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님 손, 혹시 담배 피우시다가 다치신 건가요?”배현수의 검지와 엄지손가락 옆면에는 깊은 화상 자국이 박혀 있었고 자세히 살펴보니 새로운 상처와 오래된 상처가 겹겹이 쌓여 남은 흔적 같았다.전에도 조유진은 이를 보았지만, 당시 재회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인지라 둘 사이의 관계가 너무 긴장되어 있던 탓에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었다.비록 여전히 사이는 좋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래도 덤덤하게 얘기는 몇 마디 나눌 수 있었다.“아니야.”배현수는 무심하게 자신의 손을 거두었다.조유진도 배현수가 그녀에게 그 이유를 알려주고 싶지 않아 하는듯한 눈치에 더는 묻지 않았다.눈치껏 행동하는 것, 현재의 조유진이 운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능이었다.저녁이 되자 배현수가 밖에 나가 밥을 사 왔다.조유진은 그러한 배현수에게 화상 연고를 건네주었다.“방금 의사 선생님께 가서 처방받아온 거예요. 사용하고 싶으시면 사용하시고 싫으시면 그냥 버리세요.”“밥.”정말 간결한 답변이었다. 아마 그녀와 단 한마디도 더 나누고 싶지 않다는 의미인듯하다.조유진이 마침 그 연고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배현수가 건네는 밥을 받으려고 하자 배현수가 갑자기 조유진의 손에 쥐어져 있던 연고를 낚아채 갔다.배현수가 받아들였다.조유진은 밥을 건네받으며 계속하여 물었다.“밥은 드셨어요?”“응.”배현수는 간단하게 응하고는 말을 꺼냈다.“담배 좀 피우고 올게.”...배현수와 조유진은 하룻밤 내내 조선유의 곁을 지켰다.이튿날 오전, 선유가 깨어날 때 두 사람이 보내오는 관심 어린 눈빛에 창백한 입술이 움찔거리더니 기분 좋은 호선을 그렸다.조유진은 손을 뻗어 선유의 이마를 어루만져주며 물었다.“선유야, 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선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젓고는 금방 깨어났는지라 아직 갈라져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엄마, 아빠, 안 헤어지면 안 돼요?”눈을 뜨자마자 어른들의 일을 걱정하다니. 조유진은 선유의 말에 죄책감이 몰려왔다.“선유야, 너 방금 개입 수술 끝났으니
녀석은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감정이 격해져 자신의 침에 사레가 들려 연신 기침을 해댔다.조유진은 다급히 선유의 등을 도닥여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선유를 달랬다.“엄마는 너 두고 안 가. 엄마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널 어떻게 버리고 떠나겠어? 선유야, 엄마가 미안해. 다시는 이런 말 안 할게. 응?”그때 배현수가 병실 밖에서 걸어들어오며 입을 열었다.“네 엄마와 나는 영원히 네 곁에 있어 줄 거야.”배현수의 여유로운 목소리는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워 마치 안정제 같았다.아빠의 대답을 듣자 선유의 울음소리가 뚝 그쳤고 선유의 흘러나온 콧물이 방울 모양으로 부풀어 올랐다.“아빠, 정말이에요?”“응, 정말이야.”그러자 선유는 배현수를 향해 작은 손을 붕붕 흔들었다.“아빠, 그럼 이리로 와보세요!”배현수가 선유의 부름에 병상 쪽으로 걸어왔다.그러자 조선유는 조유진과 배현수의 손을 꼭 쥐고 함께 겹쳐놓고는 애어른의 말투로 그들에게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그럼 지금 빨리 화해해요. 앞으로 싸우면 안 돼요, 알겠죠?”“선유야...”조유진은 말문이 턱 막혀 어찌할 바를 몰랐다.그러자 그때 배현수가 도리어 조유진의 손을 잡으며 선유에게 말을 건넸다.“지금 우리 화해했으니까 너도 이제 울지 마.”선유는 부풀어 오른 콧물 방울을 퐁 터뜨리며 바로 울음을 뚝 그쳤다.조유진은 자신과 배현수의 꼭 잡힌 두 손을 바라보며 잠시 넋을 잃었다.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다. 이는 그저 배현수가 선유를 달래기 위한 수법일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지금에야 달래는 데에 성공했지만 앞으로 며칠 후면 또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얼마 뒤, 의사가 병실로 들어와 선유에게 간단하게 몇 가지 진찰을 하였다.“별다른 문제는 없어요. 수술 뒤에는 가볍고 영양이 균형적인 식사를 하셔야 하고요. 일주일 뒤쯤이면 퇴원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퇴원한 뒤 격렬한 운동 하지 마시고요. 큰 수술은 아니지만 그래도 심장 수술이기에 수술 뒤에는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감정이 격해지면 절대 안
선유는 말을 마치고는 곧바로 얼굴을 찡그렸다.그러자 조유진은 다급하게 입꼬리를 당기며 선유를 달랬다.“아니야. 엄마 지금 웃고 있잖아. 빨리 찍어. 방금은 어떻게 웃을지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야.”그러자 선유는 금세 다시 활력을 되찾았다.세 식구 모두 카메라 안에 담겨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따뜻하고 화목해 보였다.아빠는 잘생겼고 엄마는 자애롭고 아이는 귀여웠다.여러 장을 찍은 뒤 선유는 사진첩을 이리저리 뒤지며 한참을 바라보았다.이 아이는 정말이지...두 어른의 명줄을 꽉 붙잡고 있기라도 하듯이 두 사람은 선유가 하라는 대로 모두 척척 협조해주었다.그렇게 세 사람은 오후 내내 사진 소동을 일으켰다.저녁이 되자 조유진은 선유에게 계란찜과 죽을 떠먹여 주었다.아직 영양 수액을 맞고 있어서 선유도 배고프지 않아 많이 먹지는 못했다.다 먹고 난 뒤 선유는 병상의 다른 한쪽을 작은 손으로 팡팡 치며 배현수에게 눈짓했다.“아빠, 아빠도 이리로 와요. 저 이제 졸리니까 아빠가 잠자기 전 이야기 해주세요!”배현수는 선유 곁으로 다가와 앉았고 선유는 배현수의 품에 기댔다.“뭐 듣고 싶어?”그러자 선유는 연신 주접을 떨었다.“아빠가 해주는 이야기면 다 좋아!”선유의 귀여운 아양에 배현수는 가볍게 피식 웃었다.“그럼 웃긴 개그 이야기 해줄게.”선유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빠가 웃긴 이야기도 할 줄 알아요?”배현수는 겉보기에는 무척 싸늘하고 엄숙하여 마치 높은 벼랑 끝에서 피어난 꽃 같아 적어도 우스갯소리를 할 줄 아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어느 날, 공주가 대마왕한테 잡혀갔어. 그리고 대마왕이 공주한테 아무리 목이 터지라 외쳐도 아무도 구하러 와주지 않을 거라고 말하지. 그러자 공주가 큰소리로 외치기 시작했어. ‘목이 터지라, 목이 터지라...’ 하지만 아무도 ‘공주님, 구하러 왔어요’라고 말해주지 않았어.”말을 마치고 배현수가 고개를 숙여 그대로 굳어버린 선유의 작은 얼굴을 바라보았다.“뭐야? 안 웃겨?”배현수가
조유진은 문 앞에 서서 오랫동안 마음을 진정시켰다.선유에게 보름에 한 번씩 만날 수 있다고 알려준다면 선유가 어떻게 될지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핸드폰 갤러리를 열어 아까 찍은 몇 안 되는 가족사진들을 보고 있자니 조유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어떤 일은 그 순간이 결국 영원이 되어버리는 것이다.마치 이 몇 장의 가족사진처럼 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조유진은 배현수와 이렇게 화목하게 지낼 수 있는 순간이 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이튿날 오전.남초윤이 선유를 보러 병원으로 찾아왔다. 물론 육지율도 함께 왔다.남초윤은 레고 나무 하나를 사서 선유에게 전했다.“꼬맹이, 병실에서 심심하지. 심심하면 이모가 준 레고 가지고 놀아.”선유는 남초윤으로부터 레고를 건네받으며 맑은 눈빛이 초롱초롱 반짝거렸다.“우와~ 이모 정말 저한테 너무 잘해주세요! 고맙습니다, 이모!”한편 어색하게 곁에 서 있던 육지율은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이건 비록 네 이모가 골랐지만, 돈은 이 이모부인 내가 낸 거야. 왜 나한테는 고맙다고 안 해?”“이모부?”선유는 두리번두리번 눈을 굴리고 이내 육지율의 뒤쪽을 슬쩍 살폈다.“이모부가 어디 있는데요?”육지율:“네 이놈 자식! 너 왜 네 아빠처럼 뒤끝 작렬인데?”남초윤은 웃음을 터뜨리며 육지율을 비웃었다.“눈치 챙기세요. 선유가 당신 이모부로 인정하기 싫다잖아요.”육지율이 지금까지 살면서 언제 아이한테 농락 당한 적이 있겠는가. 그의 성격대로라면 당연히 자신의 체면을 살려내야 할 것이다.“잼민아, 네가 날 이모부로 인정해주면 레고 열 개 사줄게. 어떠냐?”“잼민이의 이모부면 인가?”몇 명의 어른들은 선유의 말에 연달아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져버렸다.계속하여 무뚝뚝한 표정을 하던 배현수마저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씰룩거렸다.하지만 농담은 농담이고 예의는 지켜야 하는 법이기에 조유진이 곧바로 선유를 나무랐다.“선유야, 육 아저씨는 어른이니 무례하게 굴면 안 돼.”선유도 곧바로 순순히
선유가 병원에서 며칠 묵어야 했기 때문에 조유진은 집으로 돌아가 갈아입을 옷 몇 벌을 챙겨왔다.요 며칠, 선유는 부모님이 모두 곁에 있어서 그런지 매우 행복해 보였다.낮에 계속하여 소란을 피운 탓인지 저녁이 되면 금방 잠자리에 들곤 했다.조유진은 꿈나라에 빠진 아이의 작은 얼굴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가방에서 작은 수첩과 펜을 꺼내 위에 적힌 첫 번째 소원에 줄을 그었다.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배현수는 아마 그녀와 서해를 보러 가주지 않을 것이다.배현수는 이미 선유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선유의 양육권마저 가져갔기 때문에 조유진에게는 더는 배현수를 “협박”할 수 있는 비밀이 없었다.하지만 인생을 살면서 어떻게 한두 가지 정도의 아쉬움마저 없겠는가?“딸깍.”병실 문이 열리고 배현수가 돌아왔다.조유진은 다급하게 수첩을 닫고 가방에 도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수첩을 치우는 데에 정신이 팔렸었던 조유진은 핸드폰 화면이 아직 켜져 있음을 알아채지 못했다.배현수는 한눈에 켜져 있는 스크린을 통하여 채용 앱을 훑고 있던 조유진의 모습을 알아챘다.그때, 조유진도 멈칫하더니 이를 눈치챘다.그래도 배현수는 엄연히 그녀의 사장이었고 결국 조유진은 자신의 사장 앞에서 채용 앱을 뒤적거리며 이직 준비를 하고 있었던 셈이니 이 상황이 너무나도 이질적으로 다가왔다.“그... 저, 저 그냥 구경만 하고 있었어요. 마케팅이 제 전문 분야가 아니기도 하고 전 그래도 원래 하던 방송 진행 분야로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배현수의 검은 눈동자에서 한순간의 한기가 스쳐 가더니 이내 무뚝뚝한 얼굴을 유지한 채 무심하게 말을 내뱉었다.“나한테 해명할 필요 없어. 난 분명 넌 이제 자유라고 말했으니까 앞으로 어디에서 일할지는 네 선택이고 나한테까지 보고할 필요는 없어.”“선유가 퇴원하면 바로 회사로 복귀해서 일할게요.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 전까지는 지금의 일에 대해서도 열심히 임할 겁니다.”배현수는 조유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줄곧 말하기
강이진은 마음속의 원망과 불만을 꾹꾹 눌러버리고는 고개를 들어 선유에게 사과했다.“미안해. 아줌마가 잠깐 이성을 잃어서 너한테 몹쓸 짓을 했어. 아줌마 용서해줄 수 있어?”선유는 작은 입술을 달싹이며 눈앞의 나쁜 아줌마를 바라보더니 강이진의 체면을 그대로 산산조각내버렸다.“안 되겠는데요.”“너...”강이진의 성질이 다시 한번 나오려고 하자 옆에 서 있던 강이찬이 다급하게 강이진의 팔을 붙잡으며 그녀를 제지했다.그러자 그때 배현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잘못을 저질러서 사과하는 건 네 일이고 상대방에게도 사과를 거절할 권리는 있어. 강이진, 내가 네 책임을 더 추궁하지 않는 것은 네 오빠 얼굴을 봐서야. 하지만 다음부터는 네 오빠도 소용없을 줄 알아.”배현수의 말투는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았고 간략하게 말을 끝맺었지만, 그의 말속에서는 상위자로서 위압력이 느껴졌다.강이진은 고개를 숙인 채 더는 별다른 짓을 하지 못했다....강이찬과 강이진이 병원을 빠져나왔다.병원에서 나오자마자 강이진은 곧바로 자신의 본성을 드러냈고 강이찬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오빠도 봤지? 그 망할 년 현수 오빠랑 벌써 아이도 생겼다니까. 조유진 앞으로 분명 아이를 이용해서 미친 듯이 현수 오빠에게 들러붙을 게 뻔하다고! 강이찬, 넌 내 행복을 망쳤을 뿐만 아니라 너 자신의 행복마저 짓밟아 버렸다고.”“이진아, 너 지금 대체 뭐라는 거야? 빨리 타. 집에 가자.”“나 오빠랑 안 가! 집에 가면 또 나 혼낼 거지? 오빠 맨날 내 귀에 대고 얌전해야 한다고, 현수 오빠 좋아하지 말라고 잔소리하잖아. 그럼 강이찬 넌? 너도 친구 여자 탐내잖아!”“강이진, 그 입 다물지 못해?”강이찬이 갑자기 언성을 높이더니 강이진을 호되게 꾸짖었다. 하지만 강이진은 강이찬을 무서워할 리가 없었고 오히려 비웃음을 터뜨리며 비아냥거렸다.“왜, 내가 네 정곡을 찔러서 화 난 거야? 그렇게 조유진이 좋으면 왜 직접 쟁취하지 않는 거야? 왜 조유진이 거머리처럼 현수 오빠에게 계속
강이찬은 손을 빼내며 싸늘한 얼굴로 강이진을 거절했다.“난 너 안 도와줄 거야.”“강이찬, 네가 기꺼이 조유진을 위해 모든 걸 포기하는 건 네 일이야. 그런데 나도 너처럼 찌질하게 살아야 하는 권리는 없어.”말을 마치자 강이진은 몸을 홰 돌리고는 하이힐을 신고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차 옆에 선 채 멀어져가는 강이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강이찬의 미간 사이에는 온통 수심이 가득했다.강이찬은 강이진이 길을 잘못 들어설까 봐 진심으로 걱정되었다. 그리고 정말로 그런 날이 온다면 강이찬마저 그녀를 지킬 수 없을까 봐 무서워졌다.강이찬은 차 안에 기대앉아 피곤해진 마음을 가라앉혔다.이윽고 강이찬은 차 안의 사물함을 열고 담배 한 갑을 꺼내려는데 그때 웬 사진 한 장이 강이찬의 손가락에 닿았다.그 사진은 누군가에 의해 잘려 파손된 형태였고 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사실 사진 속엔 본래 세 사람이 나란히 있었다.강이찬, 조유진, 그리고 배현수.이 사진은 강이찬과 조유진이 유일하게 같은 앵글에 담긴 사진이었지만 이 또한 배현수 덕분이었다.당시, 강이찬과 배현수가 박사 학위 졸업사진을 찍고 있었고 조유진도 배현수를 보러 온 것이었다.신사적이고 예의하에 여성을 중간에 세웠었던 것이다.그리고 그 뒤, 강이찬은 무슨 정신에선지 배현수를 잘라버렸고 하여 이 파손된 사진 속에는 강이찬과 조유진만이 남아있었다.이 사진은 강이찬에 의해 비닐에 감싸져 소중히 보관되어 거의 새것처럼 깨끗했다.강이진의 말이 맞았다. 강이찬은 겁쟁이였다.강이찬은 조유진을 좋아했지만 결국 끝까지...조유진을 쟁취하지 못했다.그저 마음속의 이 설렘을 혼자 마음속 깊은 곳에 꾹꾹 눌러 담아 빛을 보지 못하도록 감추어 두었다.강이찬은 아직도 그때를 기억한다. 그해 여름 방학, 강이찬과 배현수는 기숙사를 나와 함께 셋집을 얻어 동거했었다. 그때 조유진은 아직도 학교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토요일 밤, 조유진은 충남으로 돌아가기 싫었지만 갈 곳이 없었던지라 배현수가 조유진을 데리고
차 부근에 도착하자 조유진은 그들과 함께 차를 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머뭇거렸다.그러자 이미 차에 올라탄 선유가 조유진을 향해 외쳤다.“엄마, 빨리 차에 타요. 밖에 엄청 덥단 말이에요.”조유진은 배현수를 힐끔 바라보았고 배현수는 잠시 사색에 빠지는가 싶더니 이내 의미심장하게 말을 꺼냈다.“먼저 차에 타. 산성 별장에 도착한 뒤에 다시 보자고.”조유진은 그렇게 그들과 함께 차에 올라탔고 별장으로 향하는 내내 안절부절못했다.“엄마, 우리 지금 어디 가? 아빠 집에 가는 거야?”“응. 아빠 집에 가.”“근데 나 뚱이 안 챙겼는데.”“내가 챙겼어. 갈아입을 옷가지를 가지러 집에 들른 김에 캐리어도 다 갖고 왔지. 선유 물건 다 트렁크에 있어.”선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조유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그럼 엄마 물건은?”선유의 맑은 눈빛이 너무나도 순수하고 깨끗해 조유진은 차마 선유를 속일 수가 없었다.“내... 내 물건도 챙겼어.”녀석은 믿지 않는 듯 입술을 삐죽 내밀며 조유진을 심문하듯 추궁했다.“정말?”조유진은 그저 간단히 응하고는 화제를 돌려버렸다.“선유 항상 고양이 키우고 싶어 했잖아. 아빠 집에 예삐라는 치즈 고양이가 있어. 포동포동하고 엄청 귀여운데 조금 뒤면 볼 수 있겠네.”어쨌든 선유는 아직 어린아이인지라 금방 조유진의 말에 넘어가 버렸다.별장으로 향하는 길 내내 조유진은 선유에게 아빠 집이 얼마나 좋은지를 묘사해주며 최선을 다해 선유가 그 집이 좋아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그리고 곧이어 그들은 산성 별장에 도착했다.차가 별장 내부로 들어가고 눈앞에는 푸르고 싱싱한 잔디밭이 펼쳐졌다. 그뿐만 아니라 그곳에는 그네와 큰 풀장도 있었다.이미 전에 선유를 데리고 오기로 했던 터라 배현수는 특별히 서정호에게 분부하여 별장의 경관을 조금 더 아기자기하게 꾸미도록 하였다.수영장 안에는 여러 개의 튜브와 둥실둥실 떠다니는 미니 덕들이 가득했다.그리고 정원 입구에는 아이가 탈 수 있는 전동 미니카 한 대가 세워져 있기도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