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호기심이 생기기 마련이었다.저녁, 심미경은 병실 침대에 누워 핸드폰 주소록을 보았다. 어떤 이름은 낯익다는 생각이들긴 했어도 누군지 도저히 기억나지 않았다.특히 조유진의 이름이 더 그랬다.애써 기억해 내려고 했지만 머리가 아파져 와 손으로 두드리려다 강이찬에게 제지당하고 말았다.“이마 상처 아직 낫지도 않았어요. 억지로 생각하지 말아요. 다 나았을 때까지도 기억나지 않으면 수술하면 되니까요.”“수술로 회복될 수 있어요?”강이찬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런데 지금은 신체가 너무 허약해서 두 번째 수술을 진행하기 어렵다고 하셨어요. 일단은 회복이 최우선이에요.”“조유진 씨가 누군지 아세요?”“갑자기 조유진 씨는 왜요?”강이찬은 그녀가 지금까지도 조유진에 대해 경계심을 품고 있는 줄 알고 굳이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지만 심미경이 계속 캐물었다.“조유진 씨 아세요? 혹시 어떤 분이세요?”강이찬은 더는 숨기지 않으려고 했다.“사실 유진이는 저의 대학교 후배였어요. 배현수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걔 여친이었어요. 전에 저랑 싸우고 임신한 몸으로 혼자 뛰쳐나갔다가 저혈압으로 길바닥에 쓰러져있는 거 유진이가 살려줬어요. 그렇게 서로 알게 된 거예요.”“그렇구나. 글쎄 어딘가 익숙하다 했어요.”심미경은 차 사고당하기 전 조유진에게 전화했던 적이 있었다.조유진은 그녀가 자신한테 고마워하면서 식사 대접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했다.그러고 한밤중에 근처에서 만두를 사 오겠다고 차를 끌고 나갔는데 어째서인지 내비게이션에는 산성 별장이 찍혀있어 강이찬도 의아하던 찰나였다.하지만 아직 허약한 상태라 뭐라 더 물어보기도 그랬다.“비서한테 영양사를 알아보라고 했는데 특별히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먹어도 되는지 물어보게요. 유산 후에는 몸조리 잘해야 해요.”부드러운 남자한테 끌리지 않는 여자는 없었다. 특히나 가장 허약하고 의지할 곳이 필요할 때 말이다.자신이 누군지도 기억나지 않으면서 자신한테 잘해주는 이 남자를 보고 있자니
‘나는 기억상실 때문에 아이가 없어졌어도 별로 슬프지 않지만 강이찬 씨는? 모든 걸 기억하고 있잖아.’심미경은 미안한 마음에 그를 밀쳐냈다.“제 잘못이에요. 한밤중에 만두사러 가는 거 아니었어요. 그러면 차 사고도 당하지 않았을 거고 아이도...”강이찬은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면서 위로했다.“미경 씨만 괜찮으면 됐어요. 아이는 나중에 또 가지면 되니까요.”유산된 아이 언급에 두 사람은 표정이 씁쓸해지고 말았다.강이찬은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더니 화제를 돌렸다.“이거 제가 선물한 거예요. 맘에 들어요? 별로라면 퇴원해서 다른 거 사러 가요. 이참에 웨딩드레스도 피팅해보고요.”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심미경이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로 다정하기만 했다.그녀는 약지에 끼워져 있는 반짝반짝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쳐다보면서 다른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네, 맘에 들어요. 강이찬 씨...”“예전에는 저를 이렇게 부르지 않았어요.”“그러면 어떻게 불렀는데요?”“성을 빼서 불러줬어요.”심미경은 살짝 부끄러웠다.“이... 찬 씨?”강이찬은 그녀를 안더니 고개 숙여 입맞춤을 했다.결국 심미경은 이 스킨십에 잠재적 감정이 수면에 떠오르기 시작했다.기억이 상실되긴 했지만 자신이 이 남자를 좋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아니면 내가 왜 혼전임신을 했겠어? 많이 좋아해서 혼전임신도 괜찮다고 생각했을 거야.’한 사람은 기억 상실 후 가장 먼저 보이는 사람을 의지하기 마련이었다.더군다나 강이찬이 자신을 극진히 챙겨주는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하지만 첫눈에 반한 사랑은 쉽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성남시.지난번 배현수가 대극장에서 조유진을 구해주고 사라진 이후로 이 둘은 서로 연락한 적이 없었다.조선유에게 영상통화를 보냈을 때도 배현수는 자연스럽게 자리를 피했다.조유진은 성행 그룹에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배울 것도 많았기 때문에 일로 자신의 감정을 무마시키면 그나마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죽은 사람이 네 친아빠라고! 조유진, 너 어떻게 그렇게 독할 수 있어? 친아빠가 돌아갔다는데 어떻게 그렇게 불효를 저지를 수 있어!”“당신이랑 아빠한테 불효를 저지른 건 하루 이틀이 아니잖아요. 제가 왜 이런 독한 말을 하게 되었는지는 나중에 지옥 가서 아빠를 만났을 때 저 대신 물어봐 주세요. 왜 친딸을 이 지경까지 만들었는지!”“지금 나 저주하는 거야?”조유진의 목소리는 차갑기만 했다.“맞아요, 대놓고 저주하는 거.”“너!”정설혜가 말을 이어가기 전에 조유진이 아예 전화를 끊어버렸다.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는 이미 차단된 상태였다.이 사실을 확인한 정설혜는 믿기지 않아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여보, 유진이 어떻게 나한테 이런 말을 할 수 있어요? 딸을 어떻게 키웠길래 이렇게 교양이 없는 거예요!”조범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죽었다는데 돌아올 생각을 안 해?”“이 방법 안 먹혀요! 유진이는 이미 당신을 잊어버렸나 봐요. 이년이 배현수랑 나쁜 것만 배워서 어른한테 하는 말버릇이 싹수없네요!”정설혜가 조유진을 욕하는 말을 들은 조범은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나를 아빠로 인정하지 않으니, 이제부터 나도 매정해져도 되겠네!”“오지도 않는데 어떻게 돈 달라고 해요?”조범이 욱하더니 말했다.“유진이 아이가 아직 대제주시에 있잖아?”“아, 맞네요. 자식을 목숨처럼 생각하니까 그 녀석을 잡아 오면 일이 쉽게 풀리겠네요! 사람 붙여 알아보도록 할게요! 녀석이 배현수 옆에 있어서 쉽지는 않을 거예요.”조범이 피식 웃더니 말했다.“지금의 배현수는 우리 힘으로 상대가 안 돼. 그런데 내가 그동안 헛살았는 줄 알아? 그때 내가 드래곤 파에 가입했더라면 걔가 나를 뒤에서 무너뜨렸을 것 같아? 조유진 그년이 순진해서 지금까지 거짓 증언으로 나를 감옥에 보냈는 줄 알잖아. 어릴 때는 그렇게 착하더니 배현수를 만난 후부터 사람 자체가 변했어!”“다 당신이 그렇게 만든 거예요! 예전에 나더러 잘 교육하라고 했다면 이 정도
“여보더러 배현수를 꼬드겨서 가입시키라고 하면 어떡해요? 저희는 배현수랑 원수 같은 사이인데, 같이 가입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배현수는 진작에 단칼에 거절했어. 그런데 드래곤 파의 원칙이 바로 어기는 자를 죽여버리는 거야. 드래곤 파에서 우리랑 배현수와의 관계를 알고 배현수를 없애려고 협조해달라고 할 거야.”정설혜는 배현수가 죽도록 미웠다.“드래곤 파의 도움으로 이번에는 꼭 배현수를 죽여야 해요!”조범은 걱정되는 부분이 있는지 표정이 어두워졌다.“그런데 유진이를 이용해서 배현수를 끌어내라고 했어. 그리고 제물 역시 유진으로 정했고.”“제물이요?”“이것이 바로 드래곤 파 가입 조건이야. 자기 가족을 제물로 바치는 거.”정설혜 역시 독한 사람이었지만 이 가입 조건을 듣고 흠칫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드래곤 파가 그렇게 독해요? 그러면 거기 가입하게 되면 위험해지는 거 아니에요?”“이 드래곤 파는 만들어진 지 백 년 가까이 돼. 역대 최고 관리자들이 사탄을 믿고 있어 밝은 세상 속에서 가장 음흉한 짓을 하고 다녔지. 가입하기만 하면 평생 배신해서도 안 돼. 만약 지시대로 일을 처리하지 않으면 죽일지도 몰라. 이것이 바로 내가 전에 계속 미뤘던 이유이기도 해. 배현수는 담도 크지. 그런 조직을 거절했으니. 내가 충주 기밀로 드래곤 파에게 잘 보이지 않았다면 나를 진작에 죽였을 거야. 그런데 부귀영화를 누리려면 언제나 죽을 각오를 해야지. 지금은 무일푼이니까 거기에 가입해서 같이 싸우는 수밖에.”“...”조범이 죽었다는 소식에 조유진은 심정이 복잡미묘하기만 했다.아무리 독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급사했다는 소식에 기쁘지만은 않았다.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았고 그저 고구마 백 개를 먹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대제주시를 떠나 아름답지 않았던 기억을 멀리해서 그런지 한동안 실면하지도 않았고 최근에는 정서가 안정되어 파록세틴도 거의 먹지 않았지만 오늘 조범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또 한 번 실면하게 되었다.밖에 날이 밝아서야 결국 스르륵
조유진은 중간고사에서 국어성적이 꼴찌인 이유를 물어보기로 했다.“암기를 제대로 안 했구나?”조선유는 고개를 흔들었다.“했어! 완벽하게 했다고!”조유진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그러면 왜 꼴찌 한 건데?”사실 조선유는 기억력도 좋고 지능도 높아 암기하는 속도가 다른 애들보다 현저히 빨랐다.녀석은 우물쭈물하더니 말했다.“원래는 1등 할 수 있었는데 그날 며칠 동안 아빠가 집에 없는 틈을 타 저녁 늦게까지 놀고 늦게 잤거든. 시험을 보면서 너무 졸려서 그만 자버렸어... 다시 깨어났을 때는 선생님께서 이미 시험지를 거둬가려고 했어.”이런 이유에 조유진은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그러니까, 뒤에 작문은 비워두고 백지를 낸 거나 마찬가지네?”작문이 있는 시험지 뒷면에는 0점이라고 떡하니 적혀있었다.“...”조유진은 턱을 괴더니 말했다.“시험지가 왜 이렇게 꼬질꼬질해?”‘시험을 잘 못 봐서 울었나?’시험 한 번쯤 잘못 본 건 대수롭지 않다고 위로하려고 했지만 조선유가 먼저 제 발 저린지 실토하고 말았다.“엄마, 내가 말하면 웃으면 안 돼!”“응. 안 웃을게.”“사실 자면서 침 흘려서 그래.”“...”‘정말... 뭐라고 해야 할지.’조선유는 입이 삐죽 내밀더니 말했다.“선생님이 시험지를 거둘 때 나한테 막 뭐라고 했거든. 아빠랑 얘기 좀 해봐야겠다면서. 그래서 내가 아빠 출장 가셔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더니 엄마를 불러오래. 엄마, 나 한 번만 도와주면 안 돼?”“...”조유진은 어쩌다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선유야, 그러면 안 되는 거야.”조선유는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녀석이라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응, 엄마.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다음에 시험 볼 때는 시험지에 침을 떨어뜨리지 않을게.”“...”조유진은 어처구니가 없어 웃고 말았다.“다음에 시험 볼 때도 자겠다는 말이야?”“나도 자고 싶지 않았는데 너무 졸려서 그만.”조선유는 평소에도 잘 잤기 때문에 거짓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매번 꼴찌 한 건 아니잖아! 전에는 잘 봤는데.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고!”“1학년이 되더니 속담까지 할 줄 아네.”조선유는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당연하지.”조선유는 테이블 위에 턱을 기대고 불쌍한 표정으로 조유진을 바라보더니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엄마, 나랑 놀면 뭐 어때. 성남에 간 이후로 선유 보러 온 지도 오래됐잖아. 아빠는 말도 없고 정말 심심하다고.”녀석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프기만 했다.늘 조선유한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녀석의 애교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조유진은 바로 저녁에 대제주시로 출발하는 비행기 티켓을 구매했다.엄창민이 물었다.“내가 같이 가줄까? 저번에 대극장에서 너를 총으로 죽이려고 한 사람도 알아내지 못했는데. 또 널 찾으러 갈지도 모르겠어.”“창민 오빠, 저 공항까지만 데려다줘요. 비행기 타고 대제주시에 도착하면 괜찮을 거예요.”엄창민은 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배현수가 나랑 있는 거 보고 우리 사이를 의심할까 봐?”“아니요, 이번에는 선유 학부 모회의 참석하러 가는 거예요. 다음 주 월요일이면 출근할거예요. 대제주시에 오래 머물지 않아 아무 말도 없을 거예요.”백소미는 1층에서 대화하고 있는 이 둘을 힐끔 내려다보더니 방으로 들어가 누군가에게 전화했다.“보스님, 조유진이 오늘 저녁 대제주시로 간답니다.”...저녁 8시, 불야성 바.배현수가 자리에 앉자마자 육지율이 블루 칵테일을 들고 오면서 말했다.“새로운 술이야, 한번 맛봐. 너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새로 오픈한 이 술집 배후 투자인은 바로 육지율이었다.그는 몰래 이런 부업을 하기 좋아했다.육지율의 할아버지인 육성일은 늘 이런 짓이나 하고 다니는 그를 탐탁지 않아 했지만 배현수는 자기 친손주보다도 더 맘에 들어 해 육지율은 속상하기만 했다.배현수는 감옥에 있는 3년 동안 처음에는 조유진에 대한 배신감으로 정신을 못 차려 다른 사람들이 때리고 욕해도 그냥 가만히 있었다.하지만 조범의
육지율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혀를 끌끌 찼다.“무슨 말이야! 내가 너한테 독을 왜 타.”육지율은 여자를 좋아했지, 남자는 좋아하지 않았다.이때 머릿속에 갑자기 이 둘을 실제 주인공으로 쓴 소설이 떠올랐다. ‘작가 이름이 막쓴이라고 했나?’묘사가 생동한 야한 내용도 곁들여져 있는 이 소설은 심지어 N 포털사이트에까지 업로드되기도 했다.육지율은 화가 났지만, 궁금한 마음에 인지도를 확인해 보았더니 조회수가 꽤 괜찮아 수입도 짭짤한 것 같았다.‘나중에 작가가 누군지 확인되면 고소해 버릴 거야! 쓰면 썼지 왜 나를 귀요미로 구사한건데!’마치 더러운 신발 바닥으로 얼굴이 뭉개진 듯이 자존심이 와장창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생각하기만 하면 어질어질해 날 정도로 화가 났다.배현수는 칵테일이 맛없다는 것을 사실대로 말했다.“여기에 메탄올 섞었어?”“원래 그 맛이야. 75도짜리를 마셔야 제맛이지. 이 술의 이름은 브레이브이고 우리 가게에서 제일 핫한 칵테일이야.”배현수가 비웃듯이 말했다.“브레이브? 이름이 왜 이래?”육지율도 지지 않고 말했다.“너랑 조유진한테서 받은 영감이야.”“...”배현수는 사생활이 침범되었다는 생각에 불쾌한 말투로 말했다.“나랑 유진이의 스토리로 돈을 벌어?”“이 술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 듣고 싶지 않아?”배현수는 어두운 표정을 하더니 별로 듣고 싶지 않았다.“한 잔의 술 따위에 무슨 의미가 담겨있겠어.”“그러니까 너한테 문화적 세포가 없다는 거야. 너 지금 얼음 잔을 들고 있지?”배현수는 바보 취급하듯이 육지율을 쳐다보더니 냉랭하게 말했다.“잔 표면에 얼음이 붙어있는 이 술을 겨울에 손님들한테 팔면 동상이 걸리겠네.”육지율은 어이가 없었다.“... 이 술의 숨은 뜻은 왜 얼음 잔을 잡고 있어야 하냐 그 말이야. 행복은 얼음표면을 걷는 것과도 같으니까. 용기 있는 자만이 이 75도짜리 술을 마실 수 있는 거야. 마치 너랑 조유진의 감정처럼 차가웠다 뜨거웠다. 어때, 괜찮지?”“... 그건 잘 모르겠고,
하지만 어떤 말은 계속 속에 넣어뒀다간 자신만 불쾌해지고 상대방과 더 이상 친구 사이로도 남을 수 없었다.배현수는 감정에 둔한 사람도 아니었고, 뻔히 알면서 모른 척하는 사람도 아니었다.감정에 대해서는 사랑이든 우정이든 깔끔한 것을 좋아했다.육지율은 그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할지 몰랐다.강이찬은 더욱 그가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 줄 몰랐다.“걱정하지 마. 나랑 유진이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썸 자체도 없었어. 이 점에 대해서는 날 믿어줘야 해. 그리고 유진이는 더욱...”“나는 네가 유진이를 좋아했는지,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물어본 거야. 이찬아, 난 사실대로 듣고 싶어.”배현수가 얼을 잔을 꽉 쥐자 표면에 붙어있던 얼음 몇 조각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고 말았다. 결국 분위기가 갑자기 조용해지고 말았다.강이찬은 손에 쥐고 있는 술을 쭉 들이키더니 바텐더에게 말했다.“75도짜리 한 잔 더 주세요.”예전에는 감정이 상할 정도로 싸우고 싶지 않았지만 배현수가 이렇게까지 물었는데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같은 대학교에서 친구로 오랫동안 알고 지내면서 조유진한테 마음이 흔들린 적은 있었지만 이 둘의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짓도 하지 않았고 친구의 여친을 빼앗아 올 마음도 전혀 없었다는 것을 모두 다 사실대로 말했다.육지율은 다 듣고 나서 한숨을 들이마시게 되었다.더욱이 배현수는 기분이 말이 아니었다.“때리고 싶으면 때려.”말이 끝나기 바쁘게 배현수는 주먹으로 강이찬의 얼굴을 때렸다.힘이 가득 실린 한방에 강이찬은 아예 바닥에 쓰러져 입안이 온통 피범벅 되고 말았다.“맞은 거 별로 억울하진 않지?”배현수는 어두운 표정에 말투마저 차가웠다.오랫동안 참아왔던 분노가 폭발했는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강이찬은 피를 쓱 닦더니 말했다.“하나도 안 억울해. 맞을 짓을 했으니까. 더 때리고 싶으면 때려.”배현수가 주먹을 꽉 쥐자 관절 마디마디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강이찬은 눈앞이 어지럽다는 느낌을 받았고 이명까지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