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유진의 왼손을 잡은 배현수는 그녀의 약지에 낀 은반지를 만지작거렸다.1년 전, 바로 이 지리산 모텔에서 조유진은 이 반지를 배현수에게 돌려줬다.나중에 조유진이 바다에 뛰어들었을 때, 반년 넘게 우울해 있었던 배현수는 그 후 그녀와 관련된 모든 물건을 서재 서랍에 넣고 열쇠로 잠궈두었다.품에 안긴 조유진을 내려다보던 배현수는 총에 맞은 상처에 대해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아 화제를 돌렸다.“반지는 왜 또 꼈어? 전에 나에게 다시 돌려주지 않았어?”속마음을 들킨 조유진은 살짝 난처한 기색을 내보였다. 상대방이 자기와 같은 마음인지 아직 확신이 서지도 않은 상황에 자기 마음만 다 들킨 느낌이었다. 손을 움츠리고 이불 속으로 넣은 조유진은 티를 내면 안 된다는 생각에 당당한 얼굴로 말했다. “현수 씨가 말한 거잖아요. 나에게 준 물건은 내 거라고. 내가 내 물건을 끼는데, 왜요? 무슨 문제가 있어요?”그 말에 배현수는 그녀를 살짝 조롱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하지만 이건 네가 내 금고에서 뒤진 거잖아. 유진아, 이건... 절도이지 않을까?”“절도는 현수 씨가 나보다 한 수 위겠죠.”말을 마친 조유진은 등을 돌리더니 이불을 머리 위까지 당겨 얼굴을 가렸다.예민한 조유진은 배현수가 무엇인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가슴 깊이 와 닿는 것은 배현수가 그녀처럼 이 관계를 이어나가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는 그녀를 밀어내려고 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저 조유진의 눈물에 배현수의 마음이 순간 약해진 것뿐이라는 것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여자에게 이끌려 마지못해 잠자리를 가진 남자는 상대방으로부터 매정하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적어도 여자를 위하는 척은 해야 했다. 그게 설사 진심이 아닌 겉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일지라도 그는 오늘 밤 그녀를 성심성의껏 보살펴 줄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인내심과 보살핌은 다음 날 아침 일찍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그의 도덕과 양심은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며 길어도
서로의 마주친 시선에 조유진이 살짝 민망해하고 있을 때 배현수가 말했다.“나는 좀 무서운데. 나 좀 안아 주면 안 돼?”조유진은 아무 말 없이 얼른 그의 품에 안겼다.배현수를 껴안은 조유진은 두 눈을 부릅뜨고 방안을 이리저리 살피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예전에 끝방에서 묵은 적이 있어요? 끝방에서 귀신 본 적이 있어요?”조유진도 인터넷 카페 같은 데서 비슷한 이야기를 본 적이 있었다. 물론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곳은 없었지만...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배현수는 입술을 그녀 얼굴 가까이에 대더니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응, 한밤중에 정말로 빨간 옷을 입은 긴 생머리의 귀신이 침대 주위를 왔다 갔다 하더라고.”깜짝 놀란 조유진은 배현수의 품에서 몸을 웅크리며 말했다.“진짜요?”“응, 진짜.”‘너무 무섭잖아...’서둘러 이불 밖으로 나와 있는 발을 거두어들인 조유진은 저도 모르게 발가락까지 움츠렸다. 조유진은 한편으로 무섭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화도 났다. 그녀는 배현수의 팔을 꽉 잡더니 손으로 그의 근육을 꼬집고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현수 씨, 왜 야심한 밤에 갑자기 귀신 얘기하고 그래요?”“나도 무서워서. 좀 더 안아줘.”배현수의 너무 태연한 말투는 무서워하는 기색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거짓말쟁이!”하지만 조유진은 그의 말대로 배현수를 더 꽉 껴안았다. 그녀도 무서웠기 때문에...오늘 관계를 두 번이나 가졌지만 아직 씻으러 가지 않은 조유진은 몸이 끈적끈적해 불편한 상태였다. 하지만 끝방에서 귀신이 나온다는 말에 그녀는 도저히 침대에서 일어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현수 씨, 저 샤워 좀 하고 싶어요.”“어, 가.”조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귀신이 나올까 봐 무섭다면서요. 내가 화장실에 가면 혼자 여기에 있을 텐데 무섭지 않아요?”배현수는 웃으며 조유진을 쳐다보았다. “응, 안 무서워.”배현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무서워? 화장실에 같이 가달라고? 뭐 안 되는 것도 아닌데
“현수 씨가 직접 만날 필요가 없다고 해서 나도 그냥 차를 몰고 떠난 거예요. 나는 현수 씨가 말한 그 규칙들을 다 무시하고 길 건너로 달려갈 수 있었어요. 어차피 지금까지 우리 서로 놓지 못하고 계속 질척거리고 있었잖아요. 결과가 없다고 해도 뭐 어때요? 서로 이렇게 계속 놓지 못하고 있는데... 물론 무책임하고 못 됐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나도 원래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니니까 상관없어요. 위증까지 한 사람이 좋아봤자 얼마나 좋겠어요?”조유진은 침을 꿀꺽 삼키며 계속 말했다. “그저 나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한 가닥의 인간성으로 참고 있는 거라고요. 우리에게 미래가 없다면 현수 씨를 흔들지 말아야겠다고... 정말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다고요. 분명 이제 겨우 다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공해 바다에서 나와 생사를 같이할 거라는 현수 씨 말을 믿었어요. 그래서 다시 흔들렸고요. 그런데 지금은 현수 씨가 나와 더 이상 같이 있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요. 내 생각이 틀렸어요?”조유진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할 말, 하지 말아야 할 말 가리지 않고 다 해버렸다.시뻘게진 조유진의 눈시울을 보고 있던 배현수는 서심의 독성이 발작해서인지 순간 심장이 쥐어뜯기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그는 예전처럼 그녀를 꼭 안아 주고 싶었지만 끝내 참았다.배현수는 얼굴의 감정을 최대한 숨기며 말했다.“내 생각이 짧았어. 성남에 너를 찾으러 가는 게 아닌데... 말해, 어떻게 보상해 주면 될까? 네가 해 달라는 거 다 해 줄게.”배현수는 그녀가 원하는 것은 모두 다 줄 수 있었다. 미래에 대한 약속만 빼고... 조유진 또한 배현수의 말뜻을 바로 알아챘다. 앞으로 더는 자기를 귀찮게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배현수의 말에 조유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배 대표님께서 나와 자자마자 바로 나를 버리려고요? 그런데 SY 회사 주식이 내 손에 있는데 배 대표님도 나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없을 것 같네요. 아니면 다른 곳에 숨겨진 재산이라도 있는 거예요?”
배현수는 살짝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물었다.“어머니가 돌아가신 일, 신경 쓰이지 않아?”이 세상에서 조유진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배현수일 것이다. 그래서 어떤 방법으로 그녀를 포기하게 할 수 있는지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서로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일수록 어떤 말들이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제일 잘 알 것이다.조유진 또한 어찌 그런 배현수가 밉지 않겠는가? 다만 가끔은 미움보다 사랑이 더 컸다. 배현수의 얇은 입술을 바라보던 조유진은 시선을 천천히 위로 올려 그의 눈을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신경 쓰여요. 그래서 나도 예지은을 용서할 생각이 없고요. 나와 현수 씨는 그냥 지금처럼 이런 상태로 있으면 돼요. 우리 둘 사이의 그런 응어리들이 하루 이틀 사이에 없어질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이렇게 서로에 대한 감정이 없어질 때까지 시간을 끌다가 현수 씨에 대한 내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면 그때 나더러 가지 말라고 해도 내가 알아서 떠날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그냥 이렇게 있어요. 네?”배현수는 차가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하지만 나는 이미 너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어.”“정말요? 나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데 공해 바다까지 날 구하러 간 거예요? 나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 사람이 자기 목숨을 바쳐가며 나를 살리려 한 거예요? 현수 씨, 지금도 나를 속이고 있어요.”“공해에 간 것은 네가 선유의 친엄마이기 때문이야. 너를 구하지 않으면 앞으로 선유가 이 아빠를 어떻게 생각하겠어?”배현수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 기복도 없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정말로 그 거짓말이 진실이라고 믿겨질 만큼...가슴이 찡해진 조유진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그럼 왜 또 성남에 와서 나와 창민 오빠의 뒤를 몰래 따라다닌 건데요?”“남자의 소유욕이 발동한 것뿐이야. 네가 엄창민과 진도가 어느 정도까지 나갔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야.”“그럼 내가 성남에 가서 창민 오빠와 결혼해도 상관없어요?”조유진이 한마디 한마디
통에서 약을 꺼낸 조유진은 입에 넣기 전, 덤덤한 얼굴로 배현수를 보며 물었다. “나더러 정말 먹으라고 그러는 거예요?”배현수는 침대 머리맡에서 생수 한 병을 들고는 뚜껑을 따서 조유진에게 건넸다.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뜻은 분명했다.두 사람이 지금과 같은 애매모호한 관계에서 뜻하지 않게 임신이라도 하게 되면 정말 골칫거리가 되기 때문이다.조유진도 더 이상 감정만 앞섰던 열여덟 살 소녀가 아니다. 그녀는 약을 입에 넣은 후, 배현수가 건넨 물을 받아 약과 함께 삼켰다.그런 그녀를 보며 배현수는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어젯밤에는 네가 잠깐 오버했다고 생각할게. 앞으로 다시는 그런 바보 같은 짓 하지 마.”배현수의 앞에 서 있는 조유진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어젯밤에는 확실히 현수 씨가 살아있는 것을 보고 너무 흥분해서 오버한 건 맞아요. 그런데 현수 씨는요? 현수 씨가 콘돔을 사용하지 않은 건요?”“네가 원한 거야, 유진아.”“거절할 수도 있었잖아요.”배현수가 확실하게 조유진에게 거절의 의사를 표했더라면 어젯밤에 그녀가 그렇게 질척거릴 수 있었을까? 관계를 두 번씩이나 가질 수 있었을까? 배현수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자 조유진은 절뚝거리며 욕실로 향했다.그런 그녀의 모습을 도저히 볼 수 없었던 배현수는 그녀를 번쩍 안아 침대에 앉혔다.배현수는 그녀의 다친 오른쪽 발목을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어젯밤에 빨갛게 부어올랐던 발목은 이미 새파랗게 멍이 들어있었다. 조유진의 피부가 워낙 하얀 탓에 상처가 더 끔찍해 보였다.미간을 찌푸린 배현수는 조금 전에 사 온 연고를 뜯어 조유진의 발에 발라 주었다.겉에 셔츠 한 장만 걸치고 있었던 조유진은 안 그래도 속옷을 안 입고 있었는데 발까지 들자... 속살이 그대로 보였다. 진짜로 보여줘야 할 것, 보여주지 말아야 할 것들이 이 순간 전부 낱낱이 드러난 것 같았다. 민망한 조유진이 다리를 움츠리려 하자 배현수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의 발을 더 꽉 부여잡았다.“움직이지 마.”
남녀 사이의 관계는 신체적인 차이로 인해 항상 남자가 부담을 덜 느끼는 쪽이 된다. 남자가 아무런 보호 조치를 취하지 않은 위험은 전적으로 여자가 짊어져야 하니까...배현수는 조유진이 나중에 다른 사람 앞에서도 자신을 보호하지 못할까 봐 걱정되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배현수의 얼굴도 점점 어두워졌다. 그는 자기가 죽은 후, 누군가가 그녀를 돌볼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사람이 자기만큼 조유진을 사랑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그의 품에 안겨 있는 조유진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배현수는 그녀를 품에서 떼어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대답해.”그의 딱딱하고 차가운 말투에 조유진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어젯밤에 현수 씨가 먼저 나를 책임지지 않을 거라 했어요. 이런 일은 우리가 서로 원해서 한 거고 나도 현수 씨에게 책임지라고 질척거리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배 대표님은 무슨 자격으로 나에게 이런 요구를 하는 거죠? 내 남자친구도 아니고 나와 결혼할 배우자도 아닌데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사람을 오해하게 할 말을 하냐고요? 나와 다시...”마음속에 있는 불만을 채 말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를 보니 남초윤이었다.어제 육지율과 남초윤은 선유와 함께 놀이공원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다. 지금 전화 온 것을 보니 선유가 집에 가고 싶어 하는 모양이었다.조유진이 통화 버튼을 누르자 전화기 너머로 남초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산성 별장에 도착했어? 선유가 내일 월요일이라 학교에 가야 하는데 어제 우리 집에 오면서 숙제 책을 안 갖고 왔다네? 그래서 집에 빨리 가서 숙제해야 할 것 같다고 그래서.”“나 지금 지리산에 있어. 오후쯤 데리러 갈 테니까 진짜 미안한데 육 변과 같이 좀만 더 선유를 봐줘.”“미안하기는 뭘? 선유가 얼마나 말을 잘 듣는데. 우리가 애를 보는 게 아니라 애가 어른 둘과 같이 놀아 주는 거지.”남초윤의 말에 조유진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너도 아이가 그렇게 좋으면 한 명 낳
배현수는 손을 들어 조유진의 머리카락을 문지르며 말했다.“응, 안 갈게. 너와 함께 산성 별장으로 돌아갈게.”SY 그룹 내부에도 아직 배현수가 수습해야 할 일이 많았다.또한 앞으로 조유진과 선유 두 모녀가 함께 살 곳도 미리 봐둬야 했다. 배현수는 나중에 자기가 없더라도 두 모녀가 서로 의지하며 안전하게 잘 살기를 바랐다. 자기의 말에 설득이 되었다고 생각한 조유진은 배현수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래요. 이번에는 현수 씨를 한번 믿어볼게요.”배현수가 먼저 체크아웃을 하러 나갔고 세수를 마친 조유진도 옷매무새를 정리한 후 가방과 기복부를 들고 방을 나섰다.모텔 복도에서 조유진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배현수를 보았다.배현수가 가지 않은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조유진은 발목의 상처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 들고 있던 가방과 기복부는 바닥에 그대로 떨어졌다.순간 어리둥절해진 배현수는 그녀의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유진아, 왜 그래?”그녀가 많이 불안해하는 것을 느낀 배현수는 긴 팔로 그녀를 꼭 감싸 안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은 채 꽤 오랫동안 복도에 서 있었다.배현수의 품에 한참이나 안긴 후에야 조유진은 그나마 감정을 추스를 수 있었다. 그녀는 배현수 허리춤의 셔츠를 손으로 움켜쥐고는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나 발목이 좀 아파요.”나긋나긋한 목소리는 꼭 마치 배현수에게 애교를 부리는 것 같았다.조유진은 꽤 오랫동안 배현수에게 애교를 부리지 않았다.그는 손으로 그녀의 작은 얼굴을 살짝 꼬집더니 한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가방과 기복부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를 안아 들었다.“기복부는 어떻게 가지고 나온 거야?”배현수의 목을 껴안은 조유진은 당당한 얼굴로 말했다.“현수 씨가 나에게 쓴 거잖아요. 기념으로 간직하고 싶어서 가져가는 건데 안 돼요?”“돼.”하지만 기념으로 남긴 물건들이 앞으로 어쩌면 그녀의 심장을 후벼 파는 화살이 될 지모 모른다.아름다운
“하... 야 이 꼬맹이, 지금 누구보고 체력이 안 좋다는 거야? 어제 네가 공연을 보겠다고 해서 목마에 태워준 사람이 누구인데! 이제 아빠가 왔다고 이 아저씨를 까맣게 잊은 거야?”“아저씨, 왜 어린이와 싸우고 따지려고 해요? 어제 나와 고작 하루정도 같이 있은 거로 이렇게 힘들다고 하면 나중에 아저씨와 이모가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하려고요?”선유의 말에 육지율은 말문이 막혔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남초윤도 난처한 얼굴로 한숨만 내쉬었다. 애어른 같은 선유가 정말 별소리를 다 하니... 누가 이 녀석을 말릴 수 있겠는가.물론 남초윤과 육지율은 아이 문제에서만큼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결혼하고부터 지금까지 두 사람은 아이에 대한 계획이 없었다.게다가... 하루가 멀다 하고 이혼 얘기가 나오고 있는 마당에 아이는 더더욱 가져서는 안 되었다. 오후 내내 배현수는 육지율과 단둘이 그동안의 회사 일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저녁에 선유가 집에 가서 숙제해야 한다고 조르는 바람에 세 사람은 육지율의 집에서 저녁을 먹지 않고 산성 별장으로 돌아왔다.집에 도착하자마자 배현수는 그동안 밀린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바로 서재로 들어갔다.선유도 숙제할 책과 커다란 유리병을 품에 안고 배현수를 따라 서재로 들어갔다.녀석은 배현수 앞에 서서 불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아빠, 오자마자 왜 일부터 해요? 엄마와 말도 안 하고. 그동안 어디 있었어요? 엄마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알아요? 매일 울었어요.”선유의 말에 배현수는 순간 하던 일을 멈췄다.그는 노트북을 덮고 옆에 서 있는 선유를 바라보며 물었다.“손에 든 것은 뭐야?”선유는 마치 보물을 내놓는 듯 조심스럽게 유리병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이것은 나와 엄마가 직접 접은 종이학이에요. 안에 천 마리나 들어있어요! 엄마와 내가 며칠 내내 이것만 접었어요. 아빠가 돌아왔으니 이제 아빠에게 드릴게요.”“갑자기 왜 종이학 접을 생각을 한 거야? 숙제는 안 하고 매일 이것만 접고 있었던 거야?”그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