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장 낭독이 끝나자, 장내는 술렁이기 시작하였다.“아니 이게 무슨 뜻이야? SY 그룹을 남의 손에 맡긴다고?”“육 변, 배 대표 지분을 딸이 상속받는 데까지는 우리가 어떻게든 이해하겠소, 배 대표의 딸이니까. 근데 지금 이거는 너무 한 거 아니오?”“내 말이. 이 유서 아무래도 가짜 같은데!”“육 변, 아무리 배 대표님이랑 친하다고 해도 이건 아니지!”육지율은 차분하게 대답했다.“이 유서는 진짜입니다. 여러분들이 못 믿으시겠다면 법무팀에 의뢰해서 감정을 진행하시죠.”“진짜든 아니든, 글쎄 우리는 회사를 한낱 외부인에게 맡길 수 없다니까?”그중 나이가 많은 주주가 벌떡 일어서서는 조유진을 가리키며 말했다.“아니. 저 여자가 뭔데 회사를 관리한다고 나대고 있어? 그리고, 7년 전에 저 여자가 법정에서 거짓 증언을 하는 바람에 배 대표가 감옥에 들어간 거 아니오! 배 대표가 제정신이면 저 여자를 자리에 앉힐 수가 없지!”“설령 배 대표의 부인이라고 해도 대표이사 자리는 안 되죠!”“조유진 씨가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있는 건, 배 대표님 하나뿐인 딸의 친모라서 가능한 거요. 누울 자리를 봐 가면서 발을 뻗으라고!”“그래요. 여러분들 말이 다 맞습니다. 제가 여기에 참석해 발언할 자격도 없고 대표 자리에 앉을 자격은 더더욱 없습니다. 근데 만약에 이 모든 게 배현수 씨의 유언이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저는 반드시 그의 유언대로 따를 예정입니다.”“회사 관리가 무슨 애들 소꿉장난인 줄 아나? 아니 어디서 뭐 하다 온 사람인지도 모르는 여자가 덜컥 나타나서 SY를 경영하겠다 그러는데, 당신이 생각해도 너무 웃기지 않아?”“조유진 씨라고 했죠? 그냥 집에 가서 애나 보지. 여기가 어디라고!”“잠깐, 나 당신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조햇살인가 인플루언서인지 뭔지였잖아. 육 변호사님, 이건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니에요?”주주들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조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유서가 진짜라면 지금부터 효력이 발생하게 되는데 여러분들이
육지율의 눈빛은 차갑게 빛났다.“아마 드래곤 파가 엮인 게 틀림없어. 배 대표가 공해에서 그들을 쳤으니 가만있지 않을 거야.”서정호는 불길한 예감에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누군가 이 틈을 타서 풀매수하지는 않겠죠?”“그럴 수도 있어.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텨봐야지. ”“그런데 육 변호사님, 이 유서 진짜 현수 씨가 쓴 건가요?”조유진이 물었다. “당연하지. 직접 보면 알 거야. 현수 필체를 잘 알잖아.”필체가 날카롭고 대범한 것이 확실히 배현수의 필체였다. 기재한 날짜는 그녀가 납치되던 날이었다. 조유진의 마음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는 살아서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유서를 보기 전까지 그녀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 희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배현수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육지율이 이어서 말했다.“공해에 나가기 전에 배 대표가 이 유서를 주고 갔어. 자기한테 무슨 일이 생기거든 너를 도와 회사 일을 처리해달라고 부탁했지. 회사 일 아직 익숙하지 않을 거야. 나랑 서 비서한테 물어보면 돼. 아니면 전문 경영인 불러서 해도 되고.”“그이의 마지막 유언인데, 아무리 힘들어도 할 거예요. 다만 배울 시간이 좀 필요해요.”전에 성남에 있을 때 그녀는 기업경영과 관리를 배운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냥 이론에 불과했으며 이 회사에서의 앞날이 얼마나 고될지 그녀 자신조차도 상상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이내 딸한테 머물렀다. 차갑던 눈빛은 부드럽고 단단하게 변했다.이제는 배현수가 없으니, 그녀는 가능한 한 빨리 강해져서 딸의 보호막이 되어야 했다. 회사에서 출발하기 전, 조유진은 다시 한번 서정호에게 확인했다.“서 비서님, 현수 씨를 아직도 못 찾은 건가요?”시신 잔해라도?“네. 아직 아무것도 찾지 못했어요. 아무래도 폭발하면서 시신이...”서정호는 차마 입 밖으로 낼 자신이 없어서 말끝을 흐렸다. 주먹 쥔 조유진의 손톱이 살에 박혔지만, 그녀는 아픈 줄 몰랐다. 그저 가슴이 욱신거
719부대.검은색 허머 SUV 한 대가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돌진해 들어왔다.차게 세워지자 육지율이 차에서 내려 부대 병원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병원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주치의 송하진과 마주쳤다.육지율이 다급하게 물었다. “오늘 상황은 어때요? 아직 숨은 붙어 있나요?”“뭔 말을 그렇게 험하게 해요? 배현수 씨 절친이 맞기나 한가요? 배현수 씨는 오늘 아침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났어요. 왼쪽 어깨와 허벅지에 총상을 두 개나 입어 죽지 않아도 반신불수가 됐을 겁니다. 배현수 씨가 잘 버텨낸거죠.”“저 좀 들어가서 볼게요.”육지율은 곧장 병실로 들어갔다.“이봐, 이제야 깨어난거야? 끝까지 안 깨어나면 내가 알아서 네 장례식까지 치러주려고 했는데 말이야.”배현수는 부상으로 인한 출혈로 얼굴이 초췌하고 창백해진 채 병상에 기대어 누워 있었다.그는 육지율을 아니꼽게 쏘아보고는 입을 열었다. “지금 바깥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어?”“주식을 팔려는 주주가 몇 명 있어 드래곤 파에서 그 주주들을 접촉하고 있어.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이상 일부 기회주의자들이 무조건 배신을 때릴거야. 지금 인터넷 여론은 SY 그룹에 매우 불리해. 드래곤 파에서도 줄곧 네 행방을 찾고 있어. 그들은 아마 네가 완전히 죽지 않았다고 의심하는 모양이야. 그래서 널 찾아내 총알을 몇 방 더 먹이려는 거겠지. 바깥 상황은 이래. 그래서 내 결론은 네 부상이 완치되기 전까지 당분간 부대를 떠나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아.”지금은 719부대가 가장 안전한 장소임이 틀림없었다.육지율은 말을 마친 후 배현수가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그는 홀가분하게 웃으며 배현수를 슬쩍 떠봤다. “바깥 상황을 알려달라며? 그룹 상황을 알려달라는 거야, 아니면 조유진 상황을 알려달라는 거야?” “다 알면서 굳이 뭘 물어봐?”배현수는 병상 옆에 기대어 어두운 그늘이 진 눈을 감고 차갑고 딱딱하게 말했다.육지율은 그런 절친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너 지금 되게 비
“잠깐만.”“또 뭘 시키려고 그래?”배현수는 아무래도 조유진이 걱정되어 참을 수 없었다. “조유진은 지금 도대체 어떤 ?”육지율은 조유진의 객관적인 상태를 있는 그대로 털어놨다. “운다거나 소란은 피우지 않아. 상태가 아주 안정적이야.”하지만 육지율의 대답은 그의 걱정을 덜어내기는커녕 그의 마음을 뭐라고 말할 수 없는 큰 고통에 사로잡히게 했다.육지율이 떠난 후 주치의 송하진이 다시 병실에 들어왔다.그는 수심이 꽉 찬 얼굴로 배현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배 대표님이 중독된 얘기를 왜 꺼내지 않았죠?”“걔가 독을 치료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육지율이 실수로 조유진에게 이 일을 알리기라도 하면...그들이 걱정과 슬픔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원망할 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드래곤 파의 사람들이 그들의 상태가 수상하다고 여겨 조사라도 하면 배현수가 중독된 사실이 드래곤 파에도 알려지게 될 것이다.중독에 관한 일은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당시 공해 지대에서 복면남이 배현수에게 쏜 두 총알은 특별히 제작된 독이 묻은 총알이었다.사람들로 꽉 찬 유람선이 폭발하며 복면남은 공해에 빠져 목숨을 잃었고 지금 그가 중독된 사실을 아는 유일한 사람은 배현수를 위해 해독제를 개발하고 있는 송하진뿐이었다. 심지어 사령관님도 이 사실을 모른 채 그가 일반적인 총상을 당했다고 오해하고 있었다.송하진은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총알의 독이 이미 배 대표님 상처에 깊숙이 스며들어 얼마 지나지 않아 독성이 발작할 것 같아요. 제가 해독제를 개발하는 속도가 배 대표님 독이 발작할 시간을 앞장서지 못할까 봐 두려워요.”게다가 송하진은 자신이 과연 ‘서심’의 해독제를 개발해 낼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드래곤 파가 드래곤 파로 불리는 이유는 특이한 방식으로 일을 처리할 뿐만 아니라 ‘독’을 만드는 데도 능숙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개돼지를 대하듯이 사람들의 목숨을 하찮게 여겨 독을 제
“현수 씨, 아직 살아있어요? 서정호와 다른 사람들은 모두 현수 씨가 죽었다고 말했지만 선유랑 나는 여전히 현수 씨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오늘이 일곱 번째 날이에요. 선유랑 내가 집에서 수많은 촛불을 켜고 밤새도록 현수 씨를 기다렸는데 왜 잠시라도 집에 들리지 않았나요? 일곱 번째 날에 죽은 사람의 영혼이 집에 돌아온다 그러지 않았나요? 내가 보기 싫다 쳐요. 그럼 우리 선유는요? 현수 씨가 어떻게 우리 선유도 보고 싶지 않을 수 있죠?”“공해에서 보낸 그날 밤, 왜 나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함께 살고 함께 죽자고 약속한 거 아니었나요? 내가 현수 씨를 속인 적이 있어 현수 씨도 나를 한 번 속이는 건가요? 현수 씨 속임수에 내가 감쪽같이 넘어갔고 덕분에 나도 이렇게 버젓이 잘살고 있어요. 또 현수 씨 소원대로 그룹을 넘겨받을 준비도 다 해놨어요. 현수 씨가 알다시피 아무런 경영 경험이 없는 내가 그 주주들을 상대하기 얼마나 버겁겠어요? 현수 씨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내가 현수 씨가 힘들게 키운 그룹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도 있어요. 그래도 괜찮겠어요?”“오늘 대제주시에서 비가 내리고 있어요. 가을에 들어서서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네요. 어제 선유가 가을의 첫 밀크티를 원해서 주문해 줬어요. 주문하면서 7년 전에 현수 씨가 나에게 가을의 첫 밀크티를 주문해 줬던 기억이 문뜩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더라고요. ”“오늘 현수 씨 서랍에서 작은 그림책을 발견했어요. 전에 다 찢어버리지 않았었나요? 왜 다시 붙여놨죠? 현수 씨가 뭐라고 대답할지는 잘 알아요. 그래도 현수 씨 입으로 듣고 싶어요.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이 아니라 해도 좋아요...현수 씨, 뭐든 좋으니까 말을 해봐요. 한 마디라도 좋으니까요.”“잘 자요, 현수 씨.”...메시지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은 후, 배현수는 한참 동안 정신을 추스르지 못하고 침대에 조용히 기대어 있었다.음성 메시지속 조유진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쓸쓸했지만 부드럽기도 했다.7년 전 그녀와 헤어진 이후 그녀가 이렇
심미경은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하지만 조유진은 심미경의 기억 상실이 부럽기만 했다. “사실 과거를 잊는 것이 전적으로 나쁜 일은 아니에요. 원하지 않는 일을 가슴에 깊이 새기는 게 오히려 벌이 되는 경우가 많아요. 이런 일을 완전히 잊어버린다면 딱히 나쁜 일이라고 말하긴 어렵죠.”심미경은 SY 그룹 사무실에 오기 전에 이미 강이찬으로부터 조유진과 배현수 사이의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일들을 들었었다. 그리고 덤으로 배현수의 사망 소식도 전해 들었다.조유진이 지금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원하는 일을 잊어버리게 되면 상처로 멍든 가슴이 치유되고 헤여나올 수 없는 과거의 늪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런 일은 둘러싸인 성과 같았다.기억을 잃은 사람은 기억을 되찾고 싶어 하고 기억을 지우고 싶은 사람은 결코 쉽게 잊을 수 없었다.심미경은 머리가 살짝 아파져 관자놀이를 누르며 조유진을 바라보았다.조유진은 그런 그녀를 부축하며 다급하게 물었다. “왜 그래요? 머리가 많이 아파요?”“왠지는 모르겠는데 제가 조유진 씨에게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느낌이 자꾸 들어요. 근데 진짜 생각나지 않아요...오늘 조유진 씨를 보고 나서 이런 느낌이 더 강렬해졌어요.”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조유진은 심미경이 뭘 말하려고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어떤 부분에 관련된 일이죠?”“저도 잘 모르겠지만 아주 중요한 일인 것 같아요. 그게 아니라면 저도 이 정도로 강한 느낌이 들지 않았을 거예요.”하지만 심미경이 도무지 생각해 내지 못하자 조유진도 계속 캐묻기에 난처했다.“일단 좀 쉬세요. 머리가 아프면 애써 뭔가를 생각해 내려고 하지 마세요.”...오후에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조유진은 테이블 위에 밀크티 한 잔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재스민 그린 밀크티, 당도 30%, 검정 타피오카와 분홍색 타피오카 그리고 커피 젤리 추가.가을의 첫 밀크티 한 잔.“...”조유진은 제자리에 얼어붙은 채 얼굴색이 확 달라졌다.“육 변
“그때 현수가 널 구하기 위해 온몸에 폭탄을 매달아 놨는데 그가 무슨 재간으로 죽음을 피해 갈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거야?”조유진은 여전히 고집을 부렸다. “그의 몸에 매단 폭탄이 가짜라면요? 상대방에게 혼선을 주기 위해서 위장한 거라면...”“무슨 말인지 알겠어. 근데 그날 밤 유람선은 진짜 폭발했잖아. 유진아, 자꾸 아닌 걸 억지로 지어내려고 하지 마.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서둘러 네 정서를 조절하고 현수를 대신해 SY 그룹을 보란 듯이 지켜내는 거야. 그리고 네에겐 선유도 있잖아. 선유에게 네가 없으면 되겠어? 선유를 봐서라도 하루빨리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해.”육지율은 입이 무거운 사람인지라 배현수에 관련된 그 어떤 사실도 누설하지 않았다.조유진은 그의 말을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현수가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배현수가 진짜 살아있다면 왜 그녀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까?혹시 심미경처럼 기억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하지만 기억을 잃었다면 그녀가 재스민 그린 밀크티를 즐겨 마시는 사실을 그가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조유진은 배현수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시도했지만 자신의 논리에 의해 금세 반박당했다.조유진의 눈 밑은 잿빛 안개가 껴 생기를 잃었다. “육 변호사님, 내일 하루만 남초윤과 함께 선유를 좀 봐주실 수 있나요?”“어디 가려고 그래? 유진아, 허튼 생각을 하거나 그러면 안 돼...”그녀는 입꼬리를 끄집어 당기며 힘없이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허튼 생각 하지 않아요. 지리산 절에 가 기도하면 소원이 잘 성취된다고 하더라구요. 내일 절에 가서 부처님께 현수 씨가 아직 살아있는지 물어보려고요.”사람들은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지만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을 때 흔히 실체도 없이 허무맹랑한 하느님이나 부처님에게 모든 희망을 걸게 된다.조유진이 6살 때 갑자기 고열이 났었다. 그래서 안정희가 그녀를 병원에 데려가 주사나 링거도 맞히고 약도 먹이며 할 수 있는 치료를 다 해봤으나 고열이 떨어지지
“이게 배 시주님의 축원서예요. 조 시주님이 본당에 들어오기 전에 본당 입구에 있는 오래된 고무나무에 빨간색 천 조각이 걸려 있는 걸 보셨나요?”조유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못 봤어요.”그러자 현공민은 자상하게 웃으며 권유했다. “관심이 있으시면 이따가 가서 보세요.”“그럴게요.”조유진은 축원서를 받아 한 장 한 장 넘겼다.모든 페이지에 배현수의 필체가 빼곡히 적혀 있었고 그녀의 이름도 그중에 적혀 있었다.조유진이 무사하기를 빕니다.그녀의 손끝이 글씨 하나하나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나갔다. 그녀의 심장이 갑자기 극심한 고통을 호소했고 눈물이 스르르 눈 앞을 가렸다.현공민은 그런 그녀를 보며 말문을 열었다. “그날 저는 배 시주님이 폭우 속에서 무릎을 꿇고 무엇을 기도하는지 물었어요. 그러자 그는 한 사람이 무사하기를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어요. 저는 그런 그에게 그 소원을 위해서 어떠한 대가도 다 치를 준비가 되었냐고 물었죠. 물론 목숨을 바쳐서라도요. 조 시주님, 그가 어떤 대답을 했는지 궁금하세요?”조유진은 축원서에 눈물을 똑똑 떨구면서도 입꼬리가 올라간 채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미 그의 목숨으로 제 목숨을 맞바꿨으니 그의 대답은 알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배현수는 자신의 목숨으로 조유진을 위험 속에서 구해냈다.이것을 소원 성취라고 할 수 있을까?목숨과 목숨을 맞바꾸는 일은 살아남은 자에게 너무나 잔인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현공민은 두 손을 맞대고 감개무량해했다. “아미타불. 배 시주님은 귀인의 얼굴을 갖춘 사람이니 위험을 이겨내고 보란 듯이 무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승려님, 지금 저를 위로해 주시는 건가요?”“그날 저도 이렇게 배 시주님을 위로했어요. 그 결과 지금 조 시주님이 이렇게 버젓이 기도하고 있으니 위로도 일종 신념이라고 볼 수 있죠. 신념만 잃지 않는다면 세상만사가 다 가능할 수 있어요. 배 시주님과 조 시주님의 집착이 너무 깊어서 제 생각엔 이 인연을 끊어내기 어려울 것입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