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유진, 사실대로 말해.”배현수의 목소리는 차갑기만 했다.조유진은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정말 사실대로 말해요? 저한테는 안 좋은 기억이라 말하기 싫은데.”어떤 말은 입 밖에 내면 수습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냥 모르는 척하려고 했지만, 배현수가 계속 되물었다.조유진은 애원하는 눈빛으로 배현수를 쳐다보았다.“현수 씨,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제 6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냥 모른 척하면 될 거 아니에요. 마지막 6일을 즐겁게 보내다가 각자 갈 길 가면 안 될까요?”‘왜 사실대로 말해야 하는 거지?’하지만 배현수는 모르는 척할 수가 없었고 애매모호한 대답보다 확실한 대답을 원했다.그는 작은 약병을 보더니 비웃듯이 말했다.“전에 말한 흥분제, 흥분제도 아니지? 이 약을 먹지 않으면 나한테 가까이할 수도 없었지? 고통스러울 만큼?”“...”“조유진, 내 말이 맞아?”배현수는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조유진은 감정이 북받쳐 올라 침을 꿀꺽 삼켰다.“이미 알고 있으면서 왜 물어요?”그가 따지지만 않는다면 아름다운 관계로 남을지도 몰랐다.“왜 이렇게 된 건지 알고 싶어서 그래.”조유진은 고개를 숙여 슬픈 감정을 숨기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배현수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것 같았다.“어머님 죽음과 관련 있어?”배현수는 망설임 끝에 이 질문을 했다.조유진은 떨리는 목소리를 참으면서 말했다.“아직 팔의 상처도 낫지 않았는데 이 말 이제 그만하면 안 될까요? 나중에 나으면...”“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6일이라도 내 옆에 있는 것이 고통스러운 거라면. 유진아, 내가 정말 너한테 마음을 독하게 먹은 줄 알아?”그는 자신한테 과민반응을 보인다는 것을 알면서도 억지로 곁에 잡아둬서 약을 먹게 할 정도로 독한 사람은 아니었다.조유진은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심지어 고개 들어 배현수를 볼 수조차 없었다.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배현수가 듣기 싫어하는 말이라 할 수도 없었다.그래서 말해도 별
‘피 공포증도 어머님 죽음을 목격해서 그런 거겠지. 정말 어머님 때문이라면 이대로 넘어갈 수 없어. 어머님 죽음이 확실히 엄마랑 연관 있을 수 있어. 그때 나도 무의식적으로 엄마 편을 들었던 거야.’조유진은 그의 품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만약... 아빠가 없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현수 씨도 감옥에서 3년 동안 고생할 일도 없고 엄마도 죽지 않았을 텐테...’조유진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서서히 고개를 들더니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눈물만 흘렸다.‘현수 씨 너무 좋아.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렇게 좋은 사람 다시 만나기 어려울 거야. 현수 씨는 나한테 100점 만점의 사람이었어. 나의 모든 순수함과 열정을 다 바쳤던 사람...’조유진은 자신이 행운아라고 느껴지면서도 가슴이 저릿저릿할 정도로 아프기만 했다.이때 붉어진 두 눈으로 웃으면서 말했다.“남은 6일 동안이라도 즐거운 기억만 남기려고 했어요. 그러면 나중에 다시 되돌려 보았을 때 저를 만난 거 아름다웠던 기억 하나 없을 정도로 불행했다고만 기억하지 않을 거 아니에요.”하지만 지금은...조유진도 왜 두 사람 사이가 자꾸 엇갈리는지 몰랐다.너무도 사랑해서, 아니면 어울리지 않아서일 수도 있었다.사랑을 하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아무것도 용납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예전에는 배현수가 그녀의 배신을 용납할 수 없었고 지금은 조유진이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배현수도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한숨을 들이마시면서 물었다.“저번에 무의도에 갔을 때 절벽에서 죽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 조유진, 난 진실을 알고 싶어. 이렇게 된 마당에 계속 나를 숨길 필요도 없잖아.”조유진은 부인하지 않았다.“조금은 그런 마음이 있었어요. 하지만 살고 싶은 마음이 더 컸어요. 현수 씨랑 함께한 그동안 솔직히 말하면 정말 행복했어요. 약을 먹어야 했어도 행복했어요. 사랑했기 때문에 싫어할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저는 현수 씨를 미워한 적도 없었어요.”조유진이 자신을 미워한 적이 없
안방은 불이 안 켜져서 어두웠지만 창밖에서 비쳐 들어오는 달빛을 통해 배현수의 어두운 눈빛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표정은 평온해도 속은 들끓고 있었다.나쁜 결말이라는 말은 비수처럼 그의 가슴에 박혀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배현수는 갑자기 웃더니 말했다.“나 갑자기 후회됐어.”‘물어보지 말걸. 그러면 우리 사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몰랐을 텐데.’“조유진, 나한테 거짓말이라도 해야 했어. 지금은 거짓말이라도 했으면 좋겠어.”“이미 뱉은 말은 거둘 수가 없어요. 현수 씨는 저한테 물어보지 말았어야 했어요.”가끔 어떤 내뱉는 말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만 줄 뿐이었다.거짓말이 얼마나 오래갈지는 거짓말하는 사람의 기술이 얼마나 대단한지보다 거짓말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이 이것이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언제까지 모르는 척해줄 수 있느냐에 달렸다.배현수는 더는 모른 척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조유진도 거짓말할 필요가 없어졌다.그렇게 서로 상처만 주는 두 사람은 아무 소리 없이 쳐다만 볼 뿐이었다. 이 순간, 배현수는 조유진과 가까이 있으면서 멀게만 느껴졌다. 영원히 닿을 수 없는 하늘의 별처럼 말이다.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기만 했다.“조유진...”“네, 저 여기 있어요.”“그만 가. 더는 괴롭히지 않을게.”조유진은 눈물을 떨구더니 웃으면서 바라보았다.“정말요?”“응. 난... 너를 죽게 만들고 싶지 않아.”조유진이 살고 싶어 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그녀가 살아있어야만 배현수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고 다른 건 다 필요 없었다.이번에는 억지로 손에 모래를 쥐지 않으려고 했다. 꽉 쥘수록 손에서 다 빠져나가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이 모래였다.배현수는 두 사람 사이에 남은 마지막 감정마저 짓밟고 싶지 않았다.고집이 그에게는 포기하는 것이 어렵기만 했다.7년 동안 조유진은 18살부터 25살 되기까지 자신의 운명을 모두 배현수에게 맡겼지만 7년 전에 이미 목숨을 잃은 것처럼 더는 해맑지 않았다.하지만
배현수가 말했다.“선유를 데려가고 싶으면 데려가. 서정호한테 양육비 제때 보내주라고 할게. 가끔 시간날 때마다 성남에 선유 보러 갈게.”“계속 대제주시에서 살고, 대제주시에서 학교 다니다가 갑자기 성남으로 데려가면 적응못 할 거예요. 그리고 친구 퉁퉁이도 여기 있잖아요. 제가 가끔 대제주시에 보러 오면 돼요.”“그래. 6년 동안 혼자 키우느라 고생도 많았는데 이제부터 내가 키울게.”배현수는 잠긴 목을 축이더니 말했다.“유진아, 꼭 행복해야 해.”더 이상 그녀에게 강박적으로 무언가 시키지 않으려고 했다.만약 자신을 만나서 안 좋은 기억, 트라우마를 상기시키게 된다면 다시는 그녀의 앞에 나타나지 않으려고도 했다.조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현수 씨도 행복해야 해요. 괜찮은 사람 있으면 만나보기도 해요.”한 사람만 만나야 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배현수가 다른 사람을 만나서 행복하기를 바랐다.자신이 주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줄 수 있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배현수는 그녀의 모든 부탁에 대답했지만 유독 이 마지막 부탁은 대답하지 않았다.‘괜찮은 사람? 나한테는 조유진 이외로 괜찮은 사람이 없는데?’배현수의 세계에는 조유진과 기타 등등밖에 없었다.조유진을 얻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조유진이 누구인가? 바로 배현수가 어렸을 때부터 마음을 빼앗긴 사람이었다. 가만히 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배현수의 시선을 온몸에 받았던 사람이었다.그를 과거에 얽매이게 한 장본인이기도 했다.몇 번을 다시 만나도 본능적으로 그녀한테 마음이 흔들릴 것이 뻔했다.배현수는 더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마음의 공간이 없다는 것을 그녀에게 말해주지 않았다.모든 순수함과 좋아하는 마음을 모두 조유진에게 줘버렸기 때문에 다시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얼마 동안이나 부둥켜안았는지 몰랐지만, 배현수가 갑자기 무슨 결심이라도 한 듯 서서히 그녀를 밀어냈다.손으로 그녀의 얼굴에
얼마 지나지 않아 조유진은 마당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경적소리를 듣게 되었다.바로 배현수가 떠나는 소리였다.심지어 조유진이 망설일 기회도 주지 않고 그대로 떠나버렸다.‘잘된 일이야. 그렇게 서로를 괴롭히더니, 이제야 끝이 났군. 어차피 계속 이대로 갔다간 나도 현수 씨가 원하는 것을 주지 못했을 텐데. 타임머신이 있었으면 좋겠네. 다시 7년 전 현수 씨랑 작은 월세방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로 돌아가 그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7년이라는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었다.침대에 기대어 앉은 조유진은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이때 전화벨 소리가 침묵을 깼다.발신자는 바로 심미경이었다.조유진은 몇 초간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게 되었다.“여보세요?”“유진 씨 맞죠?”“네. 무슨 일이죠?”“저 성남에서 대제주시로 돌아왔어요. 저번에 저랑 제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살려주셨는데 내일 시간 되시면 밥 한 끼라도 대접해 드리고 싶어요.”“아니에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리고 저 내일 대제주시를 떠나요.”심미경은 의아하기만 했다.“대제주시를 떠나요? 어디로 가시게요?”“성남으로 돌아가려고요.”“그러면 배 대표님이랑은...”“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그러면 또 대제주시로 돌아오는 거예요? 저 아직 고맙다는 말도 못 했는데.”조유진이 웃으면서 말했다.“괜찮아요. 만날 기회는 많으니까요.”‘선유 보러도 와야 하는데. 나중에 만날 기회는 꼭 있을 거야. 오늘이 마지막인 것은 아니잖아.’...천우 별장.통화를 마친 심미경은 한참이나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팩을 하고 옆을 지나가던 강이진이 마침 그 둘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강이진은 요즘 매일 밤 조유진이 진실을 알고 난 후 칼을 들고 흉악한 표정을 하고서 쫓아오는 꿈을 꾸었고 매일 아침 땀범벅이 된 채로 놀라서 잠에서 깼다.그녀는 마치 눈이 돌아간 것처럼 심미경의 전화를 뺏더니 통화기록을 들춰보았다.“왜 조유진한테 전화했어? 조유진이랑 친해?”심미경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정신
강이진은 순간 감정이 격해진 듯 목까지 붉어진 채로 소리쳤다.“내가 한 게 아니야!” “그래, 제발 네가 한 게 아니길 바랄게.”말을 마친 심미경은 휴대전화를 들고 침실로 들어갔다.방금 조유진과 전화 통화만 했을 뿐인데 강이진의 반응이 이상할 정도로 너무 격했다.너무 이상한데...설마 강이진이 진짜로 조유진의 어머니를 죽인 범인인가?이 생각이 심미경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는 순간, 그녀는 저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녀는 또다시 조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이번에는 한참을 기다려도 통화 연결음만 들릴 뿐,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전화가 꺼졌다는 기계음이 들렸다. 의심이 들기 시작한 이상 끝장을 보지 않으면 멈출 수 없다. 조유진은 그녀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다. 한밤중에 찾아가는 게 어쩌면 당돌한 행동일 수 있지만 그녀는 내일 성남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며칠 전 병원에서 조유진은 배현수와 더 이상 함께 있지 않는다고 말했었다.그리고 지난번 서재에서 조유진과 배현수는 절대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강이진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일련의 흐트러진 정보들은 마치 퍼즐 조각 같았다. 심미경은 헤드셋을 끼고 녹취된 음성파일을 눌렀다.강이진과 강이찬이 서재에서 말다툼하던 날, 심미경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살인이라는 단어를 듣고 의심스러운 마음에 ‘녹음’ 버튼을 눌렀었다.하지만 소리가 너무 작아 아무리 크게 틀어도 알아듣기 어려웠다.그저 강이찬이 묻는 말이 어렴풋이 들렸다.“조유진 씨 어머니 죽음이 너와 진짜로 관련이 있는 거야?”강이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오빠, 내 말 좀 들어봐. 내가 한 짓이 아니야! 나는 그저 옆에서 본 것뿐이야...”그 뒤의 말들은 잡음이 너무 심해 심미경은 여러 번 재생해서 들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의심이 점점 더 깊어진 심미경은 침대에 누워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녀는 이 사실을 강이찬에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강이찬은 절대 강이진이 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불야항 바에서 배현수는 자리에 앉아 술 한 세트를 주문했다.열 잔을 마신 그는 목이 따끔거리는 게 느껴졌다.옆에 있던 서정호가 그런 그의 모습에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배 대표님, 팔의 상처가 아직 낫지 않았는데 이렇게 독한 술을 마시면 상처 회복에 좋지 않아요.”그 말을 들은 배현수가 차가운 얼굴로 한마디 툭 내뱉었다.“마실래?”“저... 저는 이따가 운전해야 해서 마시지 않겠습니다.”게다가 곤드레만드레 취한 상태로 한밤중에 집에 돌아가면 분명 와이프가 화낼 거예요.하지만 서정호는 그다음 말을 할 수 없었다.조유진은 내일 아침 성남으로 돌아갈 예정이고 배 대표는 이제 아내가 없기 때문이다. “안 마실 거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네...”배현수는 오늘 정말 죽도록 취하고 싶었다. 하지만 힘들 때일수록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마시면 마실수록 오히려 정신이 더 맑아지고 있었다.정신이 멀쩡한 상태에서 느끼는 이 아픔은 더 말할 것 없이 고통스러웠다.그는 술잔을 들고 단숨에 들이켰다. 술은 빠른 속도로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렸고 도수 높은 술 때문에 위가 당장이라도 불타오를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알코올로 끊임없이 모든 장기를 마비시켜야만 심장이 그나마 통증을 덜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한잔 또 한잔, 몇 잔을 마셨는지도 모른 채 그는 끊임없이 들이켰다.이때 옆에 있던 서정호가 한마디 했다.“배 대표님, 열여덟 번째 잔이에요. 이러다 위가 다 망가지겠어요. 더 마시면 진짜로...”응급실에 갈 수도 있어요.배현수는 손에 잔을 쥔 채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내가 죽으면 유진이가 안 가지 않을까?”서정호는 배현수의 물음에 순간 멈칫했다.그는 배현수가 목숨까지 걸 만큼 이런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무슨 일이 생기면 조유진 씨가 슬퍼할 거고 조유진 씨뿐만 아니라 선유도 많이 슬퍼할 거예요.”만약 예전의 배현수였다면 그는 분명 이 하찮은 목숨으로 조유진을 붙잡으려 했을 것이다. 어쩌면 강제로 조유진을 가두려
서정호는 서둘러 우산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배 대표님, 팔 상처가 아직 낫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비를 맞으면 감염될 수 있어요! 얼른 차에 타세요!”서정호는 검은 우산으로 배현수를 향해 덮치는 비바람을 막았다.그러나 배현수는 자리에 선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7년 전, 유진이가 법정에서 나를 지목했을 때도 나는 한 번도 유진이를 잃을 거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어. 나만 유진이 미워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언제든 내가 돌아보면 유진이는 분명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릴 거로 생각했어.”“조유진 씨가 생각이 짧아서 그러는 걸 수도 있잖아요. 나중에 대표님을 이해하면 다시 돌아올 거예요...”그 말에 배현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서정호, 유진이가 더 이상 나를 안 봐. 유진이에게 이제 나는 없어.”“배 대표님, 제 생각에 조유진 씨는 여전히 대표님을 사랑해요.”서정호는 그저 이런 말로 그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그 여느 때보다 정신이 맑은 배현수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사랑만으로는 이제 안돼.”그녀가 배현수를 사랑하려고 진심으로 원해야만 소용이 있다.만약 그녀에게 다가가기까지 백 걸음이 필요하다면 그래서 그녀가 한 걸음, 아니 딱 반걸음만 앞으로 내디뎌 준다면 배현수는 남은 걸음을 기꺼이 걸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반걸음이 없는 한, 배현수가 아무리 백 걸음, 천 걸음을 걸어도 결국 두 사람은 이어질 수 없다. ...비 오는 밤, 흰색의 작은 벤츠 한 대가 산성 별장으로 가고 있었다.이때 심미경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힐끗 바라보니 강이찬에게 온 전화이다.심미경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이찬 씨?”“나 방금 집에 도착했는데 미경 씨 어디예요? 마당에 차도 없네요.”이렇게 늦은 밤, 그녀는 어디로 간 걸까?심미경은 솔직히 말할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강이찬이 그녀의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누가 자신의 친여동생이 살인범이라는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