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수 씨, 아직 살아있어요? 서정호와 다른 사람들은 모두 현수 씨가 죽었다고 말했지만 선유랑 나는 여전히 현수 씨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오늘이 일곱 번째 날이에요. 선유랑 내가 집에서 수많은 촛불을 켜고 밤새도록 현수 씨를 기다렸는데 왜 잠시라도 집에 들리지 않았나요? 일곱 번째 날에 죽은 사람의 영혼이 집에 돌아온다 그러지 않았나요? 내가 보기 싫다 쳐요. 그럼 우리 선유는요? 현수 씨가 어떻게 우리 선유도 보고 싶지 않을 수 있죠?”“공해에서 보낸 그날 밤, 왜 나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함께 살고 함께 죽자고 약속한 거 아니었나요? 내가 현수 씨를 속인 적이 있어 현수 씨도 나를 한 번 속이는 건가요? 현수 씨 속임수에 내가 감쪽같이 넘어갔고 덕분에 나도 이렇게 버젓이 잘살고 있어요. 또 현수 씨 소원대로 그룹을 넘겨받을 준비도 다 해놨어요. 현수 씨가 알다시피 아무런 경영 경험이 없는 내가 그 주주들을 상대하기 얼마나 버겁겠어요? 현수 씨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내가 현수 씨가 힘들게 키운 그룹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도 있어요. 그래도 괜찮겠어요?”“오늘 대제주시에서 비가 내리고 있어요. 가을에 들어서서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네요. 어제 선유가 가을의 첫 밀크티를 원해서 주문해 줬어요. 주문하면서 7년 전에 현수 씨가 나에게 가을의 첫 밀크티를 주문해 줬던 기억이 문뜩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더라고요. ”“오늘 현수 씨 서랍에서 작은 그림책을 발견했어요. 전에 다 찢어버리지 않았었나요? 왜 다시 붙여놨죠? 현수 씨가 뭐라고 대답할지는 잘 알아요. 그래도 현수 씨 입으로 듣고 싶어요.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이 아니라 해도 좋아요...현수 씨, 뭐든 좋으니까 말을 해봐요. 한 마디라도 좋으니까요.”“잘 자요, 현수 씨.”...메시지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은 후, 배현수는 한참 동안 정신을 추스르지 못하고 침대에 조용히 기대어 있었다.음성 메시지속 조유진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쓸쓸했지만 부드럽기도 했다.7년 전 그녀와 헤어진 이후 그녀가 이렇
심미경은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하지만 조유진은 심미경의 기억 상실이 부럽기만 했다. “사실 과거를 잊는 것이 전적으로 나쁜 일은 아니에요. 원하지 않는 일을 가슴에 깊이 새기는 게 오히려 벌이 되는 경우가 많아요. 이런 일을 완전히 잊어버린다면 딱히 나쁜 일이라고 말하긴 어렵죠.”심미경은 SY 그룹 사무실에 오기 전에 이미 강이찬으로부터 조유진과 배현수 사이의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일들을 들었었다. 그리고 덤으로 배현수의 사망 소식도 전해 들었다.조유진이 지금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원하는 일을 잊어버리게 되면 상처로 멍든 가슴이 치유되고 헤여나올 수 없는 과거의 늪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런 일은 둘러싸인 성과 같았다.기억을 잃은 사람은 기억을 되찾고 싶어 하고 기억을 지우고 싶은 사람은 결코 쉽게 잊을 수 없었다.심미경은 머리가 살짝 아파져 관자놀이를 누르며 조유진을 바라보았다.조유진은 그런 그녀를 부축하며 다급하게 물었다. “왜 그래요? 머리가 많이 아파요?”“왠지는 모르겠는데 제가 조유진 씨에게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느낌이 자꾸 들어요. 근데 진짜 생각나지 않아요...오늘 조유진 씨를 보고 나서 이런 느낌이 더 강렬해졌어요.”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조유진은 심미경이 뭘 말하려고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어떤 부분에 관련된 일이죠?”“저도 잘 모르겠지만 아주 중요한 일인 것 같아요. 그게 아니라면 저도 이 정도로 강한 느낌이 들지 않았을 거예요.”하지만 심미경이 도무지 생각해 내지 못하자 조유진도 계속 캐묻기에 난처했다.“일단 좀 쉬세요. 머리가 아프면 애써 뭔가를 생각해 내려고 하지 마세요.”...오후에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조유진은 테이블 위에 밀크티 한 잔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재스민 그린 밀크티, 당도 30%, 검정 타피오카와 분홍색 타피오카 그리고 커피 젤리 추가.가을의 첫 밀크티 한 잔.“...”조유진은 제자리에 얼어붙은 채 얼굴색이 확 달라졌다.“육 변
“그때 현수가 널 구하기 위해 온몸에 폭탄을 매달아 놨는데 그가 무슨 재간으로 죽음을 피해 갈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거야?”조유진은 여전히 고집을 부렸다. “그의 몸에 매단 폭탄이 가짜라면요? 상대방에게 혼선을 주기 위해서 위장한 거라면...”“무슨 말인지 알겠어. 근데 그날 밤 유람선은 진짜 폭발했잖아. 유진아, 자꾸 아닌 걸 억지로 지어내려고 하지 마.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서둘러 네 정서를 조절하고 현수를 대신해 SY 그룹을 보란 듯이 지켜내는 거야. 그리고 네에겐 선유도 있잖아. 선유에게 네가 없으면 되겠어? 선유를 봐서라도 하루빨리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해.”육지율은 입이 무거운 사람인지라 배현수에 관련된 그 어떤 사실도 누설하지 않았다.조유진은 그의 말을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현수가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배현수가 진짜 살아있다면 왜 그녀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까?혹시 심미경처럼 기억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하지만 기억을 잃었다면 그녀가 재스민 그린 밀크티를 즐겨 마시는 사실을 그가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조유진은 배현수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시도했지만 자신의 논리에 의해 금세 반박당했다.조유진의 눈 밑은 잿빛 안개가 껴 생기를 잃었다. “육 변호사님, 내일 하루만 남초윤과 함께 선유를 좀 봐주실 수 있나요?”“어디 가려고 그래? 유진아, 허튼 생각을 하거나 그러면 안 돼...”그녀는 입꼬리를 끄집어 당기며 힘없이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허튼 생각 하지 않아요. 지리산 절에 가 기도하면 소원이 잘 성취된다고 하더라구요. 내일 절에 가서 부처님께 현수 씨가 아직 살아있는지 물어보려고요.”사람들은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지만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을 때 흔히 실체도 없이 허무맹랑한 하느님이나 부처님에게 모든 희망을 걸게 된다.조유진이 6살 때 갑자기 고열이 났었다. 그래서 안정희가 그녀를 병원에 데려가 주사나 링거도 맞히고 약도 먹이며 할 수 있는 치료를 다 해봤으나 고열이 떨어지지
“이게 배 시주님의 축원서예요. 조 시주님이 본당에 들어오기 전에 본당 입구에 있는 오래된 고무나무에 빨간색 천 조각이 걸려 있는 걸 보셨나요?”조유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못 봤어요.”그러자 현공민은 자상하게 웃으며 권유했다. “관심이 있으시면 이따가 가서 보세요.”“그럴게요.”조유진은 축원서를 받아 한 장 한 장 넘겼다.모든 페이지에 배현수의 필체가 빼곡히 적혀 있었고 그녀의 이름도 그중에 적혀 있었다.조유진이 무사하기를 빕니다.그녀의 손끝이 글씨 하나하나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나갔다. 그녀의 심장이 갑자기 극심한 고통을 호소했고 눈물이 스르르 눈 앞을 가렸다.현공민은 그런 그녀를 보며 말문을 열었다. “그날 저는 배 시주님이 폭우 속에서 무릎을 꿇고 무엇을 기도하는지 물었어요. 그러자 그는 한 사람이 무사하기를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어요. 저는 그런 그에게 그 소원을 위해서 어떠한 대가도 다 치를 준비가 되었냐고 물었죠. 물론 목숨을 바쳐서라도요. 조 시주님, 그가 어떤 대답을 했는지 궁금하세요?”조유진은 축원서에 눈물을 똑똑 떨구면서도 입꼬리가 올라간 채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미 그의 목숨으로 제 목숨을 맞바꿨으니 그의 대답은 알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배현수는 자신의 목숨으로 조유진을 위험 속에서 구해냈다.이것을 소원 성취라고 할 수 있을까?목숨과 목숨을 맞바꾸는 일은 살아남은 자에게 너무나 잔인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현공민은 두 손을 맞대고 감개무량해했다. “아미타불. 배 시주님은 귀인의 얼굴을 갖춘 사람이니 위험을 이겨내고 보란 듯이 무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승려님, 지금 저를 위로해 주시는 건가요?”“그날 저도 이렇게 배 시주님을 위로했어요. 그 결과 지금 조 시주님이 이렇게 버젓이 기도하고 있으니 위로도 일종 신념이라고 볼 수 있죠. 신념만 잃지 않는다면 세상만사가 다 가능할 수 있어요. 배 시주님과 조 시주님의 집착이 너무 깊어서 제 생각엔 이 인연을 끊어내기 어려울 것입니
이때는 이미 짙은 어둠이 지리산에 깔렸고 지리산은 유명한 관광지가 아닌지라 관광객이 많지 않은 편이어서 산길에 가로등도 많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사방이 깜깜한 어둠 속에 휩싸인 상태였다.검은 옷을 입은 두 남자는 불빛 아래 돌계단 위에 서 있었다.조유진은 산언덕 아래로 굴러가 어둠이 내린 울창한 풀숲과 큰 나무 뒤에 숨었다.발목에서 심장을 찢을 듯이 뼈저리게 아픈 통증이 느껴졌다.조유진은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풀숲 틈 사이로 눈물이 맺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적을 바라보며 숨죽여 기척을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조유진 씨, 얼른 고분고분 나와 우리와 함께 갑시다. 맹세컨대 당신을 해치지 않을 겁니다.”“우리는 단지 조유진 씨에게 엄청나게 이득이 될 거래를 제안하려고 이렇게 찾아온 겁니다. 배현수는 이미 죽었으니 당신에겐 배후가 없어졌잖아요. 가만히 앉아 딴 사람들에게 물려 죽는 걸 기다리는 것보단 우리와 함께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물론 조유진 씨 손에 있는 그 40%의 지분을 갖고 말이죠. 그럼 조유진 씨는 죽을 때까지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겁니다.”“얼른 나오세요. 조유진 씨를 초대하기 위해 특별히 우리가 여기까지 찾아온 겁니다. 지금 나오지 않더라도 우리는 여기서 쭉 조유진 씨를 지켜볼 겁니다. 우리 드래곤 파가 이런 능력 정도는 있다는 걸 공해에서 이미 충분히 경험해 봤겠죠. 그러니까 부디 현명한 판단을 내리길 바랍니다.”조유진은 감히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풀숲에 숨어 있었다.그녀가 막 휴대폰으로 경찰에 신고하는 버튼을 누르려 할 때...갑자기 단단한 가슴이 그녀의 등에 바짝 대어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비명을 지르려 했다. 그 순간, 남자의 크고 약간 차가운 손이 그녀의 입을 꽉 막으며 귀에 대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야, 겁내지 마.”“...”이 목소리는...그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익숙한 목소리였다. 조유진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을 커다랗게 뜨고 고
배현수는 30년 동안 살아 오면서 거짓말을 딱 두 번 했다.첫 번째는 공해 바다 위에서였다. 배현수는 조유진에게 죽든 살든 늘 그녀와 함께할 거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조유진과 헤어진 후, 다른 사람이 그에게 더 이상 조유진을 사랑하지 않냐고 물었을 때였다. 그때 그는 그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다. 눈시울이 시뻘게진 조유진은 배현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현수 씨도 이제 거짓말할 줄 아네요? 만약 오늘 내가 드래곤 파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 거예요? 그 재스민 그린 밀크티도 현수 씨가 산 거죠? 그렇죠?”“유진아...”“육지율 씨는 현수 씨가 살아있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왜 나에게 말하지 않았어요?”배현수는 손을 들어 조유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하지만 그칠 줄 모르는 그녀의 눈물은 배현수가 닦자마자 또다시 흘러내렸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는 배현수의 마음도 너무 아팠다. 배현수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일단 여기에서 벗어나고 다시 얘기해.”그러나 발목이 다친 조유진은 걸을 수가 없었다.하지만 산기슭까지는 아직 한참 남아 있었다.배현수가 일어나 등을 돌리려 하자 조유진이 그의 팔목을 잡으며 물었다.“어디 가요?”바닥에 앉아 고개를 든 채 배현수를 빤히 보고 있는 조유진의 눈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조유진은 배현수가 또 그녀를 버리고 떠나는 줄 알았다.그런 그녀의 모습에 배현수의 가슴도 뭉클해졌다. 등을 돌린 배현수는 쪼그리고 앉아 고개를 옆으로 돌리더니 그녀를 보며 말했다.“그 발로 산에서 어떻게 내려가려고? 빨리 업혀.”조유진이 가만히 있자 배현수는 두 손을 뒤로 젖히며 말했다.“말 들어, 빨리.”드래곤 파 사람들이 다시 이곳에 오기라도 하면 그때는 진짜 곤란한 상황이 생길지도 모른다.두 사람은 최대한 한 빨리 이곳을 떠나야 했다.등 뒤에 있던 조유진이 두 손으로 배현수의 목을 감싸자 그는
가는 길 내내 조유진은 배현수의 어깨에 기댄 채 그만 바라봤다.사실 두 사람은 겨우 18일 동안 떨어져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생사를 넘나드는 이별을 겪었던 탓인지 보름 남짓한 이 짧은 시간이 조유진은 그 어느 때보다 길게 느껴졌다. 그녀는 그사이 배현수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잔뜩 준비해 놓았었다. 하지만 막상 만나고 보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현수 씨.”“어?”“18일 동안 어디 갔었어요? 왜 산성 별장으로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 나와 선유는 현수 씨의 관까지 준비할 뻔했잖아요.”시신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하관하더라도 준비한 관에는 시신 없이 유품만 넣어야 했다. 잠시 걸음을 멈춘 배현수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고 물었다.“유진아, 설마 그사이 내가 다른 사람이라도 만났을까 봐 의심하는 거야?”그 말에 얼굴이 살짝 달아오른 조유진은 배현수의 목을 감싸고 있는 팔을 더 꽉 끌어안았다.배현수는 질문만 했을 뿐 굳이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그녀를 업고 산 아래로 성큼성큼 내려갔다.배현수는 분명 조유진의 눈앞에 있었지만 그녀는 왠지 모르게 그가 언제라도 당장 사라질 것만 같았다. 조금 전, 배현수와 만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그는 조유진이 묻는 모든 질문에 최대한 단답형으로 대답하거나 아니면 아예 침묵으로 일관했다.상대에게 강요하는 것을 싫어하는 조유진 또한 배현수가 대답하지 않는 이유가 드래곤 파 혹은 719부대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719부대도 분명 비밀스러운 조직일 것이라 생각했다.조유진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배현수의 목을 더 꼭 감싸 안았다.배현수가 무사히 살아 있는 것이 지금 이 순간 제일 중요했기 때문에...지리산 모텔에 도착하니 카운터에는 여전히 그때 그 아주머니가 있었다. 파마한 듯한 곱슬머리, 빨간 립스틱을 바른 입술, 그리고 검은 망사 스타킹에 하이힐을 신고 있는 아주머니는 빨간 매니큐어를 바른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고 있었다. 담배 두 모금을 피운
조유진은 사실 받기도 안 받기도 애매모호한 상황이었다. 여자로서 덥석 받는 것도 꽤 곤란하기 때문이다.마치 그녀가 꼭 관계를 갖지 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보였으니... 물론 조유진의 마음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저...”조유진이 괜찮다고 말하려고 할 때 앞에 있던 배현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방값까지 다 합쳐서 얼마예요?”“십삼만 원.”배현수가 돈을 지불하자 아주머니는 손에 쥔 콘돔 한 줌을 다시 조유진에게 건네며 낮은 소리로 한마디 했다.“몸조심해.” 콘돔 한 줌을 움켜쥐고 있는 조유진의 손바닥은 불타오르는 듯 뜨거웠다.너... 너무 창피해서...조유진은 배현수의 등에 얼굴을 묻고는 손으로 그의 등을 꼬집으며 말했다.“빨리 가요.”방은 바로 지리산 옆에 있어 방안에서 바로 산의 경치를 볼 수 있었지만 복도 제일 끝에 있는 끝방이었기에 한참 걸어야 했다. 방 구조는 여전히 스위트룸이었고 방 가운데에는 물침대가 놓여있었다.배현수는 조유진을 침대에 내려놓고 큰 손으로 침대 매트리스를 누르며 눈살을 찌푸렸다.“너무 흔들거리는 거 아니야? 이런 데서 어떻게 자? 프런트에 가서 평범한 더블 침대방이 있는지 물어보고 올게.”이 물침대는 말 그대로 물에 있는 것처럼 심하게 흔들리는 것 외에 별 특이한 것이 없었다.배현수가 일어나자 침대에 앉아 있던 조유진이 갑자기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얼떨떨해진 배현수는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침대가 마음에 들어?”사실 배현수가 별 뜻 없이 한 말이었지만 조유진의 귀에는 꼭 마치 ‘너는 이 침대에서 하는 것을 원해?’라고 묻는 듯했다.전에 이 호텔에 왔을 때 물침대에서 잔 적도 있었고 이 물침대에서 관계를 가진 적도 있었다.별 특별한 느낌은 없었지만 침대가 너무 흔들리는 바람에 한밤중에 잠에서 깨거나 몸을 뒤집으면 옆에 있는 다른 한 명도 쉽게 잠에서 깨기 일쑤였다. 관계를 하는 데 좀 더 새로운 것을 원한다면 여기서 한 번쯤 시도해보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단순히 잠만 자려 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