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미친년이! 너 내 옷이 얼마짜린 줄은 알아?!”정장 차림의 남자가 선두로 여자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퍼붓고 있었고 그 따까리쯤으로 보이는 남자들 역시 좋지 않은 시선으로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죄... 죄송합니다.”겁에 질린 여자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사과를 하고 있었다.“죄송? 그딴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면 끝이야?!”화를 내던 정장 차림의 남자는 갑자기 음흉한 미소를 짓더니 말을 이었다.“고개 들어봐, 얼굴 어떻게 생겼는지나 좀 보게.”“죄송합니다, 제가 정말... 죄송합니다.”남자의 말에도 여전히 고개만 숙인 채 사과를 하는 여자를 보자 남자는 아까보다 더 크게 소리 질렀다.“고개 들라고!”“네...”그 소리에 몸을 파르르 떨던 여자는 남자의 화를 돋우지 않기 위해 천천히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머리카락에 가려졌잖아, 머리카락 치우고 손 내려! 얼굴이 제대로 안 보이잖아!”“사장님, 정말 죄송해요.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이렇게 사과할게요...”목소리를 깔고 말하는 남자에 여자는 울먹이며 애원했다.“뭐?”여자의 반항에 남자가 미간을 찌푸리자 두려워진 직원은 하는 수없이 얼굴을 절반이나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리고 머리를 귀 뒤로 넘겨 계란형의 예쁜 얼굴을 드러냈다.두려움이 가득한 얼굴에 손자국까지 붉게 나 있었지만 여자의 얼굴은 그래도 아름다웠다.“허, 이년 봐라? 얼굴은 반반하네.”여자의 얼굴을 본 남자는 눈을 반짝이고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네가 가서 내 옷 깨끗하게 빨아와. 그럼 나도 이 일로 더는 뭐라 하지 않을게.”“감사합니다.”여직원은 감격에 겨워 말했다.“옷 벗어 주시면 빨아올게요.”“내가 벗어?”남자는 아까보다 더 음흉한 눈으로 여자를 아래 우로 훑으며 말했다.“네가 수프를 쏟아서 내 옷이 더러워졌는데 그걸 내 손으로 벗으면 내 손까지 더러워지잖아.”“그, 그럼 제가 해드릴게요...”여자는 우물쭈물하면서도 결국 남자 앞으로 다가갔다.지금의 그녀는 이
“거기 너, 얘 알아?”정장 차림의 남자는 문어 구에 서 있는 임유환을 향해 기분 나쁜 시선을 보내왔다.“응.”그에 임유환이 고개를 끄덕이자 더 당황한 건 허유나였다.임유환이 자신과의 관계를 인정할 줄 몰랐기에 나온 반응이었다.“무슨 사인데?”“그냥 친구 사이.”하지만 담담히 대답하는 임유환에 허유나의 기대에 찼던 눈빛은 금세 다시 사그라들었다.“그냥 친구?”남자는 임유환의 대답을 듣고는 입꼬리를 올려 냉소를 흘렸다.“그냥 친구면 신경 끄고 가던 길 가. 얘가 지금 내 옷을 더럽혀서 그거 배상하라고 하는 중이니까.”“얼마야? 내가 대신 줄 테니까 그 손부터 좀 놓지.”임유환과 허유나는 이미 아무 관련도 없는 사이였지만 전 부인이 다른 사람한테 모욕을 당하는 걸 본 이상 임유환은 그냥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그리고 임유환의 대답에 많이 놀란 허유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임유환을 바라봤다.임유환을 향한 두 눈에도 어느새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하지만 임유환은 그런 허유나가 아니라 남자만을 차갑게 내려다보고 있었다.“대신 내준다고?”남자는 코웃음을 치고는 말을 이었다.“이게 얼만 줄 알고 대신 내준다는 거야? 이거 특별제작이야.”“2천만 원이면 돼?”한번 훑어본 바로는 그냥 길거리에서 파는 싸구려 옷인 것 같았지만 이런 일에 굳이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던 임유환은 금액부터 제시했다.“2천? 난 1억은 받아야겠는데.”돈 좀 있어 보이는 상대에 남자는 냅다 가격을 올리기 시작했다.돈과 여자 중에 선택하라면 여자는 당연히 버리고도 남으니까.“길거리에서 파는 싸구려를 1억이나 쳐달라고? 양심이란 건 없니? 누굴 바보로 아나.”느긋하던 임유환의 말투가 갑자기 차가워졌다.처음에 2천만 원을 주겠다한 건 그냥 시간 낭비하는 게 싫어서였지 그렇다고 남한테 호구 잡히겠다는 뜻은 아니었다.“누가 길거리 싸구려를 입었다고 그래!”“2천만 원, 거절하면 한 푼도 없어.”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거짓말을 들켜버린 남자는 역정부터 냈지만 임
“네가 정우빈 도련님을 알아?”눈썹을 꿈틀거리며 묻는 남자에 임유환은 놀리듯 웃으며 답했다.“알자, 정우빈을 어떻게 몰라.”“그럼 돈이나 빨리 내놔!”“돈 없으면 내 일 방해 말고 빨리 꺼져.”남자는 임유환의 말을 친한 척한다고 여겨 그를 재촉하고 나섰다.이 연경 바닥에서 정우빈 이름 석 자면 모두들 고개를 숙이니 임유환 역시 그러할 거라고 생각했다.“하하, 뭔가 좀 오해를 한 것 같은데.”남자의 말을 들은 임유환은 아까보다 더 익살스럽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어쩌겠다는 건데?”남자가 다시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임유환은 고개를 저었다.“정우빈 사람이면 내가 굳이 2천만 원을 낭비할 필요가 없겠다는 뜻이었어.”“네가 감히 날 놀려?!”그제야 임유환의 말뜻을 알아차린 남자는 눈을 번뜩이며 잔뜩 열이 올라서 소리쳤다.“야, 당장 저놈 처리해!”“예, 보스!”남자의 표정이 일그러짐에 따라 철주를 포함한 다른 양아치들도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다시 손을 털어댔다.그들은 감히 제 보스를 농락하고 정우빈을 욕 먹이는 임유환을 제대로 교육해주리라 다짐하고 있었다.그 광경을 본 서인아는 당장 핸드폰을 들어 호텔 경호원을 부르려 했지만 임유환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마저도 제지시켰다.“인아야, 걱정 마.”“처리해.”말을 마친 임유환이 무리를 향해 천천히 다가가자 정장 차림의 남자는 험악한 얼굴을 더 일그러뜨리며 양아치들에게 명령했다.그러자 열몇 명의 따까리들이 임유환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나갔다.그 모습에 가만히 있던 허유나도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임유환을 걱정했다.“임유환, 조심해!”하지만 잔뜩 놀란 그녀와 달리 임유환은 여전히 무표정을 유지한 채 주먹을 들어 올렸다.그 주먹이 바람을 가르며 양아치들을 향해 돌진하자 곧이어 처절한 비명소리가 연달아 방안에 울려 퍼졌다.“아아아!”아까 임유환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새우마냥 몸을 웅크린 채 누워있는 모습에 허유나는 너무 놀라 입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뭐 더 할 말 있어?”그 부름에 뒤로 돈 임유환이 허유나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물었다.“아까는... 고마웠어.”허유나는 눈을 피하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지금의 허유나는 예전처럼 기고만장하지도 않았고 임유환의 얼굴조차 똑바로 보지 못했다.“응.”그에 임유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다가 허유나의 부어오른 뺨을 보며 한마디 덧붙였다.“반차 내고 병원 가봐, 돈이 부족하면 내가 사람 시켜서 보내줄게.”임유환의 말에 허유나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자신이 전에 임유환에게 그런 몹쓸 짓들을 했는데 아직도 저를 도와주려는 임유환에게서 일말의 희망을 보아낸 허유나는 입술을 짓이기다 한참 만에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고는 임유환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전... 전에는 내가 많이... 미안했어... 이 정도 돈이면 병원이 충분히 갈 것 같아...”허유나가 말한 돈은 남자가 준 천만 원을 일컫고 있었다.임유환 역시 더는 오만방자하지 않은 허유나의 모습에 그래도 한 달 사이에 많이 변한 것 같아 다행이다 싶었다.하지만 그 외의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다.“응, 그럼 나 먼저 갈게. 몸조심해.”말을 마친 임유환이 돌아서자 허유나는 한 치의 미련도 없어 보이는 그 뒷모습을 서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입술을 짓이겼다.하지만 전에 제가 한 짓이 도를 넘었다는 걸 본인도 알고 있었기에 허유나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서인아는 오만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온통 후회로 가득해 보이는 허유나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담담히 한마디 했다.“내일 오전 아홉 시, 장안로 서원 그룹 인사팀으로 가. 비서한테 업무 파일 관련된 자리 하나 빼놓으라고 연락할게.”갑작스러운 서인아의 말에 당황하던 것도 잠시, 허유나는 연신 고맙다며 고개를 숙였디.“감사합니다, 아가씨. 정말 감사드려요!”“그래.”담담히 대꾸한 서인아는 임유환과 함께 뒤 돌아 나갔고 허유나의 시선은 서인아 뒷모습에서 조명주와 최서우에게로 옮겨졌다.자신보다 더 예쁘고 더 잘난 사람들이 모두 임
밥을 다 먹고 호텔 입구까지 온 임유환은 좀 있다가 이어질 서인아의 잔소리에 자연스레 표정이 어두워졌다.그리고 그 모습을 보아 낸 서인아는 임유환을 보며 귀엽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서인아 씨, 오늘 정말 너무 잘 먹었어요!”그때 최서우가 잘 먹었다며 감사 인사를 전해오자 서인아도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별말씀을요, 아 그런데 서우 씨랑 조 중령님은 어떻게 여기에 오신 거예요?”“택시 타고 왔어요.”“그럼 제가 차로 모셔다드릴게요.”최서우의 대답에 서인아는 흔쾌히 자신이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아니에요, 번거롭게 그러실 필요 없어요.”“괜찮아요. 저 주차장 가서 차 가져올 테니까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고 계세요.”서인아는 최서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는 주차장으로 향했다.가만히 서인아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최서우는 서인아가 좀 멀어지자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울상을 짓고 있는 임유환에게 물었다.“유환 씨, 서인아 씨랑은 진도 어디까지 나간 거예요?”아까 식사 자리에서는 예기치 못한 사건사고가 좀 있어 흐지부지하게 끝난 화제였지만 궁금한 건 참을 수 없었던 최서우가 서인아가 없는 틈을 타 물은 것이다.“그게...”“그냥 좀 알려줘요!”임유환이 예상대로 망설이자 최서우는 눈을 반짝이며 그를 재촉했다.최서우 본인이 궁금한 것도 있었지만 제 친구인 조명주를 돕고자 묻는 것이기도 했다.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차도녀라고 불리는 서인아는 최서우가 알기로는 연애는 고사하고 이성들과도 철저히 거리를 지키는 사람이었는데 임유환을 대하는 태도는 그런 소문과는 확연히 달랐다.그리고 7년 전부터 알고 지냈다 하니 최서우의 호기심이 제대로 발동해버린 것이다.조명주 역시 그 일이 신경 쓰였는지 임유환을 바라보고 있었다.“그게... 말하자면 좀 길어요. 나중에 자세히 알려줄 테니까 오늘은 우리 먼저 보내줘요...”임유환이 고심 끝에 김빠지는 대답을 하자 최서우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어우 진짜 쪼잔해요! 나랑 명주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보였지만 계속 망설이기만 하고 말을 내뱉지 못하고 있는 조명주를 임유환은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았다.“네? 왜요?”“아, 아니에요. 우리 얼른 내려가자고요.”그에 조명주는 흔들리는 눈빛을 다 잡으며 호텔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사실 어제 결혼식이 끝난 뒤부터 조명주는 마음이 뒤숭숭했다.서인아의 결혼식장에 백마 탄 왕자처럼 나타나는 모습을 보니 만약 제가 서인아와 같은 처지라면 과연 임유환이 달려왔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왜 자신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떠올랐는지는 모르겠지만 아까 서인아와 임유환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니 그 생각이 점점 더 뚜렷해졌다.“조 중령님, 괜찮아요?”“네...”임유환은 어딘가 이상해 보이는 조명주를 쫓아갔지만 조명주는 괜찮다며 애써 둘러댈 뿐이었다.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최서우는 조명주가 너무 답답해 났다.임유환한테 호감이 있고 또 무엇이 궁금한지 뻔히 보이는데도 말을 못 하고 혼자 끙끙대는 게 안쓰러웠던 최서우는 자신이 대신 말해주기로 했다.“유환 씨, 명주는 자신이 어제 서인아 씨 같은 상황에 처했어도 유환 씨가 구하러 와 줄 건지 물어보고 싶대요.”“서우야!”최서우가 필터링도 없이 말을 내뱉자 조명주의 눈빛은 세차게 흔들렸다.“인아를 구하러 간 것처럼요?”임유환이 이해를 못 한 듯 되묻자 최서우는 손까지 동원하여 다시 설명해주었다.“그러니까 명주가 서인아 씨처럼 원치 않는 결혼을 하게 된다면 유환 씨가 어젯밤처럼 결혼식장에 쳐들어가서 다들 한마디도 못 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묻는 거죠.”말을 하던 최서우는 어젯밤 임유환의 용감한 자태가 떠올라 저도 모르게 눈을 반짝였다.여자라면 누구나 백마 탄 왕자를 좋아하듯 최서우도, 조명주도 마찬가지였다.“어... 명주 씨한테도 혹시 그런 일이 생겼어요?”“아니요, 그냥 물어보는 거죠. 대답이나 해요.”임유환이 놀란 듯 묻자 최서우는 눈을 깜빡이며 대답을 재촉했다.“당연하죠.”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 답하며 조명주에게 그런 일이
공기가 순식간에 차가워졌고 임유환의 경계는 더욱 짙어졌다.그걸 본 조명주도 진지해진 표정으로 임유환을 향해 물었다.“유환 씨, 왜 그래요?”“주변에 살기가 느껴져요, 얼른 서우 씨 데리고 호텔로 먼저 가 있어요!”사뭇 엄숙해 보이는 임유환의 표정과 차가운 눈빛을 본 조명주의 눈빛에도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하지만 조명주가 반응하기도 전에 무언가가 밤바람을 가르며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조심해요!”그걸 본 임유환은 소리를 지르며 조명주와 최서우를 잡고 바닥으로 몸을 숙였다.공중에서 날아온 힘은 그대로 호텔 계단을 부쉈고 거기서 떨어져 나온 파편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굉음과 함께 계단에는 큰 홈이 생겨났다.고개를 들어 그 홈을 유심히 바라보던 조명주는 총알의 모양과 똑같은 걸 보고 두 눈을 크게 떴다.홈의 깊이로 보아 그냥 총알이 아니라 저격 창에서 발사된 총알인 것 같았다.임유환에 의해 몸이 숙여진 최서우는 그 소리에 깜짝 놀라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어대고 있었다.최서우는 임유환과 조명주와는 다른 훈련을 거치지 않은 일반인이었기에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이런 상황이 무섭기만 해 머릿속까지 하얘졌다.그때 총알이 다시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총알이 날아온 방향은 동, 서, 남 총 세 군데였다. 그 말인즉 킬러가 셋이란 뜻이었다.“얼른 은신처를 찾아야 해요!”임유환이 소리를 치며 진기를 뿜어내자 최서우와 조명주는 순식간에 그 손에 들려 근처에 있는 시멘트로 된 기둥 뒤에 몸을 숨길 수 있었다.그러자 총알들이 빗발치듯 날아오며 정확히 기둥을 맞고 떨어진 돌 조각과 함께 튕겨 나갔다.지금은 기둥이 은신처 역할을 해주고 있었지만 계속 이 상태로 있다가는 기둥이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그때가 되면 킬러들의 망원경 앞에 그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버릴 것이기에 임유환은 다른 수를 써야만 했다.“조 중령님은 최서우 씨 지켜요, 저 새끼들은 제가 상대할게요.”“조심해요.”“네.”잔뜩 긴장한 상태에서도 당부를 잊지 않는 조명주에 임유환은
그 목소리에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등골이 오싹해났다.이미 무왕 후기에 오른 최고의 킬러인 자신도 남자가 등 뒤까지 오는 동안에 아무런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기에 더욱 두려워졌다.“10초 줄게. 누가 보냈는지 대답해.”섬뜩한 임유환의 목소리는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킬러의 귓가에 맴돌았다.그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은 남자는 갑자기 표정을 싹 바꾸더니 혀들 들어 올려 이빨 사이에 있는 독약을 먹고 자결하려 했다.하지만 그걸 이미 예상하고 있던 임유환은 손을 들어 남자의 턱을 세게 잡아당겼다.임유환은 턱이 빠져버린 남자를 향해 섬뜩하게 웃으며 말했다.“왜, 죽으려고?”이렇게 허무하게 자살의 기회까지 빼앗겨버린 킬러의 눈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한 두려움이 차올랐다.“얌전히 내 말에 협조하는 게 좋을 거야. 널 괴롭힐 방법은 많고 많으니까. 내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넌 사는 게 죽는 것보다도 더 괴로워질 거야.”사신마냥 제 귓가에 대고 죽음을 예고하는 임유환에 킬러는 온몸을 세차게 떨어댔다.임유환의 표정을 보니 그냥 겁주려고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그리고 남자의 몸이 떨리는 걸 느낀 임유환은 다시 차가운 말을 내뱉었다.“앞으로 내가 묻는 말에 너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는 걸로 대답해.”“원하는 대답을 들으면 넌 살려줄게.”“그렇지 않으면 널 데려가서 직접 심문할 거야. 네가 바른대로 말할 때까지.”“정씨 집안에서 너희를 보낸 거지?”임유환의 첫 번째 질문에 킬러는 고개를 움직이는 대신 웅얼거리며 울부짖었다.“대답해!”그에 임유환은 호통을 치며 은침을 들어 킬러의 척추를 찔렀다.킬러는 온몸을 관통하는 듯한 그 통증에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식은땀이 흘려댔다.“이건 애피타이저일 뿐이야. 더한 걸 경험하고 싶지 않다면 빨리 말하는 게 좋을 텐데.”다시 입을 연 임유환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지만 킬러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말, 안 할 거야?”그에 인내심을 잃은 임유환이 두 번째 침을 놓으려고
임유환과 윤여진은 최서우의 병이 악화될까 염려하여 일부러 그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임씨 집안으로 향했다.임씨 집안으로 가는 차 안에서 윤여진은 사건의 자초지종에 대해 간략하게 전해 듣게 되었다.영상 속의 그 여자는 임유환의 시중을 들던 나비라는 이름의 메이드이고 그 메이드를 남자들에게 건네준 이가 임준호라는 사실까지 다 듣고 난 윤여진도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윤여진이 알고 있는 임준호는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었는데 그런 분이 한 일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잔인한 행동에 15년 전 자신의 친아들을 직접 내쫓던 그때의 임준호가 떠올라 윤여진은 온몸이 오싹해났다.아마도 15년 전 그날부로 임준호가 완전히 변한 게 아닌가 싶었다.30분 뒤 그들은 임씨 집안에 도착했지만 워낙 깊은 밤이라 저택의 대문은 당연히 잠겨있었고 흑기군을 데리고 대문 앞에서 한참 동안 대기하고 있던 흑제가 임유환을 보고 인사를 건네왔다.“임 선생님.”“오셨어요?”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세계 제일 갑부의 느닷없는 등장이 윤여진은 놀랍기만 했다.임유환을 대하는 흑제의 태도가 지나치게 깍듯해 그 둘의 사이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라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할 때라서 윤여진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영상에서 봤던 모습을 떠올리며 윤여진이 다시 표정을 굳히자 아까부터 냉랭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임유환이 앞으로 나서더니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임준호, 당장 나와!”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저택 사람들 몇 명이 눈을 떴고 하인 두 명이 달려 나왔다.밖에 나와 상황을 살피던 하인 두 명은 익숙한 임유환의 얼굴에 깜짝 놀랐지만 그런 놀라움도 얼마 오래가진 못했다.하인들은 이내 비아냥거리며 임유환을 향해 말했다.“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임유환 도련님 아니세요?”입으로는 도련님이라 하고 있었지만 그 말투 속에 진하게 녹아나 있는 조롱은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을 정도였다.“무슨 도련님이야, 버려진 도련
임유환의 몸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이미 덜덜 떨리고 있었다.“주인님, 그건 저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이 영상도 그 경찰에 대해 조사할 때 경찰 시스템을 뒤지다 발견한 겁니다.”“경찰 시스템?”“그럼 이것도 정씨 집안에서 한 짓이란 말이야?”“그것까진 아직 모르겠는데... 제가 알아본 바로는 저 여자분은 주인님... 아버님께서 직접 저 남자들 손에 넘긴 거였습니다.”이 일이 임유환의 아버지와 관련되어있기도 했고 영상 속의 여자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하면 더 위험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아 흑제는 대답을 망설였다.“아버지?”“네, 주인님.”흑제의 말에 당황하던 임유환은 재차 확인을 거친 후에 또다시 기운을 뿜어내며 당장이라도 임준호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임유환은 어떻게 자신이 직접 데려온 아이를 또 내다 버릴 수가 있는지 임준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당연히 제 한 목숨 부지하고자 행한 나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저 사람들 손에 끌려가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내어준 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짓인지 의문이 갔다.영상 속 사람들이 말하는 비밀 열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임유환은 나비가 지금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임준호!”갑자기 소리 지르는 임유환 때문에 방 안에 있던 윤여진은 화들짝 놀랐다.“흑제.”“예, 주인님.”“지금 당장 흑기군 준비해서 나랑 임씨 집안으로 간다.”“예, 주인님.”지금 임유환은 약해빠진 임준호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었다.그래서 직접 집으로 쳐들어가서 대체 나비를 누구에게 넘겨준 것인지, 나비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살아있다면 직접 얼굴을 봐야 했고 죽었다면 그 시체라도 봐야 진정될 것 같았다.임유환은 나비가 그 짐승 같은 놈들 손에 놀아나도록 두고 볼 수가 없었다.살아있다면 당장 데려다가 직접 치료를 해줄 것이고 죽었어도 데리고 와서 묻어줄 생각으로 눈이 빨갛게 충혈된 임유환은 차오르는 분노와
“나비?”아까는 얼굴이 제대로 안 보여서 몰랐는데 영상 속의 여자는 바로 임유환만 보면 도련님이라 부르며 해맑게 웃던 나비였다.그렇게 밝고 예쁘게 웃던 아이가 피범벅이 된 채 모진 고문을 견뎌내는 걸 보고 임유환은 낯빛이 창백해졌고 머리가 울려왔으면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서 쫓겨난 지도 15년이니 나비도 많이 커서 얼굴만 보면 못 알아봤겠지만 나비 문양의 반점 덕분에 한눈에 그녀의 알아볼 수 있었다.나비라는 아이는 5살의 어린 나이에 임씨 집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름도 없어서 나비도 임유환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나비는 어릴 때 강도들의 손에 부모님을 잃고 그들에게 이끌려 여기저기 팔려 다니던 이이였는데 그런 그녀를 불쌍하게 여긴 임준호가 큰돈을 들여 데리고 오는 바람에 임씨 집안에서 메이드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나비는 임유환을 보자마자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때릴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도 슬퍼 보여서, 웅크린 몸을 떨고 있는 아이가 너무 애처로워 보여서 임유환은 아직까지도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 들어온 이상 더는 그 어떤 괴롭힘도 없을 거라고 다독여봐도 나비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었다.다른 메이드들을 시켜 깔끔히 씻기고 머리도 빗겨주고 깨끗한 옷까지 갈아입혀 주니 왼쪽 얼굴에 있는 나비 모양의 반점도 드러났다.임유환이 그 반점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비는 신분이 낮은 제가 얼굴에 난 반점으로 임유환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어 동굴 속에서 강도들에게 폭행당하던 것처럼 맞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반점을 가리며 몸을 떨었다.그에 임유환은 바로 나비의 손을 잡아주며 자신은 그들과는 다르다고 천천히 타일러주었다.그리고는 나비의 긴장과 두려움을 해소해주기 위해 정원 산책까지 데리고 갔다.드넓은 정원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있었고 그것들이 함께 조화로운 향도 만들어내고 있었다.이런 아름다운 곳은 처음 보는 나비는 처음에는 몸이 굳어버리며 어색해했지만 이
“아!”남자의 행동과 함께 흘러나온 여자의 처절한 비명이 밀실을 가득 채웠다.화면을 뚫고도 전해지는 여자의 절망과 고통에 핸드폰을 들고 있던 임유환의 몸도 떨려왔고 마찬가지로 비명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윤여진도 임유환 쪽으로 다가오며 화면을 바라보았다.“어머!”사람한테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하는 영상 속 인간들 때문에 윤여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소리쳤다.너무 집중해서 본 나머지 옆에 윤여진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던 임유환이 다급하게 화면을 가리며 말했다.“여진아, 넌 보지 마.”“오빠, 이 사람들 누구예요?”“아직 모르겠어.”얼굴과 입술이 창백해진 윤여진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임유환은 한숨부터 쉬며 대답했다.“여진아, 네 방 화장실 좀 쓸게.”말을 마친 임유환은 화장실로 들어가서 다시 영상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화면 속의 여자는 여전히 은침에 찔린 손을 들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온몸을 비틀려고 발버둥 치는 여자는 마치 불판 위에 올라간 미꾸라지 같기도 했다.하지만 검은 옷차림의 남자는 그런 여자가 불쌍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차가운 눈을 하고 두 번째 은침을 꺼내 들어 여자의 다른 손가락에 찔러넣었다.“아!”가슴을 관통하는 듯한 고통에 여자는 순간 고개를 확 젖혀버렸고 이미 흑과 말라 굳어버린 핏자국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이 여자의 얼굴을 가렸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몰라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그냥 날 죽여줘요 제발...”“죽여주세요...”남자가 아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여자는 울며불멸 죽기를 애원하고 있었다.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으면 죽는 걸 원하고 있을까 싶어 임유환은 비통하다 못해 화까지 나고 있었다.“말했잖아, 얘기하면 죽여준다고.”말을 마친 남자는 섬뜩하게 웃더니 나머지 손가락에도 하나하나 은침을 꽂아 넣었고 여자는 온몸에 경련이 일듯 몸을 떨어대다가 한계에 다다른 건지 다시 한번 기절했다.은침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열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들은 빠르게 작은 웅덩이
“마음의 준비요?”의미심장한 흑제의 말에 임유환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영상인데 그래요?”“혼자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미 암호 걸어서 이메일 보내놨어요.”임유환이 영상을 보면 어떤 반응일지 알기에 흑제는 말을 내뱉기가 어려웠다.“알겠어요.”임유환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나서 빠르게 흑제가 보내온 이메일을 확인했다.이메일의 정체는 5분쯤 되는 영상이었는데 영상의 장소는 어두운 밀실같이 보였다.밀실 안에는 똑같은 옷차림을 한 남자가 다섯이나 있었는데 그들은 전부 눈 하나만 내놓고 있었다.임유환은 그들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핸드폰 화면으로만 들여다보고 있음에도 무시무시한 그들의 기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남자들의 발밑에는 거의 죽어가는 젊은 여자 하나가 누워있었다.남루한 옷차림의 여자는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몸에는 채찍에 맞느라 생긴 생채기들이 한가득이었다.생채기 주위의 살들은 진작에 터져나갔고 팔은 안에 있는 뼈가 다 보일 정도로 앙상했다.그리고 몸에 난 상처는 그뿐만이 아니라 담배로 인해 생긴 작은 화상 자국들도 빼곡했다.옛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새로 난 상처들은 이미 옷과 붙어버려 여자의 처참한 상태를 더욱 잘 보여주고 있었다.영상을 보고 있던 임유환도 서서히 여자가 불쌍해졌다.다섯 남자들은 대체 누구길래 여자한테 이토록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그리고 여자는 또 누구인지 임유환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영상 하단에 떠 있는 시간을 보니 아직 5분 1밖에 진행되지 않은 영상에 임유환은 계속해서 화면을 들여다봤다.화면은 빠르게 전환됐고 여전히 같은 복장을 한 남자 다섯 명과 아까와 다를 게 없는 밀실이 나타났지만 아까 그 일로부터 며칠은 지난 듯 보였다.영상 속의 남자는 찬물을 들어 쓰러져있는 여자의 몸 위로 뿌렸고 여자는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고통 속에서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검은 복면을 쓴 남자 하나가 입을 열자 나머지 네 명도 여자를 차갑게 바라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검사할 거예요 오빠?”그때 귀를 간질거리는 윤여진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부끄러워하면서도 도발적인 말을 뱉어내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심장이 쿵쾅거렸다.“여진아, 나는...”오해를 풀어보려고 고개를 돌려 윤여진을 보던 임유환은 몸을 앞으로 숙인 탓에 훤히 드러난 검은색 슬립 아래의 몸매에 다시 말을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임유환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은 시각 동물인지라 완벽한 몸매와 유독 눈에 띄는 풍만한 가슴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반응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감정도 이내 임유환의 이성에 묻혀버렸다.“후...”임유환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여진아, 진짜 이제 그만해. 진짜 실수한다니까.”“오빠는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나긋나긋하게 말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뜨거운 숨결 때문에 점점 본능이 들끓고 있었던 임유환은 이대로 있었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런데 그 순간 윤여진이 임유환의 손을 덥석 잡아 오자 우유 크림처럼 부드러운 그 느낌에 임유환은 일어서려던 다리마저 굳어버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유환 오빠, 나 장난하는 거 아니라니까요.”윤여진은 여전히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하며 잡고 있던 임유환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그 모습에 임유환은 순간 머리가 하얘졌고 이 손을 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하고 있었다.그런데 마침 타이밍 좋게 울린 전화벨 소리에 둘 다 화들짝 놀랐고 임유환도 또 한 번 울리는 벨 소리에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윤여진도 겁먹은 고양이마냥 손을 빼내며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나... 전화 좀 받을게.”임유환이 어색하게 말하자 윤여진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네.”아까의 대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부끄럼 타는 고양이 같은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리던 임유환이 전화를 받았다.흑제에게서 온 전화라 조금 긴장한 채로 받았는데 역시나 전에 지시했던 일
가슴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임유환은 애써 윤여진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장난치지 말라니까.”윤여진이 여전히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한 임유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말을 돌렸다.“아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다고 했잖아, 그거 알려줄게.”“그 얘긴 나중에 하고, 오빠 아직 내 말에 대답 안 했잖아요.”“어... 그 얘기 먼저 하자, 불 끄면 졸려서 못 할 것 같아.”임유환은 기대에 찬 윤여진의 얼굴이 보였지만 어떻게든 이 숨 막히는 상황부터 끝내보고자 평소답지 않게 우겨댔다.그리고 사실 윤여진이 한 말이 장난인지 아닌지 제대로 분간도 가지 않아 아까부터 심장이 떨리고 있었다.장난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장난이 아니라면 아주 어색해질 것 같았다.“오빠, 왜 아까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리는 것 같죠?”그때 임유환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을 보며 윤여진이 부드럽게 물어왔다.“그... 그래?”“긴장한 거예요 설마?”임유환에게 질문을 하며 코앞까지 다가온 윤여진 때문에 둘의 거리는 3㎝도 채 남지 않게 되었다.정말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닿을 것같이 가까운 거리라서 임유환은 윤여진이 내뱉는 호흡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뜨거운 숨결과 함께 풍기는 향기에 임유환은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여진아, 이제 진짜 그만해.”사람 둘은 족히 앉을 정도로 떨어져서야 임유환은 잔뜩 긴장했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장난 아니라니까요.”임유환이 저에게서 멀어지자 윤여진은 살짝 실망한 듯 보였지만 이내 연애 수첩 제1항을 떠올린 그녀는 다시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그래서 윤여진은 긴장한 듯 굳어있는 임유환을 보며 익살스레 웃어 보였다.“유환 오빠, 누가 그러는데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 긴장을 한대요.”“오빠 설마 나 좋아하는 거예요?”윤여진이 이 질문을 할 때 임유환은 이게 장난이든 진심이든 간에 서둘러 이 화제가 지속되는 것부터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둘이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상해지는 방 안의
“어...”단도직입적인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은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 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임유환의 생각이 불순한 건 맞지만 그게 오로지 임유환의 잘못은 아니었다.이미 성인이 된 그들은 15년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윤여진은 얼굴이며 몸매며 누가 봐도 예쁜 여자로 성장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멀쩡할 남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임유환 역시 남자였으니 검은색 레이스 속옷에 슬립까지 입고 제 눈앞을 돌아다니고 있는 윤여진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슬립 아래로 보일 듯 말 듯 한 윤곽이 아까부터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임유환은 지금 온 정신력을 다 쏟아서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자신의 눈이 윤여진의 몸으로 향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임유환이기에 당연히 같이 자자는 그녀의 요구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모든 남자들의 워너비인 그 몸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밤을 조용히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오빠, 이상한 생각 한 거 맞죠?”한편 윤여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임유환을 보며 기쁨이 섞인 목소리로 장난스레 물었다.“어...”임유환은 이젠 정말 자신이 무슨 생각인지도 잘 모를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정말 윤여진을 두고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말하기에는 그는 윤여진이 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고 말하기에는 그녀의 몸만 보면 저절로 뜨거워지는 가슴이 대신해서 부정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여진아, 사실... 나는...”다그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해명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진심이 전달될지 몰라 말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임유환에게 윤여진은 여전히 15년 전 꼬맹이였고 임유환 또한 그때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그는 윤여진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오해하는 것도 원치 않았고 또 윤여진도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대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여전히 그때처럼 윤여진이 힘들 때 그녀에게 힘이 돼주는 든든한 오빠가 되고 싶었는데 이 마음을 전하기에 말 한마디
“아니야, 그냥 네가 아까 한 말 생각하고 있었어.”“그럼 오빠도 나랑 같이 있고 싶은 거예요?”다급히 해명하는 임유환에 시무룩해 있던 윤여진은 다시 밝게 웃으며 물었다.“그럼.”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사실 그와 윤여진이 말한 같이 있는다는 서로 전혀 다른 뜻이었다.“그럼 오빠,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임유환의 팔을 감싸 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간드러지게 말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몸이 먼저 반응할 뻔한 걸 간신히 참고는 물었다.“여기서 너랑 같이 밤을 보내자고?”“네!”윤여진이 이런 부탁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임유환이기에 제 팔에 닿아오는 말랑거리는 그 느낌도 까맣게 잊은 채 놀랐다.그런 임유환의 반응을 보던 윤여진은 혹시라도 거절당할까 봐 다급하게 한마디 더 보탰다.“여기서 자는 건 처음이라 좀 무서워요, 워낙 낯설기도 하고...”“어...”윤여진의 부탁도 일리가 있어 보여 임유환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오빠, 그냥 남아서 나랑 같이 자면 안 돼요?”윤여진은 임유환의 팔을 좌우로 흔들며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임유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가만히 있어도 예쁜 얼굴인데 애교까지 부리니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모습이 섞여 있어 웬만한 남자라면 다 윤여진한테 넘어갈 것 같았다.인내심과 자제력 하나는 자부하면서 살아왔던 임유환도 윤여진의 애교 공세에 3초도 못 버티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알... 알겠어.”임유환은 저도 모르게 긍정의 대답을 해버렸다.정말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바로 거절하고 싶었지만 저를 향해 애원의 눈빛을 보내는 윤여진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역시, 오빠는 내 말 들어줄 줄 알았어요!”결국 제 말을 들어준 임유환에 윤여진의 촉촉한 눈망울에서는 빛이 나기 시작했다.“너랑 같이 있어 줄 수는 있는데, 난 바닥에서 잘 거야.”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는 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 돼버렸으니 임유환은 나름대로 그 안에서 최선책을 찾으려고 노력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