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경은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하지만 조유진은 심미경의 기억 상실이 부럽기만 했다. “사실 과거를 잊는 것이 전적으로 나쁜 일은 아니에요. 원하지 않는 일을 가슴에 깊이 새기는 게 오히려 벌이 되는 경우가 많아요. 이런 일을 완전히 잊어버린다면 딱히 나쁜 일이라고 말하긴 어렵죠.”심미경은 SY 그룹 사무실에 오기 전에 이미 강이찬으로부터 조유진과 배현수 사이의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일들을 들었었다. 그리고 덤으로 배현수의 사망 소식도 전해 들었다.조유진이 지금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원하는 일을 잊어버리게 되면 상처로 멍든 가슴이 치유되고 헤여나올 수 없는 과거의 늪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런 일은 둘러싸인 성과 같았다.기억을 잃은 사람은 기억을 되찾고 싶어 하고 기억을 지우고 싶은 사람은 결코 쉽게 잊을 수 없었다.심미경은 머리가 살짝 아파져 관자놀이를 누르며 조유진을 바라보았다.조유진은 그런 그녀를 부축하며 다급하게 물었다. “왜 그래요? 머리가 많이 아파요?”“왠지는 모르겠는데 제가 조유진 씨에게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느낌이 자꾸 들어요. 근데 진짜 생각나지 않아요...오늘 조유진 씨를 보고 나서 이런 느낌이 더 강렬해졌어요.”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조유진은 심미경이 뭘 말하려고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어떤 부분에 관련된 일이죠?”“저도 잘 모르겠지만 아주 중요한 일인 것 같아요. 그게 아니라면 저도 이 정도로 강한 느낌이 들지 않았을 거예요.”하지만 심미경이 도무지 생각해 내지 못하자 조유진도 계속 캐묻기에 난처했다.“일단 좀 쉬세요. 머리가 아프면 애써 뭔가를 생각해 내려고 하지 마세요.”...오후에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조유진은 테이블 위에 밀크티 한 잔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재스민 그린 밀크티, 당도 30%, 검정 타피오카와 분홍색 타피오카 그리고 커피 젤리 추가.가을의 첫 밀크티 한 잔.“...”조유진은 제자리에 얼어붙은 채 얼굴색이 확 달라졌다.“육 변
“그때 현수가 널 구하기 위해 온몸에 폭탄을 매달아 놨는데 그가 무슨 재간으로 죽음을 피해 갈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거야?”조유진은 여전히 고집을 부렸다. “그의 몸에 매단 폭탄이 가짜라면요? 상대방에게 혼선을 주기 위해서 위장한 거라면...”“무슨 말인지 알겠어. 근데 그날 밤 유람선은 진짜 폭발했잖아. 유진아, 자꾸 아닌 걸 억지로 지어내려고 하지 마.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서둘러 네 정서를 조절하고 현수를 대신해 SY 그룹을 보란 듯이 지켜내는 거야. 그리고 네에겐 선유도 있잖아. 선유에게 네가 없으면 되겠어? 선유를 봐서라도 하루빨리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해.”육지율은 입이 무거운 사람인지라 배현수에 관련된 그 어떤 사실도 누설하지 않았다.조유진은 그의 말을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현수가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배현수가 진짜 살아있다면 왜 그녀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까?혹시 심미경처럼 기억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하지만 기억을 잃었다면 그녀가 재스민 그린 밀크티를 즐겨 마시는 사실을 그가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조유진은 배현수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시도했지만 자신의 논리에 의해 금세 반박당했다.조유진의 눈 밑은 잿빛 안개가 껴 생기를 잃었다. “육 변호사님, 내일 하루만 남초윤과 함께 선유를 좀 봐주실 수 있나요?”“어디 가려고 그래? 유진아, 허튼 생각을 하거나 그러면 안 돼...”그녀는 입꼬리를 끄집어 당기며 힘없이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허튼 생각 하지 않아요. 지리산 절에 가 기도하면 소원이 잘 성취된다고 하더라구요. 내일 절에 가서 부처님께 현수 씨가 아직 살아있는지 물어보려고요.”사람들은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지만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을 때 흔히 실체도 없이 허무맹랑한 하느님이나 부처님에게 모든 희망을 걸게 된다.조유진이 6살 때 갑자기 고열이 났었다. 그래서 안정희가 그녀를 병원에 데려가 주사나 링거도 맞히고 약도 먹이며 할 수 있는 치료를 다 해봤으나 고열이 떨어지지
“이게 배 시주님의 축원서예요. 조 시주님이 본당에 들어오기 전에 본당 입구에 있는 오래된 고무나무에 빨간색 천 조각이 걸려 있는 걸 보셨나요?”조유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못 봤어요.”그러자 현공민은 자상하게 웃으며 권유했다. “관심이 있으시면 이따가 가서 보세요.”“그럴게요.”조유진은 축원서를 받아 한 장 한 장 넘겼다.모든 페이지에 배현수의 필체가 빼곡히 적혀 있었고 그녀의 이름도 그중에 적혀 있었다.조유진이 무사하기를 빕니다.그녀의 손끝이 글씨 하나하나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나갔다. 그녀의 심장이 갑자기 극심한 고통을 호소했고 눈물이 스르르 눈 앞을 가렸다.현공민은 그런 그녀를 보며 말문을 열었다. “그날 저는 배 시주님이 폭우 속에서 무릎을 꿇고 무엇을 기도하는지 물었어요. 그러자 그는 한 사람이 무사하기를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어요. 저는 그런 그에게 그 소원을 위해서 어떠한 대가도 다 치를 준비가 되었냐고 물었죠. 물론 목숨을 바쳐서라도요. 조 시주님, 그가 어떤 대답을 했는지 궁금하세요?”조유진은 축원서에 눈물을 똑똑 떨구면서도 입꼬리가 올라간 채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미 그의 목숨으로 제 목숨을 맞바꿨으니 그의 대답은 알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배현수는 자신의 목숨으로 조유진을 위험 속에서 구해냈다.이것을 소원 성취라고 할 수 있을까?목숨과 목숨을 맞바꾸는 일은 살아남은 자에게 너무나 잔인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현공민은 두 손을 맞대고 감개무량해했다. “아미타불. 배 시주님은 귀인의 얼굴을 갖춘 사람이니 위험을 이겨내고 보란 듯이 무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승려님, 지금 저를 위로해 주시는 건가요?”“그날 저도 이렇게 배 시주님을 위로했어요. 그 결과 지금 조 시주님이 이렇게 버젓이 기도하고 있으니 위로도 일종 신념이라고 볼 수 있죠. 신념만 잃지 않는다면 세상만사가 다 가능할 수 있어요. 배 시주님과 조 시주님의 집착이 너무 깊어서 제 생각엔 이 인연을 끊어내기 어려울 것입니
이때는 이미 짙은 어둠이 지리산에 깔렸고 지리산은 유명한 관광지가 아닌지라 관광객이 많지 않은 편이어서 산길에 가로등도 많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사방이 깜깜한 어둠 속에 휩싸인 상태였다.검은 옷을 입은 두 남자는 불빛 아래 돌계단 위에 서 있었다.조유진은 산언덕 아래로 굴러가 어둠이 내린 울창한 풀숲과 큰 나무 뒤에 숨었다.발목에서 심장을 찢을 듯이 뼈저리게 아픈 통증이 느껴졌다.조유진은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풀숲 틈 사이로 눈물이 맺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적을 바라보며 숨죽여 기척을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조유진 씨, 얼른 고분고분 나와 우리와 함께 갑시다. 맹세컨대 당신을 해치지 않을 겁니다.”“우리는 단지 조유진 씨에게 엄청나게 이득이 될 거래를 제안하려고 이렇게 찾아온 겁니다. 배현수는 이미 죽었으니 당신에겐 배후가 없어졌잖아요. 가만히 앉아 딴 사람들에게 물려 죽는 걸 기다리는 것보단 우리와 함께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물론 조유진 씨 손에 있는 그 40%의 지분을 갖고 말이죠. 그럼 조유진 씨는 죽을 때까지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겁니다.”“얼른 나오세요. 조유진 씨를 초대하기 위해 특별히 우리가 여기까지 찾아온 겁니다. 지금 나오지 않더라도 우리는 여기서 쭉 조유진 씨를 지켜볼 겁니다. 우리 드래곤 파가 이런 능력 정도는 있다는 걸 공해에서 이미 충분히 경험해 봤겠죠. 그러니까 부디 현명한 판단을 내리길 바랍니다.”조유진은 감히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풀숲에 숨어 있었다.그녀가 막 휴대폰으로 경찰에 신고하는 버튼을 누르려 할 때...갑자기 단단한 가슴이 그녀의 등에 바짝 대어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비명을 지르려 했다. 그 순간, 남자의 크고 약간 차가운 손이 그녀의 입을 꽉 막으며 귀에 대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야, 겁내지 마.”“...”이 목소리는...그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익숙한 목소리였다. 조유진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을 커다랗게 뜨고 고
배현수는 30년 동안 살아 오면서 거짓말을 딱 두 번 했다.첫 번째는 공해 바다 위에서였다. 배현수는 조유진에게 죽든 살든 늘 그녀와 함께할 거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조유진과 헤어진 후, 다른 사람이 그에게 더 이상 조유진을 사랑하지 않냐고 물었을 때였다. 그때 그는 그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다. 눈시울이 시뻘게진 조유진은 배현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현수 씨도 이제 거짓말할 줄 아네요? 만약 오늘 내가 드래곤 파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 거예요? 그 재스민 그린 밀크티도 현수 씨가 산 거죠? 그렇죠?”“유진아...”“육지율 씨는 현수 씨가 살아있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왜 나에게 말하지 않았어요?”배현수는 손을 들어 조유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하지만 그칠 줄 모르는 그녀의 눈물은 배현수가 닦자마자 또다시 흘러내렸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는 배현수의 마음도 너무 아팠다. 배현수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일단 여기에서 벗어나고 다시 얘기해.”그러나 발목이 다친 조유진은 걸을 수가 없었다.하지만 산기슭까지는 아직 한참 남아 있었다.배현수가 일어나 등을 돌리려 하자 조유진이 그의 팔목을 잡으며 물었다.“어디 가요?”바닥에 앉아 고개를 든 채 배현수를 빤히 보고 있는 조유진의 눈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조유진은 배현수가 또 그녀를 버리고 떠나는 줄 알았다.그런 그녀의 모습에 배현수의 가슴도 뭉클해졌다. 등을 돌린 배현수는 쪼그리고 앉아 고개를 옆으로 돌리더니 그녀를 보며 말했다.“그 발로 산에서 어떻게 내려가려고? 빨리 업혀.”조유진이 가만히 있자 배현수는 두 손을 뒤로 젖히며 말했다.“말 들어, 빨리.”드래곤 파 사람들이 다시 이곳에 오기라도 하면 그때는 진짜 곤란한 상황이 생길지도 모른다.두 사람은 최대한 한 빨리 이곳을 떠나야 했다.등 뒤에 있던 조유진이 두 손으로 배현수의 목을 감싸자 그는
가는 길 내내 조유진은 배현수의 어깨에 기댄 채 그만 바라봤다.사실 두 사람은 겨우 18일 동안 떨어져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생사를 넘나드는 이별을 겪었던 탓인지 보름 남짓한 이 짧은 시간이 조유진은 그 어느 때보다 길게 느껴졌다. 그녀는 그사이 배현수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잔뜩 준비해 놓았었다. 하지만 막상 만나고 보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현수 씨.”“어?”“18일 동안 어디 갔었어요? 왜 산성 별장으로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 나와 선유는 현수 씨의 관까지 준비할 뻔했잖아요.”시신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하관하더라도 준비한 관에는 시신 없이 유품만 넣어야 했다. 잠시 걸음을 멈춘 배현수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고 물었다.“유진아, 설마 그사이 내가 다른 사람이라도 만났을까 봐 의심하는 거야?”그 말에 얼굴이 살짝 달아오른 조유진은 배현수의 목을 감싸고 있는 팔을 더 꽉 끌어안았다.배현수는 질문만 했을 뿐 굳이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그녀를 업고 산 아래로 성큼성큼 내려갔다.배현수는 분명 조유진의 눈앞에 있었지만 그녀는 왠지 모르게 그가 언제라도 당장 사라질 것만 같았다. 조금 전, 배현수와 만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그는 조유진이 묻는 모든 질문에 최대한 단답형으로 대답하거나 아니면 아예 침묵으로 일관했다.상대에게 강요하는 것을 싫어하는 조유진 또한 배현수가 대답하지 않는 이유가 드래곤 파 혹은 719부대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719부대도 분명 비밀스러운 조직일 것이라 생각했다.조유진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배현수의 목을 더 꼭 감싸 안았다.배현수가 무사히 살아 있는 것이 지금 이 순간 제일 중요했기 때문에...지리산 모텔에 도착하니 카운터에는 여전히 그때 그 아주머니가 있었다. 파마한 듯한 곱슬머리, 빨간 립스틱을 바른 입술, 그리고 검은 망사 스타킹에 하이힐을 신고 있는 아주머니는 빨간 매니큐어를 바른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고 있었다. 담배 두 모금을 피운
조유진은 사실 받기도 안 받기도 애매모호한 상황이었다. 여자로서 덥석 받는 것도 꽤 곤란하기 때문이다.마치 그녀가 꼭 관계를 갖지 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보였으니... 물론 조유진의 마음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저...”조유진이 괜찮다고 말하려고 할 때 앞에 있던 배현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방값까지 다 합쳐서 얼마예요?”“십삼만 원.”배현수가 돈을 지불하자 아주머니는 손에 쥔 콘돔 한 줌을 다시 조유진에게 건네며 낮은 소리로 한마디 했다.“몸조심해.” 콘돔 한 줌을 움켜쥐고 있는 조유진의 손바닥은 불타오르는 듯 뜨거웠다.너... 너무 창피해서...조유진은 배현수의 등에 얼굴을 묻고는 손으로 그의 등을 꼬집으며 말했다.“빨리 가요.”방은 바로 지리산 옆에 있어 방안에서 바로 산의 경치를 볼 수 있었지만 복도 제일 끝에 있는 끝방이었기에 한참 걸어야 했다. 방 구조는 여전히 스위트룸이었고 방 가운데에는 물침대가 놓여있었다.배현수는 조유진을 침대에 내려놓고 큰 손으로 침대 매트리스를 누르며 눈살을 찌푸렸다.“너무 흔들거리는 거 아니야? 이런 데서 어떻게 자? 프런트에 가서 평범한 더블 침대방이 있는지 물어보고 올게.”이 물침대는 말 그대로 물에 있는 것처럼 심하게 흔들리는 것 외에 별 특이한 것이 없었다.배현수가 일어나자 침대에 앉아 있던 조유진이 갑자기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얼떨떨해진 배현수는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침대가 마음에 들어?”사실 배현수가 별 뜻 없이 한 말이었지만 조유진의 귀에는 꼭 마치 ‘너는 이 침대에서 하는 것을 원해?’라고 묻는 듯했다.전에 이 호텔에 왔을 때 물침대에서 잔 적도 있었고 이 물침대에서 관계를 가진 적도 있었다.별 특별한 느낌은 없었지만 침대가 너무 흔들리는 바람에 한밤중에 잠에서 깨거나 몸을 뒤집으면 옆에 있는 다른 한 명도 쉽게 잠에서 깨기 일쑤였다. 관계를 하는 데 좀 더 새로운 것을 원한다면 여기서 한 번쯤 시도해보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단순히 잠만 자려 한다면
“부어도 상관없어요. 현수 씨, 왜 만나고 나서 지금까지 자꾸 나를 피해요?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예요?”만약 배현수가 싫어하면 그녀도 두 번 다시 그에게 매달리지 않을 것이다.자기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스토커처럼 자꾸 질척거리며 상대방을 힘들게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장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조유진 또한 그런 짓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공해 바다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일을 겪은 후, 그녀는 두 사람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높은 장벽이 허물어졌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배현수는 죽음에서 겨우 살아났음에도 바로 조유진을 만나러 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 이유를 잘 몰랐지만 왠지 좋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심지어 다시 돌아온 배현수는 그녀를 보는 눈빛마저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등을 돌린 채 서 있는 배현수는 그저 덤덤한 목소리로 조유진에게 말했다.“너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야. 유진아, 하지만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너에게 그 어떤 것도 약속할 수 없고...”영원을 약속하는 것은 너무 어렵고 평생이라는 시간 또한 너무 길다.배현수는 그녀에게 그 어떤 것도 약속할 수도, 줄 수도 없었다.그는 이미 애초의 약속대로 719부대에 들어가게 되었고 서심같이 해독약도 없는 독에 중독되었으니 이제 며칠을 더 살 수 있을지 배현수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드래곤 파 쪽에서는 계속 SY그룹을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공해 바다 위에서 719부대와 전쟁을 선포한 이상 앞으로 배현수에게도 평화로운 날이 며칠 남지 않았을 것이다.만약 이런 상황에서도 조유진을 원하고 소유하려 한다면 이보다 더 나쁜 놈은 없을 것이다.그는 이제 조유진과 선유를 자신에게서 완전히 떼어내야 했다. 두 모녀가 대제주시에 머물러 있는 것도 어쩌면 위험할 수 있었다.요 며칠, 그는 조유진과 선유를 비밀리에 스위스로 보내려고 했다. 국제적으로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있는 스위스는 드래곤 파의 세력이 개입하고 있지 않아 그곳에서는 평화로운 노후를 보낼 수 있었다. 그런 곳에서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