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어도 상관없어요. 현수 씨, 왜 만나고 나서 지금까지 자꾸 나를 피해요?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예요?”만약 배현수가 싫어하면 그녀도 두 번 다시 그에게 매달리지 않을 것이다.자기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스토커처럼 자꾸 질척거리며 상대방을 힘들게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장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조유진 또한 그런 짓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공해 바다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일을 겪은 후, 그녀는 두 사람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높은 장벽이 허물어졌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배현수는 죽음에서 겨우 살아났음에도 바로 조유진을 만나러 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 이유를 잘 몰랐지만 왠지 좋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심지어 다시 돌아온 배현수는 그녀를 보는 눈빛마저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등을 돌린 채 서 있는 배현수는 그저 덤덤한 목소리로 조유진에게 말했다.“너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야. 유진아, 하지만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너에게 그 어떤 것도 약속할 수 없고...”영원을 약속하는 것은 너무 어렵고 평생이라는 시간 또한 너무 길다.배현수는 그녀에게 그 어떤 것도 약속할 수도, 줄 수도 없었다.그는 이미 애초의 약속대로 719부대에 들어가게 되었고 서심같이 해독약도 없는 독에 중독되었으니 이제 며칠을 더 살 수 있을지 배현수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드래곤 파 쪽에서는 계속 SY그룹을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공해 바다 위에서 719부대와 전쟁을 선포한 이상 앞으로 배현수에게도 평화로운 날이 며칠 남지 않았을 것이다.만약 이런 상황에서도 조유진을 원하고 소유하려 한다면 이보다 더 나쁜 놈은 없을 것이다.그는 이제 조유진과 선유를 자신에게서 완전히 떼어내야 했다. 두 모녀가 대제주시에 머물러 있는 것도 어쩌면 위험할 수 있었다.요 며칠, 그는 조유진과 선유를 비밀리에 스위스로 보내려고 했다. 국제적으로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있는 스위스는 드래곤 파의 세력이 개입하고 있지 않아 그곳에서는 평화로운 노후를 보낼 수 있었다. 그런 곳에서
서로 뒤엉킨 두 사람은 옆에 있는 물침대에 넘어졌다.배현수는 그저 그녀를 안고 있을 뿐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조유진이 안아달라고 하니 배현수는 정말로 그녀를 안고만 있을 뿐이었다.조유진은 그의 넥타이로 두 사람이 마주 잡은 손을 묶었다. 마치 이렇게 묶으면 그가 도망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조유진은 입꼬리를 양쪽으로 올리며 말했다.“현수 씨, 우리 다시 함께할 수 있는 거죠?”이제 배현수만 원한다면 두 사람은 평생 함께할 수 있었다.“유진아...”조유진이 두 사람의 손을 넥타이를 꽉 조여 매긴 했지만 사실 쉽게 풀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배현수는 차마 그녀의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조유진은 왼손으로 그와 깍지를 낀 채 손바닥을 힘주어 누르며 그의 몸 위에 걸터앉았다.움직임이 너무 컸는지 물침대가 심하게 흔들거렸고 그녀의 비단결 같은 웨이브 머리카락도 파도처럼 출렁거렸다.배현수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조유진은 다른 한 손을 들어 그의 셔츠 단추를 풀려고 했다.그러자 배현수는 그녀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너 이런 거 싫어하잖아. 그동안 약도 안 먹었을 거 아니야. 너 힘들어서 안 돼.”배현수의 눈에 그녀의 행동은 그저 장난으로 보일 뿐이었다.하지만 조유진은 배현수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그의 귓가에 얼굴을 대고 말했다.“내가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 현수 씨가 어떻게 알아? 내 마음에 들어와 봤어?”배현수의 코끝을 스쳐 지나가는 은은한 장미 향은 그야말로 매혹적이었다.조유진은 배현수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하나둘씩 단추를 푸는 그녀는 배현수를 집요하게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현수 씨의 옷을 벗겨주는데 현수 씨는 내 옷을 안 벗겨 줄 거야?”평소의 조유진이라면 이런 일에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어쩌다 한 번 주동적으로 행동할 때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배현수는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조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내가 공해 바다에서 너를 구한 그 보답으로 이
조유진은 아주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배현수는 이마에 핏줄이 선명히 보일 정도로 참고 있었다. 그는 조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유.진.아.”“현수 씨라면 정신적인 사랑도 나는 기꺼이... 웁.”배현수는 오른손으로 넥타이를 풀며 다른 한 손으로 조유진을 힘껏 안아 올렸다. 그녀는 배현수의 넘치는 힘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조유진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배현수를 바라보자 그는 조유진의 귀를 깨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잘 생각하고 결정해. 더 이상 너를 책임질 수 없을지도 몰라. 유진아, 자꾸 나를 자극하지 마. 지금 내 위에서 내려오면 나도 너를 안 건드릴게. 나중에 후회할 짓 하지 말고. 응?”중저음의 낮은 목소리 톤은 너무 확고한 말투였지만 모순적이게도 그 목소리 사이로 그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배현수는 그녀더러 자기를 멀리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조유진은 더 반항적으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그녀는 물끄러미 배현수를 보며 말했다.“나도 이제 어린애가 아니에요. 어른이고 성인이에요. 그 누구도 저를 책임질 필요가 없어요. 나는 내가 책임져요. 이런 일은 당신이 원하고 내가 원하면 할 수 있는 거라고요. 영원한 약속? 그런 끝이 안 보이는 것은 필요 없어요. 현수 씨, 나는 지금 이 순간의 감정에 충실하고 싶어요.”“내 말은 내가 어쩌면 너와 결혼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이야. 그래도 상관없어? 후회 안 할 자신이 있냐고?”조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전에도 나와 결혼 안 했잖아요. 그래도 우리 할 건 다 했어요. 아이까지 낳았는데 인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좀 억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현수 씨에게 매달리지 않을게요. 나를 보기 싫어서 꺼지라고 하면 기꺼이 떠날게요. 하지만 지금은 현수 씨도 원하잖아요. 아니에요?”두 사람은 서로의 이마를 맞댄 채 눈을 마주 보고 있었다. 배현수는 조유진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야? 유진아
낱개로 된 그 콘돔들은 확실히 처음 보는 브랜드들이었기에 진짜인지 가짜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조유진의 걱정이 어쩌면 합리적이기도 했다.배현수도 더 이상 고집하지 않고 그녀를 보며 말했다.“정상적인 모텔도 아닌데 여기서 묵으려는 거야?”조유진은 그의 말에 1초도 생각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정상적인 호텔에는 물침대가 없잖아요.”“물침대가 그렇게 좋아? 그럼 이후에는...”배현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 사람 사이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조유진은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그를 보며 물었다.“이후에 뭐요?”“아무것도 아니야.”‘이후에? 나에게 뭔 이후가 있다고...’배현수는 그 뒷말을 하지 못하고 그냥 삼켜버렸다. 그도 그런 자신이 우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는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는 혹시라도 그녀가 과민반응을 일으킬까 봐 모든 행동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움직였다.“힘들면 안 해도 돼. 어?”예전에 조유진은 그의 너무 다정한 스킨십 때문에 그의 품에서 잠깐 기절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조유진이 대제주시로 막 돌아왔을 때라 그에 대한 거부감이 극에 달했을 때였다.그때 이후로 배현수는 더 이상 그녀에게 강요하지 않았다.하지만 공해에 가기 전날 밤, 술에 취한 배현수는 그녀에게 두 번이나 그 짓을 했다. 그날 어쩌면 그녀를 아프게 했을지도...“현수 씨.”“어?”조유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오늘 밥 안 먹었어요? 왜 이렇게 힘이 없어요?”“안 아파?조유진은 그를 똑바로 보며 고개를 가로젓더니 그의 귓가에 대고 또박또박 한 글자씩 말했다.“더.세.게.”사실 아프다. 하지만 조유진은 그가 좀 더 괴롭혀 주기를 원했다. 더 아프고 싶어서... 아픔이 더 뚜렷할수록 그녀는 이게 꿈이 아니라는 것을 믿을 수 있었다. ...지리산의 밤은 항상 비가 많이 왔다.부슬부슬 내리는 가을비 때문에 유리창에는 어느새 얇은 안개가 끼었다.가느다란 하얀 손가락이 유리창을 누르며 손자국을 남겼다.방안은 온통 두 사람의 호흡
조유진의 왼손을 잡은 배현수는 그녀의 약지에 낀 은반지를 만지작거렸다.1년 전, 바로 이 지리산 모텔에서 조유진은 이 반지를 배현수에게 돌려줬다.나중에 조유진이 바다에 뛰어들었을 때, 반년 넘게 우울해 있었던 배현수는 그 후 그녀와 관련된 모든 물건을 서재 서랍에 넣고 열쇠로 잠궈두었다.품에 안긴 조유진을 내려다보던 배현수는 총에 맞은 상처에 대해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아 화제를 돌렸다.“반지는 왜 또 꼈어? 전에 나에게 다시 돌려주지 않았어?”속마음을 들킨 조유진은 살짝 난처한 기색을 내보였다. 상대방이 자기와 같은 마음인지 아직 확신이 서지도 않은 상황에 자기 마음만 다 들킨 느낌이었다. 손을 움츠리고 이불 속으로 넣은 조유진은 티를 내면 안 된다는 생각에 당당한 얼굴로 말했다. “현수 씨가 말한 거잖아요. 나에게 준 물건은 내 거라고. 내가 내 물건을 끼는데, 왜요? 무슨 문제가 있어요?”그 말에 배현수는 그녀를 살짝 조롱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하지만 이건 네가 내 금고에서 뒤진 거잖아. 유진아, 이건... 절도이지 않을까?”“절도는 현수 씨가 나보다 한 수 위겠죠.”말을 마친 조유진은 등을 돌리더니 이불을 머리 위까지 당겨 얼굴을 가렸다.예민한 조유진은 배현수가 무엇인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가슴 깊이 와 닿는 것은 배현수가 그녀처럼 이 관계를 이어나가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는 그녀를 밀어내려고 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저 조유진의 눈물에 배현수의 마음이 순간 약해진 것뿐이라는 것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여자에게 이끌려 마지못해 잠자리를 가진 남자는 상대방으로부터 매정하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적어도 여자를 위하는 척은 해야 했다. 그게 설사 진심이 아닌 겉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일지라도 그는 오늘 밤 그녀를 성심성의껏 보살펴 줄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인내심과 보살핌은 다음 날 아침 일찍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그의 도덕과 양심은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며 길어도
서로의 마주친 시선에 조유진이 살짝 민망해하고 있을 때 배현수가 말했다.“나는 좀 무서운데. 나 좀 안아 주면 안 돼?”조유진은 아무 말 없이 얼른 그의 품에 안겼다.배현수를 껴안은 조유진은 두 눈을 부릅뜨고 방안을 이리저리 살피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예전에 끝방에서 묵은 적이 있어요? 끝방에서 귀신 본 적이 있어요?”조유진도 인터넷 카페 같은 데서 비슷한 이야기를 본 적이 있었다. 물론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곳은 없었지만...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배현수는 입술을 그녀 얼굴 가까이에 대더니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응, 한밤중에 정말로 빨간 옷을 입은 긴 생머리의 귀신이 침대 주위를 왔다 갔다 하더라고.”깜짝 놀란 조유진은 배현수의 품에서 몸을 웅크리며 말했다.“진짜요?”“응, 진짜.”‘너무 무섭잖아...’서둘러 이불 밖으로 나와 있는 발을 거두어들인 조유진은 저도 모르게 발가락까지 움츠렸다. 조유진은 한편으로 무섭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화도 났다. 그녀는 배현수의 팔을 꽉 잡더니 손으로 그의 근육을 꼬집고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현수 씨, 왜 야심한 밤에 갑자기 귀신 얘기하고 그래요?”“나도 무서워서. 좀 더 안아줘.”배현수의 너무 태연한 말투는 무서워하는 기색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거짓말쟁이!”하지만 조유진은 그의 말대로 배현수를 더 꽉 껴안았다. 그녀도 무서웠기 때문에...오늘 관계를 두 번이나 가졌지만 아직 씻으러 가지 않은 조유진은 몸이 끈적끈적해 불편한 상태였다. 하지만 끝방에서 귀신이 나온다는 말에 그녀는 도저히 침대에서 일어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현수 씨, 저 샤워 좀 하고 싶어요.”“어, 가.”조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귀신이 나올까 봐 무섭다면서요. 내가 화장실에 가면 혼자 여기에 있을 텐데 무섭지 않아요?”배현수는 웃으며 조유진을 쳐다보았다. “응, 안 무서워.”배현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무서워? 화장실에 같이 가달라고? 뭐 안 되는 것도 아닌데
“현수 씨가 직접 만날 필요가 없다고 해서 나도 그냥 차를 몰고 떠난 거예요. 나는 현수 씨가 말한 그 규칙들을 다 무시하고 길 건너로 달려갈 수 있었어요. 어차피 지금까지 우리 서로 놓지 못하고 계속 질척거리고 있었잖아요. 결과가 없다고 해도 뭐 어때요? 서로 이렇게 계속 놓지 못하고 있는데... 물론 무책임하고 못 됐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나도 원래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니니까 상관없어요. 위증까지 한 사람이 좋아봤자 얼마나 좋겠어요?”조유진은 침을 꿀꺽 삼키며 계속 말했다. “그저 나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한 가닥의 인간성으로 참고 있는 거라고요. 우리에게 미래가 없다면 현수 씨를 흔들지 말아야겠다고... 정말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다고요. 분명 이제 겨우 다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공해 바다에서 나와 생사를 같이할 거라는 현수 씨 말을 믿었어요. 그래서 다시 흔들렸고요. 그런데 지금은 현수 씨가 나와 더 이상 같이 있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요. 내 생각이 틀렸어요?”조유진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할 말, 하지 말아야 할 말 가리지 않고 다 해버렸다.시뻘게진 조유진의 눈시울을 보고 있던 배현수는 서심의 독성이 발작해서인지 순간 심장이 쥐어뜯기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그는 예전처럼 그녀를 꼭 안아 주고 싶었지만 끝내 참았다.배현수는 얼굴의 감정을 최대한 숨기며 말했다.“내 생각이 짧았어. 성남에 너를 찾으러 가는 게 아닌데... 말해, 어떻게 보상해 주면 될까? 네가 해 달라는 거 다 해 줄게.”배현수는 그녀가 원하는 것은 모두 다 줄 수 있었다. 미래에 대한 약속만 빼고... 조유진 또한 배현수의 말뜻을 바로 알아챘다. 앞으로 더는 자기를 귀찮게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배현수의 말에 조유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배 대표님께서 나와 자자마자 바로 나를 버리려고요? 그런데 SY 회사 주식이 내 손에 있는데 배 대표님도 나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없을 것 같네요. 아니면 다른 곳에 숨겨진 재산이라도 있는 거예요?”
배현수는 살짝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물었다.“어머니가 돌아가신 일, 신경 쓰이지 않아?”이 세상에서 조유진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배현수일 것이다. 그래서 어떤 방법으로 그녀를 포기하게 할 수 있는지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서로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일수록 어떤 말들이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제일 잘 알 것이다.조유진 또한 어찌 그런 배현수가 밉지 않겠는가? 다만 가끔은 미움보다 사랑이 더 컸다. 배현수의 얇은 입술을 바라보던 조유진은 시선을 천천히 위로 올려 그의 눈을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신경 쓰여요. 그래서 나도 예지은을 용서할 생각이 없고요. 나와 현수 씨는 그냥 지금처럼 이런 상태로 있으면 돼요. 우리 둘 사이의 그런 응어리들이 하루 이틀 사이에 없어질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이렇게 서로에 대한 감정이 없어질 때까지 시간을 끌다가 현수 씨에 대한 내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면 그때 나더러 가지 말라고 해도 내가 알아서 떠날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그냥 이렇게 있어요. 네?”배현수는 차가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하지만 나는 이미 너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어.”“정말요? 나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데 공해 바다까지 날 구하러 간 거예요? 나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 사람이 자기 목숨을 바쳐가며 나를 살리려 한 거예요? 현수 씨, 지금도 나를 속이고 있어요.”“공해에 간 것은 네가 선유의 친엄마이기 때문이야. 너를 구하지 않으면 앞으로 선유가 이 아빠를 어떻게 생각하겠어?”배현수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 기복도 없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정말로 그 거짓말이 진실이라고 믿겨질 만큼...가슴이 찡해진 조유진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그럼 왜 또 성남에 와서 나와 창민 오빠의 뒤를 몰래 따라다닌 건데요?”“남자의 소유욕이 발동한 것뿐이야. 네가 엄창민과 진도가 어느 정도까지 나갔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야.”“그럼 내가 성남에 가서 창민 오빠와 결혼해도 상관없어요?”조유진이 한마디 한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