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유진은 사실 받기도 안 받기도 애매모호한 상황이었다. 여자로서 덥석 받는 것도 꽤 곤란하기 때문이다.마치 그녀가 꼭 관계를 갖지 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보였으니... 물론 조유진의 마음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저...”조유진이 괜찮다고 말하려고 할 때 앞에 있던 배현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방값까지 다 합쳐서 얼마예요?”“십삼만 원.”배현수가 돈을 지불하자 아주머니는 손에 쥔 콘돔 한 줌을 다시 조유진에게 건네며 낮은 소리로 한마디 했다.“몸조심해.” 콘돔 한 줌을 움켜쥐고 있는 조유진의 손바닥은 불타오르는 듯 뜨거웠다.너... 너무 창피해서...조유진은 배현수의 등에 얼굴을 묻고는 손으로 그의 등을 꼬집으며 말했다.“빨리 가요.”방은 바로 지리산 옆에 있어 방안에서 바로 산의 경치를 볼 수 있었지만 복도 제일 끝에 있는 끝방이었기에 한참 걸어야 했다. 방 구조는 여전히 스위트룸이었고 방 가운데에는 물침대가 놓여있었다.배현수는 조유진을 침대에 내려놓고 큰 손으로 침대 매트리스를 누르며 눈살을 찌푸렸다.“너무 흔들거리는 거 아니야? 이런 데서 어떻게 자? 프런트에 가서 평범한 더블 침대방이 있는지 물어보고 올게.”이 물침대는 말 그대로 물에 있는 것처럼 심하게 흔들리는 것 외에 별 특이한 것이 없었다.배현수가 일어나자 침대에 앉아 있던 조유진이 갑자기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얼떨떨해진 배현수는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침대가 마음에 들어?”사실 배현수가 별 뜻 없이 한 말이었지만 조유진의 귀에는 꼭 마치 ‘너는 이 침대에서 하는 것을 원해?’라고 묻는 듯했다.전에 이 호텔에 왔을 때 물침대에서 잔 적도 있었고 이 물침대에서 관계를 가진 적도 있었다.별 특별한 느낌은 없었지만 침대가 너무 흔들리는 바람에 한밤중에 잠에서 깨거나 몸을 뒤집으면 옆에 있는 다른 한 명도 쉽게 잠에서 깨기 일쑤였다. 관계를 하는 데 좀 더 새로운 것을 원한다면 여기서 한 번쯤 시도해보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단순히 잠만 자려 한다면
“부어도 상관없어요. 현수 씨, 왜 만나고 나서 지금까지 자꾸 나를 피해요?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예요?”만약 배현수가 싫어하면 그녀도 두 번 다시 그에게 매달리지 않을 것이다.자기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스토커처럼 자꾸 질척거리며 상대방을 힘들게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장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조유진 또한 그런 짓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공해 바다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일을 겪은 후, 그녀는 두 사람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높은 장벽이 허물어졌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배현수는 죽음에서 겨우 살아났음에도 바로 조유진을 만나러 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 이유를 잘 몰랐지만 왠지 좋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심지어 다시 돌아온 배현수는 그녀를 보는 눈빛마저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등을 돌린 채 서 있는 배현수는 그저 덤덤한 목소리로 조유진에게 말했다.“너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야. 유진아, 하지만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너에게 그 어떤 것도 약속할 수 없고...”영원을 약속하는 것은 너무 어렵고 평생이라는 시간 또한 너무 길다.배현수는 그녀에게 그 어떤 것도 약속할 수도, 줄 수도 없었다.그는 이미 애초의 약속대로 719부대에 들어가게 되었고 서심같이 해독약도 없는 독에 중독되었으니 이제 며칠을 더 살 수 있을지 배현수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드래곤 파 쪽에서는 계속 SY그룹을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공해 바다 위에서 719부대와 전쟁을 선포한 이상 앞으로 배현수에게도 평화로운 날이 며칠 남지 않았을 것이다.만약 이런 상황에서도 조유진을 원하고 소유하려 한다면 이보다 더 나쁜 놈은 없을 것이다.그는 이제 조유진과 선유를 자신에게서 완전히 떼어내야 했다. 두 모녀가 대제주시에 머물러 있는 것도 어쩌면 위험할 수 있었다.요 며칠, 그는 조유진과 선유를 비밀리에 스위스로 보내려고 했다. 국제적으로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있는 스위스는 드래곤 파의 세력이 개입하고 있지 않아 그곳에서는 평화로운 노후를 보낼 수 있었다. 그런 곳에서
서로 뒤엉킨 두 사람은 옆에 있는 물침대에 넘어졌다.배현수는 그저 그녀를 안고 있을 뿐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조유진이 안아달라고 하니 배현수는 정말로 그녀를 안고만 있을 뿐이었다.조유진은 그의 넥타이로 두 사람이 마주 잡은 손을 묶었다. 마치 이렇게 묶으면 그가 도망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조유진은 입꼬리를 양쪽으로 올리며 말했다.“현수 씨, 우리 다시 함께할 수 있는 거죠?”이제 배현수만 원한다면 두 사람은 평생 함께할 수 있었다.“유진아...”조유진이 두 사람의 손을 넥타이를 꽉 조여 매긴 했지만 사실 쉽게 풀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배현수는 차마 그녀의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조유진은 왼손으로 그와 깍지를 낀 채 손바닥을 힘주어 누르며 그의 몸 위에 걸터앉았다.움직임이 너무 컸는지 물침대가 심하게 흔들거렸고 그녀의 비단결 같은 웨이브 머리카락도 파도처럼 출렁거렸다.배현수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조유진은 다른 한 손을 들어 그의 셔츠 단추를 풀려고 했다.그러자 배현수는 그녀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너 이런 거 싫어하잖아. 그동안 약도 안 먹었을 거 아니야. 너 힘들어서 안 돼.”배현수의 눈에 그녀의 행동은 그저 장난으로 보일 뿐이었다.하지만 조유진은 배현수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그의 귓가에 얼굴을 대고 말했다.“내가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 현수 씨가 어떻게 알아? 내 마음에 들어와 봤어?”배현수의 코끝을 스쳐 지나가는 은은한 장미 향은 그야말로 매혹적이었다.조유진은 배현수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하나둘씩 단추를 푸는 그녀는 배현수를 집요하게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현수 씨의 옷을 벗겨주는데 현수 씨는 내 옷을 안 벗겨 줄 거야?”평소의 조유진이라면 이런 일에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어쩌다 한 번 주동적으로 행동할 때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배현수는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조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내가 공해 바다에서 너를 구한 그 보답으로 이
조유진은 아주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배현수는 이마에 핏줄이 선명히 보일 정도로 참고 있었다. 그는 조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유.진.아.”“현수 씨라면 정신적인 사랑도 나는 기꺼이... 웁.”배현수는 오른손으로 넥타이를 풀며 다른 한 손으로 조유진을 힘껏 안아 올렸다. 그녀는 배현수의 넘치는 힘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조유진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배현수를 바라보자 그는 조유진의 귀를 깨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잘 생각하고 결정해. 더 이상 너를 책임질 수 없을지도 몰라. 유진아, 자꾸 나를 자극하지 마. 지금 내 위에서 내려오면 나도 너를 안 건드릴게. 나중에 후회할 짓 하지 말고. 응?”중저음의 낮은 목소리 톤은 너무 확고한 말투였지만 모순적이게도 그 목소리 사이로 그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배현수는 그녀더러 자기를 멀리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조유진은 더 반항적으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그녀는 물끄러미 배현수를 보며 말했다.“나도 이제 어린애가 아니에요. 어른이고 성인이에요. 그 누구도 저를 책임질 필요가 없어요. 나는 내가 책임져요. 이런 일은 당신이 원하고 내가 원하면 할 수 있는 거라고요. 영원한 약속? 그런 끝이 안 보이는 것은 필요 없어요. 현수 씨, 나는 지금 이 순간의 감정에 충실하고 싶어요.”“내 말은 내가 어쩌면 너와 결혼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이야. 그래도 상관없어? 후회 안 할 자신이 있냐고?”조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전에도 나와 결혼 안 했잖아요. 그래도 우리 할 건 다 했어요. 아이까지 낳았는데 인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좀 억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현수 씨에게 매달리지 않을게요. 나를 보기 싫어서 꺼지라고 하면 기꺼이 떠날게요. 하지만 지금은 현수 씨도 원하잖아요. 아니에요?”두 사람은 서로의 이마를 맞댄 채 눈을 마주 보고 있었다. 배현수는 조유진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야? 유진아
낱개로 된 그 콘돔들은 확실히 처음 보는 브랜드들이었기에 진짜인지 가짜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조유진의 걱정이 어쩌면 합리적이기도 했다.배현수도 더 이상 고집하지 않고 그녀를 보며 말했다.“정상적인 모텔도 아닌데 여기서 묵으려는 거야?”조유진은 그의 말에 1초도 생각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정상적인 호텔에는 물침대가 없잖아요.”“물침대가 그렇게 좋아? 그럼 이후에는...”배현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 사람 사이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조유진은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그를 보며 물었다.“이후에 뭐요?”“아무것도 아니야.”‘이후에? 나에게 뭔 이후가 있다고...’배현수는 그 뒷말을 하지 못하고 그냥 삼켜버렸다. 그도 그런 자신이 우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는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는 혹시라도 그녀가 과민반응을 일으킬까 봐 모든 행동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움직였다.“힘들면 안 해도 돼. 어?”예전에 조유진은 그의 너무 다정한 스킨십 때문에 그의 품에서 잠깐 기절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조유진이 대제주시로 막 돌아왔을 때라 그에 대한 거부감이 극에 달했을 때였다.그때 이후로 배현수는 더 이상 그녀에게 강요하지 않았다.하지만 공해에 가기 전날 밤, 술에 취한 배현수는 그녀에게 두 번이나 그 짓을 했다. 그날 어쩌면 그녀를 아프게 했을지도...“현수 씨.”“어?”조유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오늘 밥 안 먹었어요? 왜 이렇게 힘이 없어요?”“안 아파?조유진은 그를 똑바로 보며 고개를 가로젓더니 그의 귓가에 대고 또박또박 한 글자씩 말했다.“더.세.게.”사실 아프다. 하지만 조유진은 그가 좀 더 괴롭혀 주기를 원했다. 더 아프고 싶어서... 아픔이 더 뚜렷할수록 그녀는 이게 꿈이 아니라는 것을 믿을 수 있었다. ...지리산의 밤은 항상 비가 많이 왔다.부슬부슬 내리는 가을비 때문에 유리창에는 어느새 얇은 안개가 끼었다.가느다란 하얀 손가락이 유리창을 누르며 손자국을 남겼다.방안은 온통 두 사람의 호흡
조유진의 왼손을 잡은 배현수는 그녀의 약지에 낀 은반지를 만지작거렸다.1년 전, 바로 이 지리산 모텔에서 조유진은 이 반지를 배현수에게 돌려줬다.나중에 조유진이 바다에 뛰어들었을 때, 반년 넘게 우울해 있었던 배현수는 그 후 그녀와 관련된 모든 물건을 서재 서랍에 넣고 열쇠로 잠궈두었다.품에 안긴 조유진을 내려다보던 배현수는 총에 맞은 상처에 대해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아 화제를 돌렸다.“반지는 왜 또 꼈어? 전에 나에게 다시 돌려주지 않았어?”속마음을 들킨 조유진은 살짝 난처한 기색을 내보였다. 상대방이 자기와 같은 마음인지 아직 확신이 서지도 않은 상황에 자기 마음만 다 들킨 느낌이었다. 손을 움츠리고 이불 속으로 넣은 조유진은 티를 내면 안 된다는 생각에 당당한 얼굴로 말했다. “현수 씨가 말한 거잖아요. 나에게 준 물건은 내 거라고. 내가 내 물건을 끼는데, 왜요? 무슨 문제가 있어요?”그 말에 배현수는 그녀를 살짝 조롱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하지만 이건 네가 내 금고에서 뒤진 거잖아. 유진아, 이건... 절도이지 않을까?”“절도는 현수 씨가 나보다 한 수 위겠죠.”말을 마친 조유진은 등을 돌리더니 이불을 머리 위까지 당겨 얼굴을 가렸다.예민한 조유진은 배현수가 무엇인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가슴 깊이 와 닿는 것은 배현수가 그녀처럼 이 관계를 이어나가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는 그녀를 밀어내려고 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저 조유진의 눈물에 배현수의 마음이 순간 약해진 것뿐이라는 것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여자에게 이끌려 마지못해 잠자리를 가진 남자는 상대방으로부터 매정하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적어도 여자를 위하는 척은 해야 했다. 그게 설사 진심이 아닌 겉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일지라도 그는 오늘 밤 그녀를 성심성의껏 보살펴 줄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인내심과 보살핌은 다음 날 아침 일찍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그의 도덕과 양심은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며 길어도
서로의 마주친 시선에 조유진이 살짝 민망해하고 있을 때 배현수가 말했다.“나는 좀 무서운데. 나 좀 안아 주면 안 돼?”조유진은 아무 말 없이 얼른 그의 품에 안겼다.배현수를 껴안은 조유진은 두 눈을 부릅뜨고 방안을 이리저리 살피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예전에 끝방에서 묵은 적이 있어요? 끝방에서 귀신 본 적이 있어요?”조유진도 인터넷 카페 같은 데서 비슷한 이야기를 본 적이 있었다. 물론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곳은 없었지만...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배현수는 입술을 그녀 얼굴 가까이에 대더니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응, 한밤중에 정말로 빨간 옷을 입은 긴 생머리의 귀신이 침대 주위를 왔다 갔다 하더라고.”깜짝 놀란 조유진은 배현수의 품에서 몸을 웅크리며 말했다.“진짜요?”“응, 진짜.”‘너무 무섭잖아...’서둘러 이불 밖으로 나와 있는 발을 거두어들인 조유진은 저도 모르게 발가락까지 움츠렸다. 조유진은 한편으로 무섭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화도 났다. 그녀는 배현수의 팔을 꽉 잡더니 손으로 그의 근육을 꼬집고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현수 씨, 왜 야심한 밤에 갑자기 귀신 얘기하고 그래요?”“나도 무서워서. 좀 더 안아줘.”배현수의 너무 태연한 말투는 무서워하는 기색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거짓말쟁이!”하지만 조유진은 그의 말대로 배현수를 더 꽉 껴안았다. 그녀도 무서웠기 때문에...오늘 관계를 두 번이나 가졌지만 아직 씻으러 가지 않은 조유진은 몸이 끈적끈적해 불편한 상태였다. 하지만 끝방에서 귀신이 나온다는 말에 그녀는 도저히 침대에서 일어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현수 씨, 저 샤워 좀 하고 싶어요.”“어, 가.”조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귀신이 나올까 봐 무섭다면서요. 내가 화장실에 가면 혼자 여기에 있을 텐데 무섭지 않아요?”배현수는 웃으며 조유진을 쳐다보았다. “응, 안 무서워.”배현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무서워? 화장실에 같이 가달라고? 뭐 안 되는 것도 아닌데
“현수 씨가 직접 만날 필요가 없다고 해서 나도 그냥 차를 몰고 떠난 거예요. 나는 현수 씨가 말한 그 규칙들을 다 무시하고 길 건너로 달려갈 수 있었어요. 어차피 지금까지 우리 서로 놓지 못하고 계속 질척거리고 있었잖아요. 결과가 없다고 해도 뭐 어때요? 서로 이렇게 계속 놓지 못하고 있는데... 물론 무책임하고 못 됐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나도 원래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니니까 상관없어요. 위증까지 한 사람이 좋아봤자 얼마나 좋겠어요?”조유진은 침을 꿀꺽 삼키며 계속 말했다. “그저 나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한 가닥의 인간성으로 참고 있는 거라고요. 우리에게 미래가 없다면 현수 씨를 흔들지 말아야겠다고... 정말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다고요. 분명 이제 겨우 다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공해 바다에서 나와 생사를 같이할 거라는 현수 씨 말을 믿었어요. 그래서 다시 흔들렸고요. 그런데 지금은 현수 씨가 나와 더 이상 같이 있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요. 내 생각이 틀렸어요?”조유진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할 말, 하지 말아야 할 말 가리지 않고 다 해버렸다.시뻘게진 조유진의 눈시울을 보고 있던 배현수는 서심의 독성이 발작해서인지 순간 심장이 쥐어뜯기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그는 예전처럼 그녀를 꼭 안아 주고 싶었지만 끝내 참았다.배현수는 얼굴의 감정을 최대한 숨기며 말했다.“내 생각이 짧았어. 성남에 너를 찾으러 가는 게 아닌데... 말해, 어떻게 보상해 주면 될까? 네가 해 달라는 거 다 해 줄게.”배현수는 그녀가 원하는 것은 모두 다 줄 수 있었다. 미래에 대한 약속만 빼고... 조유진 또한 배현수의 말뜻을 바로 알아챘다. 앞으로 더는 자기를 귀찮게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배현수의 말에 조유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배 대표님께서 나와 자자마자 바로 나를 버리려고요? 그런데 SY 회사 주식이 내 손에 있는데 배 대표님도 나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없을 것 같네요. 아니면 다른 곳에 숨겨진 재산이라도 있는 거예요?”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