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세 사람은 모두 멍해졌다.강이진은 깜짝 놀라 대뜸 큰소리로 외쳤다. “당신!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내가 우리 오빠와 얘기하는거 엿듣기라도 하고 있었던 거예요?”그러자 심미경은 다급히 입을 열었다.“아니요. 저녁에 뭐 먹고 싶은지 여쭤보려고 왔어요.”하지만 강이진은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고 그녀가 심미경에게 한마디 더 하려할 때 강이찬이 그녀를 막았다.“아무거나. 해주는 거로 먹을게. 가자, 내가 같이 요리하는 거 도게.”강이찬은 심미경과 함께 부엌으로 가 같이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심미경은 채소를 썰고 강이찬은 옆에서 채소를 씻었다.이때 갑자기 강이찬이 물었다.“방금 문 앞에서 무슨 말 들었어?”“아니...”도마에서 채소를 썰고 있던 그녀는 순간 멈칫했다.그러자 강이찬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이진이가 성격이 불같아서 말을 이쁘게 하지 못해. 이해해줘. 몸만 성인이지 아직 어린애나 다름없어. 나중에 우리가 블루레일 아파트로 이사를 하면 그때는 부딪치는 일 별로 없을 거야. 조금만 참아.”그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강이찬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찬 씨, 방금 그 말은... 우리 결혼, 다시 원래대로 하자는 얘기예요?”“응.”강이찬의 ‘응’이라는 한 마디에 심미경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녀는 조유진이 돌아왔기에 강이찬이 자기와 헤어질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성남, 엄 씨 사택.엄창민은 대제주시에서 성남으로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엄준을 만나러 왔다.그곳에는 엄명월도 있었다.엄명월은 엄창민을 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여자 하나 때문에 협력사와 싸우고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오빠가 일하는 게 침착하다고 나보고 따라 배우라 하시네... 하... 그런데 훌륭한 후계자는 절대 이런 억지스러운 남녀의 감정 때문에 집단의 이익을 해치지 않아. 하지만 오빠는 어떻게 여자 때문에 협력사 대표에게 주먹을 휘두를 수 있어? 정말 그동안 내가 알던 오빠 맞아?그래도 오빠 덕분에 대제주시 일이 나에게 넘어왔지만.
엄창민은 그 봉투를 집어 들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아버지, 근래 엄환희를 사칭한 사람이 계속 나오고 있어요. 혹시... 이번에도 검사결과가 불일치라고 나와도...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엄준은 나이가 꽤 든 어르신이고 그의 아내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엄창민의 한 마디에 엄준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너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나에게 환희를 꼭 찾아달라고 했어. 어머니가 폐 때문에 항상 몸이 좋지 않아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죽을 때까지도 환희를 본 적이 없어. 이것 때문에 나는 늘 죄책감을 느껴. 어찌 되었든 계속 찾아야 희망이라도 있지 않겠니?”환희가 태어났을 때 등 뒤에는 옅은 청색 태반이 있었다.이것은 유전이다. 엄준의 등에도 있기 때문이다.엄창민은 한참 고민하다가 머뭇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이 사람이 정말 아버지의 친딸이라면... 유진이는 더 이상... ‘엄환희'로 살 수 없겠네요?”그 말에 엄준은 소리 내 웃었다. “이놈아, 너 정말 조유진 그 계집애에게 정신이 완전히 팔렸구나!”진심이 들통난 엄창민은 다소 불편한 듯 얼굴을 숙였다.그러자 엄준이 대답했다.“엄환희라는 이름은 이미 유진 씨에게 줬어. 그걸 다시 빼앗아서 뭐해? 그저 하나의 이름일 뿐이야. 조유진 씨가 그 이름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굳이 뺏을 필요 있을까? 만약 진짜 환희가 다시 돌아오면 그녀에게도 쓰고 있는 이름이 있을 거야. 전혀 문제 될 게 없어.”엄창민은 그제야 한시름 놓은 듯 엄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공항으로 향하는 엄명월은 차 뒷좌석에 앉아 자료를 보고 있었다.운전석에 앉은 사람은 그녀의 조수 겸 경호원인 김씨이다.김씨가 그녀에게 충고 한마디 했다.“대제주시는 배현수가 대부분 장악하고 있는 지역이니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그러자 엄명월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가볍게 웃었다. “내가 이번에 가는 목적은 단지 대제주시에서 우리 성행 그룹의 사업을 키우기 위한 게 아니야. 배현수의 약점이 조유진이라면서? 약점이 있는 사
“허허, 안 죽이면? 네가 성남으로 못 오게 하면 조유진이 성남으로 안 와?”조유진이 김 씨처럼 엄명월의 말을 그대로 따라야 하는 것도 아닌데 어찌 쉽게 마음대로 컨트롤 할 수 있겠는가.엄명월은 눈을 반짝이더니 입을 열었다.“조유진더러 배현수에게 시집이나 가라고 해. 가서 가정주부나 하면서 잘 지내면 되겠네. 개구리가 따뜻한 물에 오래 있으면 성남으로 안 돌아오려 하지 않을까? 게다가 배현수가 조유진을 그렇게 좋아한다며? 굳이 성남에 와서 나와 상속권 싸움을 할 필요가 없잖아? 조유진은 배현수 사모님으로 살고 나는 성행 그룹 상속인이 되는 거지. 이건 두 사람 모두에게 좋은 거 아니야?”“허허, 너 정말 못됐다.”“뭐가 못돼? 조유진, 그 여자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잖아. 엄창민 그 인간이랑 성행 그룹 일을 같이하는 것도 이미 충분히 억울해. 발목을 잡는 폐물 한 명 더 만들고 싶지 않아. 그럼 내가 매일매일 뒤치다꺼리나 해야 하잖아.”“만약 조유진도 너처럼 일 잘하는 슈퍼우먼이 꿈이라면? 일하고 싶은 사람에게 네가 가정주부를 하라고 하는 게 못 된 거 아니야?”“진짜 재수가 없으려니까 별것이 다 꼬이네. 내가 그동안 성행 그룹을 위해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데. 절대 이런 폐물이 내가 잘 차려 놓은 밥상에 재를 뿌리게 내버려둘 수 없어.”“조유진이 폐물일지 어떻게 알아? 꽤 쓸 만한 인재일 수도 있잖아.”김 씨는 정말 자기 월급 주는 주인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다. 엄명월의 원한을 사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처럼.엄명월은 화난 얼굴로 김씨를 노려보며 말했다.“이번 달 월급, 다음 달 월급 받을 생각 일도 하지 마!”그제서야 김 씨는 입을 다물었다....월요일, 조유진은 선유를 데리고 영화를 보러 갔다.영화를 다 보고 나서 밖에서 맛있는 음식까지 먹었다.조유진은 선유를 산성별장에 데려다준 후 일 분도 머물지 않고 바로 떠났다.선유는 팝콘 한 통을 안고 현관으로 들어오며 외쳤다. “아빠! 저 다녀왔어요!”“영화 재미있었어?”그러자
한 달 동안 배현수의 곁에 있으면 2천8백억 원의 빚을 한꺼번에 갚을 수 있다. 그러면 조유진도 완전히 자유가 된다.그야말로 떼돈 버는 장사가 아닌가? 조유진이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다.물론 배현수에게는 수지가 맞는 일이 아니다.“단순히 배 대표님 옆에 한 달만 있으면 되는 건가요?”조유진이 무엇을 묻고 싶은지 배현수는 잘 알고 있다.“한 달 안에 내가 부를 때마다 와야 해.”배현수는 확실하지 않은 단어들로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부를 때마다 와야 한다니? 그게 대체 무슨 뜻인가?조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그것도 해야 해요?”“뭘 하는데?”조유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설마 일부러 알아듣지 못한 척을 하는 걸까?“침대...”조유진은 그가 알아듣기 쉬운 단어로 직접 말했다.그러자 배현수는 아예 대놓고 물었다.“나와 자고 싶어?”전화기 너머의 조유진은 다시 조용해졌다.배현수의 목소리는 너무 당당해 조금의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마치 정말 진지하게 조유진에게 자기와 자고 싶은지 묻는 것 같았다.어떻게 이렇게 당당하고 솔직할 수 있을까?배현수는 협상의 고수이다.선제공격에도 능할 뿐만 아니라 이 문제를 아예 조유진에게 던져버렸다.하지만 지금은 배현수가 다가오기만 해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온몸을 떨었고 식은땀을 흘렸다. 따라서 당연히 원하지 않는다. 만약 진짜로 하게 된다면 정말 숨이 멎어 질식할지도 모른다. 아마 이런 일로 응급실에 실려 간다면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할 것이다. 상상만 해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아니요.”만약 배현수가 승낙하지 않는다면 조유진은 성실하게 돈을 벌어서 빚을 갚으려 했다. “응. 그럼 안 해.”목소리가 너무 담담하여 희로애락의 그 어떤 감정조차 알아들을 수 없었다.조유진은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때 전화기 너머 배현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물론 그건 안 하지만 손을 잡고 포옹하는 건 꼭 있어. 유진아, 나도 남자야.”그 말에 조
...다음 날 아침 일찍 남초윤은 조유진을 데리고 병원에 갔다.의사에게 진찰받은 후 파록세틴을 처방받았다.약을 받고 병원을 나서는데 때마침 심미경을 만났다.세 사람은 인사를 했고 조유진은 심미경의 손에 들 초음파 검사 사진을 발견했다. 심미경이 급하게 치우려 했지만 두 사람은 이미 눈치챘다.그러자 심미경도 더 이상 숨기지 않고 털어놨다. “저 임신했어요. 초음파 검사받으러 온 거예요.”“축하해요. 얼마나 됐어요?”“8주밖에 안 됐어요.”남초윤은 심미경 혼자 병원에 온 게 믿기지 않는 듯 심미경 뒤에 따라오는 사람이 없는지 몇 번 두리번거리더니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이찬 씨는요? 왜 같이 오지 않았어요?”심미경은 고개를 아래로 숙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글... 쎄요. 잘... 모르겠어요.”조유진은 심미경에게 분명 말 못 할 사정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바로 남초윤을 보며 말했다.“사실 저와 초윤이는 이찬 씨와 별로 친하지 않아요. 함부로 말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남초윤은 눈살을 찌푸리며 심미경을 보고 물었다.“그런데 왜 이찬 씨에게 말하지 않았어요? 결혼 준비 중이잖아요? 말해도 되지 않아요?”설마 강이찬이 파혼이라도 한 건가?심미경은 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말하자면 길어요. 유진 씨, 초윤 씨. 시간 괜찮으면 저기 커피숍에 커피 한잔하지 않을래요? 저도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카페에 도착한 세 사람은 자리를 찾아 앉았다.조유진과 남초윤은 콜드브루 커피 두 잔을 주문했고 심미경은 레모네이드를 주문했다.항상 어디서나 분위기를 주도하는 남초윤이 이번에도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저번에 식사할 때 이찬 씨가 두 분 결혼식을 할 거라고 했는데 날짜는 정하셨어요?”그러자 심미경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아직이요. 저도 이찬 씨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사실 임신한 사실을 말하려고 했는데... 이 일로 그 사람의 발목을 잡고 싶지 않아요. 저에게는 이찬 씨의 진심이 제일 중
하지만 하늘도 심미경의 마음에 감동한 걸까? 강이찬이 먼저 그녀에게 사귀자고 했다. 이건 심미경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절대 거절할 수도 없었다.물론 처음에는 망설여지기도 했고 왜 자기에게 이런 말을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자기 자신이 강이찬과 어울리는 곳이 단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조유진이 돌아온 후에야 그녀는 강이찬이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건 이유를 알았다.하지만 그녀는 결코 조유진이 아니다.그렇지만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것, 처음에는 그저 먼 발치에서 강이찬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지만 강이찬과 가까이하면서 점점 자신을 더 많이 좋아해 주기를 바라게 되었다. 비 오는 날, 강이찬은 자기 쪽으로 우산을 기울여 몸 절반이 비에 흠뻑 젖을 때도 있었다. 이런 사소한 배려에 심미경은 점점 더 강이찬에게 빠져들었고 이제는 그를 소유하고 독점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좋아하는 감정이 이미 너무 깊어져 더 이상 되돌릴 수도 없었다. 마치 언젠간 빛을 볼 거라는 기대 하나로 끝없는 숲길을 걷는 것처럼... 언젠가는 강이찬이 자신을 사랑할 거라는 믿음, 그리고 언젠가는 함께 결혼식을 할 거라는 생각...심미경은 마주 앉아 있는 조유진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유진 씨, 저는 유진 씨가 정말 부러워요.”단 조금의 질투도 없이 오직 부러움만 있을 뿐이다.조유진이 강이찬에게 사랑받는 게 부러운 게 아니라 강이찬과 함께 젊은 청춘을 보낸 게 너무 부럽다.조유진은 당연히 심미경이 뭘 부러워하는지 몰랐고 그저 그녀의 말에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내가 뭐가 부러워요. 내가 살아온 인생을 몰라서 그런 얘길 하는 거예요. 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면 마음이 바뀔 거예요.”사실 조유진의 인생에도 편한 날이 며칠 없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것, 그리고 고생하고 힘이 드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세상 인생살이가 아니겠는가? ...SY그룹의 대표실.서정호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현재 일들을 보고했다.
옷을 갈아입은 조유진은 화장대 옆에 있는 약병에 시선을 돌렸다.오늘은 배현수에게 빚을 갚는 둘째 날이고 그 임무는 바로 채권자의 친구들과 밥을 먹는 것이다. 단순히 밥 한 끼 정도 먹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그러나 배현수가 또 다른 수작을 부릴지는 조유진도 확실하지 않았다.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유진은 처방받은 파록세틴을 가방에 넣었다.정말 무슨 일이 생긴다면 지난번처럼 숨쉬기 힘들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 적어도 약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날은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조유진은 방문을 열면서 휴대전화 잠금화면을 풀고 연락처에 있는 ‘하이틴 아파트 집주인’을 ‘채권자 어르신’으로 수정했다.조씨 집 마당에서 배현수를 처음 만났을 때는 열두 살이었다.그때 조유진은 조범에게 꾸중을 듣고 마당에서 엉엉 울고 있었다.배현수는 그녀보다 다섯 살 위였지만 사실 그래도 겨우 열일곱 살이다.굳이 떠올리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했을 텐데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그때 두 사람 모두 너무 어렸다는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게 조금씩 놀라곤 한다. 서로 알고 지낸 게 벌써 13년이다.두 사람은 서로의 가장 풋풋하고 어리숙한 모습들을 보며 자랐다. 만난 지 13년이지만 연애한 지 고작 1년이다. 그 후로는 그와의 추억이 너무 괴로워 최선을 다해 잊기 위한 데 썼다.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여러 해 동안 서로 얽히고설켜 있었지만 조유진은 여전히 그와 끝까지 좋은 감정으로 남고 싶었다. 남은 한 달 동안 그녀는 그와 잘 지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이다....10분 후, 조유진은 호텔 1층에 도착했고 배현수는 담배를 피우며 차 옆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담배를 반쯤 피웠을 때 조유진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보고 배현수는 손가락으로 담뱃재를 털고는 담배꽁초를 휴지통 위의 재떨이에 눌러 불을 껐다.물이 고여있는 재떨이는 담뱃불이 닿자마자 찌지직하는 소리를 내며 불이 꺼졌다. 조유진은 폐가 좋지 않아 간접흡연도 그녀에게 좋지 않다.그녀가 조수석
배현수는 그저 한 아이의 아빠로서 잔소리하는 것이다. 배현수의 투정 부리는 모습에 조유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너무 오냐오냐하지 마세요.”배현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사탕을 일주일 동안 먹이지 않았더니 울면서 나보고 자기를 학대한대. 엄마 찾으러 갈 거라면서 너를 데려와서 나를 혼내겠다느니 뭐라느니. 이런 불같은 성격은 누구를 닮은 건지 몰라.”조유진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배현수를 바라봤다.배현수는 설마 지금 조유진더러 불같은 성격이라 욕하는 걸까? 조유진은 파인애플 맛 사탕 하나를 입에 넣었다. 그 파인애플 맛은 강하고 새콤달콤해 입속 약의 쓴맛을 재빨리 가셨다.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딸은 보통 아빠의 성격을 닮지.”조유진의 말에 배현수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래. 내가 불같은 성격이야. 됐어?’ ...차가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조유진은 이곳이 그저 평범한 식당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이것은 온천도 같이 하는 식당이다.배현수와 조유진이 룸에 도착하자 마침 음식도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육지율은 애매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조롱하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두 사람 정말 너무 꾸물대는 거 아니야. 느릿느릿 대체 뭐 하다가 온 거야. 둘째까지 만들고 온 거 아니야?”배현수는 차가운 얼굴로 육지율을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저속한 인간.”“이 저속함이 바로 네가 원하는 거잖아. 아니야?” 육지율은 피식 웃으며 메뉴판을 배현수 앞으로 던졌다.“또 뭘 먹을지 봐봐. 빨리. 나 배고파 죽기 직전이니까.”조유진은 룸에 들어오자마자 남초윤 옆에 앉았다.남초윤은 건너편 강이진을 힐끗 쳐다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심미경이 몸이 안 좋아서 못 온다고 했는데 대신 강이진 저 여자가 왔을 줄 누가 알았겠어. 뭐 오늘 저녁 볼거리는 있겠네.”“이찬 씨가 있으니까 허튼짓은 못 할 거야.”배현수는 조유진에게 메뉴판을 건넸다. 하지만 테이블에는 이미 요리들이 너무 많이 차려져 있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