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찬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심미경을 쳐다보면서 말했다.“고작 사진 한 장 때문에 결혼을 안 해요? 그렇게까지 해야 돼요? 미경 씨 전에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잖아요. 오늘 저녁에는 왜 이진이처럼 막무가내에요?”심미경은 이 상황이 웃기기만 했다.“보름만 있으면 결혼할 건데, 사진 한 장 태워버리라고 해서 제가 막무가내로 보여요?”“그럴 필요 없어요.”강이찬은 이 한마디를 내뱉고 뒤돌아 성큼성큼 거실을 떠났고 문을 열자마자 강이진과 부딪히고 말았다.아까 싸우는 소리가 너무 커서 지나가다가 다 들었던 것이다.강이진은 거실에 서 있는 심미경을 비웃더니 말했다.“무슨 자격으로 우리 오빠더러 사진을 태우라 말아야! 너의 꼬락서니를 봐. 우리 오빠랑 어울리기나 한다고 생각해?”화가 들끓고 있던 강이찬에게 기름을 더 부은 식이 되었다.그는 결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그 입 닥쳐! 네가 말할 자리가 아니야!”강이진은 흠칫 놀라고 말았다.‘오빠 나한테 이 정도로 화를 낸 적이 없는데...’강이진은 서운하기는 했지만 두려워 아무 말도 못했다.최근에 강이찬에 의해 카드사용중지가 되었기 때문이다.강이찬은 그렇게 별장을 떠나버리고 말았다.그가 멀리 떠나자 강이진은 결국 폭발하더니 거들먹거리기 시작했다.팔짱을 낀 채 아랫사람을 보듯 심미경을 깔보면서 말했다.“심미경, 꿈 깨. 눈치가 있으면 빨리 우리 오빠 곁에서 꺼져. 오빠는 널 좋아하지 않아. 우리 오빠한테서 무엇이라도 건져낼 생각 죽어도 하지 마! 우리 오빠는 회사도, 재산도 나중에 다 나한테 물려줄 거기 때문에 꿈 깨라고!”심미경은 비웃듯이 말했다.“내가 너희 오빠한테 시집 안 가도 언젠간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겠지. 그러면 이제 자기 아이가 생기면 아이한테 모든 재산을 물려주겠지. 누구한테 꿈 깨라고 하는 거야!”아이 언급에 강이진은 동공이 흔들리더니 그녀의 배 속에 있는 아이를 가리키면서 말했다.“임신했어? 조유진처럼 아이 덕에 팔자 좀 고쳐보려고?”“너랑 무슨 상
심미경은 사탕 하나를 물고 캐리어를 꺼냈다.강이찬과 헤어지면 그의 집에서 계속 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이 안방은 심미경의 스타일대로 다시 인테리어한 것이었고 전자제품부터 커튼까지 모두 그녀의 손이 안 닿은 곳이 없었지만 그녀는 미움을 받으면서 계속 여기에 남아있을 정도로 얼굴이 두꺼운 사람은 아니었다....짐 정리를 마친 심미경은 캐리어를 끌고 안방을 나섰다.1층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강이진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실실 웃기 시작했다.“가출이 우리 오빠한테 먹힐 것 같아?”심미경은 그녀와 말도 섞기 싫었다. 강이찬과 헤어지기로 했으니 그녀한테 잘 보일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해.”강이진은 피식 웃고 말았다.“한두 가지 중요한 물건을 두고 가는 것이 좋을 거야. 예를 들어 신분증 같은 거. 그 핑계로 다시 돌아올 수 있잖아. 우리 오빠가 찾지도 않는데 자기 발로 돌아오는 건 너무 쪽팔리잖아.”심미경이 받아쳤다.“난 너처럼 얼굴이 두껍지 않아. 오빠 등이나 처먹는 주제에. 난 이찬 씨가 곁에 없어도 살 수 있는데. 너는? 기생충 따위가 밖에 나가서 살 수나 하겠어?”“누구더러 기생충이래!”“지금 질문하고 있는 사람.”강이진은 화난 나머지 얼굴에 붙이고 있던 팩을 떼어버리고 씩씩거리면서 심미경을 향해 걸어갔다.“너도 우리 오빠 회사에서 출근하잖아? 기생충이 아니면 사직서 내든가!”“한 달 전에 이미 사직서 냈거든? 걱정 마, 네가 나 보기 싫은 것처럼 나도 너 꼴 보기 싫어.”“야!”심미경은 그렇게 캐리어를 끌고 천우 별장을 떠났다.강이진은 화가 나 입구를 향해 베개를 집어 던졌지만 그때는 심미경이 이미 집을 나선 후였다.그녀는 또 심미경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하,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봐! 밀당까지 해? 우리 오빠가 다시 너 찾으러 가면 손에 장을 지질 거야!”...인천 무의도.태풍 바람이 창문을 마구 두드렸다.섬에서 사는 주민이 많지 않아 밤이 되면 고요했고, 태풍 바람이 유
밖의 파도 소리는 더욱더 거세졌고 조유진은 더욱 불안해졌다.조유진은 저도 모르게 배현수의 목을 그러안고 낮게 대답했다.“...네.”배현수는 그렇게 조유진을 안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우유가 넘어지면 뭐라고 하게?”“네?”“아야...”“풉...”조유진이 웃자 배현수가 고개를 숙이고 물었다.“재밌지?”조유진은 작게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아재 개그 좋아해요? 재미없어요.”“재미없어도 웃었잖아.” 배현수는 놀리듯이 얘기했다.“...”7년만에 보여준 웃음이 아재 개그 때문이라니.이럴 줄 알았으면 아재 개그 모음집을 샀을 것이다.“유진아.”배현수는 갑자기 정색하고 그녀를 불렀다. “네?”“내일 나랑 같이 대제주로 돌아가자. 선유가 오늘 밤 전화 왔어. 언제 돌아오냐고.”조선유가 저녁에 배현수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조유진이 살짝 놀랐다.하지만 일주일이나 지났으니 조선유가 그립기도 했다. 아이를 떠올린 조유진이 물었다.“내가 인천으로 온 후 선유랑 싸웠었어요?”전에 조선유는 자꾸만 배현수와 말다툼을 했었다.다른 집의 아빠와 딸은 전생의 연인 같기도 한데 배현수와 조선유는 전생의 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자주 다퉜다.배현수도 조선유에게 지지 않고 계속 조선유를 훈계하려고 들었다.배현수는 시선을 내리깔고 솔직하게 대답했다.“응.”조선유의 얼굴을 보면 가출해서 연애 프로그램에 나간 그녀의 친엄마가 떠오르는데, 짜증이 안 날 수가 없다. 게다가 조그마한 녀석이 얼마나 말이 많은지. 짜증을 돋우는 학과라도 전공한 걸까. 조유진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얘기했다. “왜 애랑 싸우고 그래요.”배현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선유가 먼저 나한테 시비 거는 거잖아.”“...”자기 딸이랑 시비를 가리는 아빠라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렇게 안고 파도 소리를 들으며 한참 시간을 보냈다.배현수는 조유진의 목덜미를 가볍게 주무르며 얘기했다.“아직 대답해 주지 않았잖아.”“뭘요?”“내
조유진은 배현수와 다시 시작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자 배현수의 표정이 바로 어두워졌다.조유진이 급히 해명했다.“게다가 현수 씨의 신분으로 연애 프로그램에 나오는 건 좋지 않잖아요. 이미지에도 안 좋을 건데...”배현수는 차갑게 코웃음치더니 얘기했다.“날 위하는 척 하지마.”“...”“날 위해서 하는 말이야, 아니면 나랑 엮이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나 때문에 네 그 청순한 솔로 이미지에 영향이 가서 돈을 못 벌까 봐 그래?”화가 난 사람이 하는 말은 뇌를 거치지 않는 법이다.배현수도 마찬가지였다. 조유진의 일에는 자꾸만 평정심을 잃었다.배현수의 말에 조유진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그녀는 멍하니 배현수를 쳐다보며 끌어안고 있던 배현수의 목에서 손을 뗐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몸을 돌려 그를 등지고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얼마나 지났을까. 조유진이 갑자기 숨을 들이켜더니 입을 열었다.“그럼 우리가 무슨 사이였으면 좋겠는데요? 자세히 얘기하면 전 연인도 아니라 원수 아니에요?”듣기 거북한 말일 수도 있지만 그게 진실이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너무 단단한 벽이 있다. 다시 가까워지려고 해도 그건 어려운 일이었다. 조유진이 그 얘기를 하지 않은 이유는 마지막까지 예민하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미운 정도 정이라고. 그녀는 모든 힘을 다해서 배현수를 사랑할 수도 없고 독하게 마음먹고 예지은을 미워할 수도 없었다.지금 조유진과 배현수는 같은 침대에 누워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같이 안고 있었다. 우습지 않은가. 배현수는 자리에 누운 채 손등으로 이마를 짚었다. 기분은 이미 바닥이었다.결국 그는 자존심만 세우며 말을 던졌다.“아직 13일이 남았어. 13일만 지나면 넌 자유야. 그전까지는 나랑 있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참고 붙어있어.”조유진은 이불을 끌어당기며 눈을 감았다. 그녀의 눈가는 살짝 젖어있었다.조유진에게 있어 배현수는 그저 조선유의 아빠일 뿐이다.이혼이
조유진은 소리를 지르는 배현수를 보고 살짝 놀라서 대답했다.“그런 생각한 적 없어요...”배현수는 믿지 않는 듯했다. 어쩌면 조유진은 배현수가 그녀와 함께 뛰어내린다고 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조유진에게 배현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그럼 조선유는?배현수는 조유진의 어깨를 붙잡고 붉게 충혈된 눈으로 얘기했다.“조유진, 다시 이런 생각하기만 해봐. 네가 죽으면 선유에게 독한 새엄마를 찾아줄 테니까.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이거든.”조유진은 배현수를 신경 쓰지 않지만 조선유의 일에는 신경 쓸 것이다.배현수가 조선유에게 좋은 아빠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죽으려고 한 것이겠지.하지만 그 예상이 빗나간다면? 배현수는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듯, 차가운 표정으로 협박했다.배현수는 뱉은 말을 지키는 사람이다.조유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얘기했다.“선유는 현수 씨의 친딸이에요. 결혼을 한다고 해도 적어도 인성은 좋은 사람이랑 결혼해요. 선유한테 잘해주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적어도 학대하지는 말아야죠... 현수 씨... 어떻게...”배현수는 조유진을 바라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감히 죽기만 해봐. 선유한테 독한 새엄마를 찾아줄 테니까.”“당신은 그러지 않을 거예요.”두 사람이 알고 지낸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배현수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기에 절대로 조선유를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배현수는 조유진의 말에 반박하며 똑똑히 얘기했다.“아니! 난 그렇게 할 거야. 그러니 다시는 자살 따위 생각도 하지 마. 네가 죽으면... 나는 선유를 당장 갖다 버릴 거니까.”“애는 죄가 없어요.”게다가 조유진은 투신하려던 게 아니다.그저 자기가 두려워하던 것을 이겨낼 수 있는지, 마주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7년 동안 그녀는 그저 도망만 다녔다. 하지만 도망칠수록 공포와 트라우마는 끈질기게 그녀를 쫓아다녔다.화가 난 배현수는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마지막에 숨을 크게 들이쉰 그의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이 감정
배현수의 시선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는 앞만 쳐다볼 뿐, 조유진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하지만 어투는 조금 누그러진 것 같았다.조유진을 안고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로다가 마침 그녀를 찾아왔다.제작진들은 두 사람의 관계를 잘 몰랐다. 조유진은 이 일을 조용히 처리하고 싶었다. 그래서 배현수의 품에서 반항하며 작게 얘기했다.“일단 내려놔 줘요.”미간을 찌푸린 배현수는 조유진을 내려놓지 않고 오히려 더 세게 안았다. 배현수는 조유진을 안은 채, 담담하게 로다 옆으로 지나갔다.로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아주 당당하게 지나갔다.“...”‘내가 안 보이나?’게다가 시찰단이 여자 게스트를 이렇게 안고 가는 건 좀...오히려 이 두 사람이 커플 같았다.두 사람은 어느새 방에 들어왔다. 배현수는 발목을 다친 조유진을 소파에 앉혔다.그리고 조유진의 발목을 잡고 자기 다리 위에 놓고 관찰했다.조유진의 피부는 아주 하얗고 부드러워서 마치 비단 같았다.발목을 잡은 배현수의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갔다. 손바닥이 그녀의 발에 닿을 때, 조유진은 부끄러워서 귀가 빨개졌다.이 동작, 이 각도. 분위기가 살짝 오묘해졌다.게다가 조유진은 원피스를 입고 있어서...이곳에는 바를만한 약이 없었다. 배현수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발목을 마사지 해줄 수밖에 없었다. 조유진은 아파서 다리를 굽혔다.배현수는 시선을 들어 조유진을 보다가 그녀가 흰 원피스를 입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대로 굳어버렸다.조유진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아파요! 그만 해요!”배현수는 그저 차갑게 웃고 얘기했다.“아픈 줄은 아네. 여기 가만히 앉아있어. 짐 정리는 내가 할 테니까.”그리고 배현수는 짐 정리를 하려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또 걸음음 멈추고 물었다. “앞으로 흰 원피스는 금지야.”조유진은 의문스러워하며 물었다.“왜요? 안 예뻐요?”“응. 징조가 안 좋아.”“...”현대 사회에 배현수 같은 사람이 미신을 믿다니. 흰 원피스가 안 좋은 징조라면, 그
대제주의 밤. 강이찬은 술을 많이 마셨다. 그가 천우 별장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새벽이었다.강이진은 거실에 앉아 마스크 팩을 붙인 채 게임을 하고 있었다.“오빠, 왔어?”그녀는 게임기를 내려놓고 강이찬에게 걸어갔다. 가까이 가자 강이찬의 몸에서 술과 담배의 냄새가 진동했다.“술 마셨어?!”강이찬은 목의 넥타이를 풀며 강이진에게 물었다.“심미경 씨는?”“오전에 갔어.”강이찬은 강이진을 사납게 쏘아보며 물었다.“또 괴롭혔어?!”강이진은 억울하다는 듯 얘기했다.“난 괴롭힌 적 없어! 본인이 알아서 가겠다고 한 거야! 관심하지 마! 캐리어까지 끌고 나간 걸 보면 그냥 보여주기식으로 화내는 거야. 내가 이런 걸 한두 번 보는 줄 알아? 며칠 가만히 두면 알아서 돌아올 거야.”“가기 전에 뭐라고 한 적 없어?”뭐라고 했긴. 강이진에게 기생충이라고 했었다.‘자기는 뭐가 대단하다고. 그렇게 대단하면 영원히 돌아오지 마라!’강이진은 고개를 저으며 얘기했다.“아니. 오빠, 많이 마셨네. 얼른 올라가서 쉬어. 심미경은 상관하지 마. 알아서 돌아올 거야.”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았다. 그냥 돌아오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강이진은 그런 여자들을 많이 봐왔다.강이진이 강이찬을 부축하여 계단을 오르려고 하는데 강이찬이 갑자기 강이진을 뿌리쳤다.“오빠, 왜 이래... 설마 그 여자 때문에 이러는 거야?”강이찬은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꺼내 심미경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들려오는 건 차가운 기계 음성이었다.“지금 거신 전화기가 꺼져있어...”강이찬의 눈에 놀란 기색이 비쳤다.심미경은 한 번도 그의 전화를 받지 않은 적이 없었다.언제 어디서 뭘 하든지, 그녀는 강이찬의 전화를 꼬박꼬박 받았다.하지만 지금은 핸드폰을 아예 꺼버렸다.미심쩍게 생각한 강이찬이 강이진을 보며 다시 물었다.“정말 안 괴롭혔어?”“내가 왜 괴롭히겠어. 그저 오빠한테 안 어울리는 여자라고 했을 뿐이야. 이건 사실이잖아. 이 정도도 못 견딘다면 그건 너무 마
강이진은 화가 나서 벌떡 일어서서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얘기했다.“왜서! 난 오빠 친동생이야! 심미경이 돌아오든지, 말든지 나랑 무슨 상관이야! 강이찬, 너 미쳤어?”“네가 평소에 미경 씨를 어떻게 대하는지 내가 정말 몰랐을 것 같아? 너라서 봐준 거고 귀찮아서 별로 상관하지 않았더니 넌 이미 선을 넘었어. 강이진, 네 꼴을 봐. 그래도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으면 가서 계속 반성해.”강이찬은 계속 참아왔다. 평소에 강이진을 혼내는 일도 드물고 화를 내는 일도 드물었다. 그는 가면을 쓰고 거짓말을 하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이었다.하지만 오늘은 술을 마셔서인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게다가 강이진이 계속 도발하듯이 얘기하니 더욱 화가 났다.강이찬은 계속 멀쩡한 척할 수가 없었다. 육지율의 말이 맞았다. 평소에 성질을 죽이고 착한 모습을 보여주느라 착한 사람이 된 줄 알았지만 사실 강이찬의 성격도 좋은 편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배현수와 달랐다. 육지율과도 달랐다.배현수는 항상 고고한 사람이다. 좋고 싫은 감정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나 물건은 정말 끔찍이 아끼고 온갖 좋은 물건을 갖다바칠 정도였다. 싫어하는 것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짜증도 감추지 않는다.배현수는 조유진을 사랑한다. 그리고 동시에 조유진을 미워한다. 반대되는 두 감정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하지만 조유진은 배현수의 방식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눈에 띄는 편애와 강압적인 사랑을 말이다.이게 바로 배현수였다. 그는 뼛속까지 강압적이고, 이기적이며 고고한 사람이다. 사람들의 화젯거리로 되는 것에 이미 익숙해졌고 눈도 높은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대학교 시절에 그의 눈에 들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그래서 배현수는 곁에 친구가 적었다. 그래도 그는 의미 없는 사교 관계에 집착하지 않았다. 나머지는 다 덜떨어진 사람들이니까.육지율은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였다. 집안도 좋고 일 처리 방식도 고귀한 도련님들처럼 대범했다. 그는 한 번도 성본과 후과를 고려하지 않았다. 어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