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마이바흐가 호텔 앞에 도착했다.배현수는 차에서 내려 호텔 로비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고객님, 체크인 도와드릴까요?”“예.”“예약하셨습니까?”호텔로 오는 길, 서정호가 운전할 때 배현수는 인터넷으로 스위트룸을 예약했다.이런 고급 호텔은 투숙하지 않으면 절대 호텔 엘리베이터를 탈 수 없다.그리고 엘리베이터에 탄다고 해도 반드시 방 키를 찍어야 엘리베이터가 움직인다. 배현수는 신분증을 건네며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6층으로 주세요. 제가 미신을 좀 믿어서.”“네. 6층이요? 6층에 방이 있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몇 분 후 프런트 데스크에 있던 사람이 입을 열었다.“고객님, 6층에 제일 끝 방 하나밖에 안 남았는데 괜찮으실까요?”“네. 상관없어요. 체크인 해주세요.”미신까지 믿으며 굳이 6층을 원하는 사람이 제일 끝 방은 괜찮다고 하는 게 의아했지만 호텔 직원은 별 의심 없이 알겠다고 대답하고 체크인 수속을 진행했다.체크인이 끝날 무렵 서정호도 차를 세우고 황급히 로비로 들어왔다.그가 배현수와 함께 위층으로 올라가려 하자 프런트 데스크에 있는 호텔 직원이 그들을 불렀다.“고객님. 두 분 혹시 같은 방 쓰시는 걸까요? 예약은 침대 하나짜리로 하셨는데...”배현수는 호텔 직원과 입씨름을 할 겨를이 없어 서정호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남자 둘이 한 침대에서 자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요?”“아니요. 그건 아닙니다.”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호텔 직원은 말 문이 막힌 채 그들의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봤다.상대방의 기세가 하도 강하고 말투가 너무 차가워 도저히 대꾸를 할 수 없게 했다. 게다가 뭔지 모를 권력자의 느낌에 호텔 직원은 혹시라도 스위트룸까지 예약한 귀한 고객의 미움을 사면 절대 안 된다는 생각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배현수는 서정호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다.카드 키를 찍고 6층을 누르기까지 배현수의 행동은 신속하고 빈틈없었다. 그때 서정호가 물었다.“배 대표님, 만약
방금 그 여자는 배현수를 보자마자 바로 사생팬이라는 단어를 말하는 것으로 봐서 분명 조햇살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조햇살이 진짜로 조유진이 아니란 말인가? 그리고 이 여자의 목소리는 확실히 조햇살의 목소리와 비슷했다.설마... 이게 단지 우연의 일치일까?...시간을 30분 전으로 되돌리자.조금 전, 누군가가 반얀트리 호텔의 668호 스위트룸의 문을 두드렸다.똑똑.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나예요.”조유진이 일어나 문을 열며 물었다. “창민 오빠, 무슨 일 있으세요?”“저녁 안 먹었는데 배고프지 않아? 내가 알아봤는데 근처에 괜찮은 식당이 몇 군데 있더라고. 맛도 괜찮다고 블로그에 나와 있고. 같이 야식 먹으러 가지 않을래?”“좋아요. 안 그래도 마침 배가 고프던 참이었어요.”“그럼 나가자.”조유진은 돌아서서 휴대전화와 가방을 들고 엄창민과 함께 호텔을 나섰다.식당에 도착해 주문하고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기다리고 있을 때 엄창민이 입을 열었다.“한 가지 알아야 할 게 있어.”“뭔데요?”“이 반얀트리는 성행 그룹 산하에 있는 호텔이고 내가 계속 관리하고 있어. 30분 전, 호텔 기술 부서의 담당자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 호텔 투숙객의 정보가 유출되었다고 하더라고. 누군가가 호텔 시스템을 일부러 해킹해 체크인 정보를 빼내 갔다고. 그래서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지 물었어.”조유진은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이런 일은 그때그때 처리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만약 호텔 고객이 자신의 정보가 유출된 것을 알고 소송이라도 걸면 호텔에서 배상해야 할 수도 있고 호텔 평판에도 좋지 않을 것 같은데요.”반얀트리 호텔은 대제주시의 고급 호텔에 속한다.그래서 호텔에 묵으러 온 고객들도 다들 꽤 신분이 있는 사람들이라 혹시라도 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앞으로 호텔 사업이 어려울 수 있다.“너의 말이 맞아. 이런 일은 확실히 귀찮은 분쟁을 일으킬 수 있어. 하지만 시스템을 해킹한 사람이 배현수라면? 그래도 경찰에 신고해야 할까?”순간 조유진은 머
조유진이 뒤를 돌아본 순간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가 미처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상대방은 그녀를 덥석 안았고 조유진의 손에 있던 가방도 바닥에 툭 떨어졌다.“유진아! 살아있었구나. 진짜로 살아있었구나. 고마워! 넌 모를 거야. 1년 동안 내가 너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그동안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야?”남초윤은 감격에 겨워 눈시울을 붉히며 연거푸 물었다.조유진도 가장 친한 친구를 만난 기쁨에 그녀를 꼭 안으며 말했다.“초윤아. 오랜만이야.”남초윤이 다시 한번 조유진을 바라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현수 씨의 말이 맞았어! 조햇살 너 맞지?”조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실대로 말했다. “응. 최대한 숨는다고 숨었는데 결국에는 들켰네. 하지만 나도 조만간 너희들을 만나러 가려고 했어. 너를 오늘 이렇게 보니 나도 왠지 모르게 안도하게 되네? 근데 너는 여기에 왜 있는 거야?”“현수 씨가 알려줬어. 오늘 밤, 이 호텔에 와서 조햇살을 기다리라고. 그런데 현수 씨는 어디 갔지?”남초윤은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배현수는 보이지 않았다.그러자 엄창민이 그녀를 향해 말했다.“배 대표님은 이미 갔을 겁니다. 한 마디로 다 설명하기 복잡하니 초윤 씨, 같이 위층으로 올라가시죠. 하고 싶은 말들은 방에 가서 천천히 얘기해요.”그렇게 셋은 함께 호텔로 들어갔다.668호 스위트룸에 도착한 조유진은 물 한 병을 가져와 남초윤에게 건넸고 남초윤은 의자에, 조유진은 침대 옆에 앉았다.남초윤은 손을 뻗어 조유진의 얼굴을 꼬집으며 꿈인지 생시인지 확인했다. 그녀에게 지금 이 상황은 아직도 꿈만 같은 모양이다. “유진아. 정말 살아있었어! 내가 꿈꾸고 있는 거 아니지?”조유진이 남초윤의 허벅지를 꼬집자 남초윤은 아프다며 살짝 비명을 질렀다.“아파! 유진아! 오랜만에 만났는데 인사가 너무 격한 거 아니야?”그러자 조유진이 웃으며 말했다.“이제 꿈이 아닌 게 실감이 나?”두 사람은 눈시울 붉힌 채 서로를 바라보
배현수는 넋이 나간 듯 운전석에 가만히 앉아 있었고 그의 쓸쓸한 눈은 한없이 외로워 보였다.그는 이번에 반드시 조유진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하지만 또 한 번의 실망이 그의 가슴을 후벼 파고 있었다.조햇살이 조유진이 아니라니...배현수는 차 시트에 기대어 천천히 눈을 감았다.그때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고 그는 벨소리가 한참 울린 후에야 감정을 추스르고 전화를 받았다.산성 별장에서 걸려온 전화이다. 통화가 되자마자 전화기 너머로 선유가 물었다.“아빠. 어디예요? 왜 아직도 집에 안 와요?”“금방 도착해.”“빨리 오세요. 밖에 천둥이 치고 우뢰가 울어서 좀 무서워요. 비가 많이 오는데 아빠 우산은 챙기셨어요? 제가 마당으로 아빠 마중 나갈까요?”“아니야. 방에 가만히 있어. 아빠 곧 도착하니까.”“알겠어요, 아빠. 운전 조심하시고요.”“알았어.”전화를 끊자마자 배현수는 바로 차 시동을 걸었고 검은색 마이바흐 차량은 빗속을 뚫으며 여느 때보다 빨리 달렸다. 맞은편에서는 대형 트럭이 전조등을 켠 채 달려오고 있었고 배현수는 순간 그 트럭을 들이받으면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다. 그때 귓가에 선하고 여린 선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아빠. 나 무서워요. 나 떠나면 안 돼요. 알겠죠?”선유의 순진무구한 작은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려 배현수는 핸들을 꽉 잡고 브레이크를 세게 밟았다.끼익!귀에 거슬리는 타이어 긁히는 소리가 차가운 어둠을 갈랐다....다음 날 아침.남초윤은 일찌감치 산성 별장으로 향했다. 그때 배현수와 선유는 식탁에 앉아 한창 아침 식사를 하고 있다.고개를 옆으로 돌린 선유는 걸어오는 남초윤을 한눈에 알아보고 바로 외쳤다. “이모?”남초윤은 집 안으로 들어가며 큰 목소리로 인사했다.“우리 선유, 좋은 아침! 오늘 이모랑 놀러 가지 않을래?”놀러 간다는 말에 선유는 신이 나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남초윤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디로 놀러 갈까?”“쇼핑하러 갈까? 지난번에 선유가 작은 치마를
조유진은 선유에게 먹일 것을 잔뜩 주문했다.선유도 주문한 음식들을 배불리 먹고 동글동글한 아랫배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엄마, 나 돼지로 만들 거야?”조유진은 냅킨을 들고 선유 입가에 묻은 기름기를 닦아 주며 한 시도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1년 사이, 어린 선유는 키가 훌쩍 컸다. 하지만 작은 얼굴은 여전히 또래 애들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선유도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는 작은 손으로 감자튀김을 쥐고 조유진의 입가에 내밀었다.너무 오랜만에 선유가 건네는 감자튀김에 조유진은 또 한 번 눈시울을 붉혔다. 이때 선유가 먼저 입을 열었다.“엄마. 1년 동안 어디 갔었어? 아빠와 나, 우리 모두 엄마를 너무 보고 싶어 한 거 알아?”그 말에 조유진은 잠깐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음... 1년 동안 엄마에게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엄마는 절대 일부러 선유를 보러 오지 않은 게 아니야.”1년 동안 그녀는 미국에서 치료를 받으며 몸과 마음의 안정을 취하고 있었다.그리고 얼마 전에야 치료가 겨우 끝나 다시 귀국할 수 있었다.처음 미국에 갔을 때, 조유진도 선유가 너무 보고 싶어 밤을 지새운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다행히 우연한 기회에 선유와 카톡 친구가 되어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선유는 그녀의 힘든 나날들 속의 가장 큰 희망이었고 거대한 한 줄기 빛이었다. 조유진은 물티슈로 선유의 손을 닦아준 뒤 따뜻한 목소리로 물었다.“엄마가 널 떠난 건 엄마 잘못이야. 엄마 많이 밉지?”선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아니, 엄마. 엄마가 다시 내 옆에 와준 것만으로도 너무 기뻐. 엄마가 예전에는 돈도 벌고 나도 키우느라 정말 힘들었잖아. 엄마가 그때는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아. 만약 엄마가 그동안 행복하게 지냈다면 나도 너무 기뻐.”귀엽고 작은 얼굴에서 나오는 어른스러운 말에 조유진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훔쳤다.“엄마가 돈 벌어서 선유 키우는 건 당연한 거야. 선유야, 엄마가 이번에 선유 옆에 왔으니까 당분
남초윤의 말에 선유는 눈이 휘둥그레했고 작은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엄마, 정말 햇살 언니예요?”조유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선유는 입을 떡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했다. 이윽고 그는 조유진의 목을 끌어안으며 소리 질렀다.“엄마! 사인해 줘요. 우리 반 친구들에게 내가 덕질에 성공했다고 자랑할 거예요!”조유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너의 친구들도 내 노래를 들어?”선유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말했다. “많은 친구들이 이라는 노래를 들어요. 그리고 우리 학교 방송에서도 가끔이 노래를 틀어줘요. 엄마! 이 노래 부를 때 저를 생각하면서 불렀어요?”“그럼. 엄마는 항상 선유 생각만 하고 있어.”“와! 햇살 언니가 나를 생각하면서 노래를 부르다니!”조유진과 선유는 온종일 같이 있었고 그녀는 선유에게 필요한 것들을 한 아름 사줬다. 한창 걷던 세 사람은 명품가방 매장 앞에 멈춰 섰다.그러자 남초윤이 물었다.“유진아. 백 사려고?” 조유진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남초윤 씨 가장 큰 취미가 백 사는 거잖아. 들어가서 하나 골라. 가격은 신경 쓰지 말고. 오늘 남초윤 씨 백은 내가 사주지.”“대박! 유진아. 사랑해! 나의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유진! 고마워! 그럼 나도 사양하지 않을게!”몇 년 동안 남초윤은 조유진의 일이라면 자기 일처럼 발 벗고 나섰고 그래서 신세를 너무 많이 졌다. 이제 조유진은 사업도 잘되고 있고 인기검색어에 몇 번 오르면서 약간의 돈도 벌었다. 지금은 엄준에게 빚졌던 돈의 3할이자 까지 갚고도 꽤 많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남초윤에게 명품가방 하나쯤 사주는 것은 조유진에게 전혀 부담이 없었다.그리고 나중에 돈을 더 많이 벌면 그때는 가방 두게 세 개까지 사줄 수 있다. ...선유가 조유진이 사준 물건을 잔뜩 들고 산성 별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저녁 8시가 넘은 후였다.남초윤이 선유를 데려다줬을 때 배현수는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지만 아직 저녁을 먹지 않았다.“밥 먹었어?”선유는 배현수
배현수는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고 심장은 누군가가 쥐고 흔드는 듯 사정없이 격렬하게 뛰었다.“아빠, 무슨 생각 해요? 슬퍼하지 마세요. 제가 엄마를 따라간다고 해도 자주 아빠 보러 집으로 올게요.”선유가 배현수의 팔을 잡고 흔들어서야 배현수는 겨우 이성을 되찾았다.그는 선유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정말 엄마를 만났어?”조금 전 선유가 엄마라는 단어를 말하기 전까지 그는 환청이 들린 것이라 생각했다.하지만 그게 아니다. 선유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오늘 엄마와 이모 이렇게 우리 셋이서 온종일 쇼핑했어요. 이것저것 아주 많이 샀고 밥도 두 끼나 같이 먹었어요. 참! 우리 셋이 사진도 같이 찍었어요.”선유는 옷 주머니에서 작은 휴대전화를 더듬어 꺼냈다.이것은 배현수가 선유에게 사준 것이다.그는 갤러리를 열고 배현수 앞으로 휴대전화를 내밀며 말했다.“여기 봐요. 우리 사진 엄청 많이 찍었어요.”사진 속의 조유진은 선유와 얼굴을 맞대고 활짝 웃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언제나 그렇듯 화사하고 부드러웠다.그리고 창문에서 비친 햇빛이 그녀의 몸을 비춰 그녀의 예쁜 얼굴에 은은한 금빛이 코팅된 듯했다.하지만 큰 병을 앓고 난 탓인지 그녀는 당장이라도 부서질 듯 전보다 훨씬 야위었다. 사진 속 조유진의 모습에 배현수의 심장이 욱신욱신 쑤셨다.그는 그 사진들을 보며 한참 동안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그러자 선유가 배현수 앞으로 고개를 내밀며 초롱초롱한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아빠, 엄마가 드디어 돌아왔는데 한 번 노력해서 쟁취해 보는 게 어때요?”선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선유의 휴대전화에 카톡 알람이 울렸다.햇살 언니가 보낸 메시지였다.「선유야, 집에 잘 도착했어?」선유의 휴대전화를 손에 들고 있던 배현수도 화면에 뜬 메시지를 보았고 그는 내용을 보자마자 선유에게 물었다.“엄마가 조햇살이야?” “네! 아빠! 아빠도 햇살 언니를 알아요? 햇살 언가 인터넷에서 부른 노래가 매우 유명해요. 우리 반 친구 중
배현수는 담담한 얼굴로 ‘응’이라고 대답했다. 선유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한마디 보탰다.“아빠. 엄마가 아빠를 거절해도 화내지 말고 다독여야 해요. 여자들은 다독여 주는 사람을 좋아한단 말이에요. 만약 화를 내면 여자들은 더 상대를 안 하려고 할 거예요.”“알았어. 무슨 꼬마애가 잔소리가 이렇게 많아. 시끄러우니까 빨리 목욕이나 해.”선유는 눈살을 찌푸리고 꼬마 어른처럼 한마디 보탰다.“아빠, 그것 봐요. 또 짜증 내잖아요. 여자에게 시끄럽다고 말하면 안 돼요.”그 말에 배현수는 말문이 막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선유는 노란 오리 슬리퍼를 신고 2층으로 올라갔다. 선유는 아빠가 너무 직설적인 사람이라 엄마가 싫어하는 게 너무 이해됐다. 어린 선유조차 이럴 때면 아빠가 한심한데 어떡하겠는가....아래층에서 배현수는 선유의 휴대전화를 쥐고 소파에 앉았다.햇살 언니와 나눈 카톡 대화창을 켠 배현수는 선유 대신 그녀에게 답장했다. 「응, 집에 도착했어.」조유진은 이 답장에 별 의심 없이 물었다.「온종일 밖에서 노느라 피곤하지? 일찍 자. 며칠 후에 또 엄마와 놀러 가자.」그러자 선유의 ‘학교에 가기 싫어’아이디가 그녀에게 회신했다.「안 피곤해.」「그럼 좀 더 얘기할래? 우리 아기, 지금 10시가 되었는데 아직 안 자면 키가 크지 못하는데.」이 답장을 본 배현수는 눈을 찡긋하며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학교 가기 싫어’ 아이디로 다시 한번 그녀에게 회신했다.「나는 키가 이미 충분히 커.」조유진은 선유가 애교를 부린다고 생각해 웃는 이모티콘을 보냈다.「응. 우리 아기 최고.」배현수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순간 망설였다. 그러자 조유진도 더 이상 답장이 오지 않았다. 그때 배현수는 긴 손가락으로 재빨리 몇 글자를 쳤다.「대제주시에 얼마나 있다가 갈 거야?」하지만 ‘보내기’ 버튼은 계속 누르지 못한 채 삭제했다 다시 쓰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배현수는 처음으로 이렇게 뻔뻔한 일을 했다. 아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