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를 위해 경호원들에게 화까지 내는 윤여진을 보니 임유환은 다시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다정한 얼굴로 미안해하는 윤여진은 여전히 15년 전 그때와 똑같아 보여 임유환도 부드럽게 웃으며 윤여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걱정 마, 나는 그런 말에 상처 안 받아. 근데 넌 아버님이 그렇게 걱정하는 데 정말 여기 있어도 괜찮겠어?”“괜찮아요.”윤여진은 고개를 저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나는 그냥 오빠 옆에 있고 싶은 것뿐이에요. 그때 그 나쁜 놈들이 다신 오빠 건들지도 못하게 할 거예요.”그때의 윤여진은 어려서 임유환을 지키지 못했지만 지금은 달랐다.지금의 윤여진은 집안에서 발언권도 있는 사람이었기에 강한 정씨 집안을 대적한다 해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그리고 정 방법이 없다면 쓰일 최후의 수단도 준비되어 있었기에 윤여진은 임유환을 지켜낼 수 있다고 장담했다.그 방법을 쓰게 된다면 다시는 임유환을 못 본다는 게 조금 마음 아프긴 하지만 그래도 임유환을 지킬 수만 있다면 괜찮았다.저를 지켜주고 싶어 하는 윤여진의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임유환은 온기 가득한 눈으로 윤여진을 보며 말했다.“알겠어 여진아, 네 마음 너무 고마워. 근데 걱정 안 해도 되, 아무도 나 못 괴롭혀.”“네!”임유환의 당찬 말에 윤여진은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오빠, 우리 들어가요!”“응.”임유환은 웃으며 윤여진의 캐리어를 들고 먼저 성큼성큼 걸어갔다.윤여진은 비바람을 막아주려고 앞서 걸어가던 15년 전의 뒷모습과 겹쳐 보이는 지금의 임유환을 보며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15년 전에도 지금에도 임유환은 늘 윤여진보다 앞에 서서 걷고 있었지만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윤여진이 더 이상 어리지 않다는 것이었다.이제는 임유환을 지켜줄 힘이 생긴 윤여진이 된 것이다.“오빠 방은 어디에요?”별장 안으로 들어가서 탁 트인 공간을 둘러보던 윤여진은 다시 임유환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계단 입구 맞은편 방이야.”임유환은 방을 눈으로 가리키며 윤여진을
“아...들었어요?”원래는 밥을 먹을 때 소개해주려고 했는데 이미 다 들어버린 것 같은 조명주와 최서우에 임유환은 이참에 윤여진을 소개해주기로 했다.“진짜 여자를 데리고 온 거예요?”“서인아 씨에요?”임유환의 말에 조명주는 놀란 듯이 되물었다.“아니요.”“그럼요?”연경에서 임유환과 한집에 머무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사람은 서인아밖에 떠오르지 않았던 조명주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 그게 윤씨 집안 따님이에요.”여진이라는 동생이라고 소개하려던 임유환은 그러면 조명주와 최서우가 잘 알아듣지 못할 것 같기도 했고 자칫 잘 못 하면 연하 좋아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기에 다소 딱딱한 소개를 했다.“윤씨 집안 아가씨요?”윤여진이 이곳에 온 것도 갑작스러웠고 그런 윤여진을 집에 들인 임유환도 이상했기에 조명주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임유환의 말을 들은 조명주는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윤여진을 떠올렸다.연경에서는 서인아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의 미모와 몸매를 지닌 사람으로 이름이 꽤 알려져 있었던 탓에 조명주는 그런 윤여진과 임유환 사이에 친분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그리고 집에까지 들일 정도면 보통 사이는 아니라는 건데, 임유환과 윤여진이 언제 친해진 건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그때 비스듬히 열리는 방문에 조명주는 임유환을 향해 취조하듯 물었다.“유환 씨, 대답 똑바로 해요. 윤여진 씨와는 어떻게 알게 된 사이고 언제 친해진 거예요?”전에 임유환이 윤여진을 언급하는 걸 본 적은 없지만 윤여진이 집에까지 짐을 들고 찾아온 걸 보면 여간 가까운 사이는 아닌 것 같아 조명주는 머릿속에 아주 복잡해졌다.흑제님한테 프라이버시 좋은 데로 알아봐 달라 하더니 정말 집에서 여자랑 놀 생각이었는지 하는 합리적인 의심도 들었다.그리고 그 생각이 눈빛에 다 드러났는지 임유환은 조명주의 시선을 느끼고 다급하게 해명을 하기 시작했다.“조 중령님, 저 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생각하는 그런 쪽 아니니까.”“그럼 윤여진 씨랑은 무슨
“유환 오빠, 밖에 있어요?”그때 맞은편에서 들려오는 윤여진의 목소리에 임유환이 빠르게 답했다.“응, 있어.”“와서 좀 도와줄 수 있어요?”“응.”애교 섞인 여자의 목소리에 빠르게 응하며 걸음을 옮기려 하는 임유환을 향해 조명주가 딱 걸렸다는 듯 얘기했다.“윤여진이라는 동생분과는 사이가 아주 좋아 보이네요, 동생이라고 거짓말하고 이상한 짓 하고있는 거죠?”“아니에요... 조 중령님이 생각하시는 것과는 다르다니까요.”임유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제 말을 믿어주지 않는 조명주에 억울해하며 말을 이었다.“여진이 일은 좀 있다 자세히 설명할 테니까 일단은 여진이 도와주러 가볼게요.”“아, 그리고 우육면 했는데 금방 다 될 테니까 20분쯤 더 있다가 내려와서 먹어요.”“우육면이요?”임유환이 자신들을 위해 직접 아침까지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던 조명주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네.”“알겠어요, 나랑 서우를 위해서 아침까지 차려줬으니까 지금은 그냥 보내줄게요.”“어...”입술을 삐죽이는 조명주의 말투에는 바람피우다 걸린 남자를 단속하는 듯한 말투가 조금 사라져있었다.하지만 임유환은 점점 자신이 집에서 다른 여자를 키우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상황에 답답한지 뒷머리를 긁적였다.밥 먹을 때 다시 해명해야겠다고 생각한 임유환은 우선 윤여진의 방으로 들어갔다.임유환이 방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윤여진은 허리를 숙인 채 캐리어를 힘겹게 들어 올리며 옷장 안에 넣으려고 하고 있었다.그때마다 몸에 딱 맞는 그 미니스커트가 몸을 더욱 조여오면서 얇은 허리와 풍만한 엉덩이를 부각시켰다.허리부터 엉덩이까지 이어진 완벽한 호선의 끝엔 백옥같이 하얀 다리가 있었는데 짐을 옮기느라 힘이 들어간 다리는 한눈에 봐도 탄탄해 보여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놓고 있었다.윤여진을 동생처럼 아끼는 임유환도 그 핫한 몸매 앞에서는 숨을 참으며 침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목이 말라가는 것 같았던 임유환은 얼른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윤여진을 불렀다.“여진아, 내가 할게.
아침을 먹을 때가 되니 네 명은 어느새 한 식탁에 둘러앉아 있었다.식탁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우육면 네 그릇이 놓여있었다.“와, 오빠가 만든 우육면이에요? 냄새 너무 좋은데요! 나 먼저 먹어볼래요!”임유환이 직접 만든 음식은 처음인 윤여진이 잔뜩 흥분하며 젓가락으로 우육면을 집어 한입 먹어보았다.그리고 음식이 입에 들어온 순간 윤여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우육면을 씹으면 씹을수록 처음의 그 놀라움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이건 윤여진이 살면서 먹어본 중에 단연 가장 맛있는 우육면임이 분명했다.면발의 탱탱함과 고기의 풍미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너무 맛있어요!”윤여진이 감탄을 연발하며 먹자 임유환은 그런 그녀를 흐뭇하게 쳐다보며 말했다.“좋아하면 더 떠다 줄 테니까 많이 먹어.”임유환과 윤여진이 웃고 떠들 때도, 윤여진이 맛있다고 감탄을 내뱉을 때도 조명주와 최서우는 수저를 들지 않고 새로운 얼굴인 윤씨 집안 아가씨만을 쳐다보고 있었다.얼굴이며 몸매며 모두 조물주가 한 땀 한 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 같았는데 사람을 홀려놓는 얼굴은 물론이고 몸매는 더 말할 것도 없어서 여자인 자신들도 가까이 다가가 도대체 저 정도 사이즈는 어떤 느낌인지 직접 만져보고 싶었다.이런 여자를 임유환이 어떻게 꼬셨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조명주와 최서우의 시선은 일제히 임유환에게로 향했다.“어... 왜 다들 날 그렇게 봐요? 여진이는 제 동생이라고 얘기했잖아요. 어렸을 때부터 친했던 사이에요.”두 여자의 의심 가득한 눈빛을 느낀 임유환의 눈썹이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그러니까 점점 더 여자를 숨겨놓았다가 걸린 남자 같아 보였다.“저랑 유환 오빠는 어렸을 때부터 친한 사이 맞아요. 지금은 잠시 여기 머물게 됐는데 말도 없이 찾아와서 죄송해요. 제가 와서 더 불편하실 것 같네요.”그때 윤여진이 나서며 임유환을 도와 말하기 시작했다.아까 임유환이 조명주와 최서우에 대해 간단히 소개를 해줘서 그들이 이미 막역한 친구 사이라는 것은 윤여진도 알고 있는 사실
밥을 다 먹자 임유환은 최서우의 빠른 회복을 위해 같이 드라이브나 가는 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그에 다들 괜찮은 생각이라 동의하며 윤여진도 당연히 따라가겠다고 나섰다.그녀는 당장 집사를 시켜 하얀 벤틀리를 이동수단으로 쓰겠다고 가져다 놓으라고 했다.역시 연경 권세가의 아가씨답게 몇억씩이나 하는 비싼 차를 한낱 드라이브에 쓰려는 그 호방한 모습에 나머지 세 사람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곧 나갈 드라이브에 조명주와 최서우는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향했고 윤여진과 따로 할 말이 있었던 임유환은 조명주와 최서우에게는 들리지 않을 것 같은 4층에 있는 방으로 윤여진을 데리고 갔다.그리고 문을 걸어 잠그고 커튼까지 치고 나서 진지한 표정으로 저를 보는 임유환에 윤여진도 그가 하려는 얘기를 눈치채고는 아까의 장난스러운 모습 대신 차분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오빠, 그날 일 물으려고 이러는 거죠?”“응.”사뭇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임유환에 윤여진도 목소리를 낮게 깔며 바로 본론부터 꺼내기 시작했다.“15년 전 일에 대해서는 저도 잘은 몰라요. 그렇지만 확실한 건 임씨 집안이 그때 한 비밀조직에게 찍혔다는 거예요.”“비밀조직?”서강인한테서도 들은 적이 있었던 그 말에 임유환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여진아, 너는 그게 어떤 조직인지 알아?”임유환의 질문에 윤여진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그건 나도 몰라요. 제가 아는 건 그 조직에서 아버지한테도 같이 임씨 집안을 치자는 요청을 보내왔다는 거예요. 하지만 아버지는 두 집안의 좋았던 사이 때문에 그 제안을 거절하셨어요.”“근데 아마 다 권세가들은 거의 다 그날 일에 동참했을 거예요.”“아, 그리고 서씨 집안도 저희 집안과 함께 불참했어요.”윤여진과 서인아는 연경 권세가의 두 딸로서 몇 년간 사사건건 부딪쳐왔고 이번엔 또 동시에 임유환을 좋아하며 얼굴까지 붉혔지만 윤여진은 그런 사사로운 감정을 공적인 일에 대입하지는 않았다.윤여진은 그냥 임유환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싶었기에 서
“임씨 집안에 그들이 원하는 게 있다고?”“네.”미간을 찌푸리며 묻는 임유환에 윤여진이 말을 이어나갔다.“그래도 이것만큼 말이 되는 건 없어요 지금 상황에서는.”“그들이 원하는 게 임씨 집안에 있는 게 아니라면 여러 가문과 비밀조직이 협력했을 때 임씨 집안은 멸문했어야 맞는 거잖아요.”“근데 아직 이해가 안 되는 게 하나 있는데.”“그 정도 규모의 비밀조직이면 그날 일을 알아서 했어도 될 텐데 왜 굳이 다른 권세가의 협력을 요청했을까요?”“혹시 뭐 걸리는 거라도 있었을까요?”“오빠, 그 비밀조직 설마 작전 지역과 관련 있는 거 아닐까요?”순간 정씨 집안이 작전 지역에서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된 걸 떠올린 윤여진은 무언가 알아채기라도 한 듯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그럴 수도 있지.”임유환은 어두워진 표정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윤여진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날 일에 연루된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았고 사건은 더 깊은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임유환도 작전 지역을 의심해보지 않은 건 아니라서 따로 흑제를 시켜 알아보기도 했었다.하지만 역시나 특별한 물증은 찾지 못했었다.물론 앞으로 다른 증거들이 나올 기회야 있겠지만 이렇게 오래 수소문했는데도 아무것도 안 나오는 걸 보면 그 비밀조직의 배경도 꽤나 화려한 것 같았다.처음에 임유환은 은사종문을 의심했었다.15년 전에 임씨 집안을 무너뜨릴 만한 세력은 그들밖에 없었고 또 그들은 수많은 규칙들에 발이 묶여있어 함부로 모습을 드러낼 수도 없어 다른 권세가들을 시켜 일을 처리한 건 아닐까라고 생각했었는데 은사종문이 아무리 대단해도 현세에까지 힘을 쓸 수는 없는 일이기에 자연스레 용의 선상에서 배제되었다.정씨 집안이 작전 지역에서 그렇게 높은 지위에까지 올랐다는 걸 보면 상대는 지위도 높고 권력도 엄청 난 사람일 텐데 그런 사람은 세 명밖에 없었다.우선은 총사령관을 의심할 수 있었는데 그는 임유환 스승님의 오랜 친구이기에 이 사건의 참여자는 아닐 테고 그렇다면 남은 건 대통
임준호가 채수빈을 싸고돌수록 임유환은 제 어머니만 불쌍하게 여겨졌다.연경 고씨 가문의 아가씨로 지금의 서인아 못지않게 수많은 업적을 이뤄내던 어머니가 임준호라는 사람을 만나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천륜도 가감 없이 끊어내며 사랑만 좇아 결혼했는데 결혼 후에는 임준호의 내조를 한답시고 상업 여왕이라는 타이틀을 제 손으로 포기하며 자식을 키우고 집안을 지키는 데에만 매진했었다.상업계의 아름다운 장미가 임준호 같은 남자 하나 때문에 아름다움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기회마저 저버렸는데 그 결과가 참혹한 죽음이라니, 누구의 운명도 이토록 비극적일 순 없었다.그렇게 저만을 바라보던 아내가 죽었는데도 임준호는 슬프지도 않은지 이튿날 바로 다른 여자를 집안의 안주인으로 들이더니 지금까지 애지중지 보살피고 있었다.장례식도 없이 쓸쓸히 떠나신 어머니의 산소에는 개미 한 마리도 다녀가지 않는데, 가끔 임유환이 성묘하러 가서 절을 세 번 하고 오는 게 전부인데 임준호는 채수빈이라는 여자와 여태껏 호의호식하고 있다는 게 치가 떨리게 분했다.“임준호!”그에 임유환은 두 주먹을 꽉 쥐며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유환 오빠...”그때 윤여진이 그런 임유환을 걱정스레 바라보며 이름을 부르자 임유환도 순간 정신을 차렸는지 한숨을 쉬고 대답했다.“미안, 내가 못 볼 꼴을 보였네.”정말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화를 내본 게 오랜만이었던 것 같다.“오빠, 우리 그럼 이 얘기 말고 다른 얘기 할까요?”임유환이 다시 고통스러워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았던 윤여진이 넌지시 제안했지만 임유환은 웃으며 말했다.“아니야, 나 이제 괜찮아졌어.”“진짜요?”“응, 진짜야.”아직도 자신을 걱정하는 것 같은 윤여진에 임유환은 다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하려던 질문을 마저 했다.“근데 여진아, 아까 비밀조직이 다른 집안들을 불러 모아서 임씨 가문을 친 게 뭐 찾으려는 게 있어서 그런 것 같다고 했지?”“네.”“그럼 원하던 건 찾은 것 같아 보였어?”윤여진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옥에도 등급이라는 게 있는데 그중 가장 낮은 등급의 옥은 보옥이었고 최고 등급의 옥은 통영주옥이었다.살아오면서 수많은 통영주옥을 만져본 윤여진이 느끼기에 통영주옥도 물론 영기를 담고 있긴 했지만 지금 손에 들린 옥에 비한다면 그 만분의 일도 될까 말까 한 수준이었다.이 옥 팔찌는 마치 천지의 영기를 다 담은 듯한 느낌이었다.윤여진이 그렇게 놀랄 때마다 그녀의 가슴도 덩달아 아래 우로 움직이고 있었다.“여진아, 이 옥 팔찌가 특별하기라도 한 거야?”윤여진이 그렇게 놀라자 임유환도 긴장하며 물었다.“네, 엄청 특별한 옥이에요!”그에 윤여진은 잔뜩 흥분한 채로 대답했다.“적어도 제가 지금까지 본 옥 중에서는 가장 특별한 옥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그럼 이게 단서가 될 수도 있을까?”윤씨 집안이라면 옥 공예품 쪽으론 워낙 이름이 있는 집안인지라 이 세상에서 윤여진만큼 옥을 잘 보는 사람은 아마 흔치 않을 것이기에 임유환은 기대를 안고 물었다.“아직 그런 건 잘 모르겠는데 이 옥에 엄청난 영기가 담겨 있는 건 확실해요.”“나중에 제가 집에 가면 고적들 좀 뒤져볼게요. 이 옥에 대한 얘기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그래.”윤여진의 진지한 표정에 임유환도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전에는 그냥 영가 좀 있는 옥 팔찌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윤여진의 얘기를 들어보니 그리 단순한 팔찌 같지는 않았다.어쩌면 비밀조직이 찾고 있는 게 바로 이 옥 팔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또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건 아닌 것 같기도 했다.비밀조직이 만약 이 옥 팔찌를 노리고 온 게 맞다면 어머니도 어느 정도 짐작은 하셨을 텐데 옥 팔찌를 임유환에게 전해줄 때도 그냥 미래의 아내에게 줘서 꼭 대대손손 남겨야 한다는 말만 하셨지 거대한 비극을 불러온 이 팔찌에 대해서 당부하신 건 없었기 때문이다.그리고 비밀조직의 목표가 옥 팔찌였다면 이걸 대대손손 가보로 삼는 고 씨 집안을 먼저 쳐야 할 일이었다.하지만 고 씨 집안은 그날 일을 겪은 뒤에도
임유환과 윤여진은 최서우의 병이 악화될까 염려하여 일부러 그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임씨 집안으로 향했다.임씨 집안으로 가는 차 안에서 윤여진은 사건의 자초지종에 대해 간략하게 전해 듣게 되었다.영상 속의 그 여자는 임유환의 시중을 들던 나비라는 이름의 메이드이고 그 메이드를 남자들에게 건네준 이가 임준호라는 사실까지 다 듣고 난 윤여진도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윤여진이 알고 있는 임준호는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었는데 그런 분이 한 일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잔인한 행동에 15년 전 자신의 친아들을 직접 내쫓던 그때의 임준호가 떠올라 윤여진은 온몸이 오싹해났다.아마도 15년 전 그날부로 임준호가 완전히 변한 게 아닌가 싶었다.30분 뒤 그들은 임씨 집안에 도착했지만 워낙 깊은 밤이라 저택의 대문은 당연히 잠겨있었고 흑기군을 데리고 대문 앞에서 한참 동안 대기하고 있던 흑제가 임유환을 보고 인사를 건네왔다.“임 선생님.”“오셨어요?”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세계 제일 갑부의 느닷없는 등장이 윤여진은 놀랍기만 했다.임유환을 대하는 흑제의 태도가 지나치게 깍듯해 그 둘의 사이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라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할 때라서 윤여진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영상에서 봤던 모습을 떠올리며 윤여진이 다시 표정을 굳히자 아까부터 냉랭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임유환이 앞으로 나서더니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임준호, 당장 나와!”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저택 사람들 몇 명이 눈을 떴고 하인 두 명이 달려 나왔다.밖에 나와 상황을 살피던 하인 두 명은 익숙한 임유환의 얼굴에 깜짝 놀랐지만 그런 놀라움도 얼마 오래가진 못했다.하인들은 이내 비아냥거리며 임유환을 향해 말했다.“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임유환 도련님 아니세요?”입으로는 도련님이라 하고 있었지만 그 말투 속에 진하게 녹아나 있는 조롱은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을 정도였다.“무슨 도련님이야, 버려진 도련
임유환의 몸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이미 덜덜 떨리고 있었다.“주인님, 그건 저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이 영상도 그 경찰에 대해 조사할 때 경찰 시스템을 뒤지다 발견한 겁니다.”“경찰 시스템?”“그럼 이것도 정씨 집안에서 한 짓이란 말이야?”“그것까진 아직 모르겠는데... 제가 알아본 바로는 저 여자분은 주인님... 아버님께서 직접 저 남자들 손에 넘긴 거였습니다.”이 일이 임유환의 아버지와 관련되어있기도 했고 영상 속의 여자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하면 더 위험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아 흑제는 대답을 망설였다.“아버지?”“네, 주인님.”흑제의 말에 당황하던 임유환은 재차 확인을 거친 후에 또다시 기운을 뿜어내며 당장이라도 임준호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임유환은 어떻게 자신이 직접 데려온 아이를 또 내다 버릴 수가 있는지 임준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당연히 제 한 목숨 부지하고자 행한 나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저 사람들 손에 끌려가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내어준 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짓인지 의문이 갔다.영상 속 사람들이 말하는 비밀 열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임유환은 나비가 지금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임준호!”갑자기 소리 지르는 임유환 때문에 방 안에 있던 윤여진은 화들짝 놀랐다.“흑제.”“예, 주인님.”“지금 당장 흑기군 준비해서 나랑 임씨 집안으로 간다.”“예, 주인님.”지금 임유환은 약해빠진 임준호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었다.그래서 직접 집으로 쳐들어가서 대체 나비를 누구에게 넘겨준 것인지, 나비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살아있다면 직접 얼굴을 봐야 했고 죽었다면 그 시체라도 봐야 진정될 것 같았다.임유환은 나비가 그 짐승 같은 놈들 손에 놀아나도록 두고 볼 수가 없었다.살아있다면 당장 데려다가 직접 치료를 해줄 것이고 죽었어도 데리고 와서 묻어줄 생각으로 눈이 빨갛게 충혈된 임유환은 차오르는 분노와
“나비?”아까는 얼굴이 제대로 안 보여서 몰랐는데 영상 속의 여자는 바로 임유환만 보면 도련님이라 부르며 해맑게 웃던 나비였다.그렇게 밝고 예쁘게 웃던 아이가 피범벅이 된 채 모진 고문을 견뎌내는 걸 보고 임유환은 낯빛이 창백해졌고 머리가 울려왔으면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서 쫓겨난 지도 15년이니 나비도 많이 커서 얼굴만 보면 못 알아봤겠지만 나비 문양의 반점 덕분에 한눈에 그녀의 알아볼 수 있었다.나비라는 아이는 5살의 어린 나이에 임씨 집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름도 없어서 나비도 임유환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나비는 어릴 때 강도들의 손에 부모님을 잃고 그들에게 이끌려 여기저기 팔려 다니던 이이였는데 그런 그녀를 불쌍하게 여긴 임준호가 큰돈을 들여 데리고 오는 바람에 임씨 집안에서 메이드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나비는 임유환을 보자마자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때릴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도 슬퍼 보여서, 웅크린 몸을 떨고 있는 아이가 너무 애처로워 보여서 임유환은 아직까지도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 들어온 이상 더는 그 어떤 괴롭힘도 없을 거라고 다독여봐도 나비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었다.다른 메이드들을 시켜 깔끔히 씻기고 머리도 빗겨주고 깨끗한 옷까지 갈아입혀 주니 왼쪽 얼굴에 있는 나비 모양의 반점도 드러났다.임유환이 그 반점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비는 신분이 낮은 제가 얼굴에 난 반점으로 임유환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어 동굴 속에서 강도들에게 폭행당하던 것처럼 맞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반점을 가리며 몸을 떨었다.그에 임유환은 바로 나비의 손을 잡아주며 자신은 그들과는 다르다고 천천히 타일러주었다.그리고는 나비의 긴장과 두려움을 해소해주기 위해 정원 산책까지 데리고 갔다.드넓은 정원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있었고 그것들이 함께 조화로운 향도 만들어내고 있었다.이런 아름다운 곳은 처음 보는 나비는 처음에는 몸이 굳어버리며 어색해했지만 이
“아!”남자의 행동과 함께 흘러나온 여자의 처절한 비명이 밀실을 가득 채웠다.화면을 뚫고도 전해지는 여자의 절망과 고통에 핸드폰을 들고 있던 임유환의 몸도 떨려왔고 마찬가지로 비명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윤여진도 임유환 쪽으로 다가오며 화면을 바라보았다.“어머!”사람한테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하는 영상 속 인간들 때문에 윤여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소리쳤다.너무 집중해서 본 나머지 옆에 윤여진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던 임유환이 다급하게 화면을 가리며 말했다.“여진아, 넌 보지 마.”“오빠, 이 사람들 누구예요?”“아직 모르겠어.”얼굴과 입술이 창백해진 윤여진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임유환은 한숨부터 쉬며 대답했다.“여진아, 네 방 화장실 좀 쓸게.”말을 마친 임유환은 화장실로 들어가서 다시 영상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화면 속의 여자는 여전히 은침에 찔린 손을 들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온몸을 비틀려고 발버둥 치는 여자는 마치 불판 위에 올라간 미꾸라지 같기도 했다.하지만 검은 옷차림의 남자는 그런 여자가 불쌍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차가운 눈을 하고 두 번째 은침을 꺼내 들어 여자의 다른 손가락에 찔러넣었다.“아!”가슴을 관통하는 듯한 고통에 여자는 순간 고개를 확 젖혀버렸고 이미 흑과 말라 굳어버린 핏자국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이 여자의 얼굴을 가렸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몰라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그냥 날 죽여줘요 제발...”“죽여주세요...”남자가 아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여자는 울며불멸 죽기를 애원하고 있었다.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으면 죽는 걸 원하고 있을까 싶어 임유환은 비통하다 못해 화까지 나고 있었다.“말했잖아, 얘기하면 죽여준다고.”말을 마친 남자는 섬뜩하게 웃더니 나머지 손가락에도 하나하나 은침을 꽂아 넣었고 여자는 온몸에 경련이 일듯 몸을 떨어대다가 한계에 다다른 건지 다시 한번 기절했다.은침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열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들은 빠르게 작은 웅덩이
“마음의 준비요?”의미심장한 흑제의 말에 임유환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영상인데 그래요?”“혼자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미 암호 걸어서 이메일 보내놨어요.”임유환이 영상을 보면 어떤 반응일지 알기에 흑제는 말을 내뱉기가 어려웠다.“알겠어요.”임유환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나서 빠르게 흑제가 보내온 이메일을 확인했다.이메일의 정체는 5분쯤 되는 영상이었는데 영상의 장소는 어두운 밀실같이 보였다.밀실 안에는 똑같은 옷차림을 한 남자가 다섯이나 있었는데 그들은 전부 눈 하나만 내놓고 있었다.임유환은 그들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핸드폰 화면으로만 들여다보고 있음에도 무시무시한 그들의 기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남자들의 발밑에는 거의 죽어가는 젊은 여자 하나가 누워있었다.남루한 옷차림의 여자는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몸에는 채찍에 맞느라 생긴 생채기들이 한가득이었다.생채기 주위의 살들은 진작에 터져나갔고 팔은 안에 있는 뼈가 다 보일 정도로 앙상했다.그리고 몸에 난 상처는 그뿐만이 아니라 담배로 인해 생긴 작은 화상 자국들도 빼곡했다.옛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새로 난 상처들은 이미 옷과 붙어버려 여자의 처참한 상태를 더욱 잘 보여주고 있었다.영상을 보고 있던 임유환도 서서히 여자가 불쌍해졌다.다섯 남자들은 대체 누구길래 여자한테 이토록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그리고 여자는 또 누구인지 임유환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영상 하단에 떠 있는 시간을 보니 아직 5분 1밖에 진행되지 않은 영상에 임유환은 계속해서 화면을 들여다봤다.화면은 빠르게 전환됐고 여전히 같은 복장을 한 남자 다섯 명과 아까와 다를 게 없는 밀실이 나타났지만 아까 그 일로부터 며칠은 지난 듯 보였다.영상 속의 남자는 찬물을 들어 쓰러져있는 여자의 몸 위로 뿌렸고 여자는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고통 속에서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검은 복면을 쓴 남자 하나가 입을 열자 나머지 네 명도 여자를 차갑게 바라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검사할 거예요 오빠?”그때 귀를 간질거리는 윤여진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부끄러워하면서도 도발적인 말을 뱉어내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심장이 쿵쾅거렸다.“여진아, 나는...”오해를 풀어보려고 고개를 돌려 윤여진을 보던 임유환은 몸을 앞으로 숙인 탓에 훤히 드러난 검은색 슬립 아래의 몸매에 다시 말을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임유환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은 시각 동물인지라 완벽한 몸매와 유독 눈에 띄는 풍만한 가슴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반응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감정도 이내 임유환의 이성에 묻혀버렸다.“후...”임유환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여진아, 진짜 이제 그만해. 진짜 실수한다니까.”“오빠는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나긋나긋하게 말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뜨거운 숨결 때문에 점점 본능이 들끓고 있었던 임유환은 이대로 있었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런데 그 순간 윤여진이 임유환의 손을 덥석 잡아 오자 우유 크림처럼 부드러운 그 느낌에 임유환은 일어서려던 다리마저 굳어버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유환 오빠, 나 장난하는 거 아니라니까요.”윤여진은 여전히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하며 잡고 있던 임유환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그 모습에 임유환은 순간 머리가 하얘졌고 이 손을 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하고 있었다.그런데 마침 타이밍 좋게 울린 전화벨 소리에 둘 다 화들짝 놀랐고 임유환도 또 한 번 울리는 벨 소리에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윤여진도 겁먹은 고양이마냥 손을 빼내며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나... 전화 좀 받을게.”임유환이 어색하게 말하자 윤여진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네.”아까의 대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부끄럼 타는 고양이 같은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리던 임유환이 전화를 받았다.흑제에게서 온 전화라 조금 긴장한 채로 받았는데 역시나 전에 지시했던 일
가슴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임유환은 애써 윤여진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장난치지 말라니까.”윤여진이 여전히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한 임유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말을 돌렸다.“아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다고 했잖아, 그거 알려줄게.”“그 얘긴 나중에 하고, 오빠 아직 내 말에 대답 안 했잖아요.”“어... 그 얘기 먼저 하자, 불 끄면 졸려서 못 할 것 같아.”임유환은 기대에 찬 윤여진의 얼굴이 보였지만 어떻게든 이 숨 막히는 상황부터 끝내보고자 평소답지 않게 우겨댔다.그리고 사실 윤여진이 한 말이 장난인지 아닌지 제대로 분간도 가지 않아 아까부터 심장이 떨리고 있었다.장난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장난이 아니라면 아주 어색해질 것 같았다.“오빠, 왜 아까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리는 것 같죠?”그때 임유환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을 보며 윤여진이 부드럽게 물어왔다.“그... 그래?”“긴장한 거예요 설마?”임유환에게 질문을 하며 코앞까지 다가온 윤여진 때문에 둘의 거리는 3㎝도 채 남지 않게 되었다.정말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닿을 것같이 가까운 거리라서 임유환은 윤여진이 내뱉는 호흡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뜨거운 숨결과 함께 풍기는 향기에 임유환은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여진아, 이제 진짜 그만해.”사람 둘은 족히 앉을 정도로 떨어져서야 임유환은 잔뜩 긴장했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장난 아니라니까요.”임유환이 저에게서 멀어지자 윤여진은 살짝 실망한 듯 보였지만 이내 연애 수첩 제1항을 떠올린 그녀는 다시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그래서 윤여진은 긴장한 듯 굳어있는 임유환을 보며 익살스레 웃어 보였다.“유환 오빠, 누가 그러는데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 긴장을 한대요.”“오빠 설마 나 좋아하는 거예요?”윤여진이 이 질문을 할 때 임유환은 이게 장난이든 진심이든 간에 서둘러 이 화제가 지속되는 것부터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둘이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상해지는 방 안의
“어...”단도직입적인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은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 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임유환의 생각이 불순한 건 맞지만 그게 오로지 임유환의 잘못은 아니었다.이미 성인이 된 그들은 15년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윤여진은 얼굴이며 몸매며 누가 봐도 예쁜 여자로 성장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멀쩡할 남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임유환 역시 남자였으니 검은색 레이스 속옷에 슬립까지 입고 제 눈앞을 돌아다니고 있는 윤여진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슬립 아래로 보일 듯 말 듯 한 윤곽이 아까부터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임유환은 지금 온 정신력을 다 쏟아서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자신의 눈이 윤여진의 몸으로 향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임유환이기에 당연히 같이 자자는 그녀의 요구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모든 남자들의 워너비인 그 몸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밤을 조용히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오빠, 이상한 생각 한 거 맞죠?”한편 윤여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임유환을 보며 기쁨이 섞인 목소리로 장난스레 물었다.“어...”임유환은 이젠 정말 자신이 무슨 생각인지도 잘 모를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정말 윤여진을 두고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말하기에는 그는 윤여진이 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고 말하기에는 그녀의 몸만 보면 저절로 뜨거워지는 가슴이 대신해서 부정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여진아, 사실... 나는...”다그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해명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진심이 전달될지 몰라 말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임유환에게 윤여진은 여전히 15년 전 꼬맹이였고 임유환 또한 그때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그는 윤여진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오해하는 것도 원치 않았고 또 윤여진도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대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여전히 그때처럼 윤여진이 힘들 때 그녀에게 힘이 돼주는 든든한 오빠가 되고 싶었는데 이 마음을 전하기에 말 한마디
“아니야, 그냥 네가 아까 한 말 생각하고 있었어.”“그럼 오빠도 나랑 같이 있고 싶은 거예요?”다급히 해명하는 임유환에 시무룩해 있던 윤여진은 다시 밝게 웃으며 물었다.“그럼.”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사실 그와 윤여진이 말한 같이 있는다는 서로 전혀 다른 뜻이었다.“그럼 오빠,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임유환의 팔을 감싸 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간드러지게 말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몸이 먼저 반응할 뻔한 걸 간신히 참고는 물었다.“여기서 너랑 같이 밤을 보내자고?”“네!”윤여진이 이런 부탁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임유환이기에 제 팔에 닿아오는 말랑거리는 그 느낌도 까맣게 잊은 채 놀랐다.그런 임유환의 반응을 보던 윤여진은 혹시라도 거절당할까 봐 다급하게 한마디 더 보탰다.“여기서 자는 건 처음이라 좀 무서워요, 워낙 낯설기도 하고...”“어...”윤여진의 부탁도 일리가 있어 보여 임유환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오빠, 그냥 남아서 나랑 같이 자면 안 돼요?”윤여진은 임유환의 팔을 좌우로 흔들며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임유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가만히 있어도 예쁜 얼굴인데 애교까지 부리니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모습이 섞여 있어 웬만한 남자라면 다 윤여진한테 넘어갈 것 같았다.인내심과 자제력 하나는 자부하면서 살아왔던 임유환도 윤여진의 애교 공세에 3초도 못 버티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알... 알겠어.”임유환은 저도 모르게 긍정의 대답을 해버렸다.정말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바로 거절하고 싶었지만 저를 향해 애원의 눈빛을 보내는 윤여진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역시, 오빠는 내 말 들어줄 줄 알았어요!”결국 제 말을 들어준 임유환에 윤여진의 촉촉한 눈망울에서는 빛이 나기 시작했다.“너랑 같이 있어 줄 수는 있는데, 난 바닥에서 잘 거야.”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는 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 돼버렸으니 임유환은 나름대로 그 안에서 최선책을 찾으려고 노력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