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자 하니, 마치 책 속에서 말하는 헤어졌던 부부가 재결합하듯이 환상적이었다.하지만 이 뒤에 얼마나 많은 상처가 있는지는 오직 당사자만이 알고 있다.조유진은 그에게 3년 동안의 생활에 대해 적극적으로 물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서로가 과거에 대해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만약 과거에 솔직해지지 못한다면,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이 그들 사이에 넘어가지 못할 난관이 될 것이다.사실 가끔, 그녀도 매우 궁금했다. 그들이 헤어진 지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그 사이에 그는 다른 여자를 사귄 적이 없었을까?조유진이 보기에는, 그가 다른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고 해도 정상적인 것 같았다. 어쨌든 그들은 정말 헤어졌고 그들 사이에는 정말 끝났었다.그녀는 심지어 그들이 헤어진 그 몇 년 동안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대신해서 배현수를 잘 사랑해 주기를 바랐다.어쩌면 그렇게 하면 그녀의 마음이 좀 편해졌을 것이다.그녀는 자신이 여태껏... 좋은 연인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아주 가볍게 움직이며 그의 얇은 입술에 키스했다.그날 밤, 배현수는 깊은 잠을 잤지만, 조유진은 그의 품에 안겨 토끼잠을 잤다.다음 날 아침, 안방 밖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똑똑.”“아빠, 왜 아직도 안 일어나세요, 저 늦겠어요!”그 아이는 원래 중간고사를 잘 보지 못했는데, 만약에 또 늦는다면 선생님은 반드시 그 아이에게 몇 마디 잔소리할 것이다.조유진은 소리를 듣고 자기 허리에 가로놓인 팔을 살며시 뗐다.그녀가 일어나서 침대에서 내려왔을 때, 두 다리가 나른한 느낌이 있었다.그녀는 가운을 입고 가슴 쪽의 옷깃을 자세히 여미고 난 후에 문을 열었다.문밖에 서있던 조선유는 깜짝 놀랐다.“엄마!”조유진은 문을 닫고 쪼그리고 앉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빠가 아직 주무시고 계시니 먼저 내려가, 이따가 엄마가 학교까지 데려다줄게.”“엄마가 어젯밤에 돌아오셨어요? 난 엄마가 오늘 저의 학부모회에 못 오실 거로 생각했어요, 하마터면 아빠한테 말할
꼬마 선유는 작은 책가방을 메고 조유진의 손을 잡고 깡충깡충 뛰어 학급 문 앞까지 갔다.“엄마, 오후에 학부모회에 오는 걸 잊지 마세요! 그리고 절대 아빠한테 제 중간고사 국어 꼴찌 일을 알리지 마세요!”그렇지 않으면 선유에게 큰일이 일어날 수 있다!조유진은 선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응, 그래 알겠어.”모녀가 대화를 나눌 때 학급 창가에서 작은 머리 몇 개가 삐죽 내밀었다.“선유야, 네 엄마야?”꼬마 선유는 가슴을 쭉 펴고 자랑스러운 얼굴로 말했다.“그래 맞아! 그전에 말해줬지, 우리 엄마가 아름다운 미인이라 했는데도 안 믿었지! 이제 똑똑히 봤지!”“반학기가 지났는데 이제 네 엄마를 처음 봤어. 예전에 네가 거짓말하는 줄 알았어, 나 말고 얘네들도 그렇게 생각했어.”꼬마 선유는 입이 삐죽하게 나오면서 말했다.“자, 그럼, 지금 다 보았지!”“와우! 선유야, 네 엄마가 티브이에서 나오는 대스타를 닮았어!”아이들끼리의 비교 대상은 매우 단순했다. 단지 누구의 엄마가 예쁘고, 누구의 아빠가 잘생겼고, 누구의 장난감이 더 멋있고, 이런 것들을 가지고 승부를 겨루면, 아이들은 한참이나 즐거움에 빠지곤 했다.조유진이 학교에 한 번 나온 것이 선유의 체면을 단단히 세워준 셈이었다.교실로 들어온 후, 아이들이 선유를 에워쌌다.“선유야, 네 엄마가 원래 이렇게 예뻤어? 우리 엄마가 말하건대, 일부 예뻐보이는 여자들은 성형한 거래, 네 엄마도 성형한 거야?”꼬마 선유는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네 엄마가 성형했어! 우리 엄마는 계속 이렇게 예뻤거든! 많은 잘생긴 아저씨들이 우리 엄마를 좋아해! 하지만 우리 엄마는 아빠만 좋아해!”“네 엄마가 아빠만 좋아한다면, 왜 엄마 아빠가 같이 있지 않아? 매번 학교에 오는 사람은 계속 네 아빠였어.”꼬마 선유도 몹시 이해가 안 되었다.이 문제는 선유의 인지 범위를 벗어났다.아빠가 엄마를 좋아하고, 엄마도 아빠를 좋아하는데, 그들은 왜 함께 있지 못하는지, 그 이유는 그도 종종 이해할 수 없
그는 꼬마 선유로부터 이에 관해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글쎄요, 당신이 조선유 아빠세요? 제가 방금 선유에게 물었더니, 어머님께서 오후 학부모회에 오신다고 했어요, 하지만 아직 선유 어머님이 안 오셨는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배현수는 얼굴색이 멍해져서 선유가 거짓말을 하는 줄 알고 말했다.“선생님, 주선유한테 전화 좀 받으라고 하세요, 제가 선유에게 상황을 물어보겠어요.”“네.”이어, 꼬마 선유는 선생님의 핸드폰을 가지고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아빠.”배현수가 물었다.“학부모회를 한다는 걸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꼬마 선유는 목을 움츠리면서 말했다.“아빠, 엄마가 학부모회에 와주신다고 했어요, 제 생각에 아빠가 일이 너무 바쁘셔서 말 안 드렸어요, 엄마는요, 엄마보고 지금 빨리 학교에 오라 해요, 아빠!”“엄마는 지금 성남에 있는데 어떻게 네 학부모회에 참가할 수 있겠어?”꼬마 선유는 목청을 높이면서 변명했다.“아니에요! 엄마가 오늘 아침에도 저를 학교까지 바래다주었어요! 제 친구들이 다 보았어요! 아빠, 저 진짜 거짓말한 거 아니에요! 이상해요, 아빠는 엄마를 보지 못했어요?”“뭐라고?”“아빠, 엄마가 어젯밤에 아빠랑 같이 주무셨어요, 아빠가 혹시 너무 취하신 거 아니에요? 왜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세요! 엄마한테 빨리 전화해서 학교에 와서 제 학부모회에 오라고 해요! 아빠, 전에 이미 한 번 참가하셨잖아요, 제 반 친구가 너무 사나워 보여서 무서워한다고 했어요, 그러니 이번에는 아빠가 오지 마세요, 제 친구들 놀라게 하지 마요.”꼬마 선유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선유는 아빠가 정말 오셔서 성적을 알면 그 자리에서 자신을 때릴까 봐 두려웠다.그러면 얼마나 창피할까!배현서는 핸드폰을 움켜쥔 채 생각에 잠겼다.그는 천천히 어젯밤 일을 회상했다...검은 눈동자가 심하게 움츠러들었다.그러면, 어젯밤 그 꿈은 정녕 꿈이 아니고 진실이었던 걸까?사색이 멈추었다.핸드폰으로 꼬
럭셔리 유람선 한 척이 끝없이 펼쳐진 짙푸른 바다 위에서 평온하게 운항하고 있었다.유람선의 야외 갑판에는 바람이 사납게 휘몰아치고 있었다.조유진이 흐리멍덩하게 눈꺼풀을 벌렸다. 그의 두 손과 두 발은 굵은 끈으로 꽁꽁 묶여 있었고, 거센 바닷바람에 잠시 정신을 차렸다.머리 위에서 친숙한 중년 남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나의 착한 딸아, 드디어 깼구나!”“교범? 당신은 이미...”“내가 안 죽은 것을 보니 놀랍나 보지? 네가 조금이라도 효심이 있으면 내가 안 죽은 걸 보고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착한 딸, 어떻게 이렇게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 있어? 내가 죽지 않으니 크게 실망했나 봐?”조유진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아빠가 안 죽었으니 너무 실망스럽네요, 우리 사이의 부녀 관계는 이미 7년 전에 끝났어요, 이제 와서 무슨 아빠인 척해요?”“이런 불효한 년!”팍!교범은 손바닥을 치켜들고 조유진의 뺨을 호되게 때렸다.조유진의 입가에는 피가 흘렀고 얼굴도 비뚤어졌다.그녀는 갑판 난간 옆에 버려져 있었고, 고개를 돌리면 푸른 바닷물이 흰 물보라를 일으키는 것을 볼 수 있었다.깊은 바다는 맑고 깨끗하고 아름다웠다.하지만 지금의 조유진에게 이것은 끝없는 고통이었다.그녀는 숨을 몰아쉬고 얼굴색이 심하게 창백해져서 서둘러 눈을 감고 시선을 옮기고 고개를 들어 조범을 보며 말했다.“왜 저를 납치했어요?”“내가 설혜보고 너한테 전화해서 충주로 돌아와 내 마지막으로 널 보자고 했는데, 너는! 내 착한 딸! 내가 감옥에서 죽었다는 말을 듣고도 넌 아무렇지 않았지! 조유진, 내가 어떻게 너 같은 불효한 딸을 낳을 수 있어! 네가 날 만나러 오지 않으니, 난 사람을 보내 널 묶어서 나를 만나게 할 수밖에 없었지!”조유진은 눈을 부릅뜨고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그래 지금 절 만났어요, 뭐 하고 싶어요? 이 유람선이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어요!”조범은 쪼그리고 앉아 그녀를 보며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이곳은 서태평양이야, 조금 있으
조범은 배현수가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공해로 오지 않을까 봐 일부러 심한 말을 했다.“배현수, 네가 감히 오지 않으면, 조유진이 당하는 일은 바다에 버려지는 것만 아닐 거야. 이 유람선에는 젊고 힘센 남자들이 많아, 조유진이 또 이렇게 이쁜데, 그들이 만약에 화가 나면 조유진을 가만 놔두겠어? ”“조, 범!”배현수가 화가 나서 몹시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조범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네가 오기만 한다면, 조유진은 별일 없을 거야.”조유진은 핸드폰에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현수 씨, 이 사람 말을 듣지 마세요! 절 잡은 건 당신을 유인하기 위해서예요! 만약 당신이 온다면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죽을 거예요! 이 사람들 손에 총이 있어요! 오지 마세요! 죽어요!”공해라는 국경이 없는 바다에서는 강한 사람의 말이 곧 법이었다.살인과 범죄는 이 바다 위에서 흔한 일이었다.그녀는 배현수가 자신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것도 이렇게 험한 상황에 말이다.배현수의 나지막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전화에서 들려왔다.“내가 올 때까지 그들과 맞서지 말어, 꼭 살아남아야 해.”조유진은 두 눈이 빨개지고 바닷바람에 흐르는 눈물이 말라져 갔다.“현수 씨... 제발 부탁하는데 오지 마세요... 조범이 어쨌든 저의 친아버지인데, 저를 정말로 죽이지 않을 거예요, 그의 말을 믿지 마세요! 현수 씨가 여기로 온다면, 그는 정말 당신을 죽일 거예요!”그녀는 그를 속이려고 했다.만약에 배현수가 정말 온다면, 이 길은 돌아갈 수 없는 길이었다.조유진이 입이 닳도록 말했으나 배현수는 또박또박 꿋꿋이 말했다.“조유진, 잘 들어, 만약 네가 죽으면 나도 혼자 살지 않아, 그러니까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려.”“...”“약속해, 유진아.”그녀는 참으려고 애썼지만, 소리내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현수 씨, 저를 위해 위험에 처할 필요 없어요, 당신이 정말 오면 선유는 어떻게 해요? 진짜 오지 마세요...”“초운 씨가 우리 선유를 아주
조유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갑판 위에 총을 들고 검은 옷차림을 한 사람들을 바라보며 눈동자를 움츠렸다.그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의 왼쪽 팔뚝에는 모두 용처럼 생긴 문신이 있었다.보아하니 무슨 거대한 지하 조직인 것 같았다.그녀는 지금의 자신이 벌레와도 같았다. 저 사람들이 그녀를 향해 아무렇게나 총을 쏘기만 하면 그녀는 바로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하지만 그녀가 더 두려워하는 것은 죽임을 당하는 게 아니라, 배현수가 여기에 오면 그들이 배현수한테 어떻게 할까 봐 걱정했다.그녀는 피곤할 대로 피곤해진 눈을 뜨고 조범을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부녀 사이의 체면을 봐서라도 부탁 하나 해도 되겠어요?”“배현수를 놓아주라는 말은 하지 마!, 내가 할 수도 없어. 다른 것을 말해봐 봐, 내가 최선을 다해 만족시켜 줄게.”조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만약에 배현수가 죽으면 나도 안 살래요, 저는 저 검은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얼마나 나쁜지는 몰라요, 제발 부탁하는데 저 사람들이 저를 강간하지 못하게 해요, 그냥 저를 차라리 통쾌하게 죽여주세요.”“알았어.”“그리고, 바다에 시신을 던질 거면, 저와 배현수를 함께 묶어서 던져주세요.”조범은 안타까워하는 모습으로 조유진을 노려보며 호통을 쳤다.“조유진, 지금 어떤 상황인데 넌 아직도 귀신에 홀린 듯 이런 말을 해! 내가 보기에 배현수 그 새끼 도대체 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너 만약에 당시 배현수한테 빠지지 않고 내 말을 듣고 유씨 집안의 유승태랑 결혼했더라면, 지금 너와 나, 모두가 이 지경까지 이르지 않았을 거야!”조유진은 그와 이런 쓸데없는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여기는 공해였고, 유람선 위에는 총을 든 검은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한 바퀴 서있었다.그녀는 자신이 생존할 확률이 희박하고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난간에 기대 아무런 미련이 없이 마지막으로 부탁했다.“제가 조금 있으면 죽어요, 어쨌든 저는 당신 친딸인데, 저를 한번 도와주세요, 저와 현수 씨가 죽
“네 이놈아! 수작 부리지 마! 그런데 네가 어디에 가서 사람을 구하려고 하는지는 나한테 알려줄 수 있어? 누구를 구하길래 719부대의 힘이 필요해.”“공해, 내 아내를 구해야 해요.”“네놈이 언제 결혼했어?”배현수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살아서 돌아오면 제가 우리의 결혼식에 초대하겠습니다.”“알겠어, 내가 바로 통지할게, 하지만 네가 약속을 어기면 안 돼!”배현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말한 것은 반드시 지킵니다.”719부대는 지하의 암흑세력이었고, 이 세력은 정의와 한국을 위해 복무했다.719부대의 역대 최고지도자는 719부대의 맴버들에 대한 절대적인 파견 권리와 임명권이 있었다.그리고 719부대는 더욱 신비한 조직이었고 그 안에 맴버들은 각자 장점을 가지고 있고 모두 사격 솜씨가 좋았지만, 출신은… 엉망진창이었다. 사령관님이 어디서 그들을 데리고 왔는지는 아무도 몰랐다.하지만 이건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배현수를 예로 들어 말하면, 사령관님이 배현수의 배경 조사를 마친 뒤, 감옥에 있는 그를 마음에 들어 했다.7년 전, 그는 핍박받아 감옥에 들어갔다. 당시 그가 감옥에 들어갔다는 뉴스는 사실 몹시 충격적이었다. 그는 대학 입시에서 1등으로 대제주대학에 들어갔고 순조롭게 박사 공부도 했다. 이변이 없다면, 그렇게 많은 주목을 받은 이력과 우수한 성적으로 그는 대제주대학교의 에이스가 될 것이었다.그가 감옥에 들어간 지 얼마 안 지나, 사령관님은 그를 스카우트한다는 마음으로 직접 찾아왔다.719부대의 맴버 중에 그처럼 감옥살이를 한 것은 별일도 아니었다. 나이가 제일 어렸던 해커는 은행시스템을 해킹한 적이 있었고 사령관님이 이 점이 눈에 들어 그를 잘못된 길로부터 올바른 길로 인도했다.배현수는 기억력이 뛰어났고 한 번 보면 잊지 않는 재능이 있었고 그가 금융 주식시장에 대한 날카로운 안목은 사령관님으로 하여금 마음에 들게 했다. 원래 3년 동안의 감옥살이에서 사령관님은 그를 바로 데리고 나갈 수 있었지만, 그의 의지를 키우
밤이 되자 공해에서는 파도가 세차게 일었다.계속하여 맹렬하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는 조유진의 마음을 점점 무겁게 했다.어쩔 수 없이 등 뒤로 묶인 그녀의 손은 난간을 꽉 움켜쥐고 있었고, 심해 공포증으로 인해 그녀의 손바닥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오후부터 저녁까지 불과 몇 시간이 지났지만, 조유진은 매분 매초가 마치 일 년처럼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또 30분이 지났다.9시 반.조범은 급해 나서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배현수가 죽는 게 무서워서 안 오는가 보지?”조유진은 창백한 입술로 웃으며 말했다.“죽는 게 두려운 건 사람 본능이에요. 당신은 죽는 게 무섭지 않아요? 내가 보기에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이 바로 당신이에요. 혹시 현수 씨가 오지 않으면 드래곤 파에서 당신에게 맡겨 준 임무는 실패하는 거고, 조범, 아니면 우리 함께 짝이 되어 같이 바다에 뛰어들죠.”그녀는 배현수가 자신을 구하러 오지 말았으면 했다.만약에 오늘 밤 죽어야 하는 운명이라면, 그녀는 조범을 끌고 같이 지옥에 가려고 했고 배현수와 함께 죽기는 싫었다.조범은 임무를 완수한 후,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미국에서 별장에 입주해 미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거로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조범은 어찌 죽음이 두렵지 않겠는가?그는 조유진의 머리카락을 확 잡아당기며 매서운 말투로 말했다.“네가 죽고 싶으면 날 등받이로 끌어당기지 마! 조유진, 넌 내 딸로서 그 뒈질 놈의 네 엄마처럼 재수 없어! 멍청한 년!”조범은 갑판 위에서 망원경을 들고 해면을 바라보았다.갑자기 흰색 요트 한 척이 물보라를 뚫고 유람선 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이 부근에는 다른 배가 없었고 지금, 이 해역에서 나타난 것으로 봐서는 거의 틀림없이 배현수였다.조범은 망원경을 내려놓고 기쁨에 차서 소리쳤다.“배현수가 왔어!”그의 눈빛은 마치 금은보석을 본 것처럼 흥분으로 가득 찼다.조유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는 있는 힘을 다해 몸을 움직여 고개를 돌려 해면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