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유진은 최대한 예의를 갖춰 에둘러 말했지만 상대방에게 확실히 거절한다는 느낌을 주었다. “진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 않으실래요? 보수는 저희가 두둑이 챙길게요. 저희 SY그룹이 다른 데보다는 훨씬 많이 드려요.”“죄송합니다. 제가 바빠서요.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전화를 끊자마자 누군가의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환희야, 나야.”조유진은 일어나 문을 열며 말했다.“창민 오빠, 무슨 일 있어요?”“네가 어떻게 할 건지 물어보려고 왔어. 어제 아버지가 나에게 전화가 왔는데 우리더러 언제 성남으로 올 건지 물어봤어.”“저... 당분간은 못 갈 것 같아요. 어제 선유와같이 다음 주에 영화 보러 가기로 약속도 했고. 선유 양육권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어요. 만약 선유가 나와 같이 살겠다고 하면 배현수에게서 양육권을 갖고 와야 할 것 같아요.”엄창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응. 이해해. 친딸인데 핏줄은 절대 못 떼어내지. 그런데 선유가 만약 아빠를 선택하면 어떡할 거야?”조유진도 이 선택을 염두에 두지 않은 건 아니었다.“배현수가 선유에게 좋은 아빠니까 선유가 만약 그런 선택을 하더라도 나는 선유의 결정을 존중할 거예요.”“어르신이나 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우리도 얼마든지 나서서 도울 수 있으니까.”“아니에요. 너무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요. 그럴 필요도 없고요. 선유가 나를 선택하든 아니면 배현수를 선택하든 행복하기만 하면 돼요. 엄 어르신 말이 맞아요. 만약 아이의 아빠가 좋은 아빠면 걱정할 필요 없다고. 이번에 와서 보니 선유가 아빠와 같이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많이 놓여요.”“환희야, 혹시 성행 그룹에서 일할 생각은 없어? 어제 아버지가 나에게 전화 왔는데 이런 생각을 하고 계신 것 같아.”조유진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내가요? 내가 성행 그룹에 들어가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대제주시 대학교의 졸업 후생인데 어떻게 할 일이 없겠어. 해외 업무 관련된
남초윤은 그녀를 꼭 껴안았다.“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여기에서는 정말 하루도 더 일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 조유진은 남초윤의 가라앉은 기분을 보고 물었다.“육 변호사와 싸웠어?”남초윤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아니. 나와 육 변호사의 결혼은 원래부터 비즈니스였는데 시어머니가 자꾸 아이를 낳으라고 하셔. 그리고 우리 엄마도. 그런데 감정이 없는 두 사람에게서 어떻게 아이가 생길 수 있겠니?”사실 이건 남초윤이 까다로운 게 아니다. 당시 남씨 가문의 자금줄이 완전히 끊겨 그녀는 돈에 눈이 먼 친아버지 때문에 억지로 육 씨 집안에 시집가게 된 것이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한 이유도 그녀가 이쁘고 학력도 괜찮아 같이 있으면 자기 체면이 서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로의 이익만을 보고 한 결혼은 돈 때문에 시작해 돈 때문에 실패를 맛보게 된다. 따라서 언제든지 이 결혼이 깨져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감정 없는 결혼은 마치 땅 주인이 따로 있는 곳에 지어진 빌딩처럼 무너뜨리는 건 시간문제였다.조유진도 여자이기에 그녀의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정말 버티기 힘들면 잘 생각해봐. 네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나는 항상 네 편이야. 응원할게. 우리 외부 사람들의 눈에 육 변호사는 꽤 괜찮은 남자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것은 단지 겉모습만 보는 거니까. 근데 결혼은 완전히 다른 것 같아. 이 사람이 결혼한 후의 모습이 어떤지는 그 누구보다도 네가 제일 잘 알겠지. 평가할 자격은 너에게만 있어.”남초윤은 그녀의 말에 감동한 듯 조유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유진아. 역시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너 밖에 없어.”두 사람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한 샤부샤부 가게 문 앞에 이르렀다.가게 안으로 막 들어가려는 순간, 두 사람은 금방 도착한 강이찬과 마주쳤다.그의 옆에는 한 여자가 그의 팔짱을 끼고 같이 샤부샤부 가게로 들어가고 있었다. 네 사람 모두 서로를 보았고 눈이 마주친 순간 다들 자리에 멈춰 섰다.강이찬의 옆에 있던 심미경은 그가 조유진
강이찬의 말에 옆에 앉아 있던 심미경의 얼굴도 창백해졌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녀는 어쩔 줄 몰라 몸을 일으키며 이 상황을 벗어나려 했다.“제가 먼저 소스 좀 만들어서 올게요.”심미경이 자리를 비운 후, 강이찬은 조유진을 보며 물었다.“유진 씨, 살아있었으면서 왜 이제야 돌아왔어요?”그러자 조유진이 입을 열었다.“폐에 문제가 있어 1년 동안 미국에 가서 치료받았어요.”“아팠어요? 지금은요? 다 나았어요? 근데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아요.”강이찬은 안쓰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남초윤은 조유진의 어깨를 두드리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마디 했다.“유진이는 나 혼자 챙기면 되니까 강 사장님의 그 마음은 약혼녀를 위해 쓰세요. 그러다가 약혼녀가 오해할 것 같네요.”조유진도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미경 씨가 소스 갖고 온다고 했는데 저쪽에 과일도 있고... 혼자서는 못 갖고 올 것 같아. 초윤아 우리도 같이 가서 갖고 오자.”남초윤과 조유진도 소스 구역으로 향했고 테이블에는 강이찬 한 사람만 남았다.소스 코너 앞에 서 있는 심미경은 자기 몫을 먼저 챙긴 후 강이찬에게 줄 소스를 만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같이 샤부샤부를 먹으러 온 건 처음이다. 그래서 그녀는 강이찬의 입맛을 잘 모른다.그리고 또 한편으로 그녀는 강이찬에 대한 조유진의 태도를 떠보고 싶었다.“유진 씨, 혹시 이찬 씨가 어떤 소스 좋아하는지 알아요? 같이 샤부샤부를 먹으러 온 건 처음이라... 유진 씨는 오래 알고 지냈으니까 알고 있지 않아요?”조유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저... 잘 몰라요. 저와 강 사장님은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일이 없어요. 따로 식사한 적도 없고요. 어떤 소스를 원하는지 직접 물어보시는 게 어떨까요?”조유진이 어떻게 전 남자 친구 절친의 입맛까지 알겠는가!그녀의 말에 심미경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창백했던 안색도 좀 풀리는 듯했다.“네. 알겠어요.”심미경은
잘못된 타이밍에 맞는 사람을 만나면 두 사람 모두 미래가 확실하지 않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할 수도 없다.가장 무력한 나이에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놓치고 후회하게 된다. 그리고 그 아쉬움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서서히 무마되어 한없이 깊은 무력감을 느끼게 한다.이게 운명일 것이다.강유진의 말에 심미경이 웃으며 말했다.“그래요?”그녀는 손을 뻗어 강이찬의 팔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이찬 씨, 저도 유진 씨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요.”강이찬은 아랫입술을 꼭 깨물며 그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남초윤은 뒷좌석에 앉아 그들이 하는 말을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마디 했다.“미경 씨, 강 사장님과 결혼하게 되면 저와 유진이에게 꼭 알려주세요. 우리가 꼭 축하하러 갈게요.”“알겠어요. 그때 가서 청첩장 꼭 보내드릴게요.”이렇게 대답한 심미경은 자기도 모르게 강이찬의 눈치를 살폈다.강이찬의 얼굴은 이미 싸늘해져 있었고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았다. 조유진과 남초윤을 집까지 데려다준 후, 심미경이 강이찬을 보며 말했다.“이찬 씨, 웨딩숍에 연락해 웨딩드레스를 입어보고 싶은데 이찬 씨는 언제 시간 돼요? 우리 같이 ...”강이찬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요즘 일이 너무 바빠서 결혼식은 일단 미루는 거로 하죠.”기쁨이 가득하던 심미경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따지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조유진이 돌아왔기 때문이에요?”사거리에 멈춰 서 있던 앞차가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었음에도 앞으로 가지 않자 강이찬은 짜증 나는 얼굴로 경적을 울리며 심미경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호텔로 돌아온 조유진은 예전에 살던 전셋집에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1년 전, 조유진은 죽을 결심을 하고 다시는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집에서 아무것도 갖고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꽤 많은 물건을 그때 세 들어 살던 집에 두고 나왔다.전화 연결이 되자 조유진이 물었다. “안녕하세요, 최효진
한참 동안 수화기를 들고 있던 배현수는 끝내 아무 소리를 내지 않았다.조유진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배현수는 겉으로는 평온한 표정을 지었지만 눈빛은 이미 거센 파도가 휘몰아치는 듯했다.잠시 후 전화가 끊겼다.뚜뚜...전화기 너머로 계속 아무 대답이 없자 조유진이 먼저 전화를 끊은 것이다.조유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의 휴대전화에 문제가 생겼는지 의심하고 있었다.왜 상대방 집주인은 계속 아무 말을 하지 않는 거지? 잠시 후, 카톡 메시지가 왔고 추가한 사람은 하이틴 아파트의 집주인이었다. 조유진이 수락 버튼을 누르자 상대방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방금 대화하기 불편했어요. 할 말이 있으면 카톡으로 남겨주세요.」조유진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전화기에 대고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해서 상대방에게 보냈다.상대방의 카톡 닉네임은 알파벳 하나 Y였다.Y로부터 메시지가 왔다.「물건은 버리지 않았고 다 그대로 있어요.」그 말에 조유진이 답장했다.「그럼 언제 시간 될까요? 제가 찾으러 갈겠습니다.」곧바로 Y의 답장이 왔다.「오늘 밤에 시간 돼요.」「구체적으로 몇 시에 가면 될까요?」「아홉 시.」조유진이 휴대전화 시간을 보니 이미 8시 30분이다. 서둘러 출발하면 9시에 도착할 수 있다. 시간이 딱 맞는다.대화를 마친 뒤 조유진은 가방과 휴대전화를 챙겨 외출 준비를 했다.호텔 문을 나서자마자 그녀는 맞은편 스위트룸에 있던 엄창민과 마주쳤다.“밥 먹었어? 같이 식당에 가서 먹지 않을래?”“지금 일이 좀 있어서 나갔다 와야 해요. 먼저 드세요.”그러자 엄창민이 물었다.“어디 가는데?”“그동안 세 들어 살던 곳에 가서 물건 좀 가져올게요.”“그럼 내가 바래다줄게. 물건도 많을 거 아니야? 차가 없으면 불편하잖아...”“그래요. 그럼 부탁할게요.”...하이틴 아파트, 이곳은 고급 주택이 아니라 일반 주택 단지다.단지 내 환경이 좋지 않아 전용 주차 공간이 따로 없고 차량 모두 길가에 질서 없이 주차되어 있었다.엄창민은 주차 문제로
배현수의 커다란 손이 조유진의 가녀린 두 손목을 움켜쥔 후 높이 들어 벽으로 밀쳤다.강압적이면서도 거칠었다. 서로의 숨결은 어지러워지고 뜨거운 온기가 조유진의 귓가에 흘렀다. 상대의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고막 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유진아...”필사적으로 몸부림치던 조유진의 동작은 한순간 굳어졌다. 온몸에서 솟구치는 피가 순간 역류하여 얼음으로 응결된 것 같았다. 배현수...조유진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멍하니 그곳에 있었다. 배현수는 품에 안긴 사람이 굳은 게 느껴져 동작을 멈추고 그녀를 살짝 놓아주었다. 조유진은 숨을 크게 쉬며 어지러운 숨을 골랐다. 정말 놀랐는지 그녀는 손을 들어...짝!따귀가 배현수의 얼굴에 날아와 빗맞았다. 방 안에 불을 켜지 않아서 빛이 매우 어두웠다. 그녀는 그의 드리워진 얼굴이 어떤 기분인지 똑똑히 볼 수 없었다. 처음으로 배현수의 뺨을 때린 조유진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듯 손바닥을 쥐어짜고 당황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마른침을 힘껏 삼켰다...조유진이 무의식적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뒤에 있던 배현수가 그녀의 팔을 꽉 잡았다.“당신의 물건은 필요 없어?”“...”조유진은 하마터면 물건을 가지러 온 걸 잊어버릴 뻔했다. 조유진은 힘껏 심호흡을 해서 자신을 최대한 진정시켰다. 몇 초 후, 딸깍 소리와 함께 방 안의 불이 켜졌다. 배현수가 그녀에게 다가가서 눈을 내리깔고 사과했다. “방금 놀라게 해서 미안해.”조유진은 긴장할 때 지금처럼 계속 침을 삼킨다. 조유진은 입을 뻐끔거리다가 겨우 소리를 내어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현수 씨, 전화했을 때 저인 줄 알았어요?”“응.”배현수의 검은 눈동자가 조유진을 똑바로 보며 바로 인정했다.“그래서 일부러 말을 안 하고 찾으러 오라고 한 거예요?”“응.”“...”식은땀에 젖은 손바닥을 움켜쥐고 겉으로 애써 침착한 척했다.“그럼 제 물건은요?”“물건 챙기는 것 말고는 나한테 할 말 없어?”조유진의 눈초리가 미세하게 떨렸다.“무슨 말이요? 우리는 이미
하지만 만약 배현수가 선유로 조유진을 붙잡고 싶다면?“나와 함께 선유를 키울래?”배현수에게 등을 돌리고 있던 조유진이 이 말을 듣고 평온하게 말했다. “좋아요. 선유가 당신 곁에 있는 것이 익숙해졌다면, 당신 곁에 머물러도 괜찮아요. 제가 시간이 나면 선유를 보러 오기도 하고, 데리고 놀기도 할게요...”배현수가 말을 끊었다.“내가 그 뜻이 아닌 걸 알잖아.”배현수의 뜻은 선유를 위해 재결합하자는 뜻인가? 종이 상자를 안고 있던 조유진은 손가락을 점점 움켜쥐고 하얗게 질렸다...안정희가 안 죽었으면... 우리 사이에 그렇게 많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그녀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렸다. “선유의 엄마는 할래요. 그런데 더 이상 조유진이 되고 싶지 않아요. 조유진을 하기엔 너무 힘들어요. 배 대표님이 이해해 주세요. 누구든지 쉽게 살고 싶잖아요. 저도 예외가 아니에요.”조유진은 더 이상 감정에 얽히고 싶지 않았고 더 이상 흔들리고 싶지 않았고, 더더욱...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사랑이란 용기 있는 사람들의 게임이다. 조유진도 예전에는 용감했다. 조범을 거역하며 몸을 아끼지 않고 배현수와 함께했다. 하지만 그녀의 무모한 용기는 틀렸다. 그녀의 무모한 용기 때문에 배현수가 감옥에 가게 되었고 훗날의 갖가지...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조유진은 반드시 다시는 그를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아마 안정희도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 사이의 감정은 너무 많은 사람이 대가를 치르게 했다.조유진은 두려워 차라리 겁쟁이가 되려고 한다. 겁쟁이는 사랑을 추구할 자격이 없다. 조유진은 차라리 거북이 껍데기에 숨어 영원히 나오지 않고 싶다. 행복하지 않더라도 상처투성이보다는 나은 것 같다. 조유진은 종이 상자를 안고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배현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와 문 앞을 가로막았다.“조유진이 아니어도 괜찮아. 나는 당신이 누구든지 상관없어. 나는 당신이 대제주시로 돌아온 것이 나 때문인지 알고 싶어.”조유진이 대제주시로
코끝이 다가와 살며시 닿자 배현수의 숨결이 조유진의 얼굴에 뿜어져 나왔다. 다시 터프하게 키스를 퍼부었다.조유진은 눈시울을 붉혔다.“하지만 저는 원하지 않아요. 배현수 씨, 절 강요하면 안 돼요...”강요? 상관없다. 조유진을 곁에 둘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증오해도 좋고 미워해도 좋다, 조유진을 곁에 단단히 가둬두기만 한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다. 남자의 큰 손이 조유진의 허리춤으로 파고들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조유진이 갑자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당신을 배신하고 당신이 3년 동안 옥살이를 하도록 했는데 왜 아직도 나와 엮이려고 해요?”배현수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도 왜 그런지 알고 싶었다. 아마... 천한 탓이겠지. 배현수가 여전히 손을 놓지 않자 조유진이 또 말했다. “당신은 육현수에요. 당신 아버지 육성준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잊었어요?”그들 사이는 원래 악연인데, 더 이상 얽히면... 다시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배현수의 손이 멈췄다. 조유진는 기회를 틈타 단번에 그를 밀어냈다.마침 엄창민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후, 열려 있는 현관문으로 바라본 조유진의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선명했다.엄창민은 조유진이 괴롭힘을 당한 줄 알고 별생각 없이 배현수의 얼굴에 주먹을 휘둘렀다!“인간쓰레기! 여자 하나 괴롭히는 게 무슨 남자야!”엄창민은 유단자여서 주먹이 세다. 배현수는 그 자리에 서 있었고 입가에 핏자국이 생겼지만 손을 대지 않았다.엄창민은 아픔을 느끼지 못한 듯 혀끝으로 볼 안쪽을 핥자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엄창민은 두 번째 주먹을 휘두르고 싶었다.“그만 싸워요. 날 괴롭히지 않았어요. 우리 그만 가요.”조유진은 바닥에 있는 물건을 주워서 종이 상자에 넣고 일어서서 가려고 했다. 그러자 배현수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저 사람은 가도 돼. 당신은 안돼.”엄창민은 눈썹을 찡그렸다.“주먹맛을 덜 봤어요?”“반격하지 않을게요. 절 때려죽이면 보내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