낱개로 된 그 콘돔들은 확실히 처음 보는 브랜드들이었기에 진짜인지 가짜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조유진의 걱정이 어쩌면 합리적이기도 했다.배현수도 더 이상 고집하지 않고 그녀를 보며 말했다.“정상적인 모텔도 아닌데 여기서 묵으려는 거야?”조유진은 그의 말에 1초도 생각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정상적인 호텔에는 물침대가 없잖아요.”“물침대가 그렇게 좋아? 그럼 이후에는...”배현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 사람 사이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조유진은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그를 보며 물었다.“이후에 뭐요?”“아무것도 아니야.”‘이후에? 나에게 뭔 이후가 있다고...’배현수는 그 뒷말을 하지 못하고 그냥 삼켜버렸다. 그도 그런 자신이 우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는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는 혹시라도 그녀가 과민반응을 일으킬까 봐 모든 행동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움직였다.“힘들면 안 해도 돼. 어?”예전에 조유진은 그의 너무 다정한 스킨십 때문에 그의 품에서 잠깐 기절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조유진이 대제주시로 막 돌아왔을 때라 그에 대한 거부감이 극에 달했을 때였다.그때 이후로 배현수는 더 이상 그녀에게 강요하지 않았다.하지만 공해에 가기 전날 밤, 술에 취한 배현수는 그녀에게 두 번이나 그 짓을 했다. 그날 어쩌면 그녀를 아프게 했을지도...“현수 씨.”“어?”조유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오늘 밥 안 먹었어요? 왜 이렇게 힘이 없어요?”“안 아파?조유진은 그를 똑바로 보며 고개를 가로젓더니 그의 귓가에 대고 또박또박 한 글자씩 말했다.“더.세.게.”사실 아프다. 하지만 조유진은 그가 좀 더 괴롭혀 주기를 원했다. 더 아프고 싶어서... 아픔이 더 뚜렷할수록 그녀는 이게 꿈이 아니라는 것을 믿을 수 있었다. ...지리산의 밤은 항상 비가 많이 왔다.부슬부슬 내리는 가을비 때문에 유리창에는 어느새 얇은 안개가 끼었다.가느다란 하얀 손가락이 유리창을 누르며 손자국을 남겼다.방안은 온통 두 사람의 호흡
조유진의 왼손을 잡은 배현수는 그녀의 약지에 낀 은반지를 만지작거렸다.1년 전, 바로 이 지리산 모텔에서 조유진은 이 반지를 배현수에게 돌려줬다.나중에 조유진이 바다에 뛰어들었을 때, 반년 넘게 우울해 있었던 배현수는 그 후 그녀와 관련된 모든 물건을 서재 서랍에 넣고 열쇠로 잠궈두었다.품에 안긴 조유진을 내려다보던 배현수는 총에 맞은 상처에 대해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아 화제를 돌렸다.“반지는 왜 또 꼈어? 전에 나에게 다시 돌려주지 않았어?”속마음을 들킨 조유진은 살짝 난처한 기색을 내보였다. 상대방이 자기와 같은 마음인지 아직 확신이 서지도 않은 상황에 자기 마음만 다 들킨 느낌이었다. 손을 움츠리고 이불 속으로 넣은 조유진은 티를 내면 안 된다는 생각에 당당한 얼굴로 말했다. “현수 씨가 말한 거잖아요. 나에게 준 물건은 내 거라고. 내가 내 물건을 끼는데, 왜요? 무슨 문제가 있어요?”그 말에 배현수는 그녀를 살짝 조롱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하지만 이건 네가 내 금고에서 뒤진 거잖아. 유진아, 이건... 절도이지 않을까?”“절도는 현수 씨가 나보다 한 수 위겠죠.”말을 마친 조유진은 등을 돌리더니 이불을 머리 위까지 당겨 얼굴을 가렸다.예민한 조유진은 배현수가 무엇인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가슴 깊이 와 닿는 것은 배현수가 그녀처럼 이 관계를 이어나가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는 그녀를 밀어내려고 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저 조유진의 눈물에 배현수의 마음이 순간 약해진 것뿐이라는 것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여자에게 이끌려 마지못해 잠자리를 가진 남자는 상대방으로부터 매정하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적어도 여자를 위하는 척은 해야 했다. 그게 설사 진심이 아닌 겉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일지라도 그는 오늘 밤 그녀를 성심성의껏 보살펴 줄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인내심과 보살핌은 다음 날 아침 일찍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그의 도덕과 양심은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며 길어도
서로의 마주친 시선에 조유진이 살짝 민망해하고 있을 때 배현수가 말했다.“나는 좀 무서운데. 나 좀 안아 주면 안 돼?”조유진은 아무 말 없이 얼른 그의 품에 안겼다.배현수를 껴안은 조유진은 두 눈을 부릅뜨고 방안을 이리저리 살피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예전에 끝방에서 묵은 적이 있어요? 끝방에서 귀신 본 적이 있어요?”조유진도 인터넷 카페 같은 데서 비슷한 이야기를 본 적이 있었다. 물론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곳은 없었지만...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배현수는 입술을 그녀 얼굴 가까이에 대더니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응, 한밤중에 정말로 빨간 옷을 입은 긴 생머리의 귀신이 침대 주위를 왔다 갔다 하더라고.”깜짝 놀란 조유진은 배현수의 품에서 몸을 웅크리며 말했다.“진짜요?”“응, 진짜.”‘너무 무섭잖아...’서둘러 이불 밖으로 나와 있는 발을 거두어들인 조유진은 저도 모르게 발가락까지 움츠렸다. 조유진은 한편으로 무섭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화도 났다. 그녀는 배현수의 팔을 꽉 잡더니 손으로 그의 근육을 꼬집고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현수 씨, 왜 야심한 밤에 갑자기 귀신 얘기하고 그래요?”“나도 무서워서. 좀 더 안아줘.”배현수의 너무 태연한 말투는 무서워하는 기색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거짓말쟁이!”하지만 조유진은 그의 말대로 배현수를 더 꽉 껴안았다. 그녀도 무서웠기 때문에...오늘 관계를 두 번이나 가졌지만 아직 씻으러 가지 않은 조유진은 몸이 끈적끈적해 불편한 상태였다. 하지만 끝방에서 귀신이 나온다는 말에 그녀는 도저히 침대에서 일어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현수 씨, 저 샤워 좀 하고 싶어요.”“어, 가.”조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귀신이 나올까 봐 무섭다면서요. 내가 화장실에 가면 혼자 여기에 있을 텐데 무섭지 않아요?”배현수는 웃으며 조유진을 쳐다보았다. “응, 안 무서워.”배현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무서워? 화장실에 같이 가달라고? 뭐 안 되는 것도 아닌데
“현수 씨가 직접 만날 필요가 없다고 해서 나도 그냥 차를 몰고 떠난 거예요. 나는 현수 씨가 말한 그 규칙들을 다 무시하고 길 건너로 달려갈 수 있었어요. 어차피 지금까지 우리 서로 놓지 못하고 계속 질척거리고 있었잖아요. 결과가 없다고 해도 뭐 어때요? 서로 이렇게 계속 놓지 못하고 있는데... 물론 무책임하고 못 됐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나도 원래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니니까 상관없어요. 위증까지 한 사람이 좋아봤자 얼마나 좋겠어요?”조유진은 침을 꿀꺽 삼키며 계속 말했다. “그저 나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한 가닥의 인간성으로 참고 있는 거라고요. 우리에게 미래가 없다면 현수 씨를 흔들지 말아야겠다고... 정말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다고요. 분명 이제 겨우 다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공해 바다에서 나와 생사를 같이할 거라는 현수 씨 말을 믿었어요. 그래서 다시 흔들렸고요. 그런데 지금은 현수 씨가 나와 더 이상 같이 있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요. 내 생각이 틀렸어요?”조유진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할 말, 하지 말아야 할 말 가리지 않고 다 해버렸다.시뻘게진 조유진의 눈시울을 보고 있던 배현수는 서심의 독성이 발작해서인지 순간 심장이 쥐어뜯기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그는 예전처럼 그녀를 꼭 안아 주고 싶었지만 끝내 참았다.배현수는 얼굴의 감정을 최대한 숨기며 말했다.“내 생각이 짧았어. 성남에 너를 찾으러 가는 게 아닌데... 말해, 어떻게 보상해 주면 될까? 네가 해 달라는 거 다 해 줄게.”배현수는 그녀가 원하는 것은 모두 다 줄 수 있었다. 미래에 대한 약속만 빼고... 조유진 또한 배현수의 말뜻을 바로 알아챘다. 앞으로 더는 자기를 귀찮게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배현수의 말에 조유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배 대표님께서 나와 자자마자 바로 나를 버리려고요? 그런데 SY 회사 주식이 내 손에 있는데 배 대표님도 나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없을 것 같네요. 아니면 다른 곳에 숨겨진 재산이라도 있는 거예요?”
배현수는 살짝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물었다.“어머니가 돌아가신 일, 신경 쓰이지 않아?”이 세상에서 조유진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배현수일 것이다. 그래서 어떤 방법으로 그녀를 포기하게 할 수 있는지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서로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일수록 어떤 말들이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제일 잘 알 것이다.조유진 또한 어찌 그런 배현수가 밉지 않겠는가? 다만 가끔은 미움보다 사랑이 더 컸다. 배현수의 얇은 입술을 바라보던 조유진은 시선을 천천히 위로 올려 그의 눈을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신경 쓰여요. 그래서 나도 예지은을 용서할 생각이 없고요. 나와 현수 씨는 그냥 지금처럼 이런 상태로 있으면 돼요. 우리 둘 사이의 그런 응어리들이 하루 이틀 사이에 없어질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이렇게 서로에 대한 감정이 없어질 때까지 시간을 끌다가 현수 씨에 대한 내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면 그때 나더러 가지 말라고 해도 내가 알아서 떠날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그냥 이렇게 있어요. 네?”배현수는 차가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하지만 나는 이미 너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어.”“정말요? 나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데 공해 바다까지 날 구하러 간 거예요? 나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 사람이 자기 목숨을 바쳐가며 나를 살리려 한 거예요? 현수 씨, 지금도 나를 속이고 있어요.”“공해에 간 것은 네가 선유의 친엄마이기 때문이야. 너를 구하지 않으면 앞으로 선유가 이 아빠를 어떻게 생각하겠어?”배현수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 기복도 없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정말로 그 거짓말이 진실이라고 믿겨질 만큼...가슴이 찡해진 조유진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그럼 왜 또 성남에 와서 나와 창민 오빠의 뒤를 몰래 따라다닌 건데요?”“남자의 소유욕이 발동한 것뿐이야. 네가 엄창민과 진도가 어느 정도까지 나갔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야.”“그럼 내가 성남에 가서 창민 오빠와 결혼해도 상관없어요?”조유진이 한마디 한마디
통에서 약을 꺼낸 조유진은 입에 넣기 전, 덤덤한 얼굴로 배현수를 보며 물었다. “나더러 정말 먹으라고 그러는 거예요?”배현수는 침대 머리맡에서 생수 한 병을 들고는 뚜껑을 따서 조유진에게 건넸다.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뜻은 분명했다.두 사람이 지금과 같은 애매모호한 관계에서 뜻하지 않게 임신이라도 하게 되면 정말 골칫거리가 되기 때문이다.조유진도 더 이상 감정만 앞섰던 열여덟 살 소녀가 아니다. 그녀는 약을 입에 넣은 후, 배현수가 건넨 물을 받아 약과 함께 삼켰다.그런 그녀를 보며 배현수는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어젯밤에는 네가 잠깐 오버했다고 생각할게. 앞으로 다시는 그런 바보 같은 짓 하지 마.”배현수의 앞에 서 있는 조유진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어젯밤에는 확실히 현수 씨가 살아있는 것을 보고 너무 흥분해서 오버한 건 맞아요. 그런데 현수 씨는요? 현수 씨가 콘돔을 사용하지 않은 건요?”“네가 원한 거야, 유진아.”“거절할 수도 있었잖아요.”배현수가 확실하게 조유진에게 거절의 의사를 표했더라면 어젯밤에 그녀가 그렇게 질척거릴 수 있었을까? 관계를 두 번씩이나 가질 수 있었을까? 배현수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자 조유진은 절뚝거리며 욕실로 향했다.그런 그녀의 모습을 도저히 볼 수 없었던 배현수는 그녀를 번쩍 안아 침대에 앉혔다.배현수는 그녀의 다친 오른쪽 발목을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어젯밤에 빨갛게 부어올랐던 발목은 이미 새파랗게 멍이 들어있었다. 조유진의 피부가 워낙 하얀 탓에 상처가 더 끔찍해 보였다.미간을 찌푸린 배현수는 조금 전에 사 온 연고를 뜯어 조유진의 발에 발라 주었다.겉에 셔츠 한 장만 걸치고 있었던 조유진은 안 그래도 속옷을 안 입고 있었는데 발까지 들자... 속살이 그대로 보였다. 진짜로 보여줘야 할 것, 보여주지 말아야 할 것들이 이 순간 전부 낱낱이 드러난 것 같았다. 민망한 조유진이 다리를 움츠리려 하자 배현수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의 발을 더 꽉 부여잡았다.“움직이지 마.”
남녀 사이의 관계는 신체적인 차이로 인해 항상 남자가 부담을 덜 느끼는 쪽이 된다. 남자가 아무런 보호 조치를 취하지 않은 위험은 전적으로 여자가 짊어져야 하니까...배현수는 조유진이 나중에 다른 사람 앞에서도 자신을 보호하지 못할까 봐 걱정되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배현수의 얼굴도 점점 어두워졌다. 그는 자기가 죽은 후, 누군가가 그녀를 돌볼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사람이 자기만큼 조유진을 사랑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그의 품에 안겨 있는 조유진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배현수는 그녀를 품에서 떼어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대답해.”그의 딱딱하고 차가운 말투에 조유진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어젯밤에 현수 씨가 먼저 나를 책임지지 않을 거라 했어요. 이런 일은 우리가 서로 원해서 한 거고 나도 현수 씨에게 책임지라고 질척거리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배 대표님은 무슨 자격으로 나에게 이런 요구를 하는 거죠? 내 남자친구도 아니고 나와 결혼할 배우자도 아닌데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사람을 오해하게 할 말을 하냐고요? 나와 다시...”마음속에 있는 불만을 채 말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를 보니 남초윤이었다.어제 육지율과 남초윤은 선유와 함께 놀이공원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다. 지금 전화 온 것을 보니 선유가 집에 가고 싶어 하는 모양이었다.조유진이 통화 버튼을 누르자 전화기 너머로 남초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산성 별장에 도착했어? 선유가 내일 월요일이라 학교에 가야 하는데 어제 우리 집에 오면서 숙제 책을 안 갖고 왔다네? 그래서 집에 빨리 가서 숙제해야 할 것 같다고 그래서.”“나 지금 지리산에 있어. 오후쯤 데리러 갈 테니까 진짜 미안한데 육 변과 같이 좀만 더 선유를 봐줘.”“미안하기는 뭘? 선유가 얼마나 말을 잘 듣는데. 우리가 애를 보는 게 아니라 애가 어른 둘과 같이 놀아 주는 거지.”남초윤의 말에 조유진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너도 아이가 그렇게 좋으면 한 명 낳
배현수는 손을 들어 조유진의 머리카락을 문지르며 말했다.“응, 안 갈게. 너와 함께 산성 별장으로 돌아갈게.”SY 그룹 내부에도 아직 배현수가 수습해야 할 일이 많았다.또한 앞으로 조유진과 선유 두 모녀가 함께 살 곳도 미리 봐둬야 했다. 배현수는 나중에 자기가 없더라도 두 모녀가 서로 의지하며 안전하게 잘 살기를 바랐다. 자기의 말에 설득이 되었다고 생각한 조유진은 배현수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래요. 이번에는 현수 씨를 한번 믿어볼게요.”배현수가 먼저 체크아웃을 하러 나갔고 세수를 마친 조유진도 옷매무새를 정리한 후 가방과 기복부를 들고 방을 나섰다.모텔 복도에서 조유진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배현수를 보았다.배현수가 가지 않은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조유진은 발목의 상처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 들고 있던 가방과 기복부는 바닥에 그대로 떨어졌다.순간 어리둥절해진 배현수는 그녀의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유진아, 왜 그래?”그녀가 많이 불안해하는 것을 느낀 배현수는 긴 팔로 그녀를 꼭 감싸 안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은 채 꽤 오랫동안 복도에 서 있었다.배현수의 품에 한참이나 안긴 후에야 조유진은 그나마 감정을 추스를 수 있었다. 그녀는 배현수 허리춤의 셔츠를 손으로 움켜쥐고는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나 발목이 좀 아파요.”나긋나긋한 목소리는 꼭 마치 배현수에게 애교를 부리는 것 같았다.조유진은 꽤 오랫동안 배현수에게 애교를 부리지 않았다.그는 손으로 그녀의 작은 얼굴을 살짝 꼬집더니 한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가방과 기복부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를 안아 들었다.“기복부는 어떻게 가지고 나온 거야?”배현수의 목을 껴안은 조유진은 당당한 얼굴로 말했다.“현수 씨가 나에게 쓴 거잖아요. 기념으로 간직하고 싶어서 가져가는 건데 안 돼요?”“돼.”하지만 기념으로 남긴 물건들이 앞으로 어쩌면 그녀의 심장을 후벼 파는 화살이 될 지모 모른다.아름다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