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유진은 성남에서 대제주시에 올 때 달랑 캐리어 하나만 끌고 왔다. 그래서 짐도 정리할 게 별로 없었다. 선유가 달려와 그녀의 품에 안기며 말했다.“엄마, 성남에는 왜 나 안 데려가는 거야? 나도 성남에 놀러 가고 싶단 말이야.”조유진은 몸을 웅크리고 앉아 선유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그런데 우리 선유는 대제주시에서 학교도 다녀야 하잖아. 방학이 되면 엄마가 성남 구경시켜 줄게. 어때?”“그러면 아빠는? 아빠와 같이 성남에 놀러 가도 돼?”비록 아빠는 어른이지만 선유는 항상 아빠가 자기보다 엄마를 더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조유진은 선유의 얼굴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그래, 아빠가 원하면 같이 와.”하지만 배현수는 분명 거절할 것이다. 배현수가 원하는 것을 조유진은 줄 수 없기 때문에...그녀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데 만나 봤자 질척거릴 뿐 아무런 진전이 없을 것이며 서로에게도 좋을 것도 없었다. 조유진도 배현수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사실 이런 관계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 너무 잘 알고 있다.“선유야, 앞으로 공부할 때는 아빠 곁에 있고 방학이 되면 엄마와 같이 있는 거야. 어때?”선유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엄마, 왜 대제주시에 안 있는 거야? 비행기 타고 다니기 힘들지 않아?”그녀가 이번에 성남으로 돌아간 이유는 엄 어르신을 만나야 하는 것도 있었지만 엄준의 성행 그룹에 입사하라는 요청을 받아들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엄마가 성남에 가서 열심히 일해야 돈 많이 벌어서 선유에게 밀크티 사줄 수 있어.”선유는 맑고 깨끗한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는 조유진을 바라보며 작은 입을 삐죽거렸다.“엄마, 엄마는 대제주시가 싫은 거지?”순간 조유진은 선유의 물음에 어리둥절했다.대제주시, 이곳은 그녀의 너무 많은 추억이 담겨 있는 곳이다. 그녀는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배현수와 함께했던 모든 추억이 전부 이곳에 있었다.아름답고 처절했던 그 시간들...그녀는 확실히 대제주시를 좋
“아니.”선유는 깜찍하고 귀여운 얼굴에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타일렀다.“거짓말쟁이, 나보다 엄마 보내는 게 더 싫잖아요. 엄마가 가면 분명 다시 선유 보러 올 거예요. 엄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엄마는 절대 선유를 버리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엄마가 이번에 가면 아빠를 버릴지 안 버릴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요.”어린아이의 말은 정말 거리낌이 없었다.선유의 직설적인 말은 마치 칼날처럼 배현수의 심장을 찔렀다.얼마나 아픈지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어린 녀석을 차갑게 쏘아보며 말했다.“다 까불었어?”그 말에 선유가 눈살을 찌푸렸다.“누가 까부는데요? 아빠, 내 호의를 그렇게 무시하면 안 돼요.”“선유야... 이런 말은 대체 누구에게서 배운 거야?”선유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저 이제 1학년이에요. 학교에서 다 배운단 말이에요. 아빠 1학년 때는 안 배웠어요?”선유는 1학년이 되기 전부터 드라마에서 이런 말을 많이 들었었다.그는 배현수를 한심하게 바라보며 계속 잔소리를 했다.“아빠, 지금 엄마에게 가서 가지 말라고 한 번 빌어봐요. 엄마가 내 체면을 봐서라도 안 갈 수 있으니까.”배현수는 녀석의 잔소리에 할 말을 잃었다.잠시 멈칫하던 배현수는 녀석을 힐끗 바라보며 물었다.“어떻게 빌어?”“허벅지를 껴안고 가지 말라고 애원해 봐요. 내가 이렇게 부탁하면 엄마가 늘 다시 나를 꼭 껴안아 줬어요.”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너야?”이 무슨 유치한 아이의 장난이란 말인가?선유는 목을 한 번 움츠리더니 작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싫으면 말고요. 그런데 그렇게 화낼 필요는 없잖아요. 나중에 후회나 하지 말아요!”녀석은 말을 마치자마자 방을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배현수는 선유의 팔을 끌어당기며 물었다.“어디 가?” “아빠도 안 하는데 그럼 나라도 빌어서 며칠만 더 있어 달라고 해야죠! 이번 주 토요일에 엄마와 같이 동물원에도 가고 싶단 말이에요!”“안돼, 가지 마.”
선유는 맑고 큰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작은 입을 삐죽거리며 안쓰러운 눈빛으로 배현수를 바라보았다.그러자 배현수는 귀찮은 녀석 때문에 눈살을 찌푸렸다. “울고 싶지 않으니 내려가서 엄마나 바래다줘.”선유는 얼굴을 가까이하고 그의 표정을 열심히 살폈다.“진짜죠? 아빠, 나 그럼 엄마 바래다주고 올게요. 너무 많이 울지는 마세요.”녀석은 작은 손으로 그의 팔을 툭툭 치더니 어른처럼 쓰다듬었다.방문 앞까지 왔을 때 배현수가 다시 한번 선유를 불렀다.“명심해, 절대 엄마 앞에서 소란 피우지 말고 보내드려야 해.”“알았어요. 아빠나 후회하지 마세요.”선유는 나가더니 작은 손으로 손잡이를 당겨 문을 꼭 닫았다.이따가 아빠 혼자 너무 크게 울면 까칠한 아빠는 분명 창피해할 것이다....조유진이 짐을 다 싸자 서정호가 트렁크에 그 짐을 실었다.“유진 씨, 차에 타세요. 더 늦으면 10시 비행기 못 탈지도 몰라요.”시각이 벌써 9시가 다 되어갔다. 이때 선유가 뛰쳐나오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엄마! 아빠가 빨리 가래!”서정호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배 대표님, 진심입니까?’조유진도 어이가 없었지만 이내 선유를 보고 웅크리고 앉아 녀석을 꼭 끌어안았다.“그러면 엄마 먼저 갈게, 방학이 되면 엄마가 데리러 올게.”선유는 아빠의 당부가 기억나 고개를 들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말했다.“엄마, 보고 싶지 않을 거야. 내 걱정 안 해도 돼! 나는 아빠와 잘 지낼게! 엄마는 엄마만 잘 돌봐!”녀석은... 너무 착해서 탈인 것 같다.조유진은 사실 선유가 허벅지를 껴안고 울면 며칠만 더 같이 있어 주려고 했다.하지만 지금 보니 부녀 두 사람에게 조유진이 딱히 필요 없는 것 같다.조유진은 그나마 한시름은 놓았지만 약간 실망스러운 마음도 있었다.“우리 선유도 밥 잘 챙겨 먹고 잠도 잘 자고 아빠 말 잘 들어야 해. 알겠지?”“어!”선유는 조유진의 목을 껴안고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엄마, 빨리 가. 안 가면 비행기 놓쳐.”“응...
선유는 화가 난 얼굴로 배현수의 손을 뿌리치고는 성큼성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선유는 지금 열받아 미칠 지경이었다.아빠가 따라 나와 엄마를 붙잡는 줄로 알았는데... 아빠는 자기가 해야 할 말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바보 멍청이인 것 같았다. 선유는 방에 들어갔지만 배현수는 아직도 자리에 선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고 눈빛은 마치 거센 파도가 휘몰아치듯 점점 사나워졌다. ...마이바흐 차량 뒷좌석에 앉은 조유진은 빈 약병을 꼭 움켜쥐었다.떠나는 길은 역시 아쉬움이 많이 남아있었다.뒤를 돌아보니 긴 그림자가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순간 조유진은 피식 웃었다.사실 처음부터 이곳을 떠나려던 사람은 그녀였는데 자기를 놓아달라고 그렇게 외쳤지만 정작 배현수가 모든 것을 포기하자 그녀의 마음은 오히려 더 무거워졌다. 분명 더 가벼울 거로 생각했는데...분명 속이 시원해야 하는데 지금 그녀는 가슴이 답답해 괴로워 미칠 지경이었다.순간 조유진은 저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흘러나왔고 운전석에서 차를 몰던 서정호는 백미러로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한마디 했다.“유진 씨, 사실 배 대표님은 겉으로 내뱉는 말과 속이 다를 뿐이지 유진 씨를 내쫓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요.”“인제 와서 그런 말 해도 소용없는 거 아시잖아요. 서 비서님, 현수 씨 위가 안 좋으니 술자리에서 최대한 술 좀 덜 마시게 해주세요. 담배도 덜 피우고...”배현수와 선유만 잘 지내면 그 외에 더 이상 바라는 것은 없었다.그들 사이에는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상처로 얼룩져 진작 만신창이가 된 그들에게 ‘화해’와 ‘처음’이라는 단어는 감동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서정호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그녀의 말에 대꾸만 했다.“네.”...조유진이 떠나니 산성 별장은 다시 1년 전의 모습으로 돌아온 듯했다.한산하기 짝이 없었고 이따금 어린 선유의 재잘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가끔 녀석은 학교에서 돌아온 뒤 작은 가방을
어린 선유가 전화기 너머로 조유진에게 애교를 부리자 옆에 있던 엄창민이 먼저 선유에게 인사했다.“안녕, 선유야.”“창민 아저씨, 안녕하세요. 엄마, 출근한 거야?”조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엄마가 오늘 첫 출근이라 창민 아저씨가 엄마에게 회사 소개하는 중이야. 선유야, 엄마 먼저 끊을게. 저녁에 다시 전화할까?”“응! 엄마 기다릴게!”선유는 저녁에 엄마에게서 전화가 오면 아빠한테 가서 엄마에게 할 말이 없는지 물어보려고 했다. “알겠어, 8시 넘어서 전화할게.”영상통화를 끊은 후 선유는 재빨리 서재로 달려갔다. 배현수는 한창 서재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고 선유는 손잡이를 돌려 몰래 문틈으로 그를 훔쳐봤다.배현수는 인기척을 듣고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한 마디 물었다.“또 무슨 꿍꿍이야?”선유는 입을 삐쭉 내밀며 말했다.“꿍꿍이라니요. 그런 거 없어요.”“왜?”선유가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서 있자 배현수가 말했다.“들어와서 얘기해.”선유는 느릿느릿 걸어 들어와 배현수의 눈치를 살폈다.“아빠, 나 할 말이 있는데 아빠 화내면 안 돼요. 네?”“무슨 일인데?”“화내지 않겠다고 먼저 약속해요. 아빠에게 귀띔해 주는 것뿐이니까.”선유가 꾸물거리며 뜸을 들이는 것을 보자 배현수는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말 안 할 거면 숙제하러 가.”“그럼 말할게요? 화내면 안 돼요. 알았죠?”녀석은 고개를 똑바로 쳐들고 그를 보며 연신 애원했다.그런 녀석의 모습에 배현수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말 안 하면 안 들을 거야.”“방금 엄마와 영상통화 했는데...”계약서를 넘기고 있던 배현수는 조유진과 관련된 일이라는 말에 순간 자료를 넘기던 손가락을 멈췄다. 하지만 이내 무덤덤한 표정으로 물었다.“응, 그래서?”선유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리고... 창민 아저씨도 있었어요. 창민 아저씨와 엄마가 같이 있었어요.”창민 아저씨라고 하면 분명 엄창민을 말하는 것이다.조유진이 성남
“...”“아빠, 알아서 잘 생각해 보세요!”조선유는 아빠의 편이었지만 배현수가 너무 맥을 쓰지 못하는 것뿐이었다.녀석이 입구까지 걸어갔을 때, 배현수가 말했다.“방금 새아빠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했어?”조선유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엄마랑 저한테 잘해주고, 엄마만 좋아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어요. 하지만 선유는 아빠를 버리지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도 저를 계속 사랑할 거고 저도 아빠를 계속 사랑할 거예요.”‘... 그렇다면 나를 버리지 않는 거에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그래, 나가봐.”“응. 아빠도 내가 했던 말 잘 생각해 봐요! 저는 그래도 아빠가 엄마랑 어울린다고 생각해요!”“...”조선유는 새아빠를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배현수는 녀석에게 새아빠가 생긴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그저 단순히 조유진 옆에 다른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상상만 해도 불쾌했다.손에 쥐고 있는 계약서 내용은 점점 흐릿해졌고, 불안해서 집중할 수가 없었다.몇 번이고 감정을 추슬러 보았지만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지를 않았고, 자꾸만 차오르는 화를 억제할 수가 없었다.그는 손에 쥐고 있던 폴더를 창문에 던져버리고 말았다.툭!폴더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계약서가 사방에 흩날리게 되었다.테이블 앞에 앉아있던 배현수는 이마를 짚더니 표정이 어두워졌다.눈빛마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가웠다.서랍에서 담배를 꺼내려고 했을 때, 담배 옆에 있는 조유진이 사준 침향스틱에 시선이 고정되고 말았다.조유진이 산성 별장을 떠난 지 이미 며칠 지났지만, 배현수는 집안 곳곳에 남아있는 그녀의 흔적을 지울 수가 없었다.화장대 앞 머리빗에 남아있는 머리카락 몇 가닥, 그녀가 마시다 남긴 물이 담겨있는 컵...장은숙이 이 모든 것을 정리하려고 했을 때 배현수가 버럭 화를 내면서 말렸다.“건드리지 마세요.”전에는 3일에 한 번 씻던 침대 시트를 이제는 일주일이 지나도 씻지를 못했다.침대에는 조유진의 향기가 아직 남아있었기 때문이다.배현수가 병적으로 아
배현수는 조유진과 대화하고 싶은 것보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던 것뿐이었다.조선유는 그를 힐끔 보더니 조유진에게 물었다.“엄마, 엄마는 엄창민 아저씨 좋아?”“좋지.”엄창민은 조유진이 가장 어려울 때 도움을 줬던 사람이었다.그 사람이 싫었다면 친구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녀의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을 들은 배현수는 가슴에 비수가 꽂힌 듯 아팠다.이때 조선유가 울상을 하면서 물었다.“엄창민 아저씨가 좋아졌다면 아빠는 어떡해?”“뭘 어떡해?”조유진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조선유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배현수가 이미 방을 나간 후였다.“엄마는 아저씨랑 결혼할 거야?”“아니, 엄마랑 아저씨는 그저 친구 같은 관계야. 선유랑 퉁퉁이처럼 말이야.”이런 좋은 감정은 남녀 사이의 사랑과는 먼 감정이었다.배현수는 다시 서재로 돌아갔다.조유진이 엄창민을 좋아한다고 인정했을 때부터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도저히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조유진이 자신 이외의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성남으로 다시 돌려보낸 것은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양보였다.‘그런데 조유진이 자기 입으로 직접 다른 남자가 좋다고 했어... 엄창민이 나보다도 좋아? 그 사람이 나보다도 유진이를 사랑해? 나보다도 유진이를 더 많이 알아? 둘이 안지 고작 얼마나 되었다고. 나랑 유진이가 알고 지낸 13년과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텐데.’배현수의 가슴에는 질투의 화신이 불타오르고 있었다.마치 불난 데 기름을 끼얹은 것처럼 그 불씨가 점점 커 커져갔다.배현수는 그 질투심에 눈이 멀어 손등에 선명하게 핏줄이 부어오를 정도로 주먹을 꽉 쥐더니 분노가 극치에 달해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화를 삭이려고 무표정으로 진정해 보려고 했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화의 불씨는 점점 더 커져 미칠 것만 같았다.배현수가 작은 약병을 열었을 때 탄산리약은 마지막 한 알만 남은 상태였다.조유진이 살아서 돌아와 그의 옆에 있을 동안에은 발작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었
이 몇 대의 바이크는 마이바흐 차량을 초월하더니 선두를 달리던 놈이 휘파람을 불면서 시비를 걸어왔다.“우후~ 아저씨 좋은 차 타시네? 누가 더 빠른지 내기해 보실래요?”평소였다면 이런 깡패 같은 놈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테지만 인내심 한계에 다다른 지금은 바로 욱하게 되었다.‘이것들이 죽으려고 환장했네.’마이바흐 차창이 내려지더니, 잘생기고 포스가 넘치는 배현수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다.바이크 뒤에 앉아있던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한 여자아이가 환호했다.“아저씨 멋져요!”이에 앞에서 운전하던 놈이 발끈하고 말았다.“젠장, 너는 내 여자라고! 왜 다른 남자한테 정신이 팔려서 그래? 나보다도 멋져?”“당연히 너보다 훨씬 멋지지!”“제기랄, 어떻게 내기 한판 해보실래요?”이놈은 기껏해 20살짜리 한창 패기가 넘치는 청년으로 보였고, 자존심이 상했는지 승부욕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30살 배현수는 이들에게 아저씨가 맞았다.이 넓은 거리는 저녁이라 아무도 없어 레이싱하기 좋았다.차가운 바람이 창문을 통해 불어왔고, 배현수는 액셀 브레이크를 밟아 시속 200km/h로 올렸다. “아저씨! 죽고 싶어서 세단 시속을 이 정도까지 올려요?”이들은 일부러 배현수를 자극하려고 그의 차량을 하나둘 추월했다.할리 데이비슨 바이크 부대는 이상하리만큼 날뛰기 시작했다.이 깡패 같은 놈들은 뒤에 있는 배현수를 향해 중지를 치켜세웠다.“아저씨! 뒤에서 기어 와요? 저희가 기다려 줄까요?”차 안에 있던 배현수는 무표정으로 또 한 번 액셀 브레이크를 밟아 시속 300km/h로 올렸다.이 마이바흐 차량은 업그레이드 후에 최대 시속 400km/h까지도 가능했지만, 400km/h까지 올리면 죽을 수도 있었다.이들이 타고 있는 할리 데이비슨 바이크 최대 시속은 기껏해 240km/h로 보였다.이때, 마이바흐 차량이 바람처럼 할리 데이비슨 바이크 부대를 추월하게 되자 그중 한 명이 놀라고 말았다.“젠장! 300km/h까지도 가능한 차였어?”“아저씨 죽으려고 환장했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