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불빛만 비치는 어두운 공간에는 두 사람의 숨소리만 들렸고 모든 욕망이 이곳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스크린을 등진 채 배현수의 다리 위에 앉은 조유진은 심장이 두근거렸다.“여기에 CCTV가 있는 것은 아니겠죠?”“없어, 있어도 이미 껐어.”이 프라이빗 영화관은 육지율이 추천해 준 것이다. 육지율은 여기에 투자까지 했다 보니 주주인 셈이었다. 그는 이런 엉망진창인 사업에 투자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술집, 연극장, 길모퉁이 카페, 보드게임 놀이방, 방 탈출... 돈을 벌 수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즐기기만 하면 되니까...조유진은 반신반의한 얼굴로 물었다.“정말요?”그녀와 이마를 맞댄 배현수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다른 사람에게 사생활까지 보여줄 생각 없어.”그의 말에 조유진은 어느 정도 마음이 놓였다.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공공장소에서 행동이 너무 과격할 수는 없지 않은가...“영화도 아직 다 안 끝났고... 여기 꽤 더러울 것 같은데요.”그 말에 배현수는 그녀와 코끝을 맞대며 장난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유진아, 무슨 생각하는 거야?”조유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봤다.“그저 뽀뽀만 하려고 한 건데? 더 깊은 것까지 원한 거야?”배현수의 말에 조유진은 말문이 막혔다.‘아니! 그게 아니라 싫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그녀는 귀까지 빨개졌다.사람을 이상한 생각 하게끔 유도한 게 누군데... 그녀는 배현수가 원하는 게 그 짓인 줄 알았다. 배현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늘 차갑고 도도한 그였지만 그녀를 보는 눈빛은 사랑이 가득 담겨있었다.대형 스크린의 빛이 그의 얼굴에 반사되어 그림자가 가끔 졌지만 조유진을 보는 눈빛은 너무 그윽하고 따뜻해 평소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어두운 빛 때문에 조유진은 그의 얼굴에 스쳐 간 아픔과 아쉬움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저 그런 그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갖다 댔다.입술이 닿자마자 팝콘의 달콤함이 입안 가득 퍼지며
‘꼭 돌아올 거야, 반드시. 유진이와 약속했으니까.’ 멈칫한 조유진의 눈시울은 이미 붉어졌지만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있었다.“아까 계속 자고 있지 않았어요?”“들었어.”굳이 듣지 않아도 영화 속 남자주인공 로비와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대사가 쉽게 외워졌다.조유진은 그의 품에 안긴 채 영화의 엔딩 장면을 함께 지켜봤다.남자주인공 로비는 집사의 아들로 태어나 소꿉친구 세실리아와 사랑을 나눴다. 하지만 사촌 누나의 증언과 모함으로 강간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몇 년 후,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죄를 뒤집어쓴 남자주인공은 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군대로 들어갔고 무자비한 전쟁은 결국 로비와 세실리아를 완전히 갈라놓았다. 로비가 노르망디에서 죽은 후, 세실리아도 전쟁 속에 살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로비가 죽었을 때, 손에는 여주인공의 편지 뭉치가 꼭 쥐어져 있었다.영화의 끝은 누군가의 꿈으로 끝났다.꿈속에서 로비와 세실리아는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했던 바닷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모래사장을 뛰어다니며 부딪히는 파도 옆에서 오랫동안 키스를 나눴다.영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조유진은 어느새 눈물을 펑펑 흘렸다. 그녀는 휴지를 손에 쥐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하염없이 스크린을 바라보았다.영화 속 남자주인공은 배현수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다만 배현수는 전쟁에 참가하지도 않았고 패혈증으로 죽지 않았다.하지만 3년 동안의 감옥 생활은 분명 그에게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굴욕을 안겼을 것이다.3년이라는 시간은 조유진이 그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로비보다 배현수가 더 가슴이 아팠다.이 영화는 그녀의 마음속에 묵혀 두었던 어느 한 감정을 강하게 건드린 듯 두 볼에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그런 그녀를 품에 꼭 껴안은 배현수는 손으로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그러니까 왜 갑자기 슬픈 영화를 보자고 그랬어? 이대로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내가 너에게 해코지라도 한 줄 알겠어.”고개를 든 조유진
착한 귀염둥이?이 단어를 들은 조유진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마치 7년 전으로 돌아간 이 느낌... 7년 전의 배현수만이 그녀를 이렇게 불렀었다.조유진은 그의 품에 안겨 고개를 들어 물었다.“뭐라고요?”그녀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는지 배현수는 아닌 척 헛기침을 하고는 그녀를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아니야, 가자. 밀크티 사러 갈까, 아니면 가방 사러 갈래?”조유진은 배현수의 귀까지 빨개진 것을 발견했다. 사실 그가 이렇게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아주 이례적이다. 이 사람도 부끄러운 줄 안다고?!쇼핑몰에는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배현수와 조유진, 눈에 띄는 피지컬을 자랑하는 두 남녀가 서로 달래며 질척거리는 모습에 주위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두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남자는 잘생긴 외모에 카리스마가 넘치고 도도했고 여자는 재벌 집 딸 같은 청아한 외모에 청순함까지 갖추고 있었다.행인들은 남자가 여자를 괴롭힌다고 생각해 찌질한 남자라고 눈으로 욕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몰랐다. 바로 이 장면이 파파라치에게 찍혀 내일 아침 뉴스 메인 페이지를 장식할 줄은... [비즈니스계의 거물과 버려진 못된 첫사랑][첫사랑, 후회의 눈물]사진을 다 찍은 파파라치는 유유히 사라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아니꼬운 시선을 알아차린 조유진은 뒤늦게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손등으로 다급히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밀크티도 가방도 다 필요 없어요.”늘 인내심 있게 조유진을 대하는 배현수는 전혀 귀찮아하는 기색이 없었다.“그럼 뭐 하고 싶은데?”배현수는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말했다.사실 이런 인내심과 사랑은 선유를 향해서도 없었다.조유진은 전에 남초윤과 이 쇼핑몰을 구경하러 온 적이 있었다. 길 건너편에 거대한 역사 기념관이 있다는 것이 기억나 그곳에 가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고 그녀가 신은 하이힐 바닥은 양가죽 재질이라 물에 닿으면 안 되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쇼핑몰
엄창민은 조유진이 원하는 그 어떤 것도 다 들어줄 것이다. 조유진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배현수를 보며 물었다.“선유는 현수 씨의 딸이에요. 개인 과외할 선생님을 구하는 일을 왜 창민 오빠에게 부탁해요?”그동안 배현수는 엄창민과 엮이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그런데 지금은 먼저 엄창민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도 선유에게 할 개인 과외 같은 ‘집안일’을 말이다. 조유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지만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생각을 바로 눈치챈 배현수는 이내 고개를 옆으로 돌려 말했다.“어차피 엄창민에게 관심이 없잖아? 그저 오빠라고 생각한 거 아니었어?”조유진은 입술을 달싹이더니 일부러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그건 모르죠? 언제 마음이 변할지. 어쨌든 미혼인 남자와 여자잖아요. 안 그래요? 배 대표님?”마지막 한 마디는 일부러 배현수의 귀에 대고 또박또박 말했다. 그 말에 그녀를 받쳐주던 큰 손은 일부러 복수라도 하려는 듯 힘을 살짝 풀었다. 깜짝 놀란 조유진은 얼른 그의 목을 껴안고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뭐 하는 거예요?”“방금 뭐라고 불렀어?”조유진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배 대표라고?”조유진이 일부러 이렇게 말한다는 것을 배현수도 알고 있었기에 담담한 목소리로 협박했다.“손 놓을까?”조유진은 그의 목을 힘껏 끌어안으며 말했다.“안 돼요.”가을비가 내리는 밖은 습하고 추웠다. 비도 생각보다 많이 오고 있었다.물이 흥건히 고여 있는 길가에 발이 닿기만 하면 하이힐은 바로 망가질 것이다.눈썹을 치켜세운 배현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녀를 보며 말했다.“그럼 예쁘게 불러봐.”“배현수.”퉁명스럽고 어린아이 같은 말투는 마치 협박을 받는 사람 같았다. 배현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내가 너를 납치라도 했어?”뭐랄까... 협박한 것은 맞으니까... 목소리를 가다듬은 조유진은 조금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배현수?”‘이 정도면 되겠지?’입꼬리를 살짝 올린 배현수는 야유하는 듯
강이진은 못마땅한 얼굴로 손에 들고 있던 선물을 옆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오빠, 이것은 오빠와 새언니를 위해 특별히 고른 커플 컵이야. 평생 두 사람이 헤어지지 말라는 의미도 있고. 그동안 오빠가 조유진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최대한 오빠를 도우려고 했어. 그런데 오빠가 싫다고 하니 뭐, 어쩔 수 없지. 오빠는 조유진을 좋아하는 게 현수 오빠와의 우정을 배신하는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내 눈에 현수 오빠는 그저 남이야. 오빠는 내 친오빠이고. 나는 당연히 오빠 편이고. 그래서 오빠가 조유진과 잘되기를 바랐어. 그런데 오빠는 내가 오히려 방해만 한다고 하니… 나는 오빠가 너무 안타까워. 하지만 이미 심미경과 결혼했으니 진심으로 축복할 수밖에.”안도의 한숨을 내쉰 강이찬은 인상을 더욱 찌푸렸다.“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우리가 친남매이기 때문에 네가 더더욱 자수하기를 바라. 이진아, 그렇게 자꾸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안 돼.”“오빠, 내가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아. 하지만 잊었어? 몇 년 전, 우리가 고향에 돌아갔을 때, 갑자기 지진이 일어났던 날, 나는 오빠를 구하기 위해 콘크리트 기둥에 깔려 다리가 부러졌어! 그때 구조대원들에게 오빠를 먼저 살려달라고 부탁했고! 오빠, 이 세상 그 누구도 나를 안 좋게 말할 수 있지만 오빠는 안 돼!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오빠와 내 손을 잡고 말했잖아. 이 세상에 우리 둘만이 피를 나눈 가족이라고, 앞으로 서로 잘 도우며 살아야 한다고. 나는 최선을 다해 오빠를 도왔어. 그런데 오빠는? 나를 위해 한 게 뭐가 있는데?”한바탕 호소를 퍼부은 강이진은 억울한 듯 눈물을 흘렸다.강이찬은 고개를 숙인 채 정색한 얼굴로 서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고개를 들어 하나뿐인 여동생을 쳐다보는 강이찬의 눈빛에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온 이유가 고작 가족의 사랑에 대해 말하려고 온 거야? 이진아, 네가 어떤 짓을 했는지 알기나 해?”
강이찬은 고개를 위로 젖히고 눈을 꼭 감았다. 그는 주먹을 쥔 손에 힘을 꽉 주고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이진아, 꼭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야 해?”“오빠, 몰아붙이는 건 오빠야. 현수 오빠도 감옥에 갔다 왔잖아. 가서 물어봐. 3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나 정말 들어가고 싶지 않아. 그런 곳에 일단 들어가면 인생은 끝장이야! 감옥에 가느니 차라리 여기서 그냥 죽을게!”다시 뒤돌아선 강이찬은 눈이 시뻘게져 있었다. “그 칼 내려놔.”강이진은 울면서 미친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소란 피우는 거 싫어한다는 거 알아. 오빠, 마지막으로 한 번만 도와줘. 오빠와 심미경의 결혼식이 끝나면 바로 외국으로 나갈게.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게. 두 번 다시 소란 피우지 않을게. 오빠... 제발 한 번만 도와줘. 우리가 피를 나눈 친남매인 걸 봐서라도... 부모님의 체면도 있잖아. 예전에 오빠를 구하려고 내가 다리를 다칠 뻔한 것을 봐서라도 제발...”강이찬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런 그의 표정은 애석하면서도 무감각해 보였다.강이찬이 계속 아무 말을 하지 않자 날카로운 칼을 들고 있던 강이진의 손은 점점 더 목 가까이 들이밀었다. 벗겨진 그녀의 피부에서는 피까지 흘러나왔다.애원하는 강이진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떨리고 있었다.“오빠, 나 정말 감옥에 가고 싶지 않아. 오빠가 계속 이러면 나는 정말 죽을 수밖에 없어.”“미경 씨가 죽지 않았으니까 죄가 심각하지는 않을 거야. 게다가 자수하면 기껏해야 4, 5년이겠지. 이진아, 4, 5년 뒤라고 해도 너 겨우 서른 살이야. 감옥에서 잘 보이면 가석방될 수도 있고...”강이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참고 있던 강이진이 비명을 질렀다.“4, 5년? 그 후에 나오면 폐인이나 다름없는데 여기서 누가 나를 받아주겠어? 그때는 취직도 안 돼. 오빠, 어떻게 심미경 때문에 내 인생을 망치려 해? 그래, 차라리 내가 죽을게. 죽으면 그만이니까!”칼을 들고 있는 강이진은 당장이라도 목을 찌르려
전화기 너머로 옥상의 윙윙거리는 바람 소리가 들렸고 통화하는 사람의 목소리도 매우 급해 보였다.이내 정신을 차린 강이찬은 휴대전화를 꽉 잡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일단 조금만 더 잡고 있어 주세요. 바로 갈게요.”이 전화 소리에 옆에서 자고 있던 심미경까지 깼다.옆에 있던 심미경은 그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무슨 일이에요?”“강이진이 또 미친 짓을 하네요. 잠깐 나갔다 올게요.”심미경은 흠칫 놀랐다.“이진이가 왜요? 나도 같이 갈까요?”“아니요. 괜찮아요. 먼저 쉬어요. 나 기다리지 말고.”심미경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운전 조심하고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요.”“네, 알겠어요.”...쌀쌀한 초겨울 밤, 찬바람이 살을 에는 듯 추웠다.옥상에 서 있는 강이진은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강이찬이 도착했을 때, 옥상에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었다.“젊은 아가씨가 대체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이러는 거예요?”“빨리 내려오세요. 무슨 일이 있든 일단 내려와서 얘기해요!”중년을 훌쩍 넘긴 아저씨와 아줌마들은 열심히 그녀를 타이르고 있었다.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강이진에게 다가간 강이찬은 차가운 얼굴로 호통쳤다.“너 이제 어린애 아니야. 잘못했으면 벌을 받을 생각 해야지! 어떻게 그 죄가 두렵다고 자살할 생각만 하는 거야? 내려와! 사람들이 비웃어!”하지만 강이진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는 눈물범벅인 얼굴로 고집을 피우며 말했다.“거기에 들어가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일단 내려와서 얘기해!”강이진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오빠, 내가 여기서 뛰어내리면 나를 용서해 줄 거야?”“이진아, 그렇게 제멋대로 굴지 마! 더 이상 나에게 강요하지도 말고!”강이진이 정말 뛰어내리면 강이찬은 평생 죄책감 속에서 살 것이다.강이진은 앞으로 한 발 내디뎠다. 감옥에 가는 것보다 차라리 이렇게 죽는시늉으로 강이찬의 마음을 되돌리고 싶었다. 강이찬은 조급한 마음을 가다듬고 외쳤다.“강이진! 내려와! 더 이상 소
“트럭 기사를 사주해 교통사고를 낸 이유가 뭐야? 미경 씨가 미워서? 이진아, 너 이렇게 못된 애였어?”강이진은 계속 억울하다며 호소했다. 강이찬이 생각을 바꿀 기미가 보이자 이제 아예 대놓고 불쌍한 척했다.“아니야, 오빠... 심미경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잖아. 지난번에 우리가 서재에서 다투면서 했던 말을 들었나 봐. 조유진의 어머니를 내가 죽였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조유진에게 잘 보이려고 고자질하러 가는 거 있지? 오빠, 그때는 너무 무서워서 그랬어. 오빠도 알잖아. 조유진과 배현수가 어떤 사람인지. 심미경이 진짜로 이간질해서 내가 범인이라고 말한다면 정말 끝장이야. 현수 오빠의 성격에 참을 수 있겠어? 아마 당장 나를 죽이려 했을 거야. 게다가...”여기까지 말한 강이진은 다시 한번 침을 꿀꺽 삼켰다. 배현수가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나올지 생각만 해도 살이 떨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을 이었다.“안 그래도 현수 오빠는 안정희를 죽인 사람이 자기 엄마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어. 이런 상황에 심미경이 가서 그 범인이 나라고 하면 바로 믿겠지. 설령 그게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도 나에게 덮어씌우려 할 거야! 조유진과 함께 있으려면 희생양을 찾아야 하니까! 오빠, 사람은 이기적인 동물이야. 심미경의 소원은 오빠와 결혼하는 거고 그 소원이 곧 이루어질 거야. 오빠가 나를 강제로 감옥에 보내면 일만 더 꼬여. 오빠도 내가 죽는 것을 바라지 않잖아. 내가 잘 뉘우쳐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기를 바라는 거잖아. 나 이제 내 잘못을 알아. 깊이 뉘우치고 있고. 그런데 이런 일들을 만약 현수 오빠가 알아봐? 내 설명 따위 들으려고 하지 않을 거야. 내가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사람은 모두 득과 실을 따지는 동물이다. 이익을 추구하고 해를 피하는 것 또한 인간의 본성이다.소파에 기댄 강이찬은 눈을 감고 조용히 숨을 돌렸다.강이진의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었고 그녀는 마치 상갓집 개처럼 강이찬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