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유진은 중간고사에서 국어성적이 꼴찌인 이유를 물어보기로 했다.“암기를 제대로 안 했구나?”조선유는 고개를 흔들었다.“했어! 완벽하게 했다고!”조유진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그러면 왜 꼴찌 한 건데?”사실 조선유는 기억력도 좋고 지능도 높아 암기하는 속도가 다른 애들보다 현저히 빨랐다.녀석은 우물쭈물하더니 말했다.“원래는 1등 할 수 있었는데 그날 며칠 동안 아빠가 집에 없는 틈을 타 저녁 늦게까지 놀고 늦게 잤거든. 시험을 보면서 너무 졸려서 그만 자버렸어... 다시 깨어났을 때는 선생님께서 이미 시험지를 거둬가려고 했어.”이런 이유에 조유진은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그러니까, 뒤에 작문은 비워두고 백지를 낸 거나 마찬가지네?”작문이 있는 시험지 뒷면에는 0점이라고 떡하니 적혀있었다.“...”조유진은 턱을 괴더니 말했다.“시험지가 왜 이렇게 꼬질꼬질해?”‘시험을 잘 못 봐서 울었나?’시험 한 번쯤 잘못 본 건 대수롭지 않다고 위로하려고 했지만 조선유가 먼저 제 발 저린지 실토하고 말았다.“엄마, 내가 말하면 웃으면 안 돼!”“응. 안 웃을게.”“사실 자면서 침 흘려서 그래.”“...”‘정말... 뭐라고 해야 할지.’조선유는 입이 삐죽 내밀더니 말했다.“선생님이 시험지를 거둘 때 나한테 막 뭐라고 했거든. 아빠랑 얘기 좀 해봐야겠다면서. 그래서 내가 아빠 출장 가셔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더니 엄마를 불러오래. 엄마, 나 한 번만 도와주면 안 돼?”“...”조유진은 어쩌다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선유야, 그러면 안 되는 거야.”조선유는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녀석이라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응, 엄마.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다음에 시험 볼 때는 시험지에 침을 떨어뜨리지 않을게.”“...”조유진은 어처구니가 없어 웃고 말았다.“다음에 시험 볼 때도 자겠다는 말이야?”“나도 자고 싶지 않았는데 너무 졸려서 그만.”조선유는 평소에도 잘 잤기 때문에 거짓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매번 꼴찌 한 건 아니잖아! 전에는 잘 봤는데.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고!”“1학년이 되더니 속담까지 할 줄 아네.”조선유는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당연하지.”조선유는 테이블 위에 턱을 기대고 불쌍한 표정으로 조유진을 바라보더니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엄마, 나랑 놀면 뭐 어때. 성남에 간 이후로 선유 보러 온 지도 오래됐잖아. 아빠는 말도 없고 정말 심심하다고.”녀석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프기만 했다.늘 조선유한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녀석의 애교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조유진은 바로 저녁에 대제주시로 출발하는 비행기 티켓을 구매했다.엄창민이 물었다.“내가 같이 가줄까? 저번에 대극장에서 너를 총으로 죽이려고 한 사람도 알아내지 못했는데. 또 널 찾으러 갈지도 모르겠어.”“창민 오빠, 저 공항까지만 데려다줘요. 비행기 타고 대제주시에 도착하면 괜찮을 거예요.”엄창민은 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배현수가 나랑 있는 거 보고 우리 사이를 의심할까 봐?”“아니요, 이번에는 선유 학부 모회의 참석하러 가는 거예요. 다음 주 월요일이면 출근할거예요. 대제주시에 오래 머물지 않아 아무 말도 없을 거예요.”백소미는 1층에서 대화하고 있는 이 둘을 힐끔 내려다보더니 방으로 들어가 누군가에게 전화했다.“보스님, 조유진이 오늘 저녁 대제주시로 간답니다.”...저녁 8시, 불야성 바.배현수가 자리에 앉자마자 육지율이 블루 칵테일을 들고 오면서 말했다.“새로운 술이야, 한번 맛봐. 너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새로 오픈한 이 술집 배후 투자인은 바로 육지율이었다.그는 몰래 이런 부업을 하기 좋아했다.육지율의 할아버지인 육성일은 늘 이런 짓이나 하고 다니는 그를 탐탁지 않아 했지만 배현수는 자기 친손주보다도 더 맘에 들어 해 육지율은 속상하기만 했다.배현수는 감옥에 있는 3년 동안 처음에는 조유진에 대한 배신감으로 정신을 못 차려 다른 사람들이 때리고 욕해도 그냥 가만히 있었다.하지만 조범의
육지율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혀를 끌끌 찼다.“무슨 말이야! 내가 너한테 독을 왜 타.”육지율은 여자를 좋아했지, 남자는 좋아하지 않았다.이때 머릿속에 갑자기 이 둘을 실제 주인공으로 쓴 소설이 떠올랐다. ‘작가 이름이 막쓴이라고 했나?’묘사가 생동한 야한 내용도 곁들여져 있는 이 소설은 심지어 N 포털사이트에까지 업로드되기도 했다.육지율은 화가 났지만, 궁금한 마음에 인지도를 확인해 보았더니 조회수가 꽤 괜찮아 수입도 짭짤한 것 같았다.‘나중에 작가가 누군지 확인되면 고소해 버릴 거야! 쓰면 썼지 왜 나를 귀요미로 구사한건데!’마치 더러운 신발 바닥으로 얼굴이 뭉개진 듯이 자존심이 와장창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생각하기만 하면 어질어질해 날 정도로 화가 났다.배현수는 칵테일이 맛없다는 것을 사실대로 말했다.“여기에 메탄올 섞었어?”“원래 그 맛이야. 75도짜리를 마셔야 제맛이지. 이 술의 이름은 브레이브이고 우리 가게에서 제일 핫한 칵테일이야.”배현수가 비웃듯이 말했다.“브레이브? 이름이 왜 이래?”육지율도 지지 않고 말했다.“너랑 조유진한테서 받은 영감이야.”“...”배현수는 사생활이 침범되었다는 생각에 불쾌한 말투로 말했다.“나랑 유진이의 스토리로 돈을 벌어?”“이 술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 듣고 싶지 않아?”배현수는 어두운 표정을 하더니 별로 듣고 싶지 않았다.“한 잔의 술 따위에 무슨 의미가 담겨있겠어.”“그러니까 너한테 문화적 세포가 없다는 거야. 너 지금 얼음 잔을 들고 있지?”배현수는 바보 취급하듯이 육지율을 쳐다보더니 냉랭하게 말했다.“잔 표면에 얼음이 붙어있는 이 술을 겨울에 손님들한테 팔면 동상이 걸리겠네.”육지율은 어이가 없었다.“... 이 술의 숨은 뜻은 왜 얼음 잔을 잡고 있어야 하냐 그 말이야. 행복은 얼음표면을 걷는 것과도 같으니까. 용기 있는 자만이 이 75도짜리 술을 마실 수 있는 거야. 마치 너랑 조유진의 감정처럼 차가웠다 뜨거웠다. 어때, 괜찮지?”“... 그건 잘 모르겠고,
하지만 어떤 말은 계속 속에 넣어뒀다간 자신만 불쾌해지고 상대방과 더 이상 친구 사이로도 남을 수 없었다.배현수는 감정에 둔한 사람도 아니었고, 뻔히 알면서 모른 척하는 사람도 아니었다.감정에 대해서는 사랑이든 우정이든 깔끔한 것을 좋아했다.육지율은 그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할지 몰랐다.강이찬은 더욱 그가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 줄 몰랐다.“걱정하지 마. 나랑 유진이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썸 자체도 없었어. 이 점에 대해서는 날 믿어줘야 해. 그리고 유진이는 더욱...”“나는 네가 유진이를 좋아했는지,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물어본 거야. 이찬아, 난 사실대로 듣고 싶어.”배현수가 얼을 잔을 꽉 쥐자 표면에 붙어있던 얼음 몇 조각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고 말았다. 결국 분위기가 갑자기 조용해지고 말았다.강이찬은 손에 쥐고 있는 술을 쭉 들이키더니 바텐더에게 말했다.“75도짜리 한 잔 더 주세요.”예전에는 감정이 상할 정도로 싸우고 싶지 않았지만 배현수가 이렇게까지 물었는데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같은 대학교에서 친구로 오랫동안 알고 지내면서 조유진한테 마음이 흔들린 적은 있었지만 이 둘의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짓도 하지 않았고 친구의 여친을 빼앗아 올 마음도 전혀 없었다는 것을 모두 다 사실대로 말했다.육지율은 다 듣고 나서 한숨을 들이마시게 되었다.더욱이 배현수는 기분이 말이 아니었다.“때리고 싶으면 때려.”말이 끝나기 바쁘게 배현수는 주먹으로 강이찬의 얼굴을 때렸다.힘이 가득 실린 한방에 강이찬은 아예 바닥에 쓰러져 입안이 온통 피범벅 되고 말았다.“맞은 거 별로 억울하진 않지?”배현수는 어두운 표정에 말투마저 차가웠다.오랫동안 참아왔던 분노가 폭발했는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강이찬은 피를 쓱 닦더니 말했다.“하나도 안 억울해. 맞을 짓을 했으니까. 더 때리고 싶으면 때려.”배현수가 주먹을 꽉 쥐자 관절 마디마디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강이찬은 눈앞이 어지럽다는 느낌을 받았고 이명까지 들
바텐더는 배현수의 팔을 툭툭 치더니 말했다.“배 대표님, 전화 왔어요.”배현수와 육지율은 칵테일도 모자라 폭탄주까지 섞어 마셔 이미 쓰러진 상태였다.바텐더는 계속 울리는 전화가 중요한 전화인 줄 알고 자기 멋대로 받게 되었다.두 술주정뱅이 중에 한 명은 더군다나 사장님이었기 때문에 이대로 이곳에 쓰러져있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는 생각에 얼른 가족한테 연락하기로 했다.바텐더는 전화를 받더니 이렇게 말했다.“혹시 배 대표님 가족분 되세요? 저희 육 사장님이랑 바에서 술 드시다 취하셨는데 혹시 데려가실 수 있을까요?”“주소 주세요.”“시흥로에 있는 불야성 바요.”...조유진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내일 조선유의 학부모 회의에 참석하려고 대제주시에 도착했다고 배현수에게 알리려던 참이었다가 바텐더한테서 빨리 데리고 가라는 말을 들을 줄 몰랐다.혼자서 두 남자를 들 수 없어 남초윤에게도 전화했다.육지율이 사는 소정 별장과 산성 별장은 아예 다른 방향이기도 했기 때문이다.조유진이 바에 도착하자마자 남초윤도 바로 도착했다.남초윤은 허리에 손을 얹더니 바텐더에게 물었다.“얼마나 마셨길래 이 정도로 취해요?”배현수와 육지율은 주량이 꽤 괜찮았기 때문에 이 정도로 취하기도 어려웠다.바텐더: “75도짜리 술을 거의 각 250ml씩 마셨고 폭탄주도 섞어 마셨어요. 내일 깨시면 병원에 가보시는 게 좋을 거예요.”알코올에 알레르기 반응이 있는 조유진은 술의 도수가 많아 봤자 56도일 줄 알았지만, 소독용 알코올 빼고는 이런 독한 술은 처음 보았다.‘이런 알코올은 냄새를 맡기만 해도 독해 보이는데 이런 걸 마셨으니 위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조유진은 미간을 찌푸렸다.“이런 독한 술을 마셔서 무슨 일 있으면 누구 책임이에요? 여기 바에서는 감당이나 할 수 있겠어요?”“...”바텐더는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저는 직원일 뿐입니다. 이 술은 제가 만든 것도 아니고요.”그는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저기 엎드려져 있는 육지율을 가리키더니 말했다.“저분이
조유진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브레이브가 뭔데요?”“75도짜리 칵테일.”“...”‘이름도 참. 역시 육지율답네.’‘아까 바텐더분이 75도짜리 술을 250m나 마시고 또 폭탄주도 마셨다고 했는데.’조유진이 물었다.“위 안 아파요? 차 키 줘요, 집으로 데려다줄게요.”하지만 이 말은 배현수에게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다.그는 왼쪽 팔을 창문에 기대더니 태양혈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너같이 양심 없는 여자 많이 만나봤어. 알아서 꺼져줄래 아니면 내가 버려줄까?”‘나를 집까지 데려다줘? 내가 제정신이 아닐 때 침대에 눕혀서 모험이나 하려고?’배현수가 자신이 조유진이라는 것을 믿지 않자, 화를 억누르고 다르게 말하기로 했다.“고객님, 뭔가 잘못 아신 것 같은데 저는 육사장님께서 불러주신 대리기사입니다.”배현수는 술에 취했다고 해도 경계심이 가득했다.조유진은 한참이나 공을 들여서야 자신이 육지율이 부른 대리기사라는 것을 설득시켰다.“차 키는 외투 주머니에 있어요.”‘글쎄 바지 주머니에 없다 했네.’배현수가 바에 벗어두었던 외투를 조유진이 챙겼던 것이다.차 키를 찾아내고, 그가 술에 많이 취한 것 같아 생수를 건네면서 말했다.“물 좀 마셔요.”그는 눈도 안 뜨고 경계심이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물에 독 탔어요?”“...”‘아니, 왜 나를 이렇게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조유진은 일부러 그를 자극시켰다.“네. 독 탄 거 맞아요. 흥분제 좀 탔는데 마실 수 있겠어요?”배현수는 병따개를 따 바로 벌컥벌컥 마셨다.‘이 사람이...’조유진이 웃더니 말했다.“제가 독 탔는지 의심하고 있었던 거 아니에요?”배현수는 미간을 찌푸리고 생수를 꿀꺽 삼키더니 술에 취해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욱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성욕 촉진제를 먹으면 감당이 안 되긴 하는데 흥분제 정도는 괜찮아요.”“... 현수 씨, 지금 저랑 농담하는 거예요?”조유진이 차 키를 들고 운전석으로 향하려고 하자 배현수는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방금 저를 뭐라
“조유진,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해.”“...”‘이렇게 갑자기?’“40만 원.”그는 가격이 더 올렸다.“...??”배현수는 상대가 더 높은 가격을 원하는 줄 알고 무표정으로 또 가격을 올렸다.“100만 원.”그냥 한마디만 해주면 쉽게 100만 원 벌 수 있는 거였다.바보가 아닌 이상 이 기회를 놓치려는 사람은 없었지만 핸들을 붙잡고 있는 조유진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사실 배현수는 지금 취해서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이 한마디 해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하지만 어째서인지 조유진은 한참이나 우물쭈물하면서도 원하는 말을 해줄 수가 없었다.“저...”“200만 원.”“...사랑해요.”“누구를?”귀가 빨개질 정도로 부끄러워진 조유진은 이를 악물고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현수 씨, 이건 추가 비용이죠?”배현수는 협상하는 것처럼 목소리가 평온하기만 했다.“400만 원.”조유진은 심호흡하더니 애써 진정하면서 말했다.“... 현수 씨, 사랑해요.”‘이 정도면 됐겠지?’조유진은 백미러로 뒷좌석에 눈 감고 있는 그를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정말 대리기사인 줄 아나 봐.’...산성 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새벽 1시가 넘었다.조유진은 그를 안방으로 끌고 가기까지 큰 애를 먹었다.그러고는 꿀물을 타 배현수에게 건네면서 말했다.“마시면 속이 좀 편할 거예요. 독 안 탔어요.”배현수는 침대에 기대에 앉아 한참이나 지나서야 무거운 눈꺼풀을 서서히 들어 올리게 되었다. 어두운 불빛 아래, 눈앞에 있는 이 여자의 모습이 기억 속 익숙한 모습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느낌이 들었다.‘75도짜리 브레이브가 역시 소문대로 대단하군. 착각이 생길 정도라니.’사실 배현수는 이 정도로 취한 것이 처음이었다.그는 팔로 몸을 지탱하여 그윽하고도 부드러운 눈빛으로 조유진을 바라보았다.그렇게 얼마나 오랫동안 보았는지 눈에 충혈되고 말았다.보고만 있어도 흐뭇하다는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게 되었다.
이것은 바로 조유진의 향기였다.눈꽃이 섞인 은은한 장미 향기, 가까운 듯 멀어 손에 잡히지 않는, 아무리 맡아도 질리지않는 그런 유혹적인 냄새였다.75도짜리 술의 여파도 가시지 않았는지 그의 입술은 불덩이처럼 뜨겁기만 했다.갑작스러운 키스에 조유진은 그를 밀쳐내려고 했다.하지만 이때 배현수가 그녀의 목에 얼굴을 파묻고 낮은 목소리로 애원했다.“유진아, 어쩌다 내 꿈에 나타났는데 어차피 가짜인 거 나 거절하지 않으면 안 돼?”“...”조유진은 그만 멈칫하고 말았다.‘정말 취했네. 이게 꿈인 줄 아는 걸 보면.’“현수 씨, 저는...”이것이 꿈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하려던 말을 그만 삼키고 말았다.배현수는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더니 폭신한 침대로 눕혔다.그의 밑에 깔린 조유진은 어두운 불빛 속에서 술에 취해 평소보다 더욱 깊은 그의 두 눈을 바라보니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배현수는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머릿결을 정리해 주면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두려워할 필요 없어. 이건 꿈이야. 아프지 않을 거야.”“...”하지만 이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조유진은 몰래 조선유랑 만날 생각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제주시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미리 파록세틴을 먹었던 것이다.두렵다고 해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술에 취한 남성에게 이성과 자제력을 기대하면 안 되었다.배현수는 그녀의 손을 침대 위에 꾹 눌렀다.뚫어져라 쳐다보는 그의 모습에 심장이 미친 듯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배현수는 그녀의 다리를 벌리고 서서히 진입하기 시작했다.‘어떻게 이렇게 거칠고도 부드러울 수가 있지?’조유진은 그의 눈빛이 더없이 부드럽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을 내바칠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온몸이 깨질 것만 같았다.배현수는 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거칠었다.조유진은 아파서 울 것만 같았다.“현수 씨, 살살...!”“이미 살살한 건데, 유진아.”배현수는 그녀의 귓불을 깨물더니 뜨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