홍보인가요? 한번 말해봐요. 또 어떤 방법을 더 생각하고 있는지. 내가 어느 장단에 맞춰서 춤을 추면 될까요?”배현수가 내뱉는 한 글자 한마디는 뼛속까지 시릴 정도로 온몸이 으스스 떨리게 했다. 박상민은 그제야 말을 잘못했음을 깨달았다.“배 대표님, 조햇살과 글로벌 하버에서 헤어지는 사진은 공개되자마자 누리꾼들의 동시다발적인 호응을 받았습니다. 송인아는 계획에 없었던 겁니다. 갑자기 이렇게 나타날 줄 몰랐어요. 물론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네티즌들이 조햇살에게 한 말들이 사이버폭력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물론 한동안 인터넷에 떠도는 욕설은 감수해야겠죠. 하지만 인터넷은 기억이 없어요. 이 열기가 식으면 조햇살은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차마 들을 수 없었던 서정호는 눈을 꼭 감으며 말했다.“박 팀장님, 그만 좀 닥치세요.”‘닥치지 않으면 내일 이 회사에 출근 못 할 수도 있어요!’ 입꼬리만 올리며 웃는 배현수의 얼굴은 차갑기 그지없었다.“누가 조햇살과 헤어졌다고 했어요? 그리고 내가 송인아와 사귀었다고요? 증거는요?”그럼 아니란 말인가?박상민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조용히 배현수를 바라봤다. 이마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배, 배 대표님... 조햇살과의 결별 소식이 전해지자 주가가 바로 올라가서
만약 이번 여론전에서 조유진을 단순히 숨기려만 한다면 그 효과는 크지 않을 것이다. 누리꾼들이 잠잠해지는 데 시간이 걸린다.만약 조유진과의 관계를 정식으로 공개하면 적들의 함정에 빠져 또다시 SY를 부정적인 여론에 몰아넣을 수 있었다.거짓 증언을 한 사람이 설사 강요로 한 행동이라고 해도 기정사실로 된 사건의 전말은 어떻게든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배현수와의 의지와 별개로 바깥사람들에게 조유진은 그렇게 긍정적인 존재가 아니었다.미간을 잔뜩 찌푸린 배현수는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서정호는 배현수의 생각을 대충 짐작했다.“배 대표님, 지금쯤 아마 드래곤 파에서도 저희 행동을 눈여겨보고 있을 겁니다. 만약 한 발이라도 잘못 내디디면 오히려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조유진 씨도 사리에 밝은 사람이니 분명 대표님을 이해할 거예요.”홍보팀의 박상민이 꼼수를 부리긴 했지만 이번 수법으로 부정적인 여론에 휩싸였던 SY그룹의 상황을 단숨에 반전시켰다.단 한방으로 승리한 셈이다.서정호의 말을 들은 배현수는 입꼬리를 올리며 조롱 섞인 어조로 말했다.“오늘 아침에 웨딩드레스를 선물했어. 그런데 반나절도 안 돼서 외부에 아무 사이가 아니라고 반박기사를 낼까? 유진이가 너그러운 사람이니까 이런 것도 다 감수해야 하는 거야?”침을 꿀꺽 삼킨 서정호는 잠자코 가만히 있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눈을 꼭 감은 배현수의 눈시울은 어느새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피식 웃으며 한마디 했다.“내가 얼마나 원망스러울까?”“아니... 아니에요. 조유진 씨가 그렇게 억지 부릴 사람은 아니에요.”‘하지만 완전히 실망하겠죠.’물론 이번 기회를 빌려 그녀가 자발적으로 대제주시를 떠날 수 있게 한다면 이것도 어쩌면 그의 계획에 있던 것이 아닌가?배현수는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것들을 머릿속에 계산하고 있었다.SY의 주가 하락은 계획의 일환이었다.글로벌 하버 데이트 사진도 그중 하나였다. 몰래 결별설이 불거지게 하기 위해서였다.그런 포즈를 일부적으로 취하지 않으면 누가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