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전, 조유진의 소식이 갑자기 끊겼다. 영문을 알고 싶었지만, 그녀의 친한 친구인 남초윤은 단순히 그녀의 우울증이 재발했다고만 얘기할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아 신준우는 정확히 무슨 이유에서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그래서인지 신준우는 다시 만난 조유진이 너무 반가웠다. 그녀가 살아있었다는 것에 무한한 기쁨과 즐거움을 느꼈다.반가운 마음에 한달음에 조유진에게로 달려간 신준우는 그녀를 힘껏 끌어안고 눈물을 글썽이며 얘기했다.“살아있었구나, 정말 살아있었어!”자신을 꼭 끌어안고 있던 신준우를 조유진이 밀어내려던 참이었다.그 순간 한 남성의 차디찬 음성이 그녀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지?”그 소리를 들은 신준우는 그제야 끌어안고 있던 조유진을 놓아주고는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눈길을 돌렸다.조유진은 배현수의 곁으로 걸어가 상황을 설명했다.“신 썜이 오랜만에 저를 만난 게 너무 기쁘셨나 봐요. 소식이 아예 끊겨서 죽은 줄 알았는데 이렇게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되셨으니까요.”“기쁘다고 함부로 막 끌어안고 그래도 되나?”남자의 눈빛은 한겨울의 서리처럼 차가웠다.신준우는 매섭게 자신을 노려보는 남자가 누구인지 기억하고 있었다.신준우는 조유진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신준우는 그 장례식 장소였던 남산 추모공원에서 배현수를 마주쳤었다.장례식에서 한 번 마주치고 만 사이였지만 신준우는 이 남자의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쯤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친해지기 힘든 성격일 것이 분명했을 텐데 조유진이 대체 어떻게 이런 남자와 함께했던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둘 사이에 이미 선유라는 이름의 아이까지 있다는 것도 이해 할 수 없었다. 이 정도 성격이면 아무도 배현수와 잘 지내려고 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하지만 신준우 역시, 서글서글한 유순한 성격이었지만 그렇다고 나약한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배현수의 말이 거슬렸던 신준우가 바로 맞받아쳤다.“그저 친구 사이의 간단한 웰컴 포옹이었습니다만.”배현수가 가볍게
“그게 아니라면, 뭐 신준우 도와서 복수라고 할 건가?”조유진은 한참이나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한번 물었다.“그럼 지금은 또 어떻게 대제주시 제일 병원으로 돌아온 거죠? 이것도 현수 씨가 시킨 거예요?”그 질문에 배현수는 여전히 초연한 태도로 솔직하게 대답했다.“맞아.”그녀가 바다로 뛰어든 뒤, 신준우가 그녀를 구해줬다는 사실을 진작 알고 있었던 배현수가 대제주시 제일 병원 원장을 찾아가 지시했던 것이었다.하지만 온전히 배현수의 덕이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그래도 그 인간, 제일 병원이 키워낸 능력 있는 유망주였어. 내가 아니어도 제일 병원 쪽에서 언제든지 나 몰래 다시 데리고 왔을 거야.”“......”배현수의 초연하고도 당당한 태도에 얼이 빠져버린 조유진은 화를 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놓였다.“왜 그런 거예요? 그때 현수 씨가 저를 싫어해서 어디 한번 당해봐라 싶은 마음으로 그런 거예요? 하지만 신 선생님은…….”조유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현수의 말이 들려왔다.“유진아, 남자가 제대로 질투를 시작하면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어. 만약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그건 안 하는 게 아니라 상대를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거야.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마, 난 단 한 번도 신준우를 내 경쟁 상대로 생각해본 적 없으니까.”강이찬도 아니었고 신준우도 아니었고 엄창민도 아니었다.하지만 경쟁 상대가 없다고 해서 그의 마음이 편한 것은 또 아니었다.“......”조유진은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검은 롤스로이스가 빠른 속도로 산성 별장에 들어서자 배현수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만약 신준우가 널 살렸다는 사실을 내가 몰랐었다면 방금 널 끌어안았던 신준우 그 두 손, 내가 아작내버렸을 거야.”배현수의 말을 다르게 해석해보면 그는 조유진을 봐서라도 신준우와 싸울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배현수는 충분히 그렇게 하고도 남을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음에도.두 사람이 한창 뜨거운 사랑을 나누던 시기에
대제주시의 새벽 세 시, 그 시각 강이찬은 생각에 잠겨있었다.며칠 동안이나 밤을 새운 그는 차창을 내렸다. 대제주시의 맑은 가을 새벽 공기가 창문을 통해 흘러들어와 달아오른 그의 뺨을 식혔다.찬 바람을 맞으니 어느 정도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심미경이 꺼낸 헤어지자는 말이 홧김에 내뱉은 말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알 길이 없었다.그는 이미 수십 번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심미경의 전화는 여전히 꺼져있었다.만약 심미경에게 정말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는 평생을 죄책감 속에서 살아갈 것이 분명했다.심미경은 1년 가까이 강이찬과 함께 하며 단 한 번도 순종적이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강이찬 역시 그런 심미경과 함께하며 그녀의 존재가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던 참이었다.요리 실력이 뛰어났던 심미경은 강이찬이 입맛이 없을 때마다 그에게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을 대접했었다. 그런 심미경 덕에 강이찬은 꽤 행복한 시간을 보내왔었다.어찌 됐든 그는 일상 속에서 심미경의 빈자리를 크게 느꼈다. 침대 위에서든 어디에서든 그녀를 원하고 있었다.그가 사적인 연회 때문에 늦게 귀가할 때도 심미경은 짜증 한번 낸 적 없이 묵묵히 늦게 귀가한 그를 챙겨줬었다.강이찬은 심미경을 떠올리며 그녀가 정말 좋은 여자친구였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실제로 정말 좋은 여자친구였고 좋은 결혼 상대였다. 하지만 강이찬은 그녀에게 좋은 남자친구가 되지 못했다. 마음속에 다른 여자를 품고 있었던 것도 모자라 첫 만남 때는 일부러 대놓고 그녀를 무시하며 시비를 걸기도 했었다.운전석에서 운전하고 있던 진민우가 백미러로 강이찬을 바라보며 못 참겠다는 듯 얘기했다.“사장님, 저희 이미 대제주시를 이미 세바퀴나 돌았는데도 미경 아가씨 그림자도 안 보이는데, 계속 찾으실 거예요?”강이찬은 체념했다는 듯 비서에게 얘기했다.“경찰에 실종 신고해.”그 말을 들은 비서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듯 되물었다.“네?”실종 신고요? 진심이세요?진민우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하지만 아직 2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강이찬은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자신의 왼쪽에 누워있을 사람에게 손을 뻗었다.“미경아….”하지만 만져지는 것은 사람의 형체가 아닌 사람의 온기가 없어 차갑게 식어있는 침대 시트였다.“미경아?”“......”그제야 정신을 차린 강이찬은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켜 텅 비어버린 자신의 옆자리를 공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심미경이 자신을 떠났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까먹어버린 것이었다.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물을 마시러 방을 나섰다.그렇게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던 강이찬은 밤늦게 집으로 돌아온 강이진과 부딪쳤다. 집으로 돌아온 강이진은 어둠 속에서 자신과 부딪친 강이찬 때문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오빠! 여기서 뭐해!”강이찬이 미간을 찡그리며 차갑게 물었다.“어디서 뭘 하다 왔길래 이렇게 늦게 들어와?”강이진은 손에 들고 있던 신상 명품백을 내팽개치며 대답했다.“요즘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말이야. 친구들이랑 클럽에서 기분 전환 좀 하고 왔어. 근데 오빠는 아직도 안 자고 뭐 해?”“목말라서, 물 마시러 내려온 거야.”“이런 건 심미경 시키면 되잖아. 왜 직접 내려와? 심미경은 어쩌고? 이렇게 취했는데신경도 안 쓴다고? 내가 이 년을 진짜…. 오빠, 걱정하지 마. 내일 날 밝는 대로 내가 얘기 좀 해야겠어. 이게 정신상태가 아주 빠져가지고.”강이진마저 심미경의 존재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어제 심미경이 이미 집을 나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술기운에 까먹어버린 듯했다.그게 아니라면, 그녀 역시 강이찬처럼 심미경이 객기 좀 부리다가 다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심미경은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았다.강이진의 말을 듣고 있던 강이찬은 얼빠진 사람처럼 거실에 가만히 서 있었다.강이진은 비틀거리며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강이찬은 주방으로 걸어가 컵에 물을 따랐다. 컵에 담긴 물을 절반 정도 마시고 왜인지 모르게 화가 치
“너무 작아서요.”작은 휴대폰 화면 속의 여섯 글자에 배현수의 눈앞이 캄캄해졌다.배현수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그 순간 알림창으로 카톡 알림이 떴다. 저장명이 ‘육 개새끼’인 사람에게서 온 메시지였다.[술 마시러 안 나올래?]배현수는 의아하다는 듯 답장을 보냈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새벽 네 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창밖으로 동이 트고 있는 것이 보였는데 이런 새벽 시간에 술자리로 불러내는 것이 여간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육지율의 생활패턴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다.[너 어차피 지금 안 잘 거잖아, 아니야? 방금 열 명한테 카톡 보냈는데 답장한 게 너밖에 없어.]이 새벽에 술 마실 사람 찾겠다고 열 명한테나 메시지를 보내는 노력이 가상했다.어장관리 하는 남자들이나 하는 짓을 왜 본인 친구가 자신에게 하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답장하기 귀찮아진 배현수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 순간, 육지율에게서 또 하나의 메시지가 날아왔다.[이 시간까지 자지도 않고 뭐하는데, 술 마시러 나오라고 해도 안 나오고. 뭐, 조유진이랑 침대에서 엎치락뒤치락 놀이라도 하시나?]알림창을 확인한 배현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엎치락뒤치락은 개뿔. 이 넓은 침실에 혼자 있구만.생각해보니 또 자동으로 인상이 찌푸려졌다.[여자친구가 뽀뽀도 하고 포옹도 다 해주면서, 동침은 절대 안 하려는 이유가 뭘까?][조유진이 같이 자기 싫대?]의도치 않게 뼈를 맞아버린 배현수는 또다시 침묵을 이어갔다.[밀당 하는 거지 뭐. 이거 은근 남자 소유욕 자극하는 데는 짱이거든. 뭐, 좀 재밌기도 하고. 근데 이게 또 질질 끌면 너무 지루해져. 왜, 조유진이 얼마나 끌고 있길래 그래?][이때까지 한 번도 건드린 적 없어.][...야, 내가 솔직히 말해줄게. 조유진 이거 진짜 쓰레기네. 밀당을 해야 하는데 밀기만 하고, 나빴다. 내가 봤을 땐 전에 술집까지 너 데리러 왔던 그 여자분이랑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그냥 갈아타.
조유진은 확실히 그의 희로애락을 건드릴만한 능력이 있었다.계약 기간이 만료되어 성남시로 돌아가면 송지연이 제안한 MECT 치료를 고려해보기로 했다....그렇게 점심까지 자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배현수가 이미 1층으로 내려가 있었다.조선유는 딸깍딸깍 슬리퍼 소리를 내면서 2층으로 올라왔다.“엄마! 빨리 일어나! 점심시간이야! 장 셰프님이 오늘 맛있는 거 엄청 많이 하셨어! 매쉬드 포테이토도 해주셨어!”“알았어. 씻고 내려갈게. 배고프면 아빠랑 먼저 먹어.”조유진은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남초윤이 보내온 메시지를 확인했다.「얼른 인기 검색어부터 확인해.」「아오, 열 받아! 도대체 누가 악성 댓글을 단 거야!」조유진은 남초윤이 보내온 링크를 열었다.#하트 시그널 여자 출연자, 싱글맘이면서 싱글인 척 프로그램에 출연해#어렴풋한 사진이었지만 조유진은 한눈에 사진 속 모녀가 자신과 조선유라는 것을 알아챘다.아래에는 악성 댓글이 난무했다.「원래 로다 씨랑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에, 아이가 이렇게 컸는데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하더니. 얼굴이 두꺼운 사람인가 보네.」「내가 좋게 본 커플이 이대로 깨지다니...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시즌2에는 출연 안 하니까.」「아이가 이렇게 컸는데 연애 프로그램에 참여하다니. 정말 창피한 거 모르네.」「이 프로그램 대박이네. 글쎄 남자 출연자 세 분이 모두 조햇살 님 선택 안 한다 했어. 이렇게 큰 아이가 있는 줄 알았으면 나라도 선택 안 했겠다. 누가 아이 딸린 여자를 좋아하겠어?」「조햇살 님 인기 얻으려고 출연했나 본데요? 소문으로는 남자친구가 여럿이 있다는데 아이 친 아빠가 스폰서래요.」「대박! 저도 이 기사 아침에 확인했어요. 조햇살 님 스폰서를 만난 지 수년이라고 들었어요. 대학교 때부터 유부남 스폰서를 만났는데 그 유부남이 와이프에게 아이가 없는 틈을 타 몰래 임신해서 와이프 자리를 탐냈다고 했어요. 스폰서 배경도 엄청 복잡하던데.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아 아이를 지우라고 했는데
조유진이 권 여사한테 전화하려고 할 때 마침 권 여사한테서 전화가 왔다.“햇살 씨, 정말 아이가 있었어요? 왜 저한테 미리 말씀 안 하셨어요?”조유진이 사과했다.“제 실수였어요. 권 여사님, 혹시 그 사진 지울 수 있게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그러니까, 아이가 있다는 것이 사실이었어요?”조유진이 인정했다.“네.”“그러면 스폰서가 존재한다는 것도 사실이에요?”“...”‘현수 씨도 스폰서에 속하나? 그런데 현수 씨는 스폰서가 아니라 채권자잖아.’조유진이 설명하려고 할 때 권 여사가 말했다.“스폰서가 어떤 분이세요?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받아보세요. 지금 사진을 삭제한다고해서 언론을 잠재울 순 없어요. 지금 네티즌들 무서워요. 입을 막으려고 할수록 더 난리 날 거예요. 잠시 후 입장 표정을 대신해드릴게요. 아직 결혼은 안 하셨죠?”“안 했어요.”하지만 아이는 있었다.권 여사는 갑자기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그러면 스폰서 분은 와이프가 있으세요?”조유진은 무의식 결에 대답하게 되었다.“가정이 없으신 분입니다. 저는 다른 사람의 가정을 깨버린 사람이 아니에요. 아, 그것보다 저는 스폰서를 만난 적...”“정말 스폰서를 만났어요? 햇살 씨, 몰라 뵀네요. 스폰서가 있다는 거 진작에 말씀하시지. 이런 일 이 바닥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스폰서가 누구예요? 제가 아는 분인가요?”“???”‘연예계 사람들은 다 이런 마인드인가? 하늘이 무너져도 자기 연예인 가십에 흥미를 느끼다니.’조유진은 권 여사의 정신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이런 마당에 스폰서가 누군지나 물어보고!’...조유진은 복잡한 심경으로 전화를 끊어버리고 씻고 난 후 1층으로 내려갔다.배현수와 조선유가 식탁에 마주 앉아 있었다.조선유는 조유진을 보자마자 손으로 옆에 있는 의자를 두드리더니 말했다.“엄마, 얼른 와서 밥 먹어!”조유진은 녀석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이때 조선유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물었다.“엄마, 어제저녁 또 몽유했어? 왜 아빠 방
강이진은 침대에 엎드려 어떻게 하면 조유진을 배현수 곁에서 떼어낼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핸드폰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때 마당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핸드폰을 거두고 1층으로 내려가 봤더니 강이찬이 돌아온 것이었다.“오빠, 왜 이렇게 이른 시간에 집에 들어왔어?”‘오늘은 출근일 아닌가? 왜 회사에 출근하지 않고.’강이찬은 그녀를 차가운 눈빛으로 쳐다보더니 말했다.“지금 원주에 가려고.”“원주?”강이진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미간을 찌푸리면서 물었다.“그 자그마한 곳은 심미경 고향 아니야? 오빠, 정말 속아 넘어간 거 아니야? 직접 가서 데려오려고? 내가 말했잖아. 이거 그냥 그년 수작이라고. 밀당하는 거라고...”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강이찬이 냉정하게 말을 끊었다.“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짐 정리하고 이곳을 떠나.”“왜? 원주에 가서 그년을 데려오는데 내가 왜 떠나야 해? 어디에 가 있으라고? 나 오빠 동생이야. 설마 길바닥에 나앉으라고?”분명 전에 심미경한테 강이찬이 데리러 가면 이름 석 자를 거꾸로 쓰겠다고 호언장담한 적이 있었지만 강이찬은 이번에 결심한 듯 단호하기만 했다.“너 24살이나 되었어. 어린 애가 아니야. 이진아, 독립할 줄도 알아야지. 이번에 밖에서 고생 좀 해보는 것도 좋을 거야. 고생 한번 못 해봐서 이렇게 제멋대로야.”“내가 왜 고생을 해야 하는데? 오빠는 이 커다란 집에서 살면서 나는 왜 밖에 나가서 고생해야 하는데? 그래. 엄마 아빠가 안 계시니까 이제 나를 괴롭히려고? 엄마 아빠가 알면 가만히 안 놓아둘 거야!”“너를 위해 그러는 거야. 나중에 다 알게 될 거야. 엄마 아빠가 일찍 돌아가셔서 내가 너 엄하게 키우는 거야. 지금도 이런데 내가 널 교육하지 않으면 나중에 엄마 아빠 볼 면목도 없어.”강이찬은 말을 끝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2층 안방으로 가 짐을 정리했다.강이진은 제자리에서 화가나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강이찬! 나중에 분명 후회할 거야! 심미경이 일부러 덫을 놓은 거라고!”강이찬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