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유진이 실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어떻게 절 알고 있었던 건데요.” 심유진의 학교생활은 매우 단조로웠다. 좋은 대학에 가면 집에서 독립해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 하나 때문에 미친 듯이 공부만 했고 휴식일에도 집에서 책을 보거나 문제집을 풀었다. 공부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다. 그러니 허태준이 같은 고등학교를 다닌 게 아니라면 자신을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혹시 자신을 알아본건 아닐까 기대하던 허태준은 굉장히 실망했다. 허태준은 그동안 심유진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혹여나 자신 역시도 심유진에게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기대도 했다. 하지만 슬프게도 심유진에게 자신은 그저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한 평범한 행인일 뿐이었다. “로열 호텔에서 만나기 전까지는 너라는 사람을 알지 못했어.” 허태준이 고개를 푹 숙였다. 주머니에 넣은 손을 꽉 쥐었다. 냉담한 말투로 그는 다시 자신을 속이기 시작했다. “사진은 어디에서 본 건지 기억이 안 나. 그냥 우연히 보게 됐는데 마음에 들어서 배경화면으로 해놓은 거야.” 허태준은 자신이 오래전부터 심유진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마지막 존엄만큼은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심유진은 그 말에 설득당하지 못한 것 같았다. 사진에서 뒷배경이 조금 흐릿하긴 했지만 분명 고등학교 교문이 보였다. 그러니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은 학교 학생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중 허태준과 관계가 있을 것 같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허태준은 우연이라고 했지만 이런 우연은 말도 안 됐다. “진짜요?” 심유진이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내가 왜 거짓말하겠어?” 허태준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런 일로 거짓말까지 할 필요는 없지.” 심유진은 확실히 맞는 말이긴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사진의 출처를 캐묻는 건 포기하고 심유진은 허태준과 협상에 돌입했다. “그럼 사진 좀 바꿔주면 안 돼요? 너무 못생겼어요.” 심유진은 정말 그
별이에게 들키는 것보다 하은설이 알게 되는 게 문제였다. 심유진은 하은설이 이 사진을 보게 되면 얼마나 놀릴지 벌써 상상이 갔다. “지금 찍어 줄게요. 됐죠?” 심유진은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허태준은 그제야 만족한 듯 보였다. “그래.” 심유진은 카메라를 들고 대충 사진을 몇 장 찍었다. 핸드폰이 예전 모델인 데다가 아무런 보정도 들어가지 않는 일반 카메라로 찍으니 건질 수 있는 사진이 한 장도 없었다. 사진을 확인한 허태준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이렇게 억지로 찍으라는 얘기는 아니었어.” 허태준은 휴대폰을 심유진에게 돌려주었다. “그렇게 싫으면...” “싫지 않아요!”심유진이 허태준의 말을 끊었다. “마음에 드는 사진이 나올 때까지 찍어줄게요. 찍으라는 대로 찍을게요” 허태준은 조금 망설이다가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카메라를 켰다. “이리 와봐.” 심유진은 고분고분하게 옆으로 갔다. 허태준은 심유진을 와락 품에 안고는 심유진이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그 순간 카메라 셔터음이 들려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허태준은 완벽히 그순간을 담은 사진을 찍어냈다. 두 사람의 얼굴에 따뜻한 햇빛이 비춰 분위기가 더욱 오묘해 보였다. 심유진은 놀라서 그대로 굳어버렸지만 허태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하기만 했다. “이 사진으로 할게.”허태준은 심유진을 놓아주고 열심히 사진을 골랐다. 마치 방금 전의 스킨십은 사진을 찍기 위한 가벼운 행동이었다는 듯이 말이다.“됐어.”허태준은 바로 배경화면을 바꿨다. 허태준이 자신에게 입을 맞춘 사진을 보자 심유진은 또 얼굴이 붉어졌다.“이건 안 돼요!”심유진이 노트북을 빼앗으려는데 허태준이 날렵하게 피했다.“내가 찍고 싶은 대로 찍게 해 준다며.”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말문이 막혔다. 그 틈을 타 허태준은 노트북을 들고 얼른 서재에서 빠져나갔다.“더 볼일 없으면 별이랑 게임하러 갈게.”“잠시만요!”심유진이 다급히 쫓아갔지만 허태준
심유진도 그대로 몸이 굳어졌다. 조금씩 고개를 돌리다가 마침 별이와 눈이 마주쳤다. 별이는 많이 화가 난 것 같았다. 심유진이 얼른 허태준에게서 떨어져서 별이에게 해명하려고 하는데 별이가 씩씩 거리며 말했다. “나만 빼고 왜 둘이 안고 있어!” 억울해하는 아이의 모습에 심유진은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하지만 허태준은 침착했다. “이리 와.” 별이는 바로 눈을 반짝이며 허태준에게 갔다. 허태준은 노트북을 심유진에게 넘겨주고 별이를 들어 올렸다. 별이는 허태준의 목을 꽉 껴안으며 볼에 뽀뽀를 했다. “아빠가 최고야!”표정이 복잡한 심유진을 보며 허태준이 일부러 물었다. “그럼 엄마는?” “엄마도!” 별이는 눈치가 빠른 아이였기에 당연히 엄마도 놓치지 않았다. 별이가 심유진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엄마도 안을 거야!” 심유진이 피동적으로 끌려갔다. 허태준은 한 팔에 한 명씩 꽉 끌어안았다. 허태준이 한쪽 팔로 심유진의 허리를 감자 심유진이 은근슬쩍 선을 넘지 말라는 눈치를 줬다. 하지만 허태준은 모른 척 별이에게 말을 걸었다.“이제 기분이 나아졌어?”“잠시만!”별이가 휴대폰을 꺼내면서 우물쭈물 말했다.“사진도 찍고 싶어.”“당연히 찍어야지.”허태준이 시원시원하게 대답하며 심유진을 바라봤다. 별이도 애원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심유진은 사진을 찍는 걸 싫어했지만 두 사람의 공세에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그래.”별이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휴대폰을 들었다.“하나, 둘, 셋! 김치!”별이의 찬란한 웃음과 조금은 어색한 심유진의 웃음, 그리고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는 허태준까지 한 프레임에 가득 담겼다. 별이는 바로 그 사진을 하은설에게 보내주며 말했다.“이 사진 프린트 해줘! 유치원 친구들한테 보여줄 거야.”심유진은 말리고 싶었지만 그동안 별이가 아빠가 없다는 이유로 받았던 시선들을 생각하니 결국 하고 싶은 말들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별이는 그제야 심유진의 손에 들린 노트북에 주의를 돌렸다.“아빠 꺼야?”“
별이는 얌전히 대답했다. “알겠어.”허태준은 오묘한 표정으로 심유진을 바라보며 친절하게 말했다. “노트북 쓸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내 거 써도 돼.” 심유진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고맙지만 필요 없거든요?” 낮에 심유진과 허태준이 같이 자는 모습을 본 별이는 오늘은 꼭 자기도 같이 자겠다고 떼를 썼다. 심유진은 이제 열이 내렸지만 아직도 감기가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었기에 혹시 별이에게 감기를 옮길까 봐 한참을 설득했다. 끝내 허태준이 별이와 함께 자는 걸로 타협을 봤다. 심유진은 혼자 큰 침대를 차지하게 되어 기분이 좋았다. 심지어 어린아이처럼 침대위에서 뒹굴거려 보기도 했다. 근데 불을 끄고 혼자 조용히 있으니 자신의 숨소리도 느껴지는 이 공간이 유달리 외로웠다. 심유진은 순간 두려워져서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하지만 공허한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심유진은 한참을 뒤척거리다가 감기약 기운 때문에 스르르 잠이 들었다. 알람소리를 못 들은 심유진은 출근하기 10분 전이 되여서야 일어났다. 심유진은 화장도 못하고 대충 씻은 다음 다급히 집을 나섰다. 허태준은 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려고 나간 건지 집에 아무도 없었다. 주방 테이블에는 허태준이 준비한 아침과 쪽지가 있었다. “별이 데려다주고 올 테니까 아침 먹고 있어. 데려다줄게.” 하지만 심유진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심유진은 택시를 타고나서야 허태준에게 문자를 남겼다. “이미 회사로 출발했어요.” 심유진은 당연히 늦었다. 회사에서 낙하산으로 찍혔기 때문에 심유진은 이미 한소리 들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회사에 도착해 보니 자리에 누구도 없었다. 심유진은 Maria에게 문자를 보냈다. “다들 어디 갔어요?” Maria는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심유진은 김욱의 사무실에도 들어가 봤지만 역시 사람이 없었다. 육윤엽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분명 정상 출근을 하는 날이었다. 게다가 비록 다들 자리에 없었지만 노트북은 켜진 상태였고 가방
고개를 들자 어두운 표정을 한 육윤엽이 보였다. 뒤쪽을 보니 김욱과 Maria 역시 같은 표정이었다. 심유진이 서있는 걸 보고 육윤엽이 놀랐는지 멈칫했다. 심유진은 얼른 모르는 사람인척하며 공손하게 인사부터 했다. 육윤엽이 인사를 받으며 친하지 않은 척 자리를 떠났다. 김욱도 멈칫하더니 상사 역할을 톡톡히 했다. “사전에 알리지 않고 지각했으니 이번 달 보너스는 취소하겠습니다. 일단 사무실로 오셔서 상황 설명해 주시죠.” 회의실의 직원들은 모두 이 말을 들었다. Maria는 동정의 눈빛을 보냈지만 다른 직원들은 오히려 기뻐했다. 심유진은 얌전히 김욱의 뒤를 따라 사무실까지 들어가고 나서야 한숨 돌렸다. “피곤해.” 김욱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 “잘하는 짓이다.” 김욱과 육윤엽 모두 심유진이 신분을 숨기는 걸 바라지 않았기에 괜히 쓸데없이 피곤한 짓을 하는 걸 안타까워했다. “열은 내렸어?” 김욱이 노트북으로 업무를 마무리하며 말했다. “내렸어.” “하긴, 열이 안 내렸으면 태준 씨가 널 출근하게 내버려 뒀을 리가 없지.” 김욱이 심유진의 패딩을 바라봤다. “처음부터 이렇게 입었으면 얼마나 좋아.” “동기들이 촌스럽다고 한단 말이야.” 심유진이 입을 삐죽거렸다. “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얼른 적응해야지.” “그럴 필요 없어.” 김욱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곧 회사 관리인이 될 사람이니까 직원들과의 관계까지 신경 쓸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건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는 거야. 그러니까...” 김욱이 심유진이 보내준 PPT를 켜면서 말했다. “브리핑할 준비는 다 됐어?” 심유진은 준비한 대로 브리핑을 완벽하게 해냈고 김욱도 매우 만족했다. “감기가 다 나으면 나랑 고객들 만나러 다니자.” 회사 업무에 익숙해지는 과정이자 정식으로 후계자가 되기 전에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다. “그래.” 심유진은 조금 흥분됐다. 하루종일 회사에서 서류를 붙들고 있는 것보다 외근이 훨씬
Maria는 문자를 확인하라고 눈치를 줬다. 심유진은 그제야 노트북을 켰다. Maria가 보낸 문자가 보였다. “Judy가 해고당했어요. 오늘 아침에 회의도 Judy 때문에 열린 거예요. 엄청 화내셨는데 참석 안 하길 잘했어요.” 심유진은 Judy의 자리를 확인했다. 기둥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인데요?” Maria가 링크를 하나 보내줬다. 심유진은 그제야 블루 항공내부에도 익명 게시판이 있다는 걸 알았다. 사업에 관한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중고거래를 하거나 사내에 떠도는 소문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가장 우에 있는 글 한번 봐보세요!” Maria의 문자에 심유진은 댓글이 가장 많은 글을 확인했다. 심유진은 SNS를 자주 하지 않았기에 글 제목을 보고도 무슨 일인지 잘 몰랐다. 글에 첨부된 영상은 심유진이 그날 식당에서 직접 목격한 광경이었다. 글을 올린 사람은 Judy의 신상도 다 공개해 버렸고 댓글은 의견이 분분했다. “나도 아는 사람인데 사람 좋아 보이던데?””나도 아는데 매번 볼 때마다 느낌이 안 좋았어. 언젠가 이런 일이 터질 것 같더라.” “구체적으로 말해봐. 너무 궁금해!” 댓글에 직원들이 Judy의 업적을 늘어놓았다.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험담을 하거나 누군가를 괴롭혔다는 내용이었다. 심유진이 알고 있는 Judy의 모습이었다. 심유진은 Maria에게 물었다. “요즘 이 글이 핫해요?” “그럼요!!!!!” Maria의 문자에서 이 글이 얼마나 퍼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Maria는 SNS에 돌아다니는 글들을 캡처해서 보내줬다. 네티즌들은 Judy에게 욕설을 퍼부었고 블루 항공에서 Judy를 해고할 것을 요구했다. “Judy가 저희 회사 사람이라는 게 밝혀지면서 회사를 욕하는 사람도 많아요. 경쟁사는 이때다 싶어서 저희 회사를 더 억압하고 있고요. 그래서 어제 회장님이 바로 Judy를 해고시켰
솔직히 Judy가 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자업자득이었지만 그냥 비판을 받는 수준이 아니라 일자리까지 잃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신상이 다 털렸으니 알아보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심유진은 Judy가 평소에 적을 너무 많이 만들었기에 이런 후과를 초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네티즌들은 그녀가 벌을 받기를 원했고 아마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녀를 해고시키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블루 항공이 네티즌들 눈치를 봐야 하는 회사는 아니었지만 일이 커지면 회사 명의에도 영향이 가게 되니 이 방법이 가장 확실했을 것이다. Judy가 해고당한 사실을 듣고 심유진이 기쁘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심유진 역시 Judy의 피해자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Judy가 블루 항공에서 그렇게 오래 일한 걸 보면 업무 능력은 의심할 필요도 없이 훌륭하다는 말이었다. 심유진은 Judy가 이렇게 회사에서 나가버리면 다른 직원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걱정되었다. 심유진이 Maria에게 물었다. “근데 다른 직원들은 의견이 없던가요?””같이 해고당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할 말이 있어도 참아야죠. 오늘 퇴근하고 시간 있어요? 같이 저녁 먹을래요? Judy가 해고당한 걸 축하해야죠! 사실 저도 마음에 안 들었거든요.” Maria는 Judy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심유진은 조금 놀라웠다. Judy가 사람은 그다지 않아도 Maria에게만은 항상 친절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대부분 직원들은 Maria에게 친절했다. 혹시나 회장님에게 고발이라도 할까 봐 두려워서 그럴 것이다. “제가 밥 살게요.” 심유진이 말했다. 지난번에 Maria가 밥을 사줬었기에 이번에는 꼭 대접해주고 싶었다. Maria는 계속 거절하다가 결국 받아들였다. 둘은 한참을 의논하다가 요즘 유명한 식당으로 예약했다. Judy가 없으니 회사에서도 훨씬 더 편안했다. 일부러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다른 동기들은 여전히 심유진을 바라보는 시선이 좋지 않았으나 애초에 부딪힐 일이 적었기 때문에
심유진은 문을 잡아주며 육윤엽과 김욱이 먼저 들어가기를 기다렸다. 김욱은 오히려 자신이 문을 잡아주며 먼저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심유진이 망설이자 Maria는 심유진의 손목을 잡고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 “감사합니다.” 네 사람 모두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늦은 시간이라 타는 사람이 없어서 1층까지 바로 내려갔다. 그때 김욱이 물었다. “식사는 어디 가서 할 거예요?” “가까운 한식집으로 가려고요.” 미국의 한식집은 사실 대부분 현지화된 음식으로 바뀌어져서 맛있는 집이 적었다. 하지만 회사 근처의 한식집은 정말 맛이 훌륭했기에 유학생들이나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매우 유명했다. 심유진은 예전부터 그 명성에 대해 알고 있었으나 예전에 살던 곳은 거리가 멀었고 심유진은 요리를 해 먹었기에 가 볼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거기로 가시는구나.” 김욱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웃으며 말했다.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갑자기 한식이 먹고 싶네요.” 상사의 요구는 보통 아무리 난감해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심유진과 Maria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요.” 다행히 육윤엽은 같이 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회사 문 앞에서 육윤엽은 차를 타러 가고 나머지 세 사람은 식당으로 갔다. 김욱이 먼저 걸어가자고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식당이 가깝기도 하거니와 그쪽은 주차자리도 마땅치 않았다. 밤바람이 찼기에 심유진은 코를 훌쩍거렸다. 하도 휴지로 코를 풀어서 빨개진 코끝을 보며 김욱이 인상을 찌푸렸다. “오늘 약 먹었어요?” 걱정하는듯한 말투에 심유진이 깜짝 놀라서 거리를 뒀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점심에 먹었어요.” 심유진은 Maria의 눈치를 봤으나 Maria는 딱히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10분 정도 지나서 식당에 도착했다. 사전에 예약을 했기 때문에 대기할 필요도 없었다. 주문을 마친 다음 그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심유진과 Maria는 물만 마셔댔고 김욱은 휴대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