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는 노을이 그림처럼 펼쳐진 서씨 집안의 뒷산 언덕에는 서인아가 홀로 차가운 벤치에 앉아 있었다.이곳은 서인아가 마음이 복잡할 때마다 오는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오늘도 어김없이 이곳에 반나절 동안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들려온 누군가의 다급한 발소리가 서인아의 고요한 적막을 깨버렸다.때마침 서인아의 뒤에 나타난 한 인영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후, 드디어 찾았네.”목소리를 듣고 임유환인걸 알아차린 서인아는 아직 삐진 척 차갑게 물었다.“네가 여긴 왜 왔어?”“너랑 같이 있으려고 왔지.”“누가 같이 있어 달랬어? 가서 여진이랑 더 놀아주지 왜?”서인아의 화를 풀어주고자 더 능청스럽게 말하는 임유환에 서인아는 새침하게 대꾸했다.“그건 네가 오해한 거야, 나 걔랑 정말 아무 사이 아니야.”아까 일로 화가 난 것 같은 서인아에 임유환은 진심을 다해 사과했지만 서인아는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홱 하고 돌려버렸다.“아직도 화났어?”서인아의 옆에 붙어서 낮게 달래는 임유환에 서인아는 엉덩이를 들어 자리까지 옆으로 옮겨 버렸다.두 주먹 정도의 거리를 옮겨버리는 서인아에 임유환은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또 한편으론 웃기기까지 했다.평소에는 도도한 냉미녀라 불리는 서인아가 삐졌을 때는 이토록 귀여울 수 있다는 걸 누가 알기나 할까.“뭘 웃어?”하지만 서인아는 이 와중에도 웃는 임유환을 보니 더 화가 났는지 미간을 찌푸렸다.“그냥, 너 화내는 게 너무 귀여워 보여서.”“허, 누가 화내? 난 화 안 냈거든.”말은 차갑게 했지만 화가 나 붉게 상기된 얼굴은 거짓말을 못 하고 있었다.“그럼 질투하는 거야?”“꺼져!”집요하게 물어오는 임유환에 서인아는 눈을 흘기며 소리쳤다.“하하.”임유환은 사람 좋게 웃어 보이며 뻔뻔하게 또 서인아의 옆으로 가 붙었다.“인아야, 나랑 여진이는 정말 아무 사이 아니야. 그냥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서 진짜 남매처럼 친한 것뿐이야. 걔는 진짜 내 여동생이나 다름없는 애라니까.”“걔는 그렇게 생각
“너, 너 뭐 하는 거야 지금!”얼굴이 빨개진 서인아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손이 차니까 내가 따뜻하게 해주려고.”“누가 그래 달랬어?”말로는 필요 없다는 하고 있지만 서인아의 떨리는 눈동자는 임유환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온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아직도 화났어?”임유환은 고개를 기울이며 아직도 화난 듯 보이는 서인아와 눈을 맞추려 애썼다.“누가 화났다고 그래, 이거 놔...”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하던 서인아가 손을 빼내려 하자 그걸 더욱 꽉 잡은 임유환이 말했다.“안 놔.”“이젠 누가 뭐래도 안 놔.”임유환의 말에 순간 심장이 반응해버린 서인아는 손을 빼내려 주던 힘을 풀어버렸다.그리고 꼼지락대던 힘이 약해진 걸 느낀 임유환은 서인아를 더욱더 다정히 바라보았다.그리고는 단호하게 선전포고 같은 말을 내뱉었다.“이젠 너 혼자 서럽게 안 한다고 했잖아.”임유환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에 서인아는 그 말에 심장이 떨려와 이를 악물었다.7년 동안 쌓이고 쌓인 오해들이 빚어낸 둘의 불행이었다.“그날일 내가 너 계속 속였는데, 내 탓 안 해?”고개를 들어 임유환을 바라보는 서인아의 눈에는 죄책감이 가득했다.물론 임유환을 위해 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그때 서인아가 했던 말들에 임유환 역시 많은 상처를 받았었기에, 서인아도 그걸 알고 있기에 항상 미안했었다.“네 탓 안 해.”하지만 임유환은 서인아의 질문에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그때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너는 얼마나 힘들었겠어.”평범한 출신이 아니니, 집안의 운명을 등에 지고 살아온 인생이니 서인아는 단 한 번도 저만을 위한 선택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남들과 다르게 태어났다는 죄로 감정조차 집안의 반대와 간섭을 받아야 하는 서인아를 알기에 임유환은 그날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자신을 떠나보낼 때의 서인아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 단호한 표정 뒤에 가려진 진짜 얼굴은 얼마나 슬프게 울고 있었을지 짐작을 할 수 있었다.그냥 본인이 못나서 그렇게 저를 위해주는 서
“유환아.”“응?”갑자기 임유환을 불러오는 서인아에 임유환은 그녀를 바라보았다.“난 내가 너무 운이 좋았던 것 같아. 운 좋게 너를 만났잖아.”나지막이 말하는 서인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다정했다.임유환을 만난 건 정말 하느님이 베풀어준 은덕 같았다.임유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잘 짜인 각본처럼 아무런 파동도 없이 기계적으로 살아갔을 텐데 임유환이라는 사람을 만나 평온하던 인생에도 파동이 일기 시작했다.서인아에게도 신경 쓰이는 존재가 생겨버린 것이다.“나도.”대답하며 고개를 들던 임유환은 익숙한 그 얼굴에 심장이 떨려왔다.서인아는 임유환 기억 속의 7년 전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저 어린 날의 청초함이 이젠 여자의 성숙함으로 바뀐 것뿐이었다.“유환아, 유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서인아는 여전히 임유환 어깨에 기댄 채 다정히 물었다.“기억하지.”둘의 첫 만남 장소는 연경 공항이었다.“그때 나 첫인상 어땠어?”“도도했어.”“도도한 거 말고는?”“음... 이쁘고 몸매 좋다?”“남자들은 다 짐승이라니까.”“어...”서인아가 토라진 척 말하자 임유환이 입꼬리를 애써 올리다가 물었다.“그럼 너는? 내 첫인상 어땠는데?”“몰라, 그런 거 없어.”“어...”첫 만남에 그냥 지나가는 행인 정도로 서인아에게 존재감이 없었나 하는 생각에 임유환은 마음이 조금 복잡해졌다.“거짓말이고... 나 사실 너 엄청 기억에 남았었어.”“어떤 인상이었는데?”웃음을 흘리며 말하는 서인아에 임유환도 흥미가 생겨 물었다.“입은 옷은 그저 그렇고 사람은 별로 믿음직해 보이지도 않고.”“하하, 별로 좋은 인상은 아니었네.”입술을 삐죽이며 말하는 임유환에 서인아가 옅은 웃음을 흘렸다.“기억에 남았다고만 했기 좋은 인상이라곤 안 했어.”“그때는 아버지가 왜 이런 경호원을 보내줬는지 이해가 안 갔는데 뭐 좀 보다 보니까 꽤 실력 있더라 너.”옛날 일들을 떠올리니 서인아의 얼굴이 다시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빗발치는 총알을 뚫고 적들을 하나하
저도 모르게 삼켜지는 침 때문에 울대가 움직였고 호흡도 점점 가빠지기 시작했다.임유환에게 머리를 기대고 있던 서인아도 임유환의 그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려 의아하다는 듯 임유환을 바라보았다.그러더니 바로 동공이 흔들리며 서인아의 얼굴도 빛을 속도로 빨간 물감이 들어갔다.“유환아, 왜 그래...”흔들리는 속눈썹이 떨리는 서인아의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었다.아무리 도도하고 차가운 서인아라 할지라도 이런 상황에서까지 평정심을 유지하는 건 무리였다.임유환은 말없이 서인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그 누구 앞에서 이리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서인아를, 경국지색의 얼굴로 제 앞에서만 쑥스러워하는 서인아를 고스란히 눈에 담고 있었다.서인아의 손을 잡으려던 임유환의 손은 저도 모르게 서인아의 허리로 향했다.“안돼, 유환아!”그에 온몸이 굳어버린 서인아가 소리 질렀지만 이미 본능에 이성이 집어 삼켜진 뒤라 임유환의 귀에 그런 말이 들어갈 리 만무했다.서인아의 얇은 허리 위에 올려진 임유환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서인아는 맥없이 임유환의 품 안으로 들어갔고 그렇게 둘은 아까보다 더 가까이에서 서로를 느끼고 있었다.임유환의 박력 넘치는 모습과 행동에 얼굴이 빨개진 서인아는 심장까지 터질 듯 빨리 뛰고 있었다.이성과 처음으로 하는 이런 진한 스킨십에 서인아의 볼은 갈수록 뜨거워져 가고 있었고 아까까지만 해도 희미하게 남아있던 눈 속의 도도함은 이미 몽롱함으로 대체된 지 오래였다.그럴수록 임유환의 목은 점점 타들어 갔다.임유환은 서서히 시선을 옮겨 긴장한 탓에 살짝 벌어져 있는 서인아의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에 임유환의 의도를 알아차린 서인아의 눈이 반짝였다.“유환아...”부끄러운 듯 빨개진 얼굴로 나지막이 부르는 목소리에 임유환은 무언가에 이끌리기라도 하듯 천천히 서인아의 입술에 가까워져 갔다.“안돼...”서인아는 발버둥을 치며 임유환을 밀어내보려고 했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그래서 밀어내는 게 아니라 밀어내는
노을이 지는 언덕 위에서 그렇게 임유환은 마침내 서인아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췄다.벌어진 입술 틈 사이로 오가는 뜨거운 숨결에 굳게 감은 서인아의 눈초리가 파들파들 떨려왔다.그때 산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부터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뜨거운 사랑을 나누던 둘은 그 소리에 순간 몸이 굳어져 버렸다.서인아도 깜짝 놀라 눈을 떴지만 눈을 뜨니 바로 보이는 건 임유환의 얼굴이었다.둘 사이의 거리는 십 센티미터도 채 안돼 보였다.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것만 같은 거리였다.그 모습에 더욱 부끄러워진 서인아는 다급히 임유환 품에서 나와 전혀 구김이 가지 않은 치마를 정리하기 시작했다.“미안해, 내가 방해했네.”그때 갑자기 들려오는 멋쩍은 기침 소리에 임유환과 서인아가 고개를 돌려보니 서강인이 멀찍이 떨어져 서 있었다.“아, 아저씨 오셨어요.”어색하게 인사를 건네는 임유환도 지금 쪽팔려서 죽을 것 같았고 서인아는 귀 끝까지 달아오른 얼굴을 한 채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아빠가 어떻게 여길...”“나는 그냥 둘이 화해했나 궁금하기도 하고, 유환이한테 물어볼 것도 있고 해서 왔는데... 이건 전혀...”둘이 키스하는 걸 목격한 서강인도 나름대로 이 상황이 불편했다.딸의 성격을 아는 서강인은 사실 아까 윤여진의 일로 서인아가 임유환과 크게 싸울 줄 알아서 걱정되었었는데 이런 모습을 보니 한편으론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그럼 둘이 얘기해요, 난 저기 가서 좀 걷고 있을게요...”서인아는 붉어진 얼굴로 쑥스러운 듯 말하더니 서둘러 자리를 비켜주었다.그렇게 그 벤치에는 서강인과 임유환 둘이 나란히 앉게 되었다.“그, 아저씨, 아까 일은...”서인아와 임유환의 뜨거운 장면을 목격한 게 하필 서강인이어서 임유환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뒷머리만 긁적였다.“하하, 괜찮아. 나도 그런 시절이 있어서 다 알아.”서강인은 호탕하게 웃으며 임유환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임유환을 바라보는 서강인의 눈에는 감탄과 동경의 눈빛이 섞여 있었다.서강인은
“그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어. 아무 일도 없는데 그냥 사람이 나이가 드니까 이런저런 생각이 다 들어서 그래.”서강인은 잔뜩 긴장한 임유환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주며 말했다.“아저씨 아직 이렇게 젊으신데 뭐가 나이 들어요.”그에 임유환도 실소를 터뜨리며 안도의 숨을 뱉어냈다.“그래도 자네 같은 젊은이들한테는 못 비기지.”“앞으로는 다 자네 같은 젊은이들 세상이지. 근데 아까 내가 한 말은 약속해줄 수 있겠나?”“걱정 마세요 아저씨, 제가 있는 한 인아가 힘든 일은 없을 거예요.”진지하게 서강인에게 약속하는 임유환을 본 서강인은 아까보다 편한 마음으로 웃어 보였다.“자네가 그렇게 약속해주니 내 마음이 조금 놓이네.”“아저씨, 진짜 별일 없으신 거 맞죠?”하지만 계속 무언가를 감추는 듯한 서강인에 임유환은 다시 한번 되물었다.“정씨 집안에서 서씨 집안에 무슨 짓 했어요?”“정씨 집안에서는 아직 아무 짓도 안 했어. 그냥 내가 우리 인아한테 미안한 게 많아서 그래.”서강인은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었다.“인아도 진짜 불쌍한 아이야. 태어나보니 엄마가 저를 낳다가 돌아가셨지.”“그리고 내가 인아한테 새엄마를 하나 찾아줬는데.”“그게 내가 한 제일 큰 잘못이야. 그것 때문에 벌어지지 않아도 될 일들이 벌어졌어.”그 말을 하는 서강인의 눈에 진한 후회와 죄책감이 피어올랐다.어쩐지 서인아가 엄마 얘기를 한 번도 안 한다 했는데 어머님이 그렇게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은 임유환은 심장이 철렁했다.그런데 새엄마라는 분은 이 집에서 한 번도 못 본 것 같은데 어떻게 된 일인지 의아했다.“아저씨, 그럼 그 새엄마라는 분은 어떻게 됐어요?”“그 못된 년!”새엄마를 언급하자 서강인의 눈에 살기가 차올랐다.“그 여자가 우리 인아를 죽일 뻔했어!”“죽일 뻔했다고요?”“그래.”심장이 다시 한번 철렁한 임유환이 묻자 서강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살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그 여자가 우리 집 재산을 탐내서 나 모르게 인아를 몇 번이나 노렸더라고.”“
제 아버지가 연상되는 상황에 임유환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지만 이내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이젠 임유환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니까.“유환아, 이렇게 위로해줘서 고마워. 이 일 마음에 담아둔 지 꽤 됐었는데 드디어 믿음직한 사람을 만나서 이렇게 얘기하니까 마음이 놓인다.”감사 인사를 하는 서강인의 눈에는 믿음과 다정함이 가득했다.“그런 말씀 마세요, 아저씨.”아버지 된 사람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임유환이 웃어 보였다.자식한테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계속 마음에 담아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 모든 부모가 그렇듯 서강인도 서인아를 가장 사랑할 것이다.이번에 서인아를 위해 정씨 집안과 대립하는 모습이 그걸 증명해주고 있었다.이런 서강인을 보고 있으니 임유환은 자연스레 임준호를 떠올리게 되었다.서강인은 앞장서서 제 딸을 지키는데 임준호는 정씨 집안의 기에 눌려 한쪽에 물러서서는 지켜만 보다가 마지막에는 나서서 오히려 임유환을 내치기까지 했다.정말 대비되는 나약한 모습에 임유환은 다시 한번 더 임준호에게 실망했다.이제 그에게는 어떠한 기대도 없었다.지금 임유환이 알고 싶은 건 그날 임씨 집안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뿐이었다.이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진지해진 임유환이 서강인을 향해 물었다.“근데 아저씨, 예전에 임씨 집안 일에 대해서 혹시 아시는 거 있으세요?”서씨 집안도 연경 8대 가문 중 하나이니 임유환은 그 수장인 서강인은 그래도 무언가 아는 게 있을 것 같아 물었다.“15년 전 임씨 집안에 일어난 일 말하는 거야?”그날 일을 언급하는 임유환에 서강인의 표정도 어두워졌다.“네.”고개를 끄덕이는 임유환에 서강인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그날 일은 사실 나도 잘 몰라.”“그날 검은 옷을 입은 남자 하나가 내 서재로 들어왔었어. 그런데 그 인기척을 나조차도 전혀 못 느꼈었지.”15년 전의 서강인은 물론 지금 만큼의 실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무제에 발을 들인 고수였는데 그런 사람조차 다
“그래.”서강인은 탄식을 뱉으며 말했다.“그때 나도 좀 이상하긴 했어. 내가 준호 씨한테 혹시 협박받은 거냐고 물었었거든. 근데 아니라고만 하고 바로 전화를 끊었었어.”“그리고 5일째 되는 날 밤, 임씨 집안에 그런 일이 일어났지.”“그날 임씨 집안에 불까지 나면서 복면 쓴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가서 인명피해가 엄청났던 걸로 알아.”“임씨 집안이 그날 이후로 점점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거지.”서강인도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예전의 임씨 집안은 손으로 하늘을 가린다 해도 믿을 정도로 대단한 세력을 갖춘 가문이었는데 임씨 집안에 있는 고수들만 해도 나머지 일곱 가문을 더한 것보다 더 많았다.그날 일을 겪은 뒤로 임씨 집안의 세력이 급격히 감소하여 재정 상황에도 큰 타격을 주게 됐었다.죽어 나간 낙타가 말보다도 더 컸지만 그런데도 임씨 집안은 빠르게 재정비를 하여 지금까지 줄곧 8대 가문에는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그러니 그 옛날 임씨 집안의 능력이 정말 대단했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그 말을 들은 임유환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물론 그때 임유환은 이미 독을 먹고 쫓겨나서 집에 없었지만 서강인의 말만으로도 그날 밤의 임씨 집안이 얼마나 참혹한 처지였는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임유환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아저씨, 그럼 그때 어느 집안들이 그 일에 가담했는지는 알고 계세요?”“몰라.”“그냥 임씨 집안이 그렇게 되고 나서 원래는 이름도 못 올렸던 정씨 집안이 갑자기 연경 제일 세력이 되어 벼렸어.”“지금 서씨 집안이 경제 쪽에서는 일인자지만 작전 지역으로 따지면 아직도 정씨 집안과는 비할 바가 못돼.”“그래서 우리가 정씨 집안과의 정략결혼을 받아들였던 거야. 정씨 집안의 작전 지역 세력이 너무 강하니까.”“정씨 집안이요.”눈을 감았다 뜬 임유환의 눈에는 아까와 달리 살기가 가득했다.“아저씨, 그럼 그때 우리 어머니를 죽게 만든 범인은 누군지 혹시 아세요?”이건 임유환이 제일 관심하는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