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율은 평소에는 껄렁거려 보여도 진지해지면 그 누구보다도 진지한 사람이었다.남초윤은 술에 취해도 그의 시선이 느껴지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휘청거리면서 조유진을 찾아가려고 했다.육지율은 그런 그녀의 손목을 확 잡더니 말했다.“저랑 이혼하려고 한다면서요?”“...”‘제기랄, 취했는데 무슨 이혼 소리야.’“술 깨면 다시 얘기해요.”남초윤이 손을 뿌리치자 육지율은 벌떡 일어나 그녀의 앞을 가로막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저번 주 김성혁 씨와 인터뷰 끝나고 같이 밥 먹는 모습이 찍힌 거 할아버지가 보셨어요.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요.”‘설명?’남초윤은 인터뷰 전날에야 인터뷰 대상이 김성혁이라는 것을 알았다.밥을 먹은 것은 그저 우연한 쫑파티 자리였을 뿐이었다!남초윤은 실실 웃더니 많이 취했는지 육지율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이성과 밥 먹은 것도 설명해야 한다면 육 변호사님은 천번 만번 해야겠어요!”‘설명은 무슨. 어차피 이 결혼생활 더는 이어가고 싶지도 않은데.’남초윤은 결혼생활 2년 동안 육지율한테 잘못한 것이 없었다. 바람을 피우지도 않았고, 육지율과의 잠자리를 거절한 외에 그한테 잘못한 부분이 없었다.“남! 초! 윤!”육지율은 화났는지 한 글자 한 글자 그녀의 이름을 내뱉었다.남초윤이 피식 웃었다.“육씨 가문이 워낙 대단해서 지율 씨가 이혼을 원하지 않으면 이혼할 수 없다는 거 알아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뭐 더 말할 필요가 있겠어요? 그냥 대충 사는 거죠.”그냥 이대로 포기하기로 했다.‘이혼하든 말든.’남초윤은 육지율에게 가까이 가더니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그런데 지율 씨는 원하는 것이 뭐예요? 어차피 달지도 않은 수박일 텐데.”육지율은 피식 웃더니 그녀의 손목을 잡고 억지로 이곳을 벗어나려고 했다.“달지 않으면 달지 않은 대로 먹으면 되죠! 달든 말든 무슨 상관인데요! 저는 원래 단거 안 좋아해요!”남초윤은 할 말이 없었다.“...”장은숙이 뒤에서 애타게 불렀다.“육 변호사
“잘 봐요! 나는 그 빈털터리가 아니라고요!”남초윤은 헤벌쭉 웃기만 했다.‘빈털터리이든 말든.’“잘생기면 된 거죠... 거기 잘생기신 분, 오늘 밤 재워드릴까요?”“...”남초윤은 가까이하더니 진지하게 말했다.“저한테 카드 있어요!”남초윤은 가방 안에 있는 카드를 꺼내려고 물건을 모조리 꺼냈다.‘내 카드로 나를 재워주겠다고?’육지율은 화가 나 단호한 말투로 물었다.“아가씨, 진심이세요?”“진심이고 말고요. 저희 남편 돈 엄청 많아요. 하룻밤 재워주는 비용 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을 거예요!”“...”육지율은 이가 빠질 정도로 바득바득 갈았다.“남. 초. 윤!”그는 마치 숨을 끊어놓을 듯이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목을 꽉 잡았다.남초윤은 숨쉬기 어려운지 본능적으로 입을 벌렸다.‘나를 죽이려고 하는 건가?’남초윤은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쳤다.하지만 이때, 육지율은 고개를 숙여 자기 입술로 술 냄새가 풍기는 그녀의 입술을 막아버렸다.‘김성혁만 강제 키스를 할 줄 아는 것이 아니야! 내가 못 할 줄 알았어? 일부러 가만히 놔줬더니 정말 동의를 거쳐야 터치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그렇게 이 둘은 뒤엉켜 붙고 말았다.육지율이 제대로 힘을 쓰면 남초윤은 밑에 깔려서 울 수밖에 없었다.이때 육지율은 그녀의 입술에 피가 날 정도로 꽉 깨물더니 차갑게 말했다.“이름을 다시 잘 못 불렀다간 차에서 무슨 짓을 할지도 몰라요!”남초윤은 전혀 두렵지 않다는 표정으로 그의 넥타이를 힘껏 잡아당겼다.취기가 올라와 두려운 것이 없었다.‘누군데 이래. 그냥 술집 호스트인 주제에 겁도 없이! 죽을래?’남초윤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의 귓가에 바람을 불어넣더니 말했다.“이봐요, 내가 경고하는데. 이 바닥에서 계속 지내고 싶다면 말을 잘 듣는 것이 좋을 거예요!”그러고는 그의 잘생긴 얼굴을 두드렸다.그리고... 블랙 카드를 꺼내더니 그의 얼굴에 던졌다!술만 취했지 멍청하지는 않았다.‘누가 잔대? 무슨 성병이 있는지도 모르는데!’남초
이 작은 약병은 나무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 송지연 발에 닿았다.허리 숙여 약병에 적혀있는 이름을 보았더니 바로 파록세틴이었다.이 약은 각종 우울증 치료에 쓰였고 조급함이 동반된 우울증, 강박증, 공황장애, 대인기피증, 그리고 PTSD에 쓰이기도 했다.‘유진 씨 정말 약을 먹어야 할 정도로 심각한 PTSD를 앓고 있을지도 몰라.’이때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조유진과 조선유의 목소리마저 들려왔다.“엄마! 나 혼자 잠이 안 와! 같이 잘래!”“그러면 일단 방에 가 있어. 엄마 샤워하고 찾으러 갈게.”“알았어!”발걸음 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 들려오자, 송지연은 당황해하면서 황급히 조유진의 가방을 다시 잠그더니 약병을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그렇게 숨을 새도 없이 조유진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두 사람은 그대로 마주치고 말았다!조유진이 멈칫하더니 물었다.“왜 여기 계세요?”송지연은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방을 잘못 들어왔나 봐요. 여기가 저를 위해 준비한 방인 줄 알았어요.”“손님방은 왼쪽에 있어요.”“네. 그럼 가볼게요.”송지연의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 조유진은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송지연은 1층으로 내려가면서 배현수와 마주쳤다.그는 예리한 눈빛으로 쳐다보더니 물었다.“무엇을 찾았는데?”송지연은 약병을 건네면서 말했다.“파록세틴이야. 네가 전에 말한 반응들과 오늘 저녁 관찰한 모습을 보면 내 판단이 맞는 것 같아.”배현수는 작은 약병을 보더니 표정이 어두워졌다.“PTSD?”“맞아. 무슨 이유로 걸린 병인지는 직접 물어봐야 할 거야. 일반적으로 큰 사고를 당해서 걸리는 병이거든.”배현수는 고개 숙여 약병을 만지작거리더니 생각이 많아 보였다.“만약 정말 나한테 PTSD 반응을 보이고 있는데 강제적으로 곁에 둔다면 어떻게 되는 거야?”“고통스러울 거야. 신체접촉이 있을 때마다 약을 먹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거야. 심지어 질식할 수도 있어.”“이만 가봐. 대리 이미 도착했어.”배현수는 아
“조유진, 사실대로 말해.”배현수의 목소리는 차갑기만 했다.조유진은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정말 사실대로 말해요? 저한테는 안 좋은 기억이라 말하기 싫은데.”어떤 말은 입 밖에 내면 수습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냥 모르는 척하려고 했지만, 배현수가 계속 되물었다.조유진은 애원하는 눈빛으로 배현수를 쳐다보았다.“현수 씨,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제 6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냥 모른 척하면 될 거 아니에요. 마지막 6일을 즐겁게 보내다가 각자 갈 길 가면 안 될까요?”‘왜 사실대로 말해야 하는 거지?’하지만 배현수는 모르는 척할 수가 없었고 애매모호한 대답보다 확실한 대답을 원했다.그는 작은 약병을 보더니 비웃듯이 말했다.“전에 말한 흥분제, 흥분제도 아니지? 이 약을 먹지 않으면 나한테 가까이할 수도 없었지? 고통스러울 만큼?”“...”“조유진, 내 말이 맞아?”배현수는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조유진은 감정이 북받쳐 올라 침을 꿀꺽 삼켰다.“이미 알고 있으면서 왜 물어요?”그가 따지지만 않는다면 아름다운 관계로 남을지도 몰랐다.“왜 이렇게 된 건지 알고 싶어서 그래.”조유진은 고개를 숙여 슬픈 감정을 숨기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배현수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것 같았다.“어머님 죽음과 관련 있어?”배현수는 망설임 끝에 이 질문을 했다.조유진은 떨리는 목소리를 참으면서 말했다.“아직 팔의 상처도 낫지 않았는데 이 말 이제 그만하면 안 될까요? 나중에 나으면...”“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6일이라도 내 옆에 있는 것이 고통스러운 거라면. 유진아, 내가 정말 너한테 마음을 독하게 먹은 줄 알아?”그는 자신한테 과민반응을 보인다는 것을 알면서도 억지로 곁에 잡아둬서 약을 먹게 할 정도로 독한 사람은 아니었다.조유진은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심지어 고개 들어 배현수를 볼 수조차 없었다.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배현수가 듣기 싫어하는 말이라 할 수도 없었다.그래서 말해도 별
‘피 공포증도 어머님 죽음을 목격해서 그런 거겠지. 정말 어머님 때문이라면 이대로 넘어갈 수 없어. 어머님 죽음이 확실히 엄마랑 연관 있을 수 있어. 그때 나도 무의식적으로 엄마 편을 들었던 거야.’조유진은 그의 품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만약... 아빠가 없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현수 씨도 감옥에서 3년 동안 고생할 일도 없고 엄마도 죽지 않았을 텐테...’조유진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서서히 고개를 들더니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눈물만 흘렸다.‘현수 씨 너무 좋아.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렇게 좋은 사람 다시 만나기 어려울 거야. 현수 씨는 나한테 100점 만점의 사람이었어. 나의 모든 순수함과 열정을 다 바쳤던 사람...’조유진은 자신이 행운아라고 느껴지면서도 가슴이 저릿저릿할 정도로 아프기만 했다.이때 붉어진 두 눈으로 웃으면서 말했다.“남은 6일 동안이라도 즐거운 기억만 남기려고 했어요. 그러면 나중에 다시 되돌려 보았을 때 저를 만난 거 아름다웠던 기억 하나 없을 정도로 불행했다고만 기억하지 않을 거 아니에요.”하지만 지금은...조유진도 왜 두 사람 사이가 자꾸 엇갈리는지 몰랐다.너무도 사랑해서, 아니면 어울리지 않아서일 수도 있었다.사랑을 하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아무것도 용납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예전에는 배현수가 그녀의 배신을 용납할 수 없었고 지금은 조유진이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배현수도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한숨을 들이마시면서 물었다.“저번에 무의도에 갔을 때 절벽에서 죽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 조유진, 난 진실을 알고 싶어. 이렇게 된 마당에 계속 나를 숨길 필요도 없잖아.”조유진은 부인하지 않았다.“조금은 그런 마음이 있었어요. 하지만 살고 싶은 마음이 더 컸어요. 현수 씨랑 함께한 그동안 솔직히 말하면 정말 행복했어요. 약을 먹어야 했어도 행복했어요. 사랑했기 때문에 싫어할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저는 현수 씨를 미워한 적도 없었어요.”조유진이 자신을 미워한 적이 없
안방은 불이 안 켜져서 어두웠지만 창밖에서 비쳐 들어오는 달빛을 통해 배현수의 어두운 눈빛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표정은 평온해도 속은 들끓고 있었다.나쁜 결말이라는 말은 비수처럼 그의 가슴에 박혀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배현수는 갑자기 웃더니 말했다.“나 갑자기 후회됐어.”‘물어보지 말걸. 그러면 우리 사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몰랐을 텐데.’“조유진, 나한테 거짓말이라도 해야 했어. 지금은 거짓말이라도 했으면 좋겠어.”“이미 뱉은 말은 거둘 수가 없어요. 현수 씨는 저한테 물어보지 말았어야 했어요.”가끔 어떤 내뱉는 말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만 줄 뿐이었다.거짓말이 얼마나 오래갈지는 거짓말하는 사람의 기술이 얼마나 대단한지보다 거짓말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이 이것이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언제까지 모르는 척해줄 수 있느냐에 달렸다.배현수는 더는 모른 척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조유진도 거짓말할 필요가 없어졌다.그렇게 서로 상처만 주는 두 사람은 아무 소리 없이 쳐다만 볼 뿐이었다. 이 순간, 배현수는 조유진과 가까이 있으면서 멀게만 느껴졌다. 영원히 닿을 수 없는 하늘의 별처럼 말이다.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기만 했다.“조유진...”“네, 저 여기 있어요.”“그만 가. 더는 괴롭히지 않을게.”조유진은 눈물을 떨구더니 웃으면서 바라보았다.“정말요?”“응. 난... 너를 죽게 만들고 싶지 않아.”조유진이 살고 싶어 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그녀가 살아있어야만 배현수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고 다른 건 다 필요 없었다.이번에는 억지로 손에 모래를 쥐지 않으려고 했다. 꽉 쥘수록 손에서 다 빠져나가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이 모래였다.배현수는 두 사람 사이에 남은 마지막 감정마저 짓밟고 싶지 않았다.고집이 그에게는 포기하는 것이 어렵기만 했다.7년 동안 조유진은 18살부터 25살 되기까지 자신의 운명을 모두 배현수에게 맡겼지만 7년 전에 이미 목숨을 잃은 것처럼 더는 해맑지 않았다.하지만
배현수가 말했다.“선유를 데려가고 싶으면 데려가. 서정호한테 양육비 제때 보내주라고 할게. 가끔 시간날 때마다 성남에 선유 보러 갈게.”“계속 대제주시에서 살고, 대제주시에서 학교 다니다가 갑자기 성남으로 데려가면 적응못 할 거예요. 그리고 친구 퉁퉁이도 여기 있잖아요. 제가 가끔 대제주시에 보러 오면 돼요.”“그래. 6년 동안 혼자 키우느라 고생도 많았는데 이제부터 내가 키울게.”배현수는 잠긴 목을 축이더니 말했다.“유진아, 꼭 행복해야 해.”더 이상 그녀에게 강박적으로 무언가 시키지 않으려고 했다.만약 자신을 만나서 안 좋은 기억, 트라우마를 상기시키게 된다면 다시는 그녀의 앞에 나타나지 않으려고도 했다.조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현수 씨도 행복해야 해요. 괜찮은 사람 있으면 만나보기도 해요.”한 사람만 만나야 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배현수가 다른 사람을 만나서 행복하기를 바랐다.자신이 주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줄 수 있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배현수는 그녀의 모든 부탁에 대답했지만 유독 이 마지막 부탁은 대답하지 않았다.‘괜찮은 사람? 나한테는 조유진 이외로 괜찮은 사람이 없는데?’배현수의 세계에는 조유진과 기타 등등밖에 없었다.조유진을 얻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조유진이 누구인가? 바로 배현수가 어렸을 때부터 마음을 빼앗긴 사람이었다. 가만히 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배현수의 시선을 온몸에 받았던 사람이었다.그를 과거에 얽매이게 한 장본인이기도 했다.몇 번을 다시 만나도 본능적으로 그녀한테 마음이 흔들릴 것이 뻔했다.배현수는 더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마음의 공간이 없다는 것을 그녀에게 말해주지 않았다.모든 순수함과 좋아하는 마음을 모두 조유진에게 줘버렸기 때문에 다시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얼마 동안이나 부둥켜안았는지 몰랐지만, 배현수가 갑자기 무슨 결심이라도 한 듯 서서히 그녀를 밀어냈다.손으로 그녀의 얼굴에
얼마 지나지 않아 조유진은 마당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경적소리를 듣게 되었다.바로 배현수가 떠나는 소리였다.심지어 조유진이 망설일 기회도 주지 않고 그대로 떠나버렸다.‘잘된 일이야. 그렇게 서로를 괴롭히더니, 이제야 끝이 났군. 어차피 계속 이대로 갔다간 나도 현수 씨가 원하는 것을 주지 못했을 텐데. 타임머신이 있었으면 좋겠네. 다시 7년 전 현수 씨랑 작은 월세방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로 돌아가 그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7년이라는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었다.침대에 기대어 앉은 조유진은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이때 전화벨 소리가 침묵을 깼다.발신자는 바로 심미경이었다.조유진은 몇 초간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게 되었다.“여보세요?”“유진 씨 맞죠?”“네. 무슨 일이죠?”“저 성남에서 대제주시로 돌아왔어요. 저번에 저랑 제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살려주셨는데 내일 시간 되시면 밥 한 끼라도 대접해 드리고 싶어요.”“아니에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리고 저 내일 대제주시를 떠나요.”심미경은 의아하기만 했다.“대제주시를 떠나요? 어디로 가시게요?”“성남으로 돌아가려고요.”“그러면 배 대표님이랑은...”“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그러면 또 대제주시로 돌아오는 거예요? 저 아직 고맙다는 말도 못 했는데.”조유진이 웃으면서 말했다.“괜찮아요. 만날 기회는 많으니까요.”‘선유 보러도 와야 하는데. 나중에 만날 기회는 꼭 있을 거야. 오늘이 마지막인 것은 아니잖아.’...천우 별장.통화를 마친 심미경은 한참이나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팩을 하고 옆을 지나가던 강이진이 마침 그 둘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강이진은 요즘 매일 밤 조유진이 진실을 알고 난 후 칼을 들고 흉악한 표정을 하고서 쫓아오는 꿈을 꾸었고 매일 아침 땀범벅이 된 채로 놀라서 잠에서 깼다.그녀는 마치 눈이 돌아간 것처럼 심미경의 전화를 뺏더니 통화기록을 들춰보았다.“왜 조유진한테 전화했어? 조유진이랑 친해?”심미경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