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길 내내 조유진은 배현수의 어깨에 기댄 채 그만 바라봤다.사실 두 사람은 겨우 18일 동안 떨어져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생사를 넘나드는 이별을 겪었던 탓인지 보름 남짓한 이 짧은 시간이 조유진은 그 어느 때보다 길게 느껴졌다. 그녀는 그사이 배현수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잔뜩 준비해 놓았었다. 하지만 막상 만나고 보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현수 씨.”“어?”“18일 동안 어디 갔었어요? 왜 산성 별장으로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 나와 선유는 현수 씨의 관까지 준비할 뻔했잖아요.”시신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하관하더라도 준비한 관에는 시신 없이 유품만 넣어야 했다. 잠시 걸음을 멈춘 배현수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고 물었다.“유진아, 설마 그사이 내가 다른 사람이라도 만났을까 봐 의심하는 거야?”그 말에 얼굴이 살짝 달아오른 조유진은 배현수의 목을 감싸고 있는 팔을 더 꽉 끌어안았다.배현수는 질문만 했을 뿐 굳이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그녀를 업고 산 아래로 성큼성큼 내려갔다.배현수는 분명 조유진의 눈앞에 있었지만 그녀는 왠지 모르게 그가 언제라도 당장 사라질 것만 같았다. 조금 전, 배현수와 만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그는 조유진이 묻는 모든 질문에 최대한 단답형으로 대답하거나 아니면 아예 침묵으로 일관했다.상대에게 강요하는 것을 싫어하는 조유진 또한 배현수가 대답하지 않는 이유가 드래곤 파 혹은 719부대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719부대도 분명 비밀스러운 조직일 것이라 생각했다.조유진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배현수의 목을 더 꼭 감싸 안았다.배현수가 무사히 살아 있는 것이 지금 이 순간 제일 중요했기 때문에...지리산 모텔에 도착하니 카운터에는 여전히 그때 그 아주머니가 있었다. 파마한 듯한 곱슬머리, 빨간 립스틱을 바른 입술, 그리고 검은 망사 스타킹에 하이힐을 신고 있는 아주머니는 빨간 매니큐어를 바른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고 있었다. 담배 두 모금을 피운
조유진은 사실 받기도 안 받기도 애매모호한 상황이었다. 여자로서 덥석 받는 것도 꽤 곤란하기 때문이다.마치 그녀가 꼭 관계를 갖지 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보였으니... 물론 조유진의 마음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저...”조유진이 괜찮다고 말하려고 할 때 앞에 있던 배현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방값까지 다 합쳐서 얼마예요?”“십삼만 원.”배현수가 돈을 지불하자 아주머니는 손에 쥔 콘돔 한 줌을 다시 조유진에게 건네며 낮은 소리로 한마디 했다.“몸조심해.” 콘돔 한 줌을 움켜쥐고 있는 조유진의 손바닥은 불타오르는 듯 뜨거웠다.너... 너무 창피해서...조유진은 배현수의 등에 얼굴을 묻고는 손으로 그의 등을 꼬집으며 말했다.“빨리 가요.”방은 바로 지리산 옆에 있어 방안에서 바로 산의 경치를 볼 수 있었지만 복도 제일 끝에 있는 끝방이었기에 한참 걸어야 했다. 방 구조는 여전히 스위트룸이었고 방 가운데에는 물침대가 놓여있었다.배현수는 조유진을 침대에 내려놓고 큰 손으로 침대 매트리스를 누르며 눈살을 찌푸렸다.“너무 흔들거리는 거 아니야? 이런 데서 어떻게 자? 프런트에 가서 평범한 더블 침대방이 있는지 물어보고 올게.”이 물침대는 말 그대로 물에 있는 것처럼 심하게 흔들리는 것 외에 별 특이한 것이 없었다.배현수가 일어나자 침대에 앉아 있던 조유진이 갑자기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얼떨떨해진 배현수는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침대가 마음에 들어?”사실 배현수가 별 뜻 없이 한 말이었지만 조유진의 귀에는 꼭 마치 ‘너는 이 침대에서 하는 것을 원해?’라고 묻는 듯했다.전에 이 호텔에 왔을 때 물침대에서 잔 적도 있었고 이 물침대에서 관계를 가진 적도 있었다.별 특별한 느낌은 없었지만 침대가 너무 흔들리는 바람에 한밤중에 잠에서 깨거나 몸을 뒤집으면 옆에 있는 다른 한 명도 쉽게 잠에서 깨기 일쑤였다. 관계를 하는 데 좀 더 새로운 것을 원한다면 여기서 한 번쯤 시도해보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단순히 잠만 자려 한다면
“부어도 상관없어요. 현수 씨, 왜 만나고 나서 지금까지 자꾸 나를 피해요?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예요?”만약 배현수가 싫어하면 그녀도 두 번 다시 그에게 매달리지 않을 것이다.자기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스토커처럼 자꾸 질척거리며 상대방을 힘들게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장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조유진 또한 그런 짓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공해 바다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일을 겪은 후, 그녀는 두 사람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높은 장벽이 허물어졌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배현수는 죽음에서 겨우 살아났음에도 바로 조유진을 만나러 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 이유를 잘 몰랐지만 왠지 좋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심지어 다시 돌아온 배현수는 그녀를 보는 눈빛마저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등을 돌린 채 서 있는 배현수는 그저 덤덤한 목소리로 조유진에게 말했다.“너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야. 유진아, 하지만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너에게 그 어떤 것도 약속할 수 없고...”영원을 약속하는 것은 너무 어렵고 평생이라는 시간 또한 너무 길다.배현수는 그녀에게 그 어떤 것도 약속할 수도, 줄 수도 없었다.그는 이미 애초의 약속대로 719부대에 들어가게 되었고 서심같이 해독약도 없는 독에 중독되었으니 이제 며칠을 더 살 수 있을지 배현수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드래곤 파 쪽에서는 계속 SY그룹을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공해 바다 위에서 719부대와 전쟁을 선포한 이상 앞으로 배현수에게도 평화로운 날이 며칠 남지 않았을 것이다.만약 이런 상황에서도 조유진을 원하고 소유하려 한다면 이보다 더 나쁜 놈은 없을 것이다.그는 이제 조유진과 선유를 자신에게서 완전히 떼어내야 했다. 두 모녀가 대제주시에 머물러 있는 것도 어쩌면 위험할 수 있었다.요 며칠, 그는 조유진과 선유를 비밀리에 스위스로 보내려고 했다. 국제적으로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있는 스위스는 드래곤 파의 세력이 개입하고 있지 않아 그곳에서는 평화로운 노후를 보낼 수 있었다. 그런 곳에서
서로 뒤엉킨 두 사람은 옆에 있는 물침대에 넘어졌다.배현수는 그저 그녀를 안고 있을 뿐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조유진이 안아달라고 하니 배현수는 정말로 그녀를 안고만 있을 뿐이었다.조유진은 그의 넥타이로 두 사람이 마주 잡은 손을 묶었다. 마치 이렇게 묶으면 그가 도망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조유진은 입꼬리를 양쪽으로 올리며 말했다.“현수 씨, 우리 다시 함께할 수 있는 거죠?”이제 배현수만 원한다면 두 사람은 평생 함께할 수 있었다.“유진아...”조유진이 두 사람의 손을 넥타이를 꽉 조여 매긴 했지만 사실 쉽게 풀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배현수는 차마 그녀의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조유진은 왼손으로 그와 깍지를 낀 채 손바닥을 힘주어 누르며 그의 몸 위에 걸터앉았다.움직임이 너무 컸는지 물침대가 심하게 흔들거렸고 그녀의 비단결 같은 웨이브 머리카락도 파도처럼 출렁거렸다.배현수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조유진은 다른 한 손을 들어 그의 셔츠 단추를 풀려고 했다.그러자 배현수는 그녀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너 이런 거 싫어하잖아. 그동안 약도 안 먹었을 거 아니야. 너 힘들어서 안 돼.”배현수의 눈에 그녀의 행동은 그저 장난으로 보일 뿐이었다.하지만 조유진은 배현수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그의 귓가에 얼굴을 대고 말했다.“내가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 현수 씨가 어떻게 알아? 내 마음에 들어와 봤어?”배현수의 코끝을 스쳐 지나가는 은은한 장미 향은 그야말로 매혹적이었다.조유진은 배현수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하나둘씩 단추를 푸는 그녀는 배현수를 집요하게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현수 씨의 옷을 벗겨주는데 현수 씨는 내 옷을 안 벗겨 줄 거야?”평소의 조유진이라면 이런 일에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어쩌다 한 번 주동적으로 행동할 때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배현수는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조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내가 공해 바다에서 너를 구한 그 보답으로 이
조유진은 아주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배현수는 이마에 핏줄이 선명히 보일 정도로 참고 있었다. 그는 조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유.진.아.”“현수 씨라면 정신적인 사랑도 나는 기꺼이... 웁.”배현수는 오른손으로 넥타이를 풀며 다른 한 손으로 조유진을 힘껏 안아 올렸다. 그녀는 배현수의 넘치는 힘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조유진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배현수를 바라보자 그는 조유진의 귀를 깨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잘 생각하고 결정해. 더 이상 너를 책임질 수 없을지도 몰라. 유진아, 자꾸 나를 자극하지 마. 지금 내 위에서 내려오면 나도 너를 안 건드릴게. 나중에 후회할 짓 하지 말고. 응?”중저음의 낮은 목소리 톤은 너무 확고한 말투였지만 모순적이게도 그 목소리 사이로 그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배현수는 그녀더러 자기를 멀리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조유진은 더 반항적으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그녀는 물끄러미 배현수를 보며 말했다.“나도 이제 어린애가 아니에요. 어른이고 성인이에요. 그 누구도 저를 책임질 필요가 없어요. 나는 내가 책임져요. 이런 일은 당신이 원하고 내가 원하면 할 수 있는 거라고요. 영원한 약속? 그런 끝이 안 보이는 것은 필요 없어요. 현수 씨, 나는 지금 이 순간의 감정에 충실하고 싶어요.”“내 말은 내가 어쩌면 너와 결혼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이야. 그래도 상관없어? 후회 안 할 자신이 있냐고?”조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전에도 나와 결혼 안 했잖아요. 그래도 우리 할 건 다 했어요. 아이까지 낳았는데 인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좀 억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현수 씨에게 매달리지 않을게요. 나를 보기 싫어서 꺼지라고 하면 기꺼이 떠날게요. 하지만 지금은 현수 씨도 원하잖아요. 아니에요?”두 사람은 서로의 이마를 맞댄 채 눈을 마주 보고 있었다. 배현수는 조유진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야? 유진아
낱개로 된 그 콘돔들은 확실히 처음 보는 브랜드들이었기에 진짜인지 가짜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조유진의 걱정이 어쩌면 합리적이기도 했다.배현수도 더 이상 고집하지 않고 그녀를 보며 말했다.“정상적인 모텔도 아닌데 여기서 묵으려는 거야?”조유진은 그의 말에 1초도 생각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정상적인 호텔에는 물침대가 없잖아요.”“물침대가 그렇게 좋아? 그럼 이후에는...”배현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 사람 사이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조유진은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그를 보며 물었다.“이후에 뭐요?”“아무것도 아니야.”‘이후에? 나에게 뭔 이후가 있다고...’배현수는 그 뒷말을 하지 못하고 그냥 삼켜버렸다. 그도 그런 자신이 우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는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는 혹시라도 그녀가 과민반응을 일으킬까 봐 모든 행동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움직였다.“힘들면 안 해도 돼. 어?”예전에 조유진은 그의 너무 다정한 스킨십 때문에 그의 품에서 잠깐 기절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조유진이 대제주시로 막 돌아왔을 때라 그에 대한 거부감이 극에 달했을 때였다.그때 이후로 배현수는 더 이상 그녀에게 강요하지 않았다.하지만 공해에 가기 전날 밤, 술에 취한 배현수는 그녀에게 두 번이나 그 짓을 했다. 그날 어쩌면 그녀를 아프게 했을지도...“현수 씨.”“어?”조유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오늘 밥 안 먹었어요? 왜 이렇게 힘이 없어요?”“안 아파?조유진은 그를 똑바로 보며 고개를 가로젓더니 그의 귓가에 대고 또박또박 한 글자씩 말했다.“더.세.게.”사실 아프다. 하지만 조유진은 그가 좀 더 괴롭혀 주기를 원했다. 더 아프고 싶어서... 아픔이 더 뚜렷할수록 그녀는 이게 꿈이 아니라는 것을 믿을 수 있었다. ...지리산의 밤은 항상 비가 많이 왔다.부슬부슬 내리는 가을비 때문에 유리창에는 어느새 얇은 안개가 끼었다.가느다란 하얀 손가락이 유리창을 누르며 손자국을 남겼다.방안은 온통 두 사람의 호흡
조유진의 왼손을 잡은 배현수는 그녀의 약지에 낀 은반지를 만지작거렸다.1년 전, 바로 이 지리산 모텔에서 조유진은 이 반지를 배현수에게 돌려줬다.나중에 조유진이 바다에 뛰어들었을 때, 반년 넘게 우울해 있었던 배현수는 그 후 그녀와 관련된 모든 물건을 서재 서랍에 넣고 열쇠로 잠궈두었다.품에 안긴 조유진을 내려다보던 배현수는 총에 맞은 상처에 대해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아 화제를 돌렸다.“반지는 왜 또 꼈어? 전에 나에게 다시 돌려주지 않았어?”속마음을 들킨 조유진은 살짝 난처한 기색을 내보였다. 상대방이 자기와 같은 마음인지 아직 확신이 서지도 않은 상황에 자기 마음만 다 들킨 느낌이었다. 손을 움츠리고 이불 속으로 넣은 조유진은 티를 내면 안 된다는 생각에 당당한 얼굴로 말했다. “현수 씨가 말한 거잖아요. 나에게 준 물건은 내 거라고. 내가 내 물건을 끼는데, 왜요? 무슨 문제가 있어요?”그 말에 배현수는 그녀를 살짝 조롱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하지만 이건 네가 내 금고에서 뒤진 거잖아. 유진아, 이건... 절도이지 않을까?”“절도는 현수 씨가 나보다 한 수 위겠죠.”말을 마친 조유진은 등을 돌리더니 이불을 머리 위까지 당겨 얼굴을 가렸다.예민한 조유진은 배현수가 무엇인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가슴 깊이 와 닿는 것은 배현수가 그녀처럼 이 관계를 이어나가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는 그녀를 밀어내려고 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저 조유진의 눈물에 배현수의 마음이 순간 약해진 것뿐이라는 것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여자에게 이끌려 마지못해 잠자리를 가진 남자는 상대방으로부터 매정하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적어도 여자를 위하는 척은 해야 했다. 그게 설사 진심이 아닌 겉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일지라도 그는 오늘 밤 그녀를 성심성의껏 보살펴 줄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인내심과 보살핌은 다음 날 아침 일찍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그의 도덕과 양심은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며 길어도
서로의 마주친 시선에 조유진이 살짝 민망해하고 있을 때 배현수가 말했다.“나는 좀 무서운데. 나 좀 안아 주면 안 돼?”조유진은 아무 말 없이 얼른 그의 품에 안겼다.배현수를 껴안은 조유진은 두 눈을 부릅뜨고 방안을 이리저리 살피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예전에 끝방에서 묵은 적이 있어요? 끝방에서 귀신 본 적이 있어요?”조유진도 인터넷 카페 같은 데서 비슷한 이야기를 본 적이 있었다. 물론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곳은 없었지만...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배현수는 입술을 그녀 얼굴 가까이에 대더니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응, 한밤중에 정말로 빨간 옷을 입은 긴 생머리의 귀신이 침대 주위를 왔다 갔다 하더라고.”깜짝 놀란 조유진은 배현수의 품에서 몸을 웅크리며 말했다.“진짜요?”“응, 진짜.”‘너무 무섭잖아...’서둘러 이불 밖으로 나와 있는 발을 거두어들인 조유진은 저도 모르게 발가락까지 움츠렸다. 조유진은 한편으로 무섭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화도 났다. 그녀는 배현수의 팔을 꽉 잡더니 손으로 그의 근육을 꼬집고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현수 씨, 왜 야심한 밤에 갑자기 귀신 얘기하고 그래요?”“나도 무서워서. 좀 더 안아줘.”배현수의 너무 태연한 말투는 무서워하는 기색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거짓말쟁이!”하지만 조유진은 그의 말대로 배현수를 더 꽉 껴안았다. 그녀도 무서웠기 때문에...오늘 관계를 두 번이나 가졌지만 아직 씻으러 가지 않은 조유진은 몸이 끈적끈적해 불편한 상태였다. 하지만 끝방에서 귀신이 나온다는 말에 그녀는 도저히 침대에서 일어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현수 씨, 저 샤워 좀 하고 싶어요.”“어, 가.”조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귀신이 나올까 봐 무섭다면서요. 내가 화장실에 가면 혼자 여기에 있을 텐데 무섭지 않아요?”배현수는 웃으며 조유진을 쳐다보았다. “응, 안 무서워.”배현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무서워? 화장실에 같이 가달라고? 뭐 안 되는 것도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