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요. 이게 어디 회사 정관에 맞는 일입니까? 아이가 성인이 된 거라면 몰라도, 아직 쥐방울만 한 아이한테 지분을 넘겨주면, 앞으로 회사의 결정 사항은 누구 말을 들어야 하겠어요?”“우리야 당연히 회사가 점점 더 발전하고 성장하면 좋지요. 한데, 지금 배 대표가 생사 확인이 안 되는 마당에 애를 데려오면 어쩌자는 거요! 진짜로 회사 지분 저 애한테 넘기면 나는 모든 지분을 팔고 나갈 것이니 그렇게 알고 있소.”“육 변호사님, 내가 보기엔 배 대표님 지분을 우리 주주가 사들이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래도 안 된다면 일부를 외부인에게 팔면 되잖아요. 그러면 회사에 영향도 안 주고 배 대표 유가족들도 그 돈으로 앞으로 걱정 없이 살 수도 있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 아니요.”“그리고 말이 나와 말이지, 딸이라며. 지금은 그렇다 치지만 나중에 커서 후계자로 양성한다고 해도 이 큰 회사를 관리해야 되는데 누가 여자아이의 말을 따르겠습니까.”그동안 가만히 듣고만 있던 조유진은 이내 비웃으며 맞받아쳤다. “아니 지금 어떤 시대인데, 지금 그 뜻은 배 대표님이 하나뿐인 자식이, 딸이라는 이유로 지분을 상속하지 못한다는 말인가요? 그러면 아들이면 가능하고?”“조유진 씨,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조유진은 그의 말을 끊고 계속 쏘아붙였다. “조선유는 배 대표님의 하나뿐인 핏줄이에요. 절대적인 상속권을 갖고 있다는 뜻이죠. 딸이 뭐 어때서요? 딸은 자식 아닌가요? 배 대표님이 살아있다면 아마 그도 선유 양을 SY그룹의 후계자로 키워냈을 겁니다. 하지만 저도 주주 여러분들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투표로 결정하죠.”그녀의 가냘픈 몸에서 단호한 목소리가 나왔다. 조선유는 고개를 들어 조유진을 올려다보면서 눈빛을 반짝였다. 어른들이 뭐라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됐지만 조선유의 눈에는 엄마가 멋져 보였다. 주주들은 서로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각자의 속내는 달랐지만, 최종 목적은 일치했다. 그들은 배현수의 지분을 나눠 가지려 꿍꿍이를 하고 있었다. 아직
유언장 낭독이 끝나자, 장내는 술렁이기 시작하였다.“아니 이게 무슨 뜻이야? SY 그룹을 남의 손에 맡긴다고?”“육 변, 배 대표 지분을 딸이 상속받는 데까지는 우리가 어떻게든 이해하겠소, 배 대표의 딸이니까. 근데 지금 이거는 너무 한 거 아니오?”“내 말이. 이 유서 아무래도 가짜 같은데!”“육 변, 아무리 배 대표님이랑 친하다고 해도 이건 아니지!”육지율은 차분하게 대답했다.“이 유서는 진짜입니다. 여러분들이 못 믿으시겠다면 법무팀에 의뢰해서 감정을 진행하시죠.”“진짜든 아니든, 글쎄 우리는 회사를 한낱 외부인에게 맡길 수 없다니까?”그중 나이가 많은 주주가 벌떡 일어서서는 조유진을 가리키며 말했다.“아니. 저 여자가 뭔데 회사를 관리한다고 나대고 있어? 그리고, 7년 전에 저 여자가 법정에서 거짓 증언을 하는 바람에 배 대표가 감옥에 들어간 거 아니오! 배 대표가 제정신이면 저 여자를 자리에 앉힐 수가 없지!”“설령 배 대표의 부인이라고 해도 대표이사 자리는 안 되죠!”“조유진 씨가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있는 건, 배 대표님 하나뿐인 딸의 친모라서 가능한 거요. 누울 자리를 봐 가면서 발을 뻗으라고!”“그래요. 여러분들 말이 다 맞습니다. 제가 여기에 참석해 발언할 자격도 없고 대표 자리에 앉을 자격은 더더욱 없습니다. 근데 만약에 이 모든 게 배현수 씨의 유언이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저는 반드시 그의 유언대로 따를 예정입니다.”“회사 관리가 무슨 애들 소꿉장난인 줄 아나? 아니 어디서 뭐 하다 온 사람인지도 모르는 여자가 덜컥 나타나서 SY를 경영하겠다 그러는데, 당신이 생각해도 너무 웃기지 않아?”“조유진 씨라고 했죠? 그냥 집에 가서 애나 보지. 여기가 어디라고!”“잠깐, 나 당신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조햇살인가 인플루언서인지 뭔지였잖아. 육 변호사님, 이건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니에요?”주주들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조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유서가 진짜라면 지금부터 효력이 발생하게 되는데 여러분들이
육지율의 눈빛은 차갑게 빛났다.“아마 드래곤 파가 엮인 게 틀림없어. 배 대표가 공해에서 그들을 쳤으니 가만있지 않을 거야.”서정호는 불길한 예감에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누군가 이 틈을 타서 풀매수하지는 않겠죠?”“그럴 수도 있어.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텨봐야지. ”“그런데 육 변호사님, 이 유서 진짜 현수 씨가 쓴 건가요?”조유진이 물었다. “당연하지. 직접 보면 알 거야. 현수 필체를 잘 알잖아.”필체가 날카롭고 대범한 것이 확실히 배현수의 필체였다. 기재한 날짜는 그녀가 납치되던 날이었다. 조유진의 마음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는 살아서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유서를 보기 전까지 그녀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 희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배현수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육지율이 이어서 말했다.“공해에 나가기 전에 배 대표가 이 유서를 주고 갔어. 자기한테 무슨 일이 생기거든 너를 도와 회사 일을 처리해달라고 부탁했지. 회사 일 아직 익숙하지 않을 거야. 나랑 서 비서한테 물어보면 돼. 아니면 전문 경영인 불러서 해도 되고.”“그이의 마지막 유언인데, 아무리 힘들어도 할 거예요. 다만 배울 시간이 좀 필요해요.”전에 성남에 있을 때 그녀는 기업경영과 관리를 배운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냥 이론에 불과했으며 이 회사에서의 앞날이 얼마나 고될지 그녀 자신조차도 상상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이내 딸한테 머물렀다. 차갑던 눈빛은 부드럽고 단단하게 변했다.이제는 배현수가 없으니, 그녀는 가능한 한 빨리 강해져서 딸의 보호막이 되어야 했다. 회사에서 출발하기 전, 조유진은 다시 한번 서정호에게 확인했다.“서 비서님, 현수 씨를 아직도 못 찾은 건가요?”시신 잔해라도?“네. 아직 아무것도 찾지 못했어요. 아무래도 폭발하면서 시신이...”서정호는 차마 입 밖으로 낼 자신이 없어서 말끝을 흐렸다. 주먹 쥔 조유진의 손톱이 살에 박혔지만, 그녀는 아픈 줄 몰랐다. 그저 가슴이 욱신거
719부대.검은색 허머 SUV 한 대가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돌진해 들어왔다.차게 세워지자 육지율이 차에서 내려 부대 병원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병원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주치의 송하진과 마주쳤다.육지율이 다급하게 물었다. “오늘 상황은 어때요? 아직 숨은 붙어 있나요?”“뭔 말을 그렇게 험하게 해요? 배현수 씨 절친이 맞기나 한가요? 배현수 씨는 오늘 아침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났어요. 왼쪽 어깨와 허벅지에 총상을 두 개나 입어 죽지 않아도 반신불수가 됐을 겁니다. 배현수 씨가 잘 버텨낸거죠.”“저 좀 들어가서 볼게요.”육지율은 곧장 병실로 들어갔다.“이봐, 이제야 깨어난거야? 끝까지 안 깨어나면 내가 알아서 네 장례식까지 치러주려고 했는데 말이야.”배현수는 부상으로 인한 출혈로 얼굴이 초췌하고 창백해진 채 병상에 기대어 누워 있었다.그는 육지율을 아니꼽게 쏘아보고는 입을 열었다. “지금 바깥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어?”“주식을 팔려는 주주가 몇 명 있어 드래곤 파에서 그 주주들을 접촉하고 있어.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이상 일부 기회주의자들이 무조건 배신을 때릴거야. 지금 인터넷 여론은 SY 그룹에 매우 불리해. 드래곤 파에서도 줄곧 네 행방을 찾고 있어. 그들은 아마 네가 완전히 죽지 않았다고 의심하는 모양이야. 그래서 널 찾아내 총알을 몇 방 더 먹이려는 거겠지. 바깥 상황은 이래. 그래서 내 결론은 네 부상이 완치되기 전까지 당분간 부대를 떠나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아.”지금은 719부대가 가장 안전한 장소임이 틀림없었다.육지율은 말을 마친 후 배현수가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그는 홀가분하게 웃으며 배현수를 슬쩍 떠봤다. “바깥 상황을 알려달라며? 그룹 상황을 알려달라는 거야, 아니면 조유진 상황을 알려달라는 거야?” “다 알면서 굳이 뭘 물어봐?”배현수는 병상 옆에 기대어 어두운 그늘이 진 눈을 감고 차갑고 딱딱하게 말했다.육지율은 그런 절친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너 지금 되게 비
“잠깐만.”“또 뭘 시키려고 그래?”배현수는 아무래도 조유진이 걱정되어 참을 수 없었다. “조유진은 지금 도대체 어떤 ?”육지율은 조유진의 객관적인 상태를 있는 그대로 털어놨다. “운다거나 소란은 피우지 않아. 상태가 아주 안정적이야.”하지만 육지율의 대답은 그의 걱정을 덜어내기는커녕 그의 마음을 뭐라고 말할 수 없는 큰 고통에 사로잡히게 했다.육지율이 떠난 후 주치의 송하진이 다시 병실에 들어왔다.그는 수심이 꽉 찬 얼굴로 배현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배 대표님이 중독된 얘기를 왜 꺼내지 않았죠?”“걔가 독을 치료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육지율이 실수로 조유진에게 이 일을 알리기라도 하면...그들이 걱정과 슬픔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원망할 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드래곤 파의 사람들이 그들의 상태가 수상하다고 여겨 조사라도 하면 배현수가 중독된 사실이 드래곤 파에도 알려지게 될 것이다.중독에 관한 일은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당시 공해 지대에서 복면남이 배현수에게 쏜 두 총알은 특별히 제작된 독이 묻은 총알이었다.사람들로 꽉 찬 유람선이 폭발하며 복면남은 공해에 빠져 목숨을 잃었고 지금 그가 중독된 사실을 아는 유일한 사람은 배현수를 위해 해독제를 개발하고 있는 송하진뿐이었다. 심지어 사령관님도 이 사실을 모른 채 그가 일반적인 총상을 당했다고 오해하고 있었다.송하진은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총알의 독이 이미 배 대표님 상처에 깊숙이 스며들어 얼마 지나지 않아 독성이 발작할 것 같아요. 제가 해독제를 개발하는 속도가 배 대표님 독이 발작할 시간을 앞장서지 못할까 봐 두려워요.”게다가 송하진은 자신이 과연 ‘서심’의 해독제를 개발해 낼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드래곤 파가 드래곤 파로 불리는 이유는 특이한 방식으로 일을 처리할 뿐만 아니라 ‘독’을 만드는 데도 능숙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개돼지를 대하듯이 사람들의 목숨을 하찮게 여겨 독을 제
“현수 씨, 아직 살아있어요? 서정호와 다른 사람들은 모두 현수 씨가 죽었다고 말했지만 선유랑 나는 여전히 현수 씨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오늘이 일곱 번째 날이에요. 선유랑 내가 집에서 수많은 촛불을 켜고 밤새도록 현수 씨를 기다렸는데 왜 잠시라도 집에 들리지 않았나요? 일곱 번째 날에 죽은 사람의 영혼이 집에 돌아온다 그러지 않았나요? 내가 보기 싫다 쳐요. 그럼 우리 선유는요? 현수 씨가 어떻게 우리 선유도 보고 싶지 않을 수 있죠?”“공해에서 보낸 그날 밤, 왜 나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함께 살고 함께 죽자고 약속한 거 아니었나요? 내가 현수 씨를 속인 적이 있어 현수 씨도 나를 한 번 속이는 건가요? 현수 씨 속임수에 내가 감쪽같이 넘어갔고 덕분에 나도 이렇게 버젓이 잘살고 있어요. 또 현수 씨 소원대로 그룹을 넘겨받을 준비도 다 해놨어요. 현수 씨가 알다시피 아무런 경영 경험이 없는 내가 그 주주들을 상대하기 얼마나 버겁겠어요? 현수 씨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내가 현수 씨가 힘들게 키운 그룹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도 있어요. 그래도 괜찮겠어요?”“오늘 대제주시에서 비가 내리고 있어요. 가을에 들어서서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네요. 어제 선유가 가을의 첫 밀크티를 원해서 주문해 줬어요. 주문하면서 7년 전에 현수 씨가 나에게 가을의 첫 밀크티를 주문해 줬던 기억이 문뜩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더라고요. ”“오늘 현수 씨 서랍에서 작은 그림책을 발견했어요. 전에 다 찢어버리지 않았었나요? 왜 다시 붙여놨죠? 현수 씨가 뭐라고 대답할지는 잘 알아요. 그래도 현수 씨 입으로 듣고 싶어요.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이 아니라 해도 좋아요...현수 씨, 뭐든 좋으니까 말을 해봐요. 한 마디라도 좋으니까요.”“잘 자요, 현수 씨.”...메시지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은 후, 배현수는 한참 동안 정신을 추스르지 못하고 침대에 조용히 기대어 있었다.음성 메시지속 조유진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쓸쓸했지만 부드럽기도 했다.7년 전 그녀와 헤어진 이후 그녀가 이렇
심미경은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하지만 조유진은 심미경의 기억 상실이 부럽기만 했다. “사실 과거를 잊는 것이 전적으로 나쁜 일은 아니에요. 원하지 않는 일을 가슴에 깊이 새기는 게 오히려 벌이 되는 경우가 많아요. 이런 일을 완전히 잊어버린다면 딱히 나쁜 일이라고 말하긴 어렵죠.”심미경은 SY 그룹 사무실에 오기 전에 이미 강이찬으로부터 조유진과 배현수 사이의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일들을 들었었다. 그리고 덤으로 배현수의 사망 소식도 전해 들었다.조유진이 지금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원하는 일을 잊어버리게 되면 상처로 멍든 가슴이 치유되고 헤여나올 수 없는 과거의 늪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런 일은 둘러싸인 성과 같았다.기억을 잃은 사람은 기억을 되찾고 싶어 하고 기억을 지우고 싶은 사람은 결코 쉽게 잊을 수 없었다.심미경은 머리가 살짝 아파져 관자놀이를 누르며 조유진을 바라보았다.조유진은 그런 그녀를 부축하며 다급하게 물었다. “왜 그래요? 머리가 많이 아파요?”“왠지는 모르겠는데 제가 조유진 씨에게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느낌이 자꾸 들어요. 근데 진짜 생각나지 않아요...오늘 조유진 씨를 보고 나서 이런 느낌이 더 강렬해졌어요.”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조유진은 심미경이 뭘 말하려고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어떤 부분에 관련된 일이죠?”“저도 잘 모르겠지만 아주 중요한 일인 것 같아요. 그게 아니라면 저도 이 정도로 강한 느낌이 들지 않았을 거예요.”하지만 심미경이 도무지 생각해 내지 못하자 조유진도 계속 캐묻기에 난처했다.“일단 좀 쉬세요. 머리가 아프면 애써 뭔가를 생각해 내려고 하지 마세요.”...오후에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조유진은 테이블 위에 밀크티 한 잔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재스민 그린 밀크티, 당도 30%, 검정 타피오카와 분홍색 타피오카 그리고 커피 젤리 추가.가을의 첫 밀크티 한 잔.“...”조유진은 제자리에 얼어붙은 채 얼굴색이 확 달라졌다.“육 변
“그때 현수가 널 구하기 위해 온몸에 폭탄을 매달아 놨는데 그가 무슨 재간으로 죽음을 피해 갈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거야?”조유진은 여전히 고집을 부렸다. “그의 몸에 매단 폭탄이 가짜라면요? 상대방에게 혼선을 주기 위해서 위장한 거라면...”“무슨 말인지 알겠어. 근데 그날 밤 유람선은 진짜 폭발했잖아. 유진아, 자꾸 아닌 걸 억지로 지어내려고 하지 마.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서둘러 네 정서를 조절하고 현수를 대신해 SY 그룹을 보란 듯이 지켜내는 거야. 그리고 네에겐 선유도 있잖아. 선유에게 네가 없으면 되겠어? 선유를 봐서라도 하루빨리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해.”육지율은 입이 무거운 사람인지라 배현수에 관련된 그 어떤 사실도 누설하지 않았다.조유진은 그의 말을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현수가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배현수가 진짜 살아있다면 왜 그녀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까?혹시 심미경처럼 기억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하지만 기억을 잃었다면 그녀가 재스민 그린 밀크티를 즐겨 마시는 사실을 그가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조유진은 배현수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시도했지만 자신의 논리에 의해 금세 반박당했다.조유진의 눈 밑은 잿빛 안개가 껴 생기를 잃었다. “육 변호사님, 내일 하루만 남초윤과 함께 선유를 좀 봐주실 수 있나요?”“어디 가려고 그래? 유진아, 허튼 생각을 하거나 그러면 안 돼...”그녀는 입꼬리를 끄집어 당기며 힘없이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허튼 생각 하지 않아요. 지리산 절에 가 기도하면 소원이 잘 성취된다고 하더라구요. 내일 절에 가서 부처님께 현수 씨가 아직 살아있는지 물어보려고요.”사람들은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지만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을 때 흔히 실체도 없이 허무맹랑한 하느님이나 부처님에게 모든 희망을 걸게 된다.조유진이 6살 때 갑자기 고열이 났었다. 그래서 안정희가 그녀를 병원에 데려가 주사나 링거도 맞히고 약도 먹이며 할 수 있는 치료를 다 해봤으나 고열이 떨어지지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