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영원이라기엔 너무 오랬다.조유진도 처음에는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영원히 함께하겠다고 했지만 ‘영원히’라는 단어는 마치 밤하늘에 타오르는 불꽃처럼 한순간 아름답게 빛나다 사라지고 말았다.배현수는 귀여운 조선유의 얼굴을 보면서 진심으로 말했다.“영원까지는 아닌데 지금은 용서가 안 돼.”눈시울이 붉어진 조선유는 입이 삐쭉 나온 채 말했다.“그런데 엄마도 많이 속상해할 거예요. 할머니와 아빠 중에서 한 분만 선택하라고 했을 때 할머니를 선택하긴 했어도 아빠한테 미안해서 많이 속상했을 거예요.”조선유가 어린 나이에 선택이라는 고통을 알고 있을 줄 몰랐다.그렇다. 양자택일은 어느 것을 선택하든 옳고 그름이 없었다.그해 조유진이 배현수를 용의자로 지목하지 않았어도 조범이 충남 시장의 신분으로 그를 감옥에 보냈을 것이다.하지만 배현수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뼈저리게 배신을 증오했다.만약 그해 자신을 용의자로 지목한 사람이 조유진이 아니었다면...그는 조선유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말했다.“아빠와 엄마 사이가 어떻든 선유는 아빠 딸이야. 엄마보다 더 많이 사랑해주겠다고 약속할게.”“아빠, 미안해요.”배현수는 멈칫하더니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왜 미안하다고 하는 거야?”“아까 나쁜 사람이라고 욕해서요.”배현수는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그래서 지금은 아빠랑 말할 수 있겠어?”“응! 노력해볼게!”울어서 코맹맹이 소리가 났지만 조금은 도도해 보였다.그 부분은 배현수를 닮은 듯했다.배현수는 조유진과 많이 닮은 조선유의 얼굴을 보면서 마음이 흔들렸다.“6년 동안 엄마랑 잘 지냈어?”조선유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절레절레 저었다.“잘 지냈다는 거야 아니면 잘 못 지냈다는 거야?”배현수는 궁금한 표정으로 조선유를 바라보았다.“상황에 따라 좋을 때도 있었고 나쁠 때도 있었죠.”어른의 말투였다.배현수는 인내심을 가지고 물었다.“어떤 부분이 좋았고 또 어떤 부분이 나빴어?”“아빠, 많이 궁금해요? 엄마를 아직
소파에 앉아있던 배현수는 심각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잡고 있었다.‘유진이는 알코올에 알레르기 반응이 있는데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고?’장셰프가 다가와서 물었다.“대표님, 저녁에 혹시 드시고 싶은 음식이 있으십니까?”별로 입맛이 없는 배현수는 레고를 쌓고 있던 조선유에게 물었다.“선유야, 먹고 싶은 거 있어?”조선유는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말했다.“음... 계란찜 먹고 싶어요.”“그러면 계란찜 준비하겠습니다. 만약 특별히 드시고 싶은 거나 가리시는 거 없으시면 오늘 메뉴대로 진행하겠습니다.”배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조선유는 레고 설명서를 들면서 물었다.“아빠, 이거 할 줄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요? 도와주세요.”잠깐 넋 놓고 있던 배현수가 듣지 못하자 조선유가 그의 다리를 툭 치면서 말했다.“아빠? 아빠도 멍때릴 때가 있어요?”“...”배현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설명서를 쭉 훑어보더니 레고를 마저 완성했다.조선유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물었다.“아빠, 아까 나랑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한 거 혹시 엄마예요?”배현수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반포 술집.조유진과 남초윤은 모두 만취한 상태였다.육지율은 남초윤을 집에 데려가고 싶었지만 남초윤은 가려고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손을 뿌리치더니 말했다.“여보세요, 누구세요! 술 취했다고 어떻게 꼬셔서 호텔로 데려가 볼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꿈 깨요! 유진아... 유진아! 일어나봐!”남초윤은 진작에 취한 상태로 바에 엎드려 있는 조유진을 흔들었다.“자, 계속해서 마셔...”조유진은 한쪽 팔로 짚고 일어나더니 계속해서 술잔에 술을 부었다.바닥난 술병을 아무리 흔들어보아도 몇 방울밖에 흘러나오지 않았다.조유진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바텐더에게 물었다.“술 더 주세요! 도수가 높은 거로요!”“손님, 더 마실 거예요?”바텐더가 술값을 계산 안 하고 도망칠까 봐 물어보는 줄 알고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놓더니 말했다.“돈 있으니까 얼른 술이나 주세요!”바텐더는 냉큼 술을
“저기요... 저는 남편이 없는데.. 혹시... 카톡 추가하실래요?”딸꾹질까지 하는 그녀의 모습에 육지율의 얼굴은 순간 어두워졌다.완전히 인사불성 된 모양이었다.그리고 한쪽에 있는 조유진의 상태는... 남초윤보다도 더 심각했다.술병을 하나 들고 비틀비틀 일어서더니 중얼거리면서 무대를 향해 걸어갔다.“무슨 노래야... 정말 별로네...”남초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유진아, 네가 가서 불러. 네가 훨씬 더 잘 불러!”“하하... 너도 그렇게 생각해?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조유진은 술병을 들고 비틀비틀 무대로 걸어갔다.무대 앞에 낮은 계단이 있는 것을 확인하지 못하고 그대로 발에 걸려 중심을 잃으면서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됐어... 이대로 그냥 죽지 뭐.’이대로 죽자는 생각에 발버둥도 치지 않았다.하지만 생각했던 것처럼 아프지는 않았다.누군가 길고 단단한 팔로 따뜻하고 넓은 가슴에 그녀를 안았다.눈을 뜬 조유진은 눈앞에 놓인 익숙한 얼굴에 놀라면서 손에 쥐고 있던 술병을 그대로 놓고 말았다.“쨍그랑!”술병이 깨져 술이 흘러나왔다.배현수는 어두운 눈빛으로 차갑게 쳐다보았다.“미친 거 아니야?”‘미쳐? 난 안 미쳤는데? 그냥 죽고 싶을 뿐이지.’“현수 씨? 아니... 왜 여기에... 역시 술에 취하면 환각이 보인다니까...”‘현수 씨가 왜 여기에? 날 찾으러 술집까지 온 건가? 말도 안 돼.’조유진은 그의 팔목을 잡고 겨우 중심을 잡고 일어섰다.취기로 인해 평소에 부드럽고 내성적이던 성격이 대담해지면서 배현수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말했다.“고마워요.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아서. 뭐 선심 써서 다른 곳에 가서 죽을게요. 아니면... 이곳 장사도 잘 안 될 텐데.”말을 끝내자마자 주춤거리면서 뒤돌아갔다.이때 배현수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손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갑자기 배현수가 자신을 들어안았다.그래서 그저 멍하니 그의 얼굴을 쳐다만 볼 뿐이었다.“도대체... 현수 씨 맞아요? 제 환각인가요?”“아니에요. 환각일
“...”배현수의 표정은 더없이 차가웠다.하지만 조유진은 여전히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저기요, 제가 한마디 해야겠어요. 누나랑 집에 가고 싶으면 그런 표정을 하면 안 되죠. 지금 그 표정 우리 집 냉장고보다도 더 차가워... 프로페셔널하게 웃어야지.”조유진은 시범으로 미소를 보여주면서 배현수더러 웃어보라고 했다.결국, 이 남자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지고 말았다.조유진은 할 수 없다는 듯 비틀비틀 일어서더니 배현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손으로 만지면서 한숨을 내쉬었다.“음... 이 얼굴이 아까워. 표정은 그래도 잘생겼으니까 누나 스타일인 거 봐서 누나 집 함께 가줄게.”배현수의 넥타이를 잡더니 앞으로 끌어당겼다.“조유진!”배현수는 어두운 표정으로 이를 꽉 깨물었다.조유진은 술에 약해 술만 마시면 주정을 부리곤 했다.하지만 지금은 술 취한 마당에 무서운 것이 없었다.배현수를 알아보지도 못했기 때문에 전혀 무서울 것이 없었다.그의 잘생긴 얼굴을 툭툭 치더니 말했다.“왜 또 소리 질러. 자식, 성질하고는. 도련님까지 되었으면서 성질은 왜 그렇게 더러워? 잘생기면 다야? 버릇을 고쳐야겠네.”또 넥타이를 잡아 끌어당기자 배현수는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조유진은 중심을 잃고 그의 가슴에 부딪히고 말았다.두 사람은 그렇게 몇 초간 서로 마주 보게 되었다.조유진은 갑자기 피식 웃더니 말했다.“결국 너도 적극적인 거 좋아하는 구나?”“조유진...”배현수가 한마디 하려고 하자 조유진은 부드러운 입술로 그의 입술에 입맞춤하더니 어질어질한 채 결국 그의 품에서 잠들고 말았다.눈을 감은 상태로 중얼거렸다.“누나 돈 있어... 술 줘...”“...”배현수는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고 한숨을 내쉬더니 차에 태워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그녀를 침대에 눕혔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산성 별장 번호였다.전화를 받자마자 조선유가 물었다.“아빠, 엄마 어떻게 되었어요?”“술에 취해서 집에 데려다줬어.”“아, 그래요? 엄마 괜찮아요?”배현수는
오늘 저녁 술집에 조유진을 데리러 간 것은 그저 조선유의 엄마여서기 때문이었다.배현수에게 조유진은 그저 조선유의 엄마라는 것 외에 다른 의미는 없었다.그저 그런 존재였다....조선유를 산성 별장으로 보내고 나서, 집에서 술을 엄청 많이 마시고 3일 내내 잤다.월요일 SY 판매팀에 출근했을 때 반가운 손님을 만났다.“엄 어르신?”엄준은 조유진을 아주 많이 반가워했다.“유진 씨, 또 만나게 될 줄 몰랐네요. 그런데... 왜 전보다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 요즘 일이 많이 힘든가요?”엄준은 관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조유진은 애써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그러게요. 엄 어르신, 오늘 건물 보러 오셨어요?”“아, 저번에 구매한 저택 보러 왔어요. 오늘 시간 되시면 혹시 함께 보러 갈 수 있을까요?”“그럼요.”조유진은 엄준과 함께 환우 그룹 아파트로 향했다.“제 기억으론 6동 13층이었던 것 같은데, 맞으시죠?”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조유진은 엄준과 함께 6동으로 들어갔다.엄준은 지난번 계약과 관련된 일이 떠올라 슬쩍 말을 꺼냈다.“지난번에는 미안해요. 유진 씨와 계약하려다 시간이 촉박해서 그냥 다른 분이랑 계약해버렸어요. 나중에야 유진 씨 업적이 빼앗겼다는 걸 알았어요.”“괜찮아요, 어르신. 누구와 계약을 맺든 다 저희 회사 고객님인걸요.”엄준은 자애로운 눈빛으로 조유진을 쳐다보았다.조유진은 얼굴에 뭐가 묻었는 줄 알고 물었다.“어르신, 왜 그러세요?”“처음 봤을 때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었어요. 마치 딸을 보는 것 같았어요. 유진 씨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죠?”“올해 24살입니다. 어르신 따님은 몇 살이세요?”엄준의 표정은 갑자기 슬퍼졌다.“딸이 태어났을 때 누군가 안고 가서 아직 찾지 못했어요. 올해로 24살이 되었을 거예요.”“죄송해요, 어르신.”“괜찮아요. 몰라서 물어본 건데요 뭐. 회사업무 때문인 것도 있고 운이 좋으면 딸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이번에 대제주시에 온
SY 판매팀으로 돌아간 조유진은 컴퓨터를 열어 문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사직서」계속 써 내려가려고 했을 때 옆에 있던 동료가 흥분하면서 말했다.“방금 단톡방에서 이번 주에 지리산에서 워크숍 한대요! 지리산 호수공원 캠핑장 정말 가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가볼 수 있게 되었네요!”“저번 회사창립 기념일에 워크숍에 대해 언급하지 않길래 저는 올해 워크숍이 없을 줄 알았어요.”“유진 씨는 참 운도 좋아. 입사한 지 한 달 만에 워크숍도 가보고.”조유진은 작성하려던 사직서를 꺼버리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북한산 캠핑장 재밌어요?”“그럼요. 거기 호수도 엄청 넓고 바다같이 맑아서 사진 찍으면 예쁘게 나올 거예요.”‘바다같이...’조유진은 끌리기 시작했다.지금까지 살면서 바닷가도 가보지 못한 촌놈이었다.예전에는 나이가 어려서이기도 했고 조씨 가문에서 잘해주지 못한 것도 있었다.나중에는 배현수와 헤어지고 조선유도 생기면서 생활의 무게로 더욱이 여행을 갈 기회가 없었다.죽기 전에 바다 같은 호수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워크숍이 끝나고 사직서를 내려고 다짐했다.조유진이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핸드폰이 울렸다.발신자는 신준우였다.핸드폰을 들고 사무실 밖에 있는 복도에 가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선생님, 무슨 일이 있으세요?”신준우가 대제주시를 떠난 이후 처음 하는 통화였다.“아무 일도 아니에요.”그냥 조유진이 보고 싶어서 전화했을 뿐이었다.신준우는 쑥스러움이 많은 성격이라 보고 싶었다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조유진이 물었다.“서울병원에서 습관은 되세요?”“방금 왔을 때는 습관이 안 되었었는데 한 달이 지나니까 많이 적응되었어요. 참, 유진 씨는요? 잘 지냈어요?”“저는 그대로죠. 뭐.”전화기 너머의 신준우는 몇 초간 망설이더니 그래도 그녀에게 미리 알려주리라 다짐했다.“깜짝 놀래주려고 했는데 유진 씨 목소리를 들으니까 더는 숨기지 못하겠네요.”“뭔데요?”“그게... 저희 부모
조선유가 산성 별장의 전화로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최소 한 시간 동안 통화하면서 아빠가 주말에 만나는 것을 동의했다고 말했다.통화를 마치고, 결국 미련이 남는지 창문을 닫았다.조선유가 곁을 떠난 일주일간, 그리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별거 없는 인생이었지만 주말에 딸을 만나는 것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동기가 될 수 있었다....곧 관광버스가 지리산 근처에 도착하고, 옆에 있던 동료가 그녀를 깨웠다.“유진 씨, 그만 자요. 지리산 다 왔어요. 이제 내려야 해요.”조유진은 눈을 뜨자마자 차창 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푸르른 호수를 마주하게 되었다.그전까지만 해도 동료가 지리산 호수가 바다 못지않게 아름답다는 말에 반신반의했지만 직접 보니 정말 바다와도 같았다.차에서 내리자 시원하고 산듯한 호수 바람이 불어왔다.교외는 시내보다 시원했고 더욱이 오늘은 햇빛도 강렬하지 않아 날씨가 아주 적당했다.지리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점심이라 각 팀은 호숫가에서 바비큐 구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조유진은 산에 가서 땔감을 찾아와야 했다.땔감을 한 웅큼 안고 돌아가려다 배현수 일행과 마주하게 되었다.육지율과 강이찬, 강이진도 함께 있었다.강이진은 조유진을 보자마자 화가 치밀어 올라 일부러 시비를 걸었다.“유진 씨, 땔감이 다 젖었는데 불이 붙겠어요?”조유진은 텅 빈 그녀의 두 손을 보더니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말랐든 젖었든 일단 줍긴 했잖아요. 빈손인 강이진 씨보단 낫죠.”“너...”강이진은 지난번 일로 조유진을 더 증오하게 되었다.“퍽!”강이진은 조유진이 품에 안고 있던 땔감을 손으로 툭 내리쳤다.며칠 전 배현수가 조선유만 받아들이고 조유진에게는 자식 덕에 팔자 고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배현수 앞에서 이런 짓을 할 수 있었다.조유진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다.‘조유진이 그래도 아이 엄마인데 이 정도로 냉철한 걸 보면 조유진을 미워하는 것이 틀림없어.’조유진을 괴롭히는 것이 배현수 대신 복수하
조유진은 눈썹을 움찔하더니 강이찬의 손에서 약 봉투를 낚아채고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비타민이에요. 어디 아픈 데 없어요.”강이찬은 바보가 아니었다.“유진 씨, 제가 비타민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를 줄 알아요?”“믿고 싶은 대로 믿어도 좋아요.”조유진은 땔감을 안고 뒤돌아 캠핑장으로 돌아갔다.더는 배현수 일행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오랫동안 이 약을 먹지 않았지만, 어제저녁 조선유가 주말에 만나자는 말에 요 며칠 약을 먹으면서 컨디션을 조절하려고 했다.안 좋은 얼굴로 조선유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죽기 전에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주고 싶었다....캠팽장에서 사람들은 바비큐를 굽고 있었다.판매팀과 멀지 않은 곳에 앉아있던 강이찬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조유진을 바라보았다.핸드폰을 꺼내 인터넷에 아까 약 봉투에 쓰여있던 약 이름을 검색하기 시작했다.‘우울증 치료제라니.’순간 멈칫하더니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강이진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오빠, 바비큐 먹어. 핸드폰으로 뭘 보고 있는데 그렇게 멍때리고 있어?”강이진이 보려고 하자 바로 화면을 잠그고 핸드폰을 거뒀다.“아무것도 아니야. 가자, 바비큐 먹으러.”고위층은 파라솔 아래에 모여있었다.다른 팀원들은 고위층에게 권하려고 이미 구워놓은 바비큐를 들고 왔다.그중에는 남자직원도 있었고 여직원도 있었다.극히 정상적인 일이었지만 여자직원이 바비큐를 들고 오자 강이진은 불쾌했는지 바비큐를 먹으면서 비아냥거렸다.“무슨 사심이 있어서 자꾸 여기를 와?”바비큐를 들고 오던 여직원은 강이진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강이찬의 여동생인 줄도 모르고 그녀의 말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하지만 고위층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어쩔 수 없이 웃으면서 반격했다.“이봐요. 그쪽도 저희가 구워놓은 바비큐를 드시고 있잖아요? 다른 사람이 구운 것을 먹기 싫으면 직접 구우시던가요.”강이찬의 손에서 곱게 자란 강이진은 이런 말을 듣고 차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그깟 바비큐 안 먹어! 누가 먹고 싶댔어?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