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을 갈아입은 조유진은 화장대 옆에 있는 약병에 시선을 돌렸다.오늘은 배현수에게 빚을 갚는 둘째 날이고 그 임무는 바로 채권자의 친구들과 밥을 먹는 것이다. 단순히 밥 한 끼 정도 먹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그러나 배현수가 또 다른 수작을 부릴지는 조유진도 확실하지 않았다.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유진은 처방받은 파록세틴을 가방에 넣었다.정말 무슨 일이 생긴다면 지난번처럼 숨쉬기 힘들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 적어도 약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날은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조유진은 방문을 열면서 휴대전화 잠금화면을 풀고 연락처에 있는 ‘하이틴 아파트 집주인’을 ‘채권자 어르신’으로 수정했다.조씨 집 마당에서 배현수를 처음 만났을 때는 열두 살이었다.그때 조유진은 조범에게 꾸중을 듣고 마당에서 엉엉 울고 있었다.배현수는 그녀보다 다섯 살 위였지만 사실 그래도 겨우 열일곱 살이다.굳이 떠올리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했을 텐데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그때 두 사람 모두 너무 어렸다는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게 조금씩 놀라곤 한다. 서로 알고 지낸 게 벌써 13년이다.두 사람은 서로의 가장 풋풋하고 어리숙한 모습들을 보며 자랐다. 만난 지 13년이지만 연애한 지 고작 1년이다. 그 후로는 그와의 추억이 너무 괴로워 최선을 다해 잊기 위한 데 썼다.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여러 해 동안 서로 얽히고설켜 있었지만 조유진은 여전히 그와 끝까지 좋은 감정으로 남고 싶었다. 남은 한 달 동안 그녀는 그와 잘 지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이다....10분 후, 조유진은 호텔 1층에 도착했고 배현수는 담배를 피우며 차 옆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담배를 반쯤 피웠을 때 조유진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보고 배현수는 손가락으로 담뱃재를 털고는 담배꽁초를 휴지통 위의 재떨이에 눌러 불을 껐다.물이 고여있는 재떨이는 담뱃불이 닿자마자 찌지직하는 소리를 내며 불이 꺼졌다. 조유진은 폐가 좋지 않아 간접흡연도 그녀에게 좋지 않다.그녀가 조수석
배현수는 그저 한 아이의 아빠로서 잔소리하는 것이다. 배현수의 투정 부리는 모습에 조유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너무 오냐오냐하지 마세요.”배현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사탕을 일주일 동안 먹이지 않았더니 울면서 나보고 자기를 학대한대. 엄마 찾으러 갈 거라면서 너를 데려와서 나를 혼내겠다느니 뭐라느니. 이런 불같은 성격은 누구를 닮은 건지 몰라.”조유진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배현수를 바라봤다.배현수는 설마 지금 조유진더러 불같은 성격이라 욕하는 걸까? 조유진은 파인애플 맛 사탕 하나를 입에 넣었다. 그 파인애플 맛은 강하고 새콤달콤해 입속 약의 쓴맛을 재빨리 가셨다.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딸은 보통 아빠의 성격을 닮지.”조유진의 말에 배현수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래. 내가 불같은 성격이야. 됐어?’ ...차가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조유진은 이곳이 그저 평범한 식당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이것은 온천도 같이 하는 식당이다.배현수와 조유진이 룸에 도착하자 마침 음식도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육지율은 애매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조롱하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두 사람 정말 너무 꾸물대는 거 아니야. 느릿느릿 대체 뭐 하다가 온 거야. 둘째까지 만들고 온 거 아니야?”배현수는 차가운 얼굴로 육지율을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저속한 인간.”“이 저속함이 바로 네가 원하는 거잖아. 아니야?” 육지율은 피식 웃으며 메뉴판을 배현수 앞으로 던졌다.“또 뭘 먹을지 봐봐. 빨리. 나 배고파 죽기 직전이니까.”조유진은 룸에 들어오자마자 남초윤 옆에 앉았다.남초윤은 건너편 강이진을 힐끗 쳐다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심미경이 몸이 안 좋아서 못 온다고 했는데 대신 강이진 저 여자가 왔을 줄 누가 알았겠어. 뭐 오늘 저녁 볼거리는 있겠네.”“이찬 씨가 있으니까 허튼짓은 못 할 거야.”배현수는 조유진에게 메뉴판을 건넸다. 하지만 테이블에는 이미 요리들이 너무 많이 차려져 있
조유진은 고개를 돌려 옆의 남자를 멍한 눈빛으로 바라봤다.재결합?강이진의 손은 이미 주먹을 불끈 쥐었다.현수 오빠는 약지에 반지를 꼈는데 조유진은? 조유진의 약지는 텅텅 비었다.강이진은 둘이 재결합할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는다...조유진은 설마 그녀의 어머니가 예지은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모를까?“현수 오빠 손에 낀 반지, 두 사람 커플 반지 맞아요? 유진 씨는 왜 안 꼈어요?”선의로 묻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들을 들춰내려는 것이다.조유진은 가볍게 대꾸했다. “까먹었어요.”조유진은 채권자 어르신의 체면을 구길 순 없었다.배현수에게 2800억 원을 빚졌으니 당연히 채권자 어르신의 편이어야 했다.이 일이 그냥 이렇게 넘어가는 줄 알았는데...배현수가 갑자기 양복바지 주머니에서 검은 벨벳 상자를 꺼냈다.열어보니 안에는 핑크 다이아몬드가 들어있었다.남초윤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헐!”이게 무슨 수작이야! 여기에서 프러포즈하려는 건가?근데 이렇게... 갑자기?육지율은 젓가락을 내팽개치며 말했다. “밥을 먹으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두 사람 애정행각에 밥맛 없어졌어.”강이진의 얼굴이 바로 붉어졌다. 반면 강이찬은 자리에 앉아서 손에 들린 술을 고개를 젖혀 단숨에 마셨다.조유진도 멍해졌다.만약 단지 강이진의 화를 돋우기 위한 것이라면 배현수의 행동을 조유진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배현수는 조유진의 손을 잡고 그 핑크 다이아몬드를 약지에 끼웠다.사이즈는 조이지도 않고 헐렁하지도 않아 딱 맞았다.핑크 다이아몬드는 깊은 광택을 띠며 불빛 아래서 눈부시게 빛났다.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는 강이진의 속이 뒤집히게 했다.조유진이 아직도 놀라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배현수가 꿀 떨어지는 말투로 말했다. “지난번에 잃어버렸다고 했는데 내가 소파 밑에서 찾았어. 아마 예삐가 물어 간 것 같아. 앞으로 손에 끼고 빼지 않으면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을 거야.”조유진:“???”“...”“!!!”배현수의 이 말에 담긴 의미는 거대
조유진과 남초윤은 오늘 낮에 병원에서 심미경을 만났고 심미경이 속이 안 좋은 것이 아니라 임신한 것을 알고 있다.그래서 심미경은 정말 임신 사실을 강이찬에게 알릴 생각이 없는 건가?강이진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그 여자가 오버하는 거예요. 몸이 안 좋을 게 뭐 있어요. 그냥 유진 언니를 만나는 게 두려울 뿐이에요.”강이찬이 갑자기 소리쳤다. “강이진!”“왜 소리쳐, 사실이잖아. 그 여자가 평소에 자꾸 유진 언니를 따라 꾸미는 걸 누가 몰라? 그 여자도 진짜 자기 스타일이 없는 거야 뭐야? 사람 흉내만 내고. 게다가 입은 것도 유진 언니만큼 예쁘지 않잖아.”강이진의 말투는 마치 조유진의 편인 것 같았지만 사실 일부러 부추기는 것뿐이었다.만약 현수 오빠가 강이찬도 조유진을 좋아한다는 것을 안다면 어떻게 생각할까?조유진이 자기 친구도 꼬시려고 하는 헤픈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을까?강이찬은 술잔을 움켜쥐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그는 강이진을 향해 소리쳤다.“입 다물어! 심미경은 네 새언니야! 또 이렇게 건방지게 굴 거면 외국으로 꺼져버려!”강이진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억울한 듯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아직 결혼 안 했잖아...”이 화제는 강이찬에 의해 바로 중단되었다. 식탁의 분위기는 매우 어색했지만 조유진은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식사가 끝나갈 무렵, 조유진이 일어서며 말했다. “화장실 좀 다녀올 테니 천천히 드세요.”조유진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강이진도 따라갔다.화장실에서 조유진이 손을 씻고 있는데 강이진이 그녀 옆에 있는 세면대 앞에 서서 조유진의 약지에 있는 핑크 다이아몬드를 힐끗 보고 칭찬했다. “현수 오빠가 선물한 핑크 다이아몬드가 너무 예뻐요.”손을 깨끗이 씻은 조유진이 웃었다. “한번 껴볼래요?”“내가 껴봐도 돼요?”강이진의 눈빛에 갈망이 보였다.“당연히... 안되죠. 좋은 건 누구나 원하지만 본인 것이 아니잖아요.”이 핑크 다이아몬드는 강이진 것도 아니고 조유진 것도 아니다. 그녀
조유진이 침착할수록 강이진은 더욱 미쳐갔다.“왜 웃어?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 난다고, 당신이 여지를 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7년이나 당신을 좋아했을까?”짝!조유진이 강이진의 뺨을 한 대 때렸다. 강이진이 경악했다.그녀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조유진이 갑자기 뺨을 때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뭐 하는 거야!”그러나 그녀는 반격할 생각이 없었다.현수 오빠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는데 마침 현수 오빠에게 조유진의 숨겨진 모습이 얼마나 악랄한지 보여주고 싶었다.“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했잖아. 네 논리대로라면 네가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때릴 수 있겠어?”이 말은 빈틈을 파고든 억지 논리다.“너...”강이진은 화가 나서 말을 가리지 않고 내뱉었다.“너와 네 아버지가 현수 오빠를 3년 동안 감옥에 보냈는데 너는 네가 아직도 오빠 아내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아 맞다, 조범 그 망나니가 현수 오빠의 친아버지도 죽였잖아. 네가 현수 오빠와 만나려고 한다면 오빠 어머니는 반대할 거야!”예지은을 언급하자...조유진의 눈빛에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예지은이 안정희를 죽였는데 조유진은 미워하지 않는 게 아니라 미워할 자격이 없을 뿐이다.그들 부모님 세대의 은혜와 원한이 너무 깊이 얽혀 있어서 자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점점 복잡하게 얽혔다. 조유진은 그 원한에 계속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조유진은 웃으며 조롱했다.“내가 현수 씨의 아내가 될 자격이 없다고 하더라고 네 차례는 안 오잖아.”정곡을 찔린 강이진은 화를 참고 이를 갈며 말했다.“당신은 현수 오빠와 전혀 어울리지 않아. 조유진, 당신이 왜 하필 현수 오빠에게 매달리는지 이해가 안 돼.”“그러면 너는? 너는 왜 또 현수 씨한테 치근덕거려? 내가 현수 씨한테 매달리지 않으면 네 것이 될 거라고 생각해?”“... 너!”조유진은 숨을 쉴 틈도 주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세상에 흔한 게 남자인데 남의 것을 자꾸 탐내지 마. 아무리 진수성찬이 차려진다 해도 네가 소화할
힘이 약한 조유진을 위해 강이찬이 거들었다. 조유진은 고맙다는 듯이 강이찬을 한 번 쳐다보고는 인사를 했다.“다 드셨어요?”“지율이랑 다들 주차장으로 갔으니 우리도 갑시다.”“좋아요.”강이찬은 참지 못하고 설명했다.“이진이가 헛소리 한 거니 신경 쓰지 말아요.”조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미경 씨랑 곧 결혼하는 데 저한테 마음 있다는 거는 헛소리죠. 미경 씨랑 결혼하면 저한테 연락하세요.”강이찬은 멈칫하더니 억지웃음을 지으며 씁쓸하게 웃었다.조유진은 강이찬에게 전혀 여지를 주지 않고 아주 직설적으로 말했다. 조유진이 진짜 모르는지 모르는 척하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중요한 건 조유진은 강이찬이 자기한테 관심 있을 거라고는 아예 생각도 못 했다는 거다.조유진에게 강이찬은 어떤 존재일까?강이찬은 배현수의 형제일 뿐이다.배현수 때문에 가끔 그와 인연이 있었을 뿐이다.강이찬은 갑자기 해명조차 쓸데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왜냐하면 조유진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강이찬이 자기에게 어떤 감정인지 궁금해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강이찬과 강이진은 모두 술을 마셔서 운전할 수 없어서 심미경이 왔다.조유진은 배현수를 부축하여 차 쪽으로 걸어갔고 심미경을 지나칠 때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차 옆에 도착한 조유진은 배현수를 부축하느라 손이 없었다. 조유진은 배현수를 팔꿈치로 밀었다. “차 키는요?”“호주머니에.”배현수는 움직이지 않고 말만 했다.“...”조유진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한 손은 배현수를 부축하고 한 손은 그의 양복바지 주머니에 넣어 더듬었다. 왼쪽을 만져봤는데 없었다.얇은 양복바지를 사이에 두고 배현수의 단단한 근육이 느껴져 손끝이 살짝 뜨거워졌다.조유진이 다시 손을 뻗어 오른쪽 주머니를 만지니 차 키가 만져졌다.차 키를 꺼내 문을 열고 배현수를 차에 밀어 넣으려 했다.그런데 배현수가 갑자기 힘껏 밀자 모든 힘이 조유진에게 가해졌다.두 사람은 동시에 차 뒷좌석으로 넘어졌다.배현수는 고개를
가까스로 산성 별장에 도착한 후 조유진은 또 많은 힘을 들여 배현수를 차에서 별장으로 부축하였다.선유는 일찍 잠들었지만 가정부는 안 자고 있었다.하지만 조유진이 전에 집에 온 적이 없어서 가정부는 그녀를 몰랐다.장 씨 아주머니는 깜작 놀랐다.“대표님 아니에요? 취하셨어요?’“네. 소주를 많이 마셨어요. 방이 어디예요? 제가 부축할게요.”장 씨 아주머니는 조유진을 보며 물었다.“당신은?’“저는 선유 엄마, 조유진이에요.”“이쪽이에요. 대표님 방은 위층에 있어요. 귀가를 늦게 하셔서 선유는 이미 잠들었어요.”장 씨 아주머니는 말하면서 조유진을 도와 배현수를 부축해 위층으로 올라갔다.침실에 도착하자 장 씨 아주머니가 말했다. “아가씨가 여기서 돌봐주고 있으니 저는 이만 자러 갈게요. 제가 돌보기에는 조금 불편하잖아요.”나이가 몇인데... 그리고 아주머니는 아이를 돌보기 위해 이 집에 왔다.장 씨 아주머니가 잽싸게 떠났다.전에 선유한테서 엄마가 너무 예쁘다고 들었는데 오늘 밤에 만나니 역시 사진보다 실물이 더 예뻤다. 어쩐지 대표님이 계속 잊지 못하더라니.장 씨 아주머니가 떠난 후, 조유진은 침대에 누워 있는 남자를 보고 어이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그녀는 배현수의 신발을 벗기고 옆의 이불을 잡아당겨 그의 허리춤을 덮었다.조유진은 침대에 등을 기대고 마루 위에 앉아 무료하게 잠시 자리를 지켰다.침대 위의 사람이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조유진이 일어나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침대 위의 배현수가 갑자기 일어나 앉았다.배현수는 목의 넥타이를 잡아당겨 셔츠 단추를 풀었다.조유진이 고개를 돌렸다.“왜 옷을 벗어요?”“자려고.”조유진은 배현수의 손을 꼭 잡고 달랬다.“잠잘 때 옷을 벗지 않아도 돼요.”“샤워하고 잠옷도 갈아입어야 해. 나 결벽증 있어.”“...”술에 취해도 이렇게 신경 쓴다고?“그럼 잠옷은 어디 있어요? 제가 가져다줄게요.”“옷장.”조유진은 몸을 돌려 옷장으로 가서 잠옷을 찾았다. 그녀가
얼마나 지났는지 품 속에서 길고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배현수는 맑고 깨끗한 검은 눈동자로 조유진을 바라봤다.조유진은 배현수의 품에 기대어 잠들었는데 잠자는 얼굴이 얌전한 고양이 같았다.배현수는 고개를 숙여 조유진에게 키스했다.밤새 참았는데 지금...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그녀가 도망갈까 봐 키스하는 것조차 그녀가 잠든 틈을 타서 해야 한다는 것이 터무니없게 느껴졌다....이튿날 아침 일찍, 가장 기쁜 것은 선유였다.아침 식사 자리에서 선유는 매우 놀라서 줄곧 조유진에게 매달리며 물었다. “엄마, 어젯밤에 언제 왔어요? 왜 나한테 말 안 했어요?”“어젯밤 엄마가 왔을 때 장 씨 아주머니가 네가 잠들었다고 해서 깨우지 않았어.”조유진은 삶은 달걀을 까서 노른자를 꺼내고 흰자를 선유의 작은 그릇에 놓았다.선유는 다가와 큰 눈으로 조유진을 보며 물었다.“그럼 왜 나랑 같이 자러 오지 않았어요? 어젯밤에 어디서 잤어요?”“...”어... 조유진은....“엄마는 어제 아빠 방에서 잤어.”배현수는 막 씻고 잠옷을 입고 산뜻하게 위층에서 내려왔다.선유가 작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그럼 엄마,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자요.”“아빠가 동의하신다면 남아서 너와 함께 잘게.”그러자 선유는 얼른 고개를 돌려 물었다. “아빠, 엄마가 오늘 밤 나랑 같이 잔다고 했는데, 안 돼요?”배현수는 테이블 옆으로 걸어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오늘 밤 엄마는 아빠랑 함께 파티에 갈 거야.”“무슨 뜻이에요? 엄마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요!”배현수는 인내심이 조금 없어져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설명했다.“우리가 돌아올 때면 너는 이미 잠들었을 거야. 엄마가 네 방에 가면 네가 깰 거야.”“괜찮아요! 깨면 엄마랑 부루마블을 놀면 돼요!”“... 너 몇 살인데 아직도 엄마가 같이 자길 바라니?”선유는 눈을 크게 뜨고 배현수를 바라보며 작은 입을 꾹 다물며 진지하게 말했다.“저는 겨우 일곱 살이에요. 정확히 말하면 여섯 살이에요. 아직 어리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