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조금만 더 빨리 이를 알았다면, 폐암도 진단받지 않았다면, 우울증도 재발하지 않았다면... 조유진은 반드시 진작에 안정희와 선유를 데리고 대제주시를 떠나, 충남시를 떠나, 모든 것들을 버려두고 떠나버렸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조유진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엄마, 전 못 가요. 저 지금은 반드시 시내에 있어야 해요. 법원과 관련 부서에서 언제든지 나를 심문하려고 할 거예요.”“유진아, 너 왜... 그렇게 바보 같니? 배현수가 뭐라고 걔를 위해 증언을 번복한다고 너까지 끌어들여. 이럴 줄 알았다면 배현수를 멀리하라고 했을 텐데. 배현수가 육성준의 아들일 줄 누가 알았겠어... 유진아, 미안해. 다 엄마 탓이야. 다 엄마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왜 그래요, 엄마. 조범은 그해 엄마로 날 협박하는 게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써서라도 저더러 배현수를 지목하게 했을거예요. 그러니 모두 어떻게든 일어나게 될 일들이었어요.”전화 건너편의 안정희가 입을 틀어막고 작은 소리로 흐느끼기 시작했다.“넌 왜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해주는 거니? 넌 언제쯤... 언제쯤 너 자신을 먼저 챙길 거야? 난 차라리 네가 이기적이었으면 좋겠어. 너 저번에 나 보러 왔을 때 맡겨둔 은행카드도 배현수를 위해 사건을 뒤엎고 돌아오지 않을 계획이었던 거지? 난 왜 이제야 발견한 거지? 글쎄 요즘 따라 이상하게 눈꺼풀이 자꾸 뛰면서 무슨 일이 생길 것 같다 하더니..”“엄마, 속상해하지 마세요. 저 아직 멀쩡하잖아요. 게다가 배현수도 저에게 복수한다고 말한 적 없어요. 그 짓은 모두 조범이 한 거고 배현수는 그 정도로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에요.”“유진아, 엄마 말 들어. 배현수에게서 멀리 떨어져. 배현수는 사랑이나 원망 감정이 극단적이라 쉽게 잘못된 길에 들어설 수 있어. 언제 갑자기...”“네. 알겠어요, 엄마. 앞으로는 배현수와 엮이지 않을게요.”조유진도 더는 배현수와 엮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어떤 일들은 결과가 있을 수 없는 운명이
“아니, 오빠! 조씨 집안 그 누구와도 알고 지내면 안 돼. 그 집안은 더럽기 짝이 없어.”강이진의 말투에는 혐오가 가득했다.그녀는 조씨 가문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그 집안이 미웠다.조유진이 나타나면 현수 오빠는 바로 마음이 약해진다. 심지어 친오빠인 강이찬조차 그녀를 감싸고 있다. 도대체 조유진 이 여자는 뭐가 그리 잘 났단 말인가? 강이찬은 여동생의 행동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바로 휴대전화를 가로채며 말했다.“강이진, 내 일에 상관하지마! 그리고 경고하는데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현수 오빠가 말하길 너의 이 고약한 성격을 고치지 않으면 출근하지 말래.”“뭐라고? 그럴 리가! 현수 오빠가 어떻게 나를 쫓아낼 수 있어? 오빠, 설마 오빠가 현수 오빠에게 시킨 거 아니야? 나 쫓아내라고?”“너의 현수 오빠가 나에게 직접 한 말이야. 너의 이 고약한 성질머리를 고치지 못하면 SY도 더 이상 너를 받아드릴 수 없다고 했어.”강이진은 입술이 하얗게 될 때까지 꼭 깨물었다.그런 그녀는 갑자기 뭔가 생각이 난 듯 손뼉을 치더니 입을 열었다.“알겠어. 지난번 지리산에서 내가 조유진을 괴롭힌 것 때문에 현수 오빠가 나를 혼내주려 거야. 조유진 이 여자가 화근이야, 화근!”“네 마음대로 생각해. 하지만 나도 너의 현수 오빠 의견과 같아. 내 생각에도 너의 이 고약한 성격으로 SY그룹에 머무르기 어려워. 적어도 지금 현재는 그래.”“오빠!”강이진이 큰 소리로 강이찬을 불렀고 그녀가 화를 내며 더 쏘아붙이기 전에 강이찬은 휴대전화를 손에 쥔 채 차 키를 들고 집을 나섰다.강이진은 이를 악물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그래! 하나둘 다 조유진 편이다 이거지?’ 강이진은 배현수가 자신을 여자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설사 배현수가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배현수의 엄마에게만 잘 보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배현수의 엄마가 자신을 좋아하고 자신의 편에 서면 효자인 배현수는 무조건 엄마 말을 들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예
“나쁜 여자? 어머님, 누구 말씀하시는 거예요?”예지은은 멀지 않은 곳의 안정희를 보고 매우 흥분했다. “바로 저 여자야! 저 여자와 저 여자의 남편이 성준 그룹을 망하게 했어. 저 여자는 조범의 아내야. 나는 저 여자에게 확실히 묻고 싶은 게 있어!”조범의 아내?그렇다면 설마... 저 사람이 조유진 엄마?강이진의 눈빛이 반짝이더니 예지은을 보며 바로 입을 열었다.“어머님, 저와 같이 가서 물어봐요.”안정희가 휠체어에 앉아 혼자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예지은이 그녀의 눈에 띄었다.안정희는 눈빛이 살짝 흔들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예지은 씨... 역시 당신이었군요. 안 그래도 당신을 찾으러 가야 하나 망설이고 있었는데... 당신은...” “안정희! 빨리 증언하러 가! 그들에게 조범이 성준 그룹을 망하게 했다고 사실대로 말하라고!”예지은은 흥분하며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안정희는 휠체어의 브레이크를 하지 않아 예지은의 손에 잡혀 휠체어에 앉은 채 앞뒤로 휘청였다. “지은 씨, 흥분하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봐요...”“네가 성준 사업을 망하게 했어! 빨리 자수하러 가라고!”안정희는 예지은의 팔을 뿌리치고 그녀를 진정시킨 후 설명하려 했다. “당신과 조유진, 정말 모녀답네요... 모두 다 화근이에요! 현수 오빠의 아버지까지 죽이고!”강이진은 예지은을 부축하면서 안정희의 휠체어를 발로 걷어찼다.순간 휠체어는 가파른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지며 순식간에 부서졌다.휠체어에 앉아 있던 안정희도 계단에서 몇 바퀴 구르더니 부서진 휠체어 옆에 쓰러졌다.순간 예지은과 강이진은 어리둥절해 서로를 바라봤다.계단 아래에는 부서진 휠체어가 옆으로 쓰러져 있었고 안정희의 머리 아래로 시뻘건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마도... 죽은 것 같다.강이진은 입술을 덜덜 떨었다. “어... 어머님. 저 여자 설마 죽은 건 아니겠죠?”예지은은 얼굴이 창백해졌고 문뜩 겁이 나기 시작했다.“내가... 민 게 아니야. 나는 그저... 증언해 달라고만 말하려고 했어.
강이진은 도망치듯 차 안으로 들어가 급히 시동을 걸었고 요양원 근처를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액셀을 힘껏 밟았다. 끼익!한참을 달리던 차가 귀에 거슬리는 브레이크 소리를 내며 아무도 없는 외진 곳에 멈춰 섰다.급브레이크 때문에 강이진의 얼굴이 핸들 속으로 파묻혔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두 손으로 핸들을 꽉 잡고 있는 그녀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예지은이 그 여자를 밀어버렸어. 내가 아니야! 나는 아무것도 몰라! 예지은이 말을 한들 정신병 환자의 말을 누가 믿겠어? ’게다가 정신병 환자의 자백은 법정에서 증언으로 채택될 수 없다.‘내가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거지? 전혀 두려워할 게 없는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강이진은 고개를 들어 백미러를 바라보았다.그녀는 휴지 한 장을 꺼내더니 얼굴의 식은땀을 천천히 닦아냈다.겁에 질렸던 눈빛이 순간 음흉하고 계산적으로 변했다.강이진이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한,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조유진, 조유진! 이번에야말로 너와 배현수는 정말 끝이야!’하늘이 이렇게 그녀를 도울 줄은 아무도 몰랐다.예지은의 손을 빌려 조유진의 어머니를 없앨 기회를 주다니!이제 예지은의 약점도 강이진의 손에 있기에 만약 예지은이 자신과 배현수의 사이를 반대하기라도 하면 강이진은 바로...강이진은 입술을 꼭 깨물더니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강이진은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들 것이다.그녀는 안승호에게 전화를 걸었고, 통화음이 몇 번 울리더니 이내 전화가 연결되었다.“여보세요? 안승호, 술 마시러 나와.”“대낮에 무슨 술이야?”강이진은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 “너 원래 대낮에 방탕하게 노는 거 좋아하잖아. 성라 술집에서 만나. 기다릴게.”전화를 끊은 강이진은 팩트 케이스를 열어 화장을 고친 후 립스틱을 발랐다.얼굴은 평소와 같이 침착하고, 조금 전의 당황스러움은 전혀 보이지 았않다.블랙박스의 영상도 깨끗이 지웠다.그녀는 조유진
얼마 지나지 않아 법의관이 현장에 도착했다.“당신이 고인의 유가족입니까?”조유진은 점점 차갑게 굳어가는 그녀의 몸을 꼭 껴안은 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고인?“우리 엄마 안 죽었어요. 그냥 잠이 든 거예요. 의사 선생님. 살려주세요... 저희 엄마 예전에도 의식을 잃은 적이 있고요. 몇 년 동안 혼수상태이시긴 했지만 다시 깨어났어요. 저희 엄마 곧 일어나실 거예요.”이런 상황을 법의관은 예전부터 많이 봐왔기에 한 번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죄송해요. 저는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아니라 시신을 부검하는 법의관이에요. 죽은 사람 이름이 안정희, 맞습니까?”조유진은 안정희를 꼭 껴안았고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그저 안정희가 살아있고 그래서 의사를 보이러 가야 한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의사를 보이지 않는다면 집에라도 데려갈 것이다.그녀는 안정희를 안아 세우고 싶었지만 그녀 혼자서는 도저히 힘에 부쳤다.“이보세요. 당신의 어머님이 자연사하신 게 아니기에 저희는 사인을 확인해야 합니다. 고인을 놓아주세요.”조유진은 핏기없는 얼굴로 안정희를 끌어안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법의관은 할 수 없이 옆에 모자를 쓴 한 중년 남자에게 손짓했다.그러자 모자를 쓴 중년 남자는 장갑을 끼고 앞으로 나와 조유진과 안정희를 억지로 끌어당겨 떼어놨다.조유진은 옆으로 끌려가 바닥에 엎드려 있었고 두 손에는 시뻘건 피가 흥건히 묻어 있었다.분명 아침까지 안정희와 통화를 했는데 왜 갑자기 여기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오랜 기간 열심히 정성을 다하여 돌봤고 마침내 다시 깨어났는데 어떻게 또 다시 긴 잠에 빠질 수 있는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만약 조유진이 벌을 받아야 하는 거라면 그녀는 이미 최선을 다해 죗값을 치르고 있었고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칠 수 있다.하지만 왜... 왜 하늘은 그녀의 제일 소중한 사람에게 벌을 주는 것일까...조범은 그녀에게 부성애를 느끼게 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죄송합니다. 저희 어머니가 정신적으로 좀 문제가 있으셔서 약간 상황파악을 잘 못하십니다.”그러나 조 팀장은 이대로 넘어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방금 요양원 직원에게 물어보니 어머니가 전에 고인과 불화가 있었고 심지어 때리기까지 했다는 게 사실입니까?”배현수는 부인하지 않았다.“사실 저희 어머니가 가끔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사람을 잘 못 알아보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요양원의 여러 환자와 크고 작은 마찰을 빚은 적이 많아요.”배현수는 흠 잡을 데 없이 대답했다.조 팀장은 그 말을 듣고 한 번 피식 웃더니 날카로운 눈빛으로 배현수의 뒤에 있는 예지은을 바라봤다. 조 팀장의 눈빛에 배현수의 뒤에 있던 예지은이 온몸을 덜덜 떨며 말했다.“나는 저 여자를 밀지 않았어... 내가 아니야... 저 여자는... 저 여자는 혼자 굴러떨어진 거야... 나는 정말 저 여자를 밀지 않았어...”“저 사람이 구르는 것을 직접 봤습니까?”조 팀장이 예지은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갑작스럽게 물었다.이 행동에 예지은은 화들짝 놀라 아무 말도 못 한 채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그때 조 팀장이 옆에 있는 팀원들을 향해 말했다.“이 요양원에 죽은 사람과 불화가 있는 사람이 있는지, 아니면 원한을 가진 사람이 있는지 한 번 알아보세요.”배현수의 얼굴은 여전히 덤덤했고 예지은은 배현수의 뒤에서 그의 옷을 잡아당겼다. 그는 예지은의 불안한 손을 꼭 잡으며 무엇인가 알고 있는 듯했다.조 팀장의 뒤에 모자를 쓰고 있던 두 젊은이는 볼펜과 노트를 들고 주위 사람에게 물어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때 조유진이 갑자기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두 눈에는 눈물 한 방울 고이지 않았다.그녀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조사할 필요 없어요. 우리 엄마는 이 요양원에서 3년 동안 모든 사람과 잘 지내셨어요. 원수를 질만 한 사람도 누구와 싸운 적도 없어요.”“조유진 씨, 어머님의 죽음은...”조유진의 말에 조 팀장이 무언가 말을 하려 했지만 끝까지 내뱉지는 못
조유진은 명함을 받으며 입을 열었다.“고맙습니다. 조 팀장님.”옆에 있던 원장님도 한마디 보탰다.“이효준 씨, 운구차를 한 대를 더 불러 유진 씨를 집까지 데려다주세요.”조유진과 몇 명의 간병인은 곧 바로 안정희의 시체를 안으로 옮겼다.배현수의 옆을 지나면서도 조유진은 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고 바로 스쳐 지나가려 했다.그때, 배현수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조유진은 피식 웃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배 대표님. 제 몸에 피가 묻어 있어서 대표님 손을 더럽힐 거예요.”배현수와 조유진 사이에는 마치 그들을 두 개의 세계로 갈라놓은 듯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었다.그 장벽은 투명하여 만질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으나 너무 견고하여 쉽게 무너뜨릴 수 없다. 조유진은 배현수의 손을 뿌리치며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갔고 한 번도 고개를 뒤로 돌리지 않았다.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배현수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시리고 아팠으 찰나의 순간에 마음이 쿵 내려앉으며 온 세상을 잃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안정희의 시체가 방으로 옮겨졌다.방에 들어온 조유진은 따뜻한 물에 깨끗한 수건을 씻은 후 안정희의 몸을 구석구석 천천히 닦았다.그녀는 또 옷장에서 부용화 꽃이 수 놓인 한복을 발견했다.이것은 조유진이 안정희의 생일에 준 선물이다. 안정희는 이 한복을 그 무엇보다도 제일 좋아했다. 안정희는 살아있었을 때도 이 옷을 입기 아까워했다. 그녀는 항상 우리 유진이가 결혼할 때 입을 거라고 말하곤 했었다.하지만 오늘은 그녀가 마지막으로 이 한복을 입는 날이다.그리고 조유진이 결혼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조유진은 안정희에게 한복을 갈아입혔고 머리를 단정히 빗겨주었다.모든 정리가 끝났지만 조유진은 서둘러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그녀는 침대 옆에 앉아 담담한 얼굴로 안정희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집에는 안 모시고 갈게요. 제가 사는 곳도 세 맡고 사는 곳이라 거기도 우리 집이 아니에요. 우리 집은 진작부터 없었어요. 엄마 혼자 저 하늘에서 외롭지 않도록
“유진아... 많이 슬픈 거 알아. 그러니까 울고 싶으면 얼마든지 울어.”남초윤은 지나치게 평온한 조유진의 얼굴을 보니 덜컥 겁이 났다.그녀의 눈에서 생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외로움과 좌절로 시들어 있다.사람은 죽기 전에 몸에서 쇠퇴한 기운을 내뿜는다고 했다. 지금 조유진의 온몸을 감싸고 있는 것 또한 무서운 죽음인 것 같았다.남초윤은 그녀를 도와 문을 열었고 조유진은 유골함을 안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그녀는 조심스럽게 유골함을 탁자 위에 올려놓더니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남초윤에게 물었다. “초윤아, 마땅한 묫자리 좀 알아봐 줄래? 내일 아침 일찍 유골함을 묻으려 해.”이 말을 하는 조유진은 매우 냉정했고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한 마디 한 마디 또박또박 내뱉으며 내일 일에 대해 조리 있게 설명했다. 남초윤은 그런 조유진의 모습에 잠시 멍해졌지만 이내 대답했다.“응. 알았어. 바로 확인해 볼게.”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남초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친구에게 부탁해서 남산 묫자리 좀 알아봐 달라고 했어. 그곳이 풍수지리도 좋고 여기와의 거리도 그리 멀지 않아. 어때?”“좋아. 나도 남산 묫자리가 좋다고 들었어.”남초윤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고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조유진이 무서울 정도로 냉정하다고 생각했다. 남초윤은 조유진을 와락 껴안으며 외쳤다.“유진아! 그냥 울어.”조유진은 가족이 별로 없다. 정확히 말해 이 세상에서 안정희와 어린 선유 두 사람밖에 없다.조범은 개돼지만도 못한 인간이라 그저 명목상의 아버지에 불과했다.이제 안정희가 조유진 곁을 떠났으니 목숨 반을 잃은은 것과 다름없다.그녀가 지금 이렇게 침착한 이유는 진짜 큰일이 날까 봐 걱정되어서다.“유진아. 네가 매우 힘들다는 거 아니까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돼. 어머니는 떠나셨지만 너에게는 선유가 있잖아. 그리고 나도 있고.”조유진은 생기가 없는 눈으로 입을 열었다.“아, 맞아. 선유가 있었지... 선유는 이미 현수 씨에게 보냈으니 현수 씨가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