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웃음소리가 방울 소리마냥 갑자기 대문 쪽에서 들려오자 다들 행동을 멈춘 채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러자 쭉 빠진 몸매에 백옥같이 하얀 다리를 가진 여자가 검은색 하이힐을 신고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안쪽으로 걸어들어오고 있었다.카키색 미니스커트가 엉덩이에 딱 달라붙어 S라인의 몸매를 완벽히 드러낸 섹시한 여자가 예쁜 얼굴로 꽃 같은 눈웃음을 흘리며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여자의 등장은 자리하고 있던 많은 젊은이들을 홀렸는데 장로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놀란 듯했다.윤씨 집안의 딸이 어쩌다 서씨 집안에 온 건지 영문을 몰라서였다.“윤여진?”서인아 역시 그녀가 여기에 온 이유를 몰랐기에 미간을 찌푸렸다.하지만 윤여진은 그들의 시선은 다 무시한 채 반짝이는 눈망울에 임유환만 가득 감고 있었다.15년 만에 본 임유환은 그때보다 키도 더 크고 더 잘생겨진 것 같았다.그리고 윤여진은 오늘 임유환을 보러 온다고 특별히 어제 새로 산 미니스커트를 입고 온 것이다. 이렇게 오면 임유환이 좋아할 것 같아서.“오빠, 오랜만이에요!”먼저 인사를 건넨 윤여진 내뱉은 오빠라는 소리에 임유환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다.온몸의 뼈마저 녹이는 듯한 목소리에 임유환도 감당하기 힘들었지만 그건 그거고 이 자리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선 안 됐기에 임유환은 이내 정신을 차렸다.제 기억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여자가 오빠라 부르는 것이 적응되지 않아서 조금 더 빨리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아무튼 임유환은 정신을 차리고 나서 여자를 향해 떠보듯 물었다.“실례지만... 누구신지?”“나 좀 속상할라 그래요, 어떻게 오빠가 날 잊어요...”눈에 순식간에 실망이 가득 차고 입꼬리가 축 처진 그 모습은 주위에 있던 다른 젊은이들의 연민을 불러일으켜 그들은 이미 임유환을 희대의 쓰레기라고 수군거리고 있었다.눈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면 임유환은 이미 수백 번 죽고도 남았을 것이다.서인아의 미간은 평소와 다르게 불쌍한 척을 해대는 윤여진에 더욱더 찌푸려졌다.주위의 장
“빙고! 기억해 냈네요!”윤여진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진짜 여진이야?!”여자가 크면 모습이 많이 변한다고는 하나 지금의 윤여진과 임유환 기억 속에 남아있는 15년 전의 윤여진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15년 전의 열 살 윤여진은 동글동글한 얼굴에 포동포동한 몸매를 가진 아이였는데 어느새 훌쩍 자라 여성스럽고 늘씬한 여자가 됐는지 임유환은 보면서도 놀라웠다.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가슴이 큰 건 여전했다.그때도 초등학교 3학년인 윤여진의 발육은 다른 또래들에 비해 월등히 빨랐었다.“오빠 아직도 나 기억하고 있었네요!”“당연하지, 내가 어떻게 널 잊겠어. 여자는 크면서 많이 변한다고 하던데 진짜 못 알아볼 뻔했네.”새초롬하게 말하는 윤여진을 임유환은 15년 전 그때처럼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고개를 젓고는 머리를 쓰다듬어주려 했다.하지만 오랜만에 본 건데 그건 좀 오버인 것 같아 임유환은 꺼냈던 손을 다시 뒤로했다.그리고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윤여진은 아직도 저를 어릴 때의 그 껌딱지 취급을 하는 임유환에 새침하게 입을 삐죽였다.어릴 때는 윤씨 집안과 임씨 집안이 세교지간이었기에 윤여진과 임유환도 각별한 사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아주 어릴 때부터 붙어 다니며 같이 놀다가 학교 갈 나이가 돼서는 같이 등하교까지 하던 사이였다.하지만 어릴 때의 윤여진은 키도 작고 통통했는데 하필 발육도 남들보다 빨라서 다른 사람들의 이상한 눈길을 자주 받다 보니 자존감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그래서 반 애들도 돼지라며 놀리고 비웃으며 일부러 윤여진을 멀리했는데 그때도 임유환만은 윤여진과 함께 있어 주며 혼자 있는 윤여진의 말동무가 되어주었고 또 다른 친구들까지 데려와 윤여진과 함께 놀아주었었다.그때 임유환이 윤여진은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예쁜 동생이라고 말 한 뒤부터 윤여진은 완벽한 임유환의 껌딱지가 되어버린 것이다.그때부터 윤여진은 늘 임유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그의 뒤에 숨어있었다.그렇게 지내는 게 윤여진은 가장 행복하고 편안했었다.하지만
“유환 오빠, 나도 이젠 어른이에요.”나지막이 말하는 윤여진의 예쁜 얼굴에 매혹적인 웃음이 피어올랐다.“그러네.”임유환도 아주 예쁘게 자라나 그때와 달리 자신만만해 보이는 윤여진이 놀라웠다.임유환은 더는 제 보호가 필요 없어진 윤여진을 그때처럼 다정하게 바라보았다.“오빠, 지금의 저는 어때요? 오빠가 좋아할 만한 스타일에요?”윤여진은 눈을 반짝이며 임유환을 다정히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는 많은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는 것인지 윤여진은 E컵이나 되는 가슴이 눌리울 정도로 임유환의 팔을 꼭 끌어안으며 그의 대답을 재촉했다.“어...”그 오랜 시간 동안 보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다정하게 스킨십을 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적잖이 당황했다.자꾸만 제 팔을 타고 전해지는 말랑한 촉감에 정신까지 아득해져 왔던 임유환은 윤여진을 보며 난감한 듯 말했다.“저, 여진아...”“왜요, 오빠?”윤여진은 남자라면 누구든 빠져들 것 같은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정말 모르겠다는 듯 임유환을 바라보았다.“그게... 거기가...”어렵사리 돌려 말하는 임유환에도 윤여진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그게 뭐요, 어차피 그때는 우리 둘이...”대수롭지 않게 얘기하던 윤여진도 그날 일을 떠올리자 눈빛이 흔들렸다.역시 윤여진은 그냥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던 거지 정말로 그런 일을 떠올려도 감정에 아무런 파동도 일지 않는 사람은 아니었다.윤여진 입에서 나온 그날 일에 임유환은 멋쩍은 듯 마른기침을 해댔다.그때 아무것도 모르던 둘이 하마터면 서로에게 큰 실수를 할 뻔했었다.때는 2학년임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발육이 다 끝난 윤여진이 하필 성교육이 원만히 진행될 수 없었던 시기에 또 친구들의 이상한 눈길과 조롱을 받고 있던 15년 전이었다.그렇게 매일 기죽어 있던 윤여진이 어느 날 하교를 하다가 임유환에게 또 가슴 때문에 놀림받았다고 고민을 털어놓았던 것이다.그때의 윤여진은 임유환과 제일 친했으니 그에게 객관적인 평가를 해달라고 가슴을 보여주겠다고 했었고 임유환
서인아의 외침에 로비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서인아는 차가운 눈에 적의를 가득 담아 윤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뭐하긴요, 당연히 오랜만에 만난 유환 오빠를 반가워하는 중이죠.”윤여진 역시 입꼬리를 올리며 서인아를 바라봤다.그렇게 둘이 기 싸움을 하며 눈을 맞추니 거기서 스파크가 튀기는 것 같았다.연경의 2대 미인으로 불리는 서인아와 윤여진은 원래도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그런 둘이 서로를 쳐다보고 있으니 분위기가 좋을 리가 없었다.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서인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반가워해요? 그게 그렇게 꼭 안고 있어야 할 일인가요?”그 말투가 아까보다 더 차가웠지만 윤여진도 물러서지 않으며 말했다.“어릴 때부터 이렇게 친했거든요.”윤여진은 겉으로 보기에는 애교 있고 사람 좋아 보이지만 그런 열정적이고 다정한 모습은 오로지 본인이 좋아하는 사람한테만 보여주는 모습이지 다른 이들을 대할 때는 서인아 못지않게 차가웠다.아니, 오히려 서인아보다 남자를 더 싫어하는 건 윤여진이었다.“그래도 장소는 가려야죠, 윤여진 씨.”그럼에도 윤여진을 보는 차가운 시선은 거두지 않는 서인아였다.“아, 그러네요. 여기가 서씨 집안이었죠.”그제야 임유환에게서 떨어지는 윤여진에 사람들은 둘의 언쟁이 싸움으로 번지지 않은 것에 안도했다.하지만 이어지는 윤여진의 말은 서씨 집안 모두의 안색을 어두워지게 했다.“아까 저 밖에서 다 들었어요. 누가 감히 우리 유환 오빠를 괴롭히더라고요.”“근데 저희 윤씨 집안에서는 이런 일에 면죄패 같은 건 통하지도 않아요. 면사패도 물론 소용없고요. 감히 가주와 내 앞에서 그런 말을 뱉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죽어야죠.”말을 하면서도 냉기를 뿜어내는 윤여진의 눈을 본 서씨 집안 장로들의 입가가 떨려왔다.역시 윤씨 집안 아가씨의 성격이 만만치 않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던 것 같다.“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서인아 씨가 오빠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직은 부족하다는 거예요.”단호한 윤여진의 말투는 마치 서인아와 한
“서인아 씨, 왜 저를 그런 눈으로 보시죠? 저는 서인아 씨한테 악감정 없는데요.”서인아의 차가운 시선을 느낀 윤여진이 웃으며 물었다.“오늘은 그냥 유환 오빠가 걱정돼서 온 거예요.”말을 마친 윤여진은 예쁜 눈으로 임유환을 보며 손을 들어 아까의 결투 때문에 주름져있는 카라를 펴주고는 다정히 물었다.“오빠, 아까 안 다쳤죠?”“응, 안 다쳤지...”두 여자 사이에 낀 것 같은 느낌에 임유환은 나지막이 대답했다.“그럼 됐어요.”영락없는 얌전한 새색시처럼 말하는 윤여진에 서씨 집안 남자들이 또다시 임유환을 질투하며 노려봤다.여신 같은 얼굴로 다정히 건네는 말에 서강인을 포함한 서씨 집안 장로들의 눈꼬리가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다.윤씨 집안 아가씨는 도도하기만 한 게 아니라 성격이 서인아와 견주어도 될 만큼 안 좋다는 소문이 돌았었는데 지금 이 모습은 그 소문과는 너무나도 상반된 모습이었다.하지만 서인아는 윤여진이 제게 보여주려고 일부러 더 과하게 행동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짜증이 나기 시작해 목소리를 차갑게 깔며 말했다.“윤여진 씨, 저는 오늘 윤여진 씨를 서씨 집안에 초대한 기억이 없는데요. 제멋대로 남의 집에 들어온 것도 모자라서 저희 집안일에 상관까지 하시고, 좀 무례하시네요.”“제가 안 오면 유환 오빠가 괴롭힘당했을 거잖아요.”윤여진은 자신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그런 건 윤여진 씨가 신경 쓸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제가 있는 한 임유환을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아까 그 상황은 그렇게 안 보였는데요.”누구 하나 물러서지 않고 팽팽히 맞서는 둘에 잠시 꺼졌던 불꽃이 다시 튀기고 있었다.그에 서인아가 미간을 찌푸리자 임유환이 상황을 중재하고자 나서며 윤여진에게 부탁하듯 말했다.“여진아, 그만해. 네가 인아를 오해한 거야.”“알겠어요, 오빠가 그렇다면 그런 거죠.”다시 고분고분하게 대답하며 웃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그제야 한시름 놓고 서인아를 향해 말했다.“인아야, 아까 여진이가 한 말은 마음에 담아 두지 마
해가 지는 노을이 그림처럼 펼쳐진 서씨 집안의 뒷산 언덕에는 서인아가 홀로 차가운 벤치에 앉아 있었다.이곳은 서인아가 마음이 복잡할 때마다 오는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오늘도 어김없이 이곳에 반나절 동안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들려온 누군가의 다급한 발소리가 서인아의 고요한 적막을 깨버렸다.때마침 서인아의 뒤에 나타난 한 인영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후, 드디어 찾았네.”목소리를 듣고 임유환인걸 알아차린 서인아는 아직 삐진 척 차갑게 물었다.“네가 여긴 왜 왔어?”“너랑 같이 있으려고 왔지.”“누가 같이 있어 달랬어? 가서 여진이랑 더 놀아주지 왜?”서인아의 화를 풀어주고자 더 능청스럽게 말하는 임유환에 서인아는 새침하게 대꾸했다.“그건 네가 오해한 거야, 나 걔랑 정말 아무 사이 아니야.”아까 일로 화가 난 것 같은 서인아에 임유환은 진심을 다해 사과했지만 서인아는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홱 하고 돌려버렸다.“아직도 화났어?”서인아의 옆에 붙어서 낮게 달래는 임유환에 서인아는 엉덩이를 들어 자리까지 옆으로 옮겨 버렸다.두 주먹 정도의 거리를 옮겨버리는 서인아에 임유환은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또 한편으론 웃기기까지 했다.평소에는 도도한 냉미녀라 불리는 서인아가 삐졌을 때는 이토록 귀여울 수 있다는 걸 누가 알기나 할까.“뭘 웃어?”하지만 서인아는 이 와중에도 웃는 임유환을 보니 더 화가 났는지 미간을 찌푸렸다.“그냥, 너 화내는 게 너무 귀여워 보여서.”“허, 누가 화내? 난 화 안 냈거든.”말은 차갑게 했지만 화가 나 붉게 상기된 얼굴은 거짓말을 못 하고 있었다.“그럼 질투하는 거야?”“꺼져!”집요하게 물어오는 임유환에 서인아는 눈을 흘기며 소리쳤다.“하하.”임유환은 사람 좋게 웃어 보이며 뻔뻔하게 또 서인아의 옆으로 가 붙었다.“인아야, 나랑 여진이는 정말 아무 사이 아니야. 그냥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서 진짜 남매처럼 친한 것뿐이야. 걔는 진짜 내 여동생이나 다름없는 애라니까.”“걔는 그렇게 생각
“너, 너 뭐 하는 거야 지금!”얼굴이 빨개진 서인아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손이 차니까 내가 따뜻하게 해주려고.”“누가 그래 달랬어?”말로는 필요 없다는 하고 있지만 서인아의 떨리는 눈동자는 임유환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온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아직도 화났어?”임유환은 고개를 기울이며 아직도 화난 듯 보이는 서인아와 눈을 맞추려 애썼다.“누가 화났다고 그래, 이거 놔...”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하던 서인아가 손을 빼내려 하자 그걸 더욱 꽉 잡은 임유환이 말했다.“안 놔.”“이젠 누가 뭐래도 안 놔.”임유환의 말에 순간 심장이 반응해버린 서인아는 손을 빼내려 주던 힘을 풀어버렸다.그리고 꼼지락대던 힘이 약해진 걸 느낀 임유환은 서인아를 더욱더 다정히 바라보았다.그리고는 단호하게 선전포고 같은 말을 내뱉었다.“이젠 너 혼자 서럽게 안 한다고 했잖아.”임유환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에 서인아는 그 말에 심장이 떨려와 이를 악물었다.7년 동안 쌓이고 쌓인 오해들이 빚어낸 둘의 불행이었다.“그날일 내가 너 계속 속였는데, 내 탓 안 해?”고개를 들어 임유환을 바라보는 서인아의 눈에는 죄책감이 가득했다.물론 임유환을 위해 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그때 서인아가 했던 말들에 임유환 역시 많은 상처를 받았었기에, 서인아도 그걸 알고 있기에 항상 미안했었다.“네 탓 안 해.”하지만 임유환은 서인아의 질문에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그때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너는 얼마나 힘들었겠어.”평범한 출신이 아니니, 집안의 운명을 등에 지고 살아온 인생이니 서인아는 단 한 번도 저만을 위한 선택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남들과 다르게 태어났다는 죄로 감정조차 집안의 반대와 간섭을 받아야 하는 서인아를 알기에 임유환은 그날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자신을 떠나보낼 때의 서인아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 단호한 표정 뒤에 가려진 진짜 얼굴은 얼마나 슬프게 울고 있었을지 짐작을 할 수 있었다.그냥 본인이 못나서 그렇게 저를 위해주는 서
“유환아.”“응?”갑자기 임유환을 불러오는 서인아에 임유환은 그녀를 바라보았다.“난 내가 너무 운이 좋았던 것 같아. 운 좋게 너를 만났잖아.”나지막이 말하는 서인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다정했다.임유환을 만난 건 정말 하느님이 베풀어준 은덕 같았다.임유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잘 짜인 각본처럼 아무런 파동도 없이 기계적으로 살아갔을 텐데 임유환이라는 사람을 만나 평온하던 인생에도 파동이 일기 시작했다.서인아에게도 신경 쓰이는 존재가 생겨버린 것이다.“나도.”대답하며 고개를 들던 임유환은 익숙한 그 얼굴에 심장이 떨려왔다.서인아는 임유환 기억 속의 7년 전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저 어린 날의 청초함이 이젠 여자의 성숙함으로 바뀐 것뿐이었다.“유환아, 유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서인아는 여전히 임유환 어깨에 기댄 채 다정히 물었다.“기억하지.”둘의 첫 만남 장소는 연경 공항이었다.“그때 나 첫인상 어땠어?”“도도했어.”“도도한 거 말고는?”“음... 이쁘고 몸매 좋다?”“남자들은 다 짐승이라니까.”“어...”서인아가 토라진 척 말하자 임유환이 입꼬리를 애써 올리다가 물었다.“그럼 너는? 내 첫인상 어땠는데?”“몰라, 그런 거 없어.”“어...”첫 만남에 그냥 지나가는 행인 정도로 서인아에게 존재감이 없었나 하는 생각에 임유환은 마음이 조금 복잡해졌다.“거짓말이고... 나 사실 너 엄청 기억에 남았었어.”“어떤 인상이었는데?”웃음을 흘리며 말하는 서인아에 임유환도 흥미가 생겨 물었다.“입은 옷은 그저 그렇고 사람은 별로 믿음직해 보이지도 않고.”“하하, 별로 좋은 인상은 아니었네.”입술을 삐죽이며 말하는 임유환에 서인아가 옅은 웃음을 흘렸다.“기억에 남았다고만 했기 좋은 인상이라곤 안 했어.”“그때는 아버지가 왜 이런 경호원을 보내줬는지 이해가 안 갔는데 뭐 좀 보다 보니까 꽤 실력 있더라 너.”옛날 일들을 떠올리니 서인아의 얼굴이 다시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빗발치는 총알을 뚫고 적들을 하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