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창민은 조유진이 원하는 그 어떤 것도 다 들어줄 것이다. 조유진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배현수를 보며 물었다.“선유는 현수 씨의 딸이에요. 개인 과외할 선생님을 구하는 일을 왜 창민 오빠에게 부탁해요?”그동안 배현수는 엄창민과 엮이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그런데 지금은 먼저 엄창민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도 선유에게 할 개인 과외 같은 ‘집안일’을 말이다. 조유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지만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생각을 바로 눈치챈 배현수는 이내 고개를 옆으로 돌려 말했다.“어차피 엄창민에게 관심이 없잖아? 그저 오빠라고 생각한 거 아니었어?”조유진은 입술을 달싹이더니 일부러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그건 모르죠? 언제 마음이 변할지. 어쨌든 미혼인 남자와 여자잖아요. 안 그래요? 배 대표님?”마지막 한 마디는 일부러 배현수의 귀에 대고 또박또박 말했다. 그 말에 그녀를 받쳐주던 큰 손은 일부러 복수라도 하려는 듯 힘을 살짝 풀었다. 깜짝 놀란 조유진은 얼른 그의 목을 껴안고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뭐 하는 거예요?”“방금 뭐라고 불렀어?”조유진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배 대표라고?”조유진이 일부러 이렇게 말한다는 것을 배현수도 알고 있었기에 담담한 목소리로 협박했다.“손 놓을까?”조유진은 그의 목을 힘껏 끌어안으며 말했다.“안 돼요.”가을비가 내리는 밖은 습하고 추웠다. 비도 생각보다 많이 오고 있었다.물이 흥건히 고여 있는 길가에 발이 닿기만 하면 하이힐은 바로 망가질 것이다.눈썹을 치켜세운 배현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녀를 보며 말했다.“그럼 예쁘게 불러봐.”“배현수.”퉁명스럽고 어린아이 같은 말투는 마치 협박을 받는 사람 같았다. 배현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내가 너를 납치라도 했어?”뭐랄까... 협박한 것은 맞으니까... 목소리를 가다듬은 조유진은 조금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배현수?”‘이 정도면 되겠지?’입꼬리를 살짝 올린 배현수는 야유하는 듯
강이진은 못마땅한 얼굴로 손에 들고 있던 선물을 옆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오빠, 이것은 오빠와 새언니를 위해 특별히 고른 커플 컵이야. 평생 두 사람이 헤어지지 말라는 의미도 있고. 그동안 오빠가 조유진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최대한 오빠를 도우려고 했어. 그런데 오빠가 싫다고 하니 뭐, 어쩔 수 없지. 오빠는 조유진을 좋아하는 게 현수 오빠와의 우정을 배신하는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내 눈에 현수 오빠는 그저 남이야. 오빠는 내 친오빠이고. 나는 당연히 오빠 편이고. 그래서 오빠가 조유진과 잘되기를 바랐어. 그런데 오빠는 내가 오히려 방해만 한다고 하니… 나는 오빠가 너무 안타까워. 하지만 이미 심미경과 결혼했으니 진심으로 축복할 수밖에.”안도의 한숨을 내쉰 강이찬은 인상을 더욱 찌푸렸다.“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우리가 친남매이기 때문에 네가 더더욱 자수하기를 바라. 이진아, 그렇게 자꾸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안 돼.”“오빠, 내가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아. 하지만 잊었어? 몇 년 전, 우리가 고향에 돌아갔을 때, 갑자기 지진이 일어났던 날, 나는 오빠를 구하기 위해 콘크리트 기둥에 깔려 다리가 부러졌어! 그때 구조대원들에게 오빠를 먼저 살려달라고 부탁했고! 오빠, 이 세상 그 누구도 나를 안 좋게 말할 수 있지만 오빠는 안 돼!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오빠와 내 손을 잡고 말했잖아. 이 세상에 우리 둘만이 피를 나눈 가족이라고, 앞으로 서로 잘 도우며 살아야 한다고. 나는 최선을 다해 오빠를 도왔어. 그런데 오빠는? 나를 위해 한 게 뭐가 있는데?”한바탕 호소를 퍼부은 강이진은 억울한 듯 눈물을 흘렸다.강이찬은 고개를 숙인 채 정색한 얼굴로 서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고개를 들어 하나뿐인 여동생을 쳐다보는 강이찬의 눈빛에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온 이유가 고작 가족의 사랑에 대해 말하려고 온 거야? 이진아, 네가 어떤 짓을 했는지 알기나 해?”
강이찬은 고개를 위로 젖히고 눈을 꼭 감았다. 그는 주먹을 쥔 손에 힘을 꽉 주고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이진아, 꼭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야 해?”“오빠, 몰아붙이는 건 오빠야. 현수 오빠도 감옥에 갔다 왔잖아. 가서 물어봐. 3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나 정말 들어가고 싶지 않아. 그런 곳에 일단 들어가면 인생은 끝장이야! 감옥에 가느니 차라리 여기서 그냥 죽을게!”다시 뒤돌아선 강이찬은 눈이 시뻘게져 있었다. “그 칼 내려놔.”강이진은 울면서 미친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소란 피우는 거 싫어한다는 거 알아. 오빠, 마지막으로 한 번만 도와줘. 오빠와 심미경의 결혼식이 끝나면 바로 외국으로 나갈게.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게. 두 번 다시 소란 피우지 않을게. 오빠... 제발 한 번만 도와줘. 우리가 피를 나눈 친남매인 걸 봐서라도... 부모님의 체면도 있잖아. 예전에 오빠를 구하려고 내가 다리를 다칠 뻔한 것을 봐서라도 제발...”강이찬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런 그의 표정은 애석하면서도 무감각해 보였다.강이찬이 계속 아무 말을 하지 않자 날카로운 칼을 들고 있던 강이진의 손은 점점 더 목 가까이 들이밀었다. 벗겨진 그녀의 피부에서는 피까지 흘러나왔다.애원하는 강이진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떨리고 있었다.“오빠, 나 정말 감옥에 가고 싶지 않아. 오빠가 계속 이러면 나는 정말 죽을 수밖에 없어.”“미경 씨가 죽지 않았으니까 죄가 심각하지는 않을 거야. 게다가 자수하면 기껏해야 4, 5년이겠지. 이진아, 4, 5년 뒤라고 해도 너 겨우 서른 살이야. 감옥에서 잘 보이면 가석방될 수도 있고...”강이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참고 있던 강이진이 비명을 질렀다.“4, 5년? 그 후에 나오면 폐인이나 다름없는데 여기서 누가 나를 받아주겠어? 그때는 취직도 안 돼. 오빠, 어떻게 심미경 때문에 내 인생을 망치려 해? 그래, 차라리 내가 죽을게. 죽으면 그만이니까!”칼을 들고 있는 강이진은 당장이라도 목을 찌르려
전화기 너머로 옥상의 윙윙거리는 바람 소리가 들렸고 통화하는 사람의 목소리도 매우 급해 보였다.이내 정신을 차린 강이찬은 휴대전화를 꽉 잡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일단 조금만 더 잡고 있어 주세요. 바로 갈게요.”이 전화 소리에 옆에서 자고 있던 심미경까지 깼다.옆에 있던 심미경은 그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무슨 일이에요?”“강이진이 또 미친 짓을 하네요. 잠깐 나갔다 올게요.”심미경은 흠칫 놀랐다.“이진이가 왜요? 나도 같이 갈까요?”“아니요. 괜찮아요. 먼저 쉬어요. 나 기다리지 말고.”심미경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운전 조심하고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요.”“네, 알겠어요.”...쌀쌀한 초겨울 밤, 찬바람이 살을 에는 듯 추웠다.옥상에 서 있는 강이진은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강이찬이 도착했을 때, 옥상에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었다.“젊은 아가씨가 대체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이러는 거예요?”“빨리 내려오세요. 무슨 일이 있든 일단 내려와서 얘기해요!”중년을 훌쩍 넘긴 아저씨와 아줌마들은 열심히 그녀를 타이르고 있었다.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강이진에게 다가간 강이찬은 차가운 얼굴로 호통쳤다.“너 이제 어린애 아니야. 잘못했으면 벌을 받을 생각 해야지! 어떻게 그 죄가 두렵다고 자살할 생각만 하는 거야? 내려와! 사람들이 비웃어!”하지만 강이진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는 눈물범벅인 얼굴로 고집을 피우며 말했다.“거기에 들어가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일단 내려와서 얘기해!”강이진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오빠, 내가 여기서 뛰어내리면 나를 용서해 줄 거야?”“이진아, 그렇게 제멋대로 굴지 마! 더 이상 나에게 강요하지도 말고!”강이진이 정말 뛰어내리면 강이찬은 평생 죄책감 속에서 살 것이다.강이진은 앞으로 한 발 내디뎠다. 감옥에 가는 것보다 차라리 이렇게 죽는시늉으로 강이찬의 마음을 되돌리고 싶었다. 강이찬은 조급한 마음을 가다듬고 외쳤다.“강이진! 내려와! 더 이상 소
“트럭 기사를 사주해 교통사고를 낸 이유가 뭐야? 미경 씨가 미워서? 이진아, 너 이렇게 못된 애였어?”강이진은 계속 억울하다며 호소했다. 강이찬이 생각을 바꿀 기미가 보이자 이제 아예 대놓고 불쌍한 척했다.“아니야, 오빠... 심미경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잖아. 지난번에 우리가 서재에서 다투면서 했던 말을 들었나 봐. 조유진의 어머니를 내가 죽였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조유진에게 잘 보이려고 고자질하러 가는 거 있지? 오빠, 그때는 너무 무서워서 그랬어. 오빠도 알잖아. 조유진과 배현수가 어떤 사람인지. 심미경이 진짜로 이간질해서 내가 범인이라고 말한다면 정말 끝장이야. 현수 오빠의 성격에 참을 수 있겠어? 아마 당장 나를 죽이려 했을 거야. 게다가...”여기까지 말한 강이진은 다시 한번 침을 꿀꺽 삼켰다. 배현수가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나올지 생각만 해도 살이 떨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을 이었다.“안 그래도 현수 오빠는 안정희를 죽인 사람이 자기 엄마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어. 이런 상황에 심미경이 가서 그 범인이 나라고 하면 바로 믿겠지. 설령 그게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도 나에게 덮어씌우려 할 거야! 조유진과 함께 있으려면 희생양을 찾아야 하니까! 오빠, 사람은 이기적인 동물이야. 심미경의 소원은 오빠와 결혼하는 거고 그 소원이 곧 이루어질 거야. 오빠가 나를 강제로 감옥에 보내면 일만 더 꼬여. 오빠도 내가 죽는 것을 바라지 않잖아. 내가 잘 뉘우쳐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기를 바라는 거잖아. 나 이제 내 잘못을 알아. 깊이 뉘우치고 있고. 그런데 이런 일들을 만약 현수 오빠가 알아봐? 내 설명 따위 들으려고 하지 않을 거야. 내가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사람은 모두 득과 실을 따지는 동물이다. 이익을 추구하고 해를 피하는 것 또한 인간의 본성이다.소파에 기댄 강이찬은 눈을 감고 조용히 숨을 돌렸다.강이진의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었고 그녀는 마치 상갓집 개처럼 강이찬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녀는
이렇게 예쁜 웨딩드레스를 누가 싫어하겠는가?“마음에 들면 사자. 그런데 지금은 문을 닫았으니 내일 같이 사러 올까?”배현수의 가벼운 말투는 장 보는 것처럼 경솔해 보였다. 드레스의 아래에 몇백억이라는 가격표가 놓여 있었다. 조유진은 옆에 있던 배현수를 올려다보며 피식 웃었다.“웨딩드레스는 결혼할 때 입는 거예요. 우리는 지금 결혼도 안 했고요.”게다가 대부분 웨딩드레스는 결혼식에 한 번만 입기에 임대를 선택하는 사람이 많다. 일부 연예인들마저도 결혼식의 웨딩드레스는 직접 돈 내고 사는 것이 아니라 협찬을 받는다.일 년 내내 연예인들의 기사를 쓰는 남초윤이 말하길 연예인들이 입는 턱시도 또한 대부분 빌린 것이라 했다. 이름이 좀 알려진 연예인들은 협찬을 많이 받는다고 했다. 누가 돈이 그렇게 많아서 행사에 갈 때마다 디자인이 다른 고급 드레스를 사 입겠는가?배현수는 사랑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따뜻하게 바라보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좋아하는 거 아니었어?”“너무 비싸요.”평소에도 입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장식용으로만 사기에는 돈이 너무 아까웠다.그녀가 이것저것 너무 많은 것들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제일 부족하지 않은 게 돈이야.”그 말에 조유진은 장난기 섞인 얼굴로 물었다.“전에 나더러 돈 갚으라고 했잖아요?”그 3천억은 조유진이 살면서 진 가장 큰 빚이었다.신용카드로 3천만 원을 빚진 것도 무서워 마음을 졸이던 그녀였다. 그런데 3천억이라니... 아마 수십 번 다시 태어나도 이 돈은 절대 못 갚을 것이다.배현수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헛기침을 한 번 했다.“그때 너보고 돈 갚지 말라고 했으면 도망쳤겠지?”말을 하는 그의 까만 눈동자는 한없이 진지했고 농담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귀가 빨개진 조유진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도망 안 가요. 선유가 옆에 있는데 어떻게 도망가요.”그땐 그저 어떻게 배현수를 대해야 할지 몰랐다. 어떻게 화해해야 할지는 더더욱 감이 잡히지 않았으니까...배현수는 시선을 내려 그
하지만 서로의 뜨거운 숨결은 아직도 두 사람의 주위를 맴돌았다.배현수는 그녀와 이마를 맞댄 채 물었다.“원하는 게 뭔데?”줄 수 있는 것이라면 반드시 전부 다 내줄 것이다.조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배현수를 보며 말했다.“배현수, 난 오롯이 당신만을 원해요.”목소리는 차가웠지만 부드럽고 단호했다.이 말을 들은 배현수는 순간 멍해졌다.한참이나 그녀를 쳐다본 배현수는 이 한마디가 너무 버겁다고 느껴졌다. 그는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그녀를 이끌고 차로 향했다.“밖이 너무 추워. 내가 필요하면 차 안에서 줄게.”“그런 뜻이 아니에요.”배현수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조롱하는 말투로 물었다.“그럼 네가 말한 게 뭔데?”“싫어요.”“싫다고?”얼굴이 살짝 달아오른 조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그런 건 필요 없어요.”일부러 조롱하는 배현수 때문에 조유진은 점점 더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그녀의 허리를 잡고 차 안으로 들어간 배현수는 큰 그림자로 그녀를 가렸다. 차가운 카리스마와 타고난 강한 풍채는 상위자의 기세를 그대로 내뿜고 있었다.하지만 몸을 숙이고 있는 배현수는 여느 때보다 더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에 키스했다. 그는 그녀를 유혹하듯 달래는 말투로 물었다.“왜 필요 없는데? 불편해? 아니면 아팠어?”조유진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배현수는 쉰 목소리로 그녀의 귀에 진지하게 말했다.“유진아, 최근 몇 번은 별로 힘을 안 줬어.”조유진은 그의 말이 어이가 없었지만 얼굴은 이미 빨갛게 달아올랐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네요. 내 말은 그 뜻이 아니에요.”배현수는 그녀의 살짝 벌어진 입술을 응시하며 말했다.“방금 그 키스가 나에게 보내는 신호인 줄 알았어.”타이밍이 어쩌면 이렇게 기가 막힐까...조유진이 반박하려 하자 그의 빨간 입술이 그녀의 입을 막아 버렸다.배현수는 다리 위에 그녀를 앉힌 후, 한 손으로는 그녀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리
당황한 조유진은 배현수를 옆으로 밀치고 안쪽 진열대로 들어갔다.진열대 맨 아래 줄에는 정말 각양각색의 꽃 향 콘돔이 있었다. 장미, 재스민, 오렌지 등...조유진은 진열된 것 중에 한 박스를 들더니 조롱 섞인 말투로 물었다.“이제 이런 물건은 겉 포장이 껌과 거의 비슷해지는 것 같아요. 설마 두리안 향까지 있는 것은 아니겠죠?”상인들은 사람의 눈길을 끌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이다.두리안 향 콘돔뿐이겠는가? 두리안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이상, 그에 따른 두리안 맛의 기생 용품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녀를 힐끗 흘겨본 배현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두리안 향 좋아해?”“뭐, 싫어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아요. 많이 먹으면 질려요.”조유진은 남초윤이 두리안을 즐겨 먹던 것이 생각났다. 대학교에 다닐 때, 남초윤은 큰 두리안을 통째로 사서 먹곤 했다. 육즙이 그대로 보이는 두리안은 살짝 건조된 상태라 아삭한 맛이 날 때도 있었다. 품질이 좋은 두리안은 정말 맛있었다.“다 한 번 맛보면 되지.”순간 멈칫한 조유진은 그제야 배현수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그녀에게 물어본 것은 두리안 맛 과일이 아니라...그녀를 보는 배현수의 눈빛은 조롱이 섞여 있으면서도 의미심장했다.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오른 조유진은 손에 있는 장미 향의 콘돔마저 너무 뜨거워 손이 데일 것 같았다.배현수의 따가운 시선과 마주친 조유진은 저도 모르게 발끈하며 말했다.“두리안, 안 좋아해요!”배현수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더니 한 걸음 다가가 뼈마디가 분명한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에 쥐어진 콘돔을 가져갔다. 그러고는 조롱 섞인 말투로 말했다.“장미 향도 괜찮지. 다 한 번 맛보면 되지.”그는 진열대를 훑어보며 진지하게 고르고 있었다.“또 어떤 향을 좋아해? 내 기억에는 네가 오렌지를 좋아했던 것 같은데?”한참 후, 그는 다섯 가지 맛을 골랐다. 장미, 오렌지, 딸기, 재스민, 레몬.결제하러 가는 배현수의 뒷모습을 보던 조유진은 혹시 가게에 키오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