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은 약병은 나무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 송지연 발에 닿았다.허리 숙여 약병에 적혀있는 이름을 보았더니 바로 파록세틴이었다.이 약은 각종 우울증 치료에 쓰였고 조급함이 동반된 우울증, 강박증, 공황장애, 대인기피증, 그리고 PTSD에 쓰이기도 했다.‘유진 씨 정말 약을 먹어야 할 정도로 심각한 PTSD를 앓고 있을지도 몰라.’이때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조유진과 조선유의 목소리마저 들려왔다.“엄마! 나 혼자 잠이 안 와! 같이 잘래!”“그러면 일단 방에 가 있어. 엄마 샤워하고 찾으러 갈게.”“알았어!”발걸음 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 들려오자, 송지연은 당황해하면서 황급히 조유진의 가방을 다시 잠그더니 약병을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그렇게 숨을 새도 없이 조유진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두 사람은 그대로 마주치고 말았다!조유진이 멈칫하더니 물었다.“왜 여기 계세요?”송지연은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방을 잘못 들어왔나 봐요. 여기가 저를 위해 준비한 방인 줄 알았어요.”“손님방은 왼쪽에 있어요.”“네. 그럼 가볼게요.”송지연의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 조유진은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송지연은 1층으로 내려가면서 배현수와 마주쳤다.그는 예리한 눈빛으로 쳐다보더니 물었다.“무엇을 찾았는데?”송지연은 약병을 건네면서 말했다.“파록세틴이야. 네가 전에 말한 반응들과 오늘 저녁 관찰한 모습을 보면 내 판단이 맞는 것 같아.”배현수는 작은 약병을 보더니 표정이 어두워졌다.“PTSD?”“맞아. 무슨 이유로 걸린 병인지는 직접 물어봐야 할 거야. 일반적으로 큰 사고를 당해서 걸리는 병이거든.”배현수는 고개 숙여 약병을 만지작거리더니 생각이 많아 보였다.“만약 정말 나한테 PTSD 반응을 보이고 있는데 강제적으로 곁에 둔다면 어떻게 되는 거야?”“고통스러울 거야. 신체접촉이 있을 때마다 약을 먹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거야. 심지어 질식할 수도 있어.”“이만 가봐. 대리 이미 도착했어.”배현수는 아
“조유진, 사실대로 말해.”배현수의 목소리는 차갑기만 했다.조유진은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정말 사실대로 말해요? 저한테는 안 좋은 기억이라 말하기 싫은데.”어떤 말은 입 밖에 내면 수습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냥 모르는 척하려고 했지만, 배현수가 계속 되물었다.조유진은 애원하는 눈빛으로 배현수를 쳐다보았다.“현수 씨,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제 6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냥 모른 척하면 될 거 아니에요. 마지막 6일을 즐겁게 보내다가 각자 갈 길 가면 안 될까요?”‘왜 사실대로 말해야 하는 거지?’하지만 배현수는 모르는 척할 수가 없었고 애매모호한 대답보다 확실한 대답을 원했다.그는 작은 약병을 보더니 비웃듯이 말했다.“전에 말한 흥분제, 흥분제도 아니지? 이 약을 먹지 않으면 나한테 가까이할 수도 없었지? 고통스러울 만큼?”“...”“조유진, 내 말이 맞아?”배현수는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조유진은 감정이 북받쳐 올라 침을 꿀꺽 삼켰다.“이미 알고 있으면서 왜 물어요?”그가 따지지만 않는다면 아름다운 관계로 남을지도 몰랐다.“왜 이렇게 된 건지 알고 싶어서 그래.”조유진은 고개를 숙여 슬픈 감정을 숨기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배현수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것 같았다.“어머님 죽음과 관련 있어?”배현수는 망설임 끝에 이 질문을 했다.조유진은 떨리는 목소리를 참으면서 말했다.“아직 팔의 상처도 낫지 않았는데 이 말 이제 그만하면 안 될까요? 나중에 나으면...”“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6일이라도 내 옆에 있는 것이 고통스러운 거라면. 유진아, 내가 정말 너한테 마음을 독하게 먹은 줄 알아?”그는 자신한테 과민반응을 보인다는 것을 알면서도 억지로 곁에 잡아둬서 약을 먹게 할 정도로 독한 사람은 아니었다.조유진은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심지어 고개 들어 배현수를 볼 수조차 없었다.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배현수가 듣기 싫어하는 말이라 할 수도 없었다.그래서 말해도 별
‘피 공포증도 어머님 죽음을 목격해서 그런 거겠지. 정말 어머님 때문이라면 이대로 넘어갈 수 없어. 어머님 죽음이 확실히 엄마랑 연관 있을 수 있어. 그때 나도 무의식적으로 엄마 편을 들었던 거야.’조유진은 그의 품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만약... 아빠가 없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현수 씨도 감옥에서 3년 동안 고생할 일도 없고 엄마도 죽지 않았을 텐테...’조유진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서서히 고개를 들더니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눈물만 흘렸다.‘현수 씨 너무 좋아.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렇게 좋은 사람 다시 만나기 어려울 거야. 현수 씨는 나한테 100점 만점의 사람이었어. 나의 모든 순수함과 열정을 다 바쳤던 사람...’조유진은 자신이 행운아라고 느껴지면서도 가슴이 저릿저릿할 정도로 아프기만 했다.이때 붉어진 두 눈으로 웃으면서 말했다.“남은 6일 동안이라도 즐거운 기억만 남기려고 했어요. 그러면 나중에 다시 되돌려 보았을 때 저를 만난 거 아름다웠던 기억 하나 없을 정도로 불행했다고만 기억하지 않을 거 아니에요.”하지만 지금은...조유진도 왜 두 사람 사이가 자꾸 엇갈리는지 몰랐다.너무도 사랑해서, 아니면 어울리지 않아서일 수도 있었다.사랑을 하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아무것도 용납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예전에는 배현수가 그녀의 배신을 용납할 수 없었고 지금은 조유진이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배현수도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한숨을 들이마시면서 물었다.“저번에 무의도에 갔을 때 절벽에서 죽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 조유진, 난 진실을 알고 싶어. 이렇게 된 마당에 계속 나를 숨길 필요도 없잖아.”조유진은 부인하지 않았다.“조금은 그런 마음이 있었어요. 하지만 살고 싶은 마음이 더 컸어요. 현수 씨랑 함께한 그동안 솔직히 말하면 정말 행복했어요. 약을 먹어야 했어도 행복했어요. 사랑했기 때문에 싫어할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저는 현수 씨를 미워한 적도 없었어요.”조유진이 자신을 미워한 적이 없
안방은 불이 안 켜져서 어두웠지만 창밖에서 비쳐 들어오는 달빛을 통해 배현수의 어두운 눈빛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표정은 평온해도 속은 들끓고 있었다.나쁜 결말이라는 말은 비수처럼 그의 가슴에 박혀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배현수는 갑자기 웃더니 말했다.“나 갑자기 후회됐어.”‘물어보지 말걸. 그러면 우리 사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몰랐을 텐데.’“조유진, 나한테 거짓말이라도 해야 했어. 지금은 거짓말이라도 했으면 좋겠어.”“이미 뱉은 말은 거둘 수가 없어요. 현수 씨는 저한테 물어보지 말았어야 했어요.”가끔 어떤 내뱉는 말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만 줄 뿐이었다.거짓말이 얼마나 오래갈지는 거짓말하는 사람의 기술이 얼마나 대단한지보다 거짓말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이 이것이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언제까지 모르는 척해줄 수 있느냐에 달렸다.배현수는 더는 모른 척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조유진도 거짓말할 필요가 없어졌다.그렇게 서로 상처만 주는 두 사람은 아무 소리 없이 쳐다만 볼 뿐이었다. 이 순간, 배현수는 조유진과 가까이 있으면서 멀게만 느껴졌다. 영원히 닿을 수 없는 하늘의 별처럼 말이다.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기만 했다.“조유진...”“네, 저 여기 있어요.”“그만 가. 더는 괴롭히지 않을게.”조유진은 눈물을 떨구더니 웃으면서 바라보았다.“정말요?”“응. 난... 너를 죽게 만들고 싶지 않아.”조유진이 살고 싶어 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그녀가 살아있어야만 배현수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고 다른 건 다 필요 없었다.이번에는 억지로 손에 모래를 쥐지 않으려고 했다. 꽉 쥘수록 손에서 다 빠져나가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이 모래였다.배현수는 두 사람 사이에 남은 마지막 감정마저 짓밟고 싶지 않았다.고집이 그에게는 포기하는 것이 어렵기만 했다.7년 동안 조유진은 18살부터 25살 되기까지 자신의 운명을 모두 배현수에게 맡겼지만 7년 전에 이미 목숨을 잃은 것처럼 더는 해맑지 않았다.하지만
배현수가 말했다.“선유를 데려가고 싶으면 데려가. 서정호한테 양육비 제때 보내주라고 할게. 가끔 시간날 때마다 성남에 선유 보러 갈게.”“계속 대제주시에서 살고, 대제주시에서 학교 다니다가 갑자기 성남으로 데려가면 적응못 할 거예요. 그리고 친구 퉁퉁이도 여기 있잖아요. 제가 가끔 대제주시에 보러 오면 돼요.”“그래. 6년 동안 혼자 키우느라 고생도 많았는데 이제부터 내가 키울게.”배현수는 잠긴 목을 축이더니 말했다.“유진아, 꼭 행복해야 해.”더 이상 그녀에게 강박적으로 무언가 시키지 않으려고 했다.만약 자신을 만나서 안 좋은 기억, 트라우마를 상기시키게 된다면 다시는 그녀의 앞에 나타나지 않으려고도 했다.조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현수 씨도 행복해야 해요. 괜찮은 사람 있으면 만나보기도 해요.”한 사람만 만나야 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배현수가 다른 사람을 만나서 행복하기를 바랐다.자신이 주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줄 수 있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배현수는 그녀의 모든 부탁에 대답했지만 유독 이 마지막 부탁은 대답하지 않았다.‘괜찮은 사람? 나한테는 조유진 이외로 괜찮은 사람이 없는데?’배현수의 세계에는 조유진과 기타 등등밖에 없었다.조유진을 얻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조유진이 누구인가? 바로 배현수가 어렸을 때부터 마음을 빼앗긴 사람이었다. 가만히 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배현수의 시선을 온몸에 받았던 사람이었다.그를 과거에 얽매이게 한 장본인이기도 했다.몇 번을 다시 만나도 본능적으로 그녀한테 마음이 흔들릴 것이 뻔했다.배현수는 더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마음의 공간이 없다는 것을 그녀에게 말해주지 않았다.모든 순수함과 좋아하는 마음을 모두 조유진에게 줘버렸기 때문에 다시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얼마 동안이나 부둥켜안았는지 몰랐지만, 배현수가 갑자기 무슨 결심이라도 한 듯 서서히 그녀를 밀어냈다.손으로 그녀의 얼굴에
얼마 지나지 않아 조유진은 마당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경적소리를 듣게 되었다.바로 배현수가 떠나는 소리였다.심지어 조유진이 망설일 기회도 주지 않고 그대로 떠나버렸다.‘잘된 일이야. 그렇게 서로를 괴롭히더니, 이제야 끝이 났군. 어차피 계속 이대로 갔다간 나도 현수 씨가 원하는 것을 주지 못했을 텐데. 타임머신이 있었으면 좋겠네. 다시 7년 전 현수 씨랑 작은 월세방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로 돌아가 그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7년이라는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었다.침대에 기대어 앉은 조유진은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이때 전화벨 소리가 침묵을 깼다.발신자는 바로 심미경이었다.조유진은 몇 초간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게 되었다.“여보세요?”“유진 씨 맞죠?”“네. 무슨 일이죠?”“저 성남에서 대제주시로 돌아왔어요. 저번에 저랑 제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살려주셨는데 내일 시간 되시면 밥 한 끼라도 대접해 드리고 싶어요.”“아니에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리고 저 내일 대제주시를 떠나요.”심미경은 의아하기만 했다.“대제주시를 떠나요? 어디로 가시게요?”“성남으로 돌아가려고요.”“그러면 배 대표님이랑은...”“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그러면 또 대제주시로 돌아오는 거예요? 저 아직 고맙다는 말도 못 했는데.”조유진이 웃으면서 말했다.“괜찮아요. 만날 기회는 많으니까요.”‘선유 보러도 와야 하는데. 나중에 만날 기회는 꼭 있을 거야. 오늘이 마지막인 것은 아니잖아.’...천우 별장.통화를 마친 심미경은 한참이나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팩을 하고 옆을 지나가던 강이진이 마침 그 둘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강이진은 요즘 매일 밤 조유진이 진실을 알고 난 후 칼을 들고 흉악한 표정을 하고서 쫓아오는 꿈을 꾸었고 매일 아침 땀범벅이 된 채로 놀라서 잠에서 깼다.그녀는 마치 눈이 돌아간 것처럼 심미경의 전화를 뺏더니 통화기록을 들춰보았다.“왜 조유진한테 전화했어? 조유진이랑 친해?”심미경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정신
강이진은 순간 감정이 격해진 듯 목까지 붉어진 채로 소리쳤다.“내가 한 게 아니야!” “그래, 제발 네가 한 게 아니길 바랄게.”말을 마친 심미경은 휴대전화를 들고 침실로 들어갔다.방금 조유진과 전화 통화만 했을 뿐인데 강이진의 반응이 이상할 정도로 너무 격했다.너무 이상한데...설마 강이진이 진짜로 조유진의 어머니를 죽인 범인인가?이 생각이 심미경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는 순간, 그녀는 저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녀는 또다시 조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이번에는 한참을 기다려도 통화 연결음만 들릴 뿐,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전화가 꺼졌다는 기계음이 들렸다. 의심이 들기 시작한 이상 끝장을 보지 않으면 멈출 수 없다. 조유진은 그녀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다. 한밤중에 찾아가는 게 어쩌면 당돌한 행동일 수 있지만 그녀는 내일 성남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며칠 전 병원에서 조유진은 배현수와 더 이상 함께 있지 않는다고 말했었다.그리고 지난번 서재에서 조유진과 배현수는 절대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강이진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일련의 흐트러진 정보들은 마치 퍼즐 조각 같았다. 심미경은 헤드셋을 끼고 녹취된 음성파일을 눌렀다.강이진과 강이찬이 서재에서 말다툼하던 날, 심미경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살인이라는 단어를 듣고 의심스러운 마음에 ‘녹음’ 버튼을 눌렀었다.하지만 소리가 너무 작아 아무리 크게 틀어도 알아듣기 어려웠다.그저 강이찬이 묻는 말이 어렴풋이 들렸다.“조유진 씨 어머니 죽음이 너와 진짜로 관련이 있는 거야?”강이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오빠, 내 말 좀 들어봐. 내가 한 짓이 아니야! 나는 그저 옆에서 본 것뿐이야...”그 뒤의 말들은 잡음이 너무 심해 심미경은 여러 번 재생해서 들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의심이 점점 더 깊어진 심미경은 침대에 누워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녀는 이 사실을 강이찬에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강이찬은 절대 강이진이 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불야항 바에서 배현수는 자리에 앉아 술 한 세트를 주문했다.열 잔을 마신 그는 목이 따끔거리는 게 느껴졌다.옆에 있던 서정호가 그런 그의 모습에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배 대표님, 팔의 상처가 아직 낫지 않았는데 이렇게 독한 술을 마시면 상처 회복에 좋지 않아요.”그 말을 들은 배현수가 차가운 얼굴로 한마디 툭 내뱉었다.“마실래?”“저... 저는 이따가 운전해야 해서 마시지 않겠습니다.”게다가 곤드레만드레 취한 상태로 한밤중에 집에 돌아가면 분명 와이프가 화낼 거예요.하지만 서정호는 그다음 말을 할 수 없었다.조유진은 내일 아침 성남으로 돌아갈 예정이고 배 대표는 이제 아내가 없기 때문이다. “안 마실 거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네...”배현수는 오늘 정말 죽도록 취하고 싶었다. 하지만 힘들 때일수록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마시면 마실수록 오히려 정신이 더 맑아지고 있었다.정신이 멀쩡한 상태에서 느끼는 이 아픔은 더 말할 것 없이 고통스러웠다.그는 술잔을 들고 단숨에 들이켰다. 술은 빠른 속도로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렸고 도수 높은 술 때문에 위가 당장이라도 불타오를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알코올로 끊임없이 모든 장기를 마비시켜야만 심장이 그나마 통증을 덜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한잔 또 한잔, 몇 잔을 마셨는지도 모른 채 그는 끊임없이 들이켰다.이때 옆에 있던 서정호가 한마디 했다.“배 대표님, 열여덟 번째 잔이에요. 이러다 위가 다 망가지겠어요. 더 마시면 진짜로...”응급실에 갈 수도 있어요.배현수는 손에 잔을 쥔 채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내가 죽으면 유진이가 안 가지 않을까?”서정호는 배현수의 물음에 순간 멈칫했다.그는 배현수가 목숨까지 걸 만큼 이런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무슨 일이 생기면 조유진 씨가 슬퍼할 거고 조유진 씨뿐만 아니라 선유도 많이 슬퍼할 거예요.”만약 예전의 배현수였다면 그는 분명 이 하찮은 목숨으로 조유진을 붙잡으려 했을 것이다. 어쩌면 강제로 조유진을 가두려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