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유진의 눈꺼풀은 뛰었다. 심장이 두근댔다.“그... ”당황해 나자 심유진의 머리는 풀리지 않는 실타래처럼 엉켜졌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입을 열자마자 머뭇거렸다.별이도 심유진의 난처함을 알아차렸는지 대신 육윤엽한테 대답했다.“제 진짜 아빠가 아니에요!”별이는 풀이 죽어 고개를 숙였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흥분했던 기운은 사라졌다.“제가 제일 좋아하는 허삼촌이에요. 저한테 아빠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 제가 아빠라고 부르는 것을 허락해 주셨어요.”“허삼촌?”육윤엽은 금방 알아차렸다.“허태준 씨?”“네, 허태준 삼촌이에요.”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허태준을 닮은 얇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눈에는 외로움이 가득 찼다.심유진의 마음은 찢어질 듯이 아팠다. 마음속의 저울은 슬그머니 허태준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육윤엽의 얼굴은 붉으락 푸르락했다. 최대한 별이를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허태준 씨가 아빠였으면 좋겠어?”별이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조심스레 심유진을 쳐다보면서 그녀의 표정을 관찰하였다.육윤엽은 거의 즉시 별이의 마음을 알아챘다.“괜찮아, 먼저 놀고 있어!”육윤엽은 억지로 그렇게 어둡지 않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허삼촌이 언제 올지도 모르니까!”육윤엽은 거의 이를 악물면서 말했다.김욱은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나서서 이 화제를 중지시켰다.“별아, 이 아이언맨 아머를 써볼래? 가슴에 불도 켜진다?”별이의 주의력은 금방 빼앗겼다.“좋아요! 너무 멋져요!”김욱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슬그머니 닦으면서 시름을 놓았다.**김욱은 별이를 데리고 방으로 가서 옷을 바꿔입혔다. 육윤엽은 심유진과 거실에 앉아서 얘기하였다.육윤엽은 심유진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별이가 허태준 씨를 아빠라고 부르는데 반대하지 않아?”“반대 해봤지만 효과가 없었어요. 그래서 나중에는 내버려뒀어요.”심유진은 소심해져서 손안에 든 머그컵을 꼭 잡았다. 눈꺼풀을 드리운 채 자신의 시선을 가렸다.“이런 일을
”그때 가서 나를 따르기만 하면 된다.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어.”육윤엽은 연회를 여는 일에 있어서는 이골이 났다.“천천히 하면 돼. 언젠가는 습관이 되어야 할 거야.”심유진은 갑작스레 들이닥친 재벌 집 딸의 생활에 공포감이 들었다.“지금 후회하면 늦을까요?”심유진은 물었다.육윤엽은 차가운 눈으로 심유진을 노려보았다.“후회? 꿈도 꾸지 마라!”어렵사리 찾은 딸인데 하도 심유진이 그동안 거절했기 때문에 그들의 관계는 지금까지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다. 심유진이 겨우 한발 물러서자 육윤엽은 파죽지세로 행동했다.**심유진은 집에서 휴양하는 날에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매일 아침 하은설과 별이보다 일찍 일어나 간단한 아침 식사를 준비하였다. 그들이 문을 나서면 김욱이 보내온 자료를 보면서 앞으로 맡게 될 업무 내용을 숙지하였다.오후 세 시, 네 시쯤 되었을 때 심유진은 차를 타고 별이를 데리러 유치원에 간다. 심유진의 다리는 아직 다 낫지 않았기에 운전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너무 오래 못 본 터라 별이는 예전보다 훨씬 심유진을 따랐다. 심유진이 집에만 있으면 시종 심유진과 붙어있으려고 했다. 그녀한테 매달리고 안으면서 손을 심유진의 몸에서 떼려 하지 않았다.하은설은 못 살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자신이 질투한다고 강조하기도 했고 두 사람을 갈라놓으려고도 했지만 결국엔 세 사람이서 한데 엉켜져 웃음을 터뜨리는 것으로 끝나곤 했다.목요일 저녁.심유진은 곧 회사에 출근하러 간다는 일을 선포했다. 별이의 기운은 눈에 띄게 떨어졌다.심유진은 별이의 모습을 보자 가슴이 아파 났다. 하지만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별이가 방에 돌아가서 자자 하은설은 냉장고에서 맥주 두 캔을 꺼내면서 심유진한테 물었다.“한잔할래?”심유진도 가슴이 복잡하여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좋지.”두 여인은 나란히 바닥에 앉아 쇼파에 등을 기댔다.하은설은 맥주캔을 들어 심유진과 건배했다. 그리고 절반을 마셔버렸다.“이렇게 빨리 출근해?”하은설의 시선은
금요일.심유진은 집에 돌아온 후 처음으로 늦잠을 잤다.자고 싶어서 잔 게 아니라 숙취도 있었고 온밤을 울었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알람이 울렸지만 심유진은 듣지 못했다.배고픔에 위가 저릿하면서 아파지자 그제야 심유진은 정신을 차렸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이미 점심 열두 시가 지났다.스크린에는 몇 통의 전화가 떴다. 전부 김욱이 걸어온 것이었다.아마도 오랫동안 응답을 듣지 못한 탓인지 김욱은 카톡으로 통지했다.“두 시에 집으로 갈게.”심유진은 번개같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직 남아있던 피곤함은 삽시간에 사라졌다.**김욱은 제때 도착했다.심유진은 여전히 호두알만큼 부은 두 눈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김욱은 그녀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표정을 살피면서 조심스레 물었다.“왜 이렇게 된 거야?”“아니에요.”심유진은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눈가에 얹은 얼음을 더 세게 눌렀다.“어제저녁에 하은설이 치정극을 보자고 졸라서 봤더니 좀 많이 울었어요.”김욱은 그녀의 말을 믿는다는 뜻으로 대답했다.“응.”“그럼 지금 나갈 수 있겠어?”김욱은 걱정스레 물었다.“아니면 조금 있다가 떠날까?”“아니에요!”심유진은 방으로 뛰어가 서랍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자신의 초췌한 몰골을 가렸다.“가요.”심유진은 신을 갈아신고 씩씩하게 문을 나섰다.그들이 가는 곳은 N 시티에서 제일 유명한 럭셔리 매장이었다.심유진은 이 도시에서 몇 년을 일했지만 가끔 고객들과 쇼핑할 때만이 이곳에 한 번씩 들르곤 했다. 그녀는 거무튀튀한 패딩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매장 입구에 서서 생각하였다.“이러고 들어가면... 좀 이상하지 않나요?”심유진은 육윤엽이 말한 예복을 고르는 곳이 한때 허태준이 그녀를 데리고 간 V.style처럼 상대적으로 폐쇄되고 프라이빗한 곳인 줄 알았다. 아무렇게나 입어도 김욱만 볼 수 있는 그런 곳인 줄 알았다.하지만...“이상할 건 뭐 있어.”김욱은 웃으면서 팔을 건넸다.“같이 들어가자.”매장 안은 사람이 별로
심유진은 끝난 줄 알았으나 매장을 나오자마자 김욱한테 끌려 옆 매장으로 갔다.아까와 똑같은 광경이 펼쳐졌다.심유진은 몇 번을 움직였는지 모른다. 김욱이 드디어 집에 가자고 말할 때 손에는 이미 각종 브랜드 로고가 찍혀있는 종이가방들로 가득 찼다.심유진은 진작에 말할 힘까지 없어졌다.아무리 자신을 힘들게 하는 고객과 함께 있더라도 오늘 경험한 쇼핑보다는 덜 힘들었다.“잘못했어요.”심유진은 말했다.“예전에는 매장직원이 너무 차갑고 사람을 무시한다고만 생각했어요.”하지만 매장직원이 열정을 보이자 심유진은 받아 당하지 못했다.“영원히 저를 무시한다 해도 이것보다는 나을 거예요.”“심유진 아가씨.”김욱은 웃으면서 그녀를 바라보면서 손안에 든 쇼핑백을 흔들어 보였다.“당신은 이미 이 매장 안의 최상급 VIP야. 여기 SA들중 누구 하나 너를 무시할 사람은 없을걸.”심유진은 절망스레 한숨을 쉬었다.“아니, 이게 부자들의 고민인가?”“이게 고민이라고?”김욱은 처음에는 우스웠으나 다시 생각해 보니 가슴이 아파 났다.심씨 일가가 몰락에 서기 전에 희열엔터는 블루항공에는 비길바가 못되지만 보통 사람들 눈에는 이미 부자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런 집안에서도 이렇게 어린 여자애 하나를 용납하지 못하다니.육윤엽이 사영은에 대한 감정이 너무 복잡해서 한마디로 단정 지을 수 없다면 김욱은 사영은한테 제일 간단하고도 단순한 한밖에 남지 않았다.허영심이 많고 악독한 여인은 그의 제일 친한 두 가족한테 상처를 줬다.김욱은 심지어 그녀가 너무 쉽게 죽었다고 생각했다.“마음의 준비를 해. 앞으로 너의 고민은 더 많아질 거야.”김욱은 가까스로 한 손을 비어내 심유진의 머리를 어루만졌다.그와 육윤엽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만 심유진에게 갖다 바칠 것이다. 그래서 그녀를 만인이 부러워하는 공주로 만들어줄 것이다.심유진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면서 김욱은 더 세게 웃었다.**새로 산 예복이랑 가방과 신은 거실에 산더미를 이루었다.하은설은 진작 엊저녁 심유진
심유진이 막아서기도 전에 별이는 영상통화가 연결된 폰을 들고 나왔다.“아빠, 아빠!”별이는 신이 나서 말했다. 좋은 소식을 빨리 알리고 싶었다.“엄마가 내일 저를 데리고 디즈니로 간대요!”“그래.”신호가 안 좋았지만 허태준의 저음 목소리는 여전히 듣기 좋았다. 나른한 말투에는 담담한 웃음이 묻어있었다.“그런데 왜 아직 안 자? 열 시가 넘었겠는데.”“곧 자요!”별이는 심유진의 곁으로 달아와 슬리퍼를 벗어 던지고 쇼파 위에 기어 올라왔다. 별이는 익숙한 듯 심유진의 품을 파고 들어가 핸드폰의 카메라를 심유진의 얼굴에 맞췄다.“아빠, 엄마랑 얘기할래요?”심유진은 당황했다. 핸드폰 속 허태준의 시선을 마주치자 어쩔 바를 몰랐다. 한참 지나서야 겨우 한마디 했다.“하이~”“하이.”허태준은 답장했다.허태준도 놀란 듯 했다. 얼굴의 미소는 이 초 동안 경직되더니 이내 자연스럽게 돌아왔다.“당신도 왜 아직 안 잤어요?”심유진의 머리는 멍한 상태다. 할 말이 없어 어색하지 않으려고 제일 일상적인 화제를 꺼냈지만 입에 내뱉자마자 갑자기 그쪽은 아직 낮이라는 사실이 생각났다.“앗! 미안해요! 시차가 있다는 걸 까먹었어요!”심유진의 사과를 듣자 허태준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아득한 눈동자에는 부드러운 기운이 묻어있었다.“졸리긴 해. 손안에 업무를 마무리하면 잠깐 쉬려고.”허태준은 심유진의 말에 맞춰주려고 노력했다.“네.”심유진은 어색하게 대답했다. 도저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럼... 일보세요. 별이 데리고 잘게요.”맞은켠에 서 있던 하은설은 눈을 흘겼다. 그리고 높은 소리로 말했다.“잠깐, 허 대표님! 끊지 말아봐요!”허태준은 멈칫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소리의 주인을 찾지 못했다.“하은설 씨?”허태준은 하은설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다.심유진은 하은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괴상한 웃음을 보자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아니나 다를까 하은설은 물었다.“허 대표님, 모레 저녁에 연회가 있는데 오실 건가요?”허태준은 눈을
표정이 너무 평온해서 아무런 사적인 감정 없이 하는 질문 같았다. “너무 멀어요.” 심유진은 생각도 하지 않고 거절했다. “일부러 올 필요까지는 없는 것 같아요.” 육윤엽이 초대한 사람들은 다 그가 미국에서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이었고 허태준과 친하지 않았기에 허태준은 어색하기만 할 것이다. 게다가 그도 자신의 사업이 있었다. “알겠어요.” 허태준은 더 이상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일찍 자요. 내일 디즈니 간다면서요. 피곤하면 재밌게 놀 기력도 없어요.” “네.” 심유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쉬움을 감췄다. 그리고는 별이에게 귀띔했다. “아...” 심유진은 잠시 멈칫하고 허태준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한테 인사해.” “아빠 안녕!” 디즈니에 간다는 사실에 신나서 별이는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고 얼른 인사했다. 허태준의 눈이 반짝거리는 게 보였다. “응.” 허태준은 입이 귀에 걸릴 것처럼 환히 웃었다. “잘 자.” 통화를 마치고도 하은설은 심유진을 놓아주지 않았다. “왜 연회에 초대 안 해? 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인데 보러 오라고 해야지!””태준씨가 너처럼 한가한 사람인 줄 알아?” 심유진이 눈을 흘겼다. “그리고 그냥 작은 연회일 뿐인데 뭐가 중요해.” “그래그래.” 하은설이 못 말린다는 듯 손을 저었다. “마음대로 해라. 난 이만 잘게. 내일도 야근이야.” 심유진도 별이를 안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우리도 자야겠다.” 심유진은 Freddy와 약속을 하고 토요일 아침에 그의 집으로 데리러 가기로 했다. 별이를 데리고 집으로 올라가서 초인종을 누르니 문을 열어주는 사람은 이미 회사에 출근했어야 하는 Allen이었다. 심유진은 순간 당황했는데 별이는 기뻐하며 그를 불렀다. “삼촌!” Allen은 별이와 시선을 맞추며 웃었다. “오랜만이야 별아.” 심유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조금 복잡한 심경으로 Allen에게 물
“당연히 보고 싶었지!”심유진이 볼을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 그리고 Allen에게 물었다.“지금 출발할까요?”“잠시만요!”Allen이 다급히 방 안으로 들어가서 짙은 갈색의 종이 가방을 들고 나왔다.“제가 방금 만든 샌드위치예요.”그가 종이 가방을 심유진에게 건넸다.“일찍 일어나서 아침도 못 드셨을 것 같아서요.”심유진은 오늘 급하게 집을 나서느라 확실히 아침을 준비하지 못했다. 그녀는 종이 가방을 별이에게 전해 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한테 고맙다고 해야지.”별이는 어째서인지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어젯밤에 그 신난 모습이 온데간데없었다. 별이는 종이 가방을 받았지만 샌드위치를 꺼내서 먹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삼촌.”별이가 억지로 웃으면서 말했다. 별이는 Allen을 잠깐 쳐다 보고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심유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별이를 바라봤다. 하지만 Allen과 Freddy 앞에서 왜 그러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네 사람은 함께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Freddy와 별이는 각각 심유진의 손을 잡았다. Freddy는 기분이 좋은지 내내 재잘재잘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롤러코스터는 꼭 타야겠다! 같이 타줄 거죠?”“아, 그리고 오리랑 사진도 찍을 거예요.”“그 유명한 닭다리도 먹고 싶어요. 제 얼굴보다 크대요.”심유진은 리액션을 해주며 별이의 반응도 살폈다. Freddy와 다르게 별이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Freddy가 별이가 가장 좋아하는 슈퍼맨 이야기를 꺼내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심유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마음속의 불안함이 더욱 커졌다. 1층에 도착해서 Allen과 Freddy가 차를 가지러 가는 틈을 타 심유진은 얼른 별이에게 물었다.“왜 그래? 어디 아파? 혹시 몸이 안 좋은 거면 오늘 굳이 안 가도 돼.”만약 그러면 Freddy가 실망할지도 모르지만 별이의 건강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그런 거 아니야.”별이가 고개를 들
Freddy는 심유진이 결정을 무르기라도 할까 봐 얼른 문을 열어서 별이를 앉히고는 별이가 타자마자 문을 닫았다. 심유진은 그런 Freddy가 귀엽고 웃겼다. 심유진은 조수석에 앉아서 Freddy를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게임할 거야?”Freddy는 언제 챙겨 왔는지 모를 아이패드를 꺼내면서 이런저런 게임을 눌렀다. Freddy는 별이와 나이가 비슷했기에 좋아하는 것도 비슷했고 별이도 어느새 게임에 푹 빠졌다. 아이들이 재밌게 같이 노는 모습을 보니 심유진은 조금 마음이 놓였다. Allen은 심유진이 다리 위에 올려 둔 종이가방을 보면서 물었다.“샌드위치 안 좋아해요?”“아!”심유진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아니요.”심유진은 가방 안에서 속이 꽉 찬 샌드위치를 꺼내면서 말했다.“아까는 먹기가 좀 불편해서요.”심유진은 먼저 별이에게 물었다.“샌드위치 먹을래? 계란이랑 베이컨 샌드위치야.”별이는 게임에 푹 빠져서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안 먹을래.”심유진은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고는 말했다.“맛있네요.”Allen은 그제야 만족스러워했다.“요리는 잘 못하고 이런 간단한 음식밖에 할 줄 몰라요.”Allen이 말했다.“그래도 좋아해서 다행이네요.”Freddy가 끼어들었다.“우리 아빠 오늘 처음 아침 만드는 거예요. 대단하죠?”Freddy가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 심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대단하네.”별이는 갑자기 뭔가에 자극을 받은 듯 패드를 내팽개치며 말했다.“우리 아빠가 더 대단해. 우리 아빠는 요리도 엄청 잘해.”별이가 이 말을 꺼내자 차 안에 정적이 흘렀다. 심유진은 하마터면 샌드위치가 목에 걸릴뻔하여 기침을 해댔다. Allen이 얼른 물을 건넸다.“조심해요.”심유진은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나서야 조금 진정이 됐다. 그때 Freddy가 별이에게 말했다.“거짓말하지 마. 아빠도 없으면서.”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Allen이 엄격하게 호통쳤다.“Freddy, 별이한테 사과해.”Freddy는 갑
하은설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시간 없어, 빨리 가자! 너 기다리다 네 남편 목 빠지겠네!”심유진은 빨리 걷기 위해 두 손으로 얼른 웨딩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응, 그래.”화창한 날씨에 황금빛 햇살이 꽃잎 사이로 레드카펫을 비추고 있었다.심유진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온실 문 앞까지 걸어왔다.온실 대문 앞에는 육윤엽이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별이의 손을 잡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별이는 심유진의 등장에 잡고 있던 육윤엽의 손을 떼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엄마, 오늘 천사 같아요!”심유진도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 우리 별이!”오늘 결혼식의 화동인 별이는 정장 차림에 작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앙증맞은 손에는 형형색색의 꽃잎이 들어있는 바구니가 들려있었다.온실 안에서 곧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육윤엽은 심유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가자.”심유진은 애써 웃고 있지만 눈물이 맺힌 육윤엽을 보고 갑자기 꼬끝이 찡해졌다.하은설은 그녀가 울려고 하자, 옆에서 한마디 했다.“참아, 울면 안 돼!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화장 번지면 안 예쁘잖아.”심유진은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패딩 점퍼를 벗어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넸고 육윤엽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별이도 앞에 서서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면서 바구니 속의 꽃잎들을 한 웅큼씩 집어서 하늘로 흩뿌렸다.신부의 등장에 하객들은 잇달아 박수를 쳤고 심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허태준은 예식장 단상 앞에서 자신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오는 심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결혼식장이 크지 않은 탓에, 육윤엽과 심유진은 2분도 안 되어 예식장 단상 앞까지 걸어왔다.행복함에 싱글벙글하던 허태준은 육윤엽이 굳은 얼굴로 헛기침을 몇 번 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아버님.”육윤엽은 심유진을 한 번
육운영과 김욱은 블루 항공이 설 연휴에도 쉬지 않은 탓에 경주에서 이틀을 보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다만 심유진은 보름 정도 되는 설 연휴 중 절반 시간을 허씨 가문의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공공장소가 문을 닫은 상황이라 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육운영과 김욱은 짧은 휴가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했다.별이도 설 연휴가 끝난 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허태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이의 유치원 픽업을 위해 일부러 허태준과 심유진이 사는 동네에 집까지 샀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 블루 항공 경주 지사의 재건축도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김욱은 몇 명의 핵심 직원들을 경주 지사 쪽으로 파견시켜 심유진과 함께 회사 초반 운영을 하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운영은 정상 궤도에 올랐고 일부 본사의 업무도 경주 지사 쪽으로 넘어왔다.회사가 눈코 뜰 새 바빠지자, 심유진은 5월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허태준이 결혼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기에 바쁜 일정 속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디자이너들을 만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면서 결혼식 준비를 했다....5월이 되자, 모두의 예상대로 코로나는 국내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퍼졌다.블루 항공은 다행히 코로나가 N시티에서 유행하기 전, 대부분의 부서를 이동한 상황이라 큰 타격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성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국내의 여러 의료기기 공장을 설립하고 마스크 등 의료 물자를 전 세계로 운송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반면 모어 항공은 블루 항공과의 소송에서 패한 뒤, 입소문이 나쁘게 퍼져서 고객들을 블루 항공에 뺏긴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이번 사건의 주역이었던 마리아는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모든 일이 잘 풀리는 중, 심유진과 허태준의 결혼식 날도 다가왔다.심유진은 결혼식 날이면 해방감이 들 줄 알았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잠을 설쳤다....YT 그룹이 부
허아주머니는 특별히 심유진을 위해 아침밥을 남겨두었다.심유진은 허아주머니의 정성에 감동했고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허태준과 별이는 그녀가 아침을 다 먹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때마침 허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만두가 가득 담긴 도시락통을 허태준에게 건넸다.“자, 이거 잊지 마.”“고맙습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떠나도 될까요?”심유진은 어젯밤의 일로 토라져서 답도 하기 싫었지만, 허아주머니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짧게 답했다.“네, 가죠.”그녀는 답을 하고 나서 별이의 손을 잡고는 허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허태준도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으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허태준이 별이에게 미리 증조할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말했고, 별이는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폭풍 질문을 던졌다.“증조할아버지는 왜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빠인 건가요?”“증조할아버지는 무서워요?”“증조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만두를 먹을 수 있어요?”...허태준은 별이의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대답했다.그동안 심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허태준은 냉랭한 심유진의 태도에 어젯밤 자기의 행동이 과한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가 거부할수록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하는 자기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허태준은 어젯밤 생각에 몸이 반응해 오면서 또 피가 끓기 시작했다....허태준은 별이를 안고 묘지 입구에서 산 꽃다발을 무덤 앞에 놓았고, 몸을 굽혀 물티슈로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할아버지, 저 왔습니다.”심유진도 허태준의 할아버지를 보자,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무덤을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심유진은 사진 속의 자상한 노인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태준 씨 아내 심유진이에요.”그러고는 별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심유진이 혼자 방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질문 세례를 했다.“태준이는? 왜 같이 내려오지 않았어?”“아빠는 어디 있어요? 불꽃놀이 시켜준다고 저랑 약속했단 말이에요.”심유진은 방에서 나오면서 침착하게 둘러댔다.“샤워하고는 피곤하다고 일찍 잠들었어요.”어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김욱만이 그녀를 몇 초 동안 주시했다.별이는 실망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아빠 미워! 오늘 같은 날 왜 이렇게 빨리 주무시는 거죠?”심유진은 그런 별이가 사랑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어. 내일 아빠가 우리 별이랑 같이 불꽃놀이 해주실 거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그녀의 말이 끝나고 허태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세뱃돈을 심유진과 별이에게 건넸다.허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심유진은 허아주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뜨겁게 포옹했다.“어머님, 고마워요.”허아주머니는 심유진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우리 유진이는 너무 착해.”이어 육운엽과 김욱도 세뱃돈을 건넸고, 별이는 많은 세뱃돈을 받은 것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늦은 시간 탓에 몇몇 어른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때마침 허아주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지.”심유진도 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허태민, 너도 이제 자야지.”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를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유진은 별이를 재운 뒤에도 허태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으로 향했다.다들 잠들었는지 온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심유진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그녀가 켜놓았던 무드등조차 꺼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웠다.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방안으로 끌어당겼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더니 발끝으
“새해 복 많이 받아요.”왜인지 심유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왜 그래요?”허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불꽃놀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완전 좋았어요!”“근데 왜 우는 거예요?”허태준은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심유진이 울면 허태준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너무 감동적이어서요.”심유진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훌쩍거렸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사랑하는 사람...”허태준의 입꼬리가 점점 귀에 걸리더니 심유진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저도 사랑해요, 유진 씨.”그는 머리를 숙이고 심유진의 이마에 키스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하지만 워낙 세게 껴안아 밀어 지지 않았다.“모두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심유진은 이성을 잃은 허태준을 일깨워 줬다.김욱은 그녀가 잠에서 깬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불꽃 쇼도 끝난 상황에 허태준과 위에 오래 무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심유진은 그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다. 허태준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알기에 그녀를 놓아줬다.“잠시 후에 꼭 보충해야 해요.”허태준은 위협적으로 말했다.“어떻게 때울까요?”심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서둘러 내려가지 않았다.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허태준의 턱으로부터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다.“이러면 돼요?”심유진은 허태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웃음치며 그를 유혹했다.“아니면 이렇게?”그녀는 허태준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허태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 빛났고 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하지만 그는 꾹꾹 참으며 인내심 있게 심유진의 다음 유혹을 기다렸다.“우리... 스릴 넘치게 놀아 볼래요?”심유진은 허태준의 턱을 잡으며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그녀는 마치 섹시한
설날에 모처럼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저녁이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들 모두 약주를 하자 허 아주머니는 육윤엽과 김욱을 모두 집에 못 가게 막았다.아침 일찍 일어나 쉴 새 없이 바빴던 심유진은 저녁이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허 아주머니는 피곤해하는 심유진을 발견하고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하지만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졸음을 떨쳐내려 애썼다.“조금만 더 버텨볼게요.”심유진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먼저 자고 싶지 않았다.올해 그녀는 더 이상 떠돌이 처지가 아닌 가족과 함께였기에 더욱 이 소중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허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극구 말렸다.“먼저 올라가서 눈 붙이고 있어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기 전에 깨워줄게요.”허태준은 심유진이 무슨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졌다.허태준이 말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별이 마저도 심유진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며 잠을 권했다.결국 심유진은 그들의 의견을 꺾지 못하고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품하며 침실로 향했다....“유진아! 심유진! 빨리 일어나! 12시야!”누군가 심유진의 뺨을 툭툭 치면서 깨웠다.심유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는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김욱이 있었다.심유진은 김욱의 손을 치우고 그를 세게 때렸다.복수를 마친 심유진은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왜 오빠가 날 깨우러 온 거야? 태준 씨는?”“아래층에 있어. 별이가 태준 씨를 놔주지 않아서 내가 올라왔지.”김욱은 방금 맞은 곳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우지 않는 건데.”“오빠가 먼저 날 때렸잖아! 내 탓 하지 마!”심유진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지금 몇분이야?” 김욱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말했다.“11시 59분이야. 이미 카운트 다운 시작됐어.”“이렇게 빨리?”조금만 잔줄 알
심유진은 생각을 되짚어보고는 문득 허태준이 유럽으로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하지만 허태준은 허택양의 일을 처리하러 유럽으로 가는 거라 핑계를 댔었다.“허태준은 너보다도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어.”육윤엽은 코웃음 치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는 참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 생각밖에 안 하네.”“아이참...”심유진은 헛웃음 지으며 이를 꼭 깨물었다.그녀는 이미 들킨 바에 모든 사실을 다 털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사실, 저와 태준 씨 이혼한 적 없어요. 저 이미 6년 전에 태준 씨와 결혼 했었어요.”허태준은 이 사실을 육윤엽한테 말한 적 없었다.심유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윤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너희 둘...”육윤엽은 가슴을 쥐어 잡고 괴로워했다.심유진과 김욱은 급히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요? 심장이 아파요?”육윤엽은 심유진의 뒤통수를 공격한 후에야 표정이 온화해졌다.그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심유진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앞으로 또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겼다간 더 아프게 때릴 줄 알아.”육윤엽은 험상궂은 얼굴로 겁을 주었다.심유진은 뒤통수를 쥐어 잡으며 대답했다.“다시는 안 숨길게요!”허태준의 부모님은 육윤엽과 김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이 별장에 들어서서부터 허 아주머니는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내오며 쉬지도 않고 대접했다.육윤엽은 젠틀하게 허태준의 부모님을 대했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심유진을 실컷 욕한 덕분일 수 있다.게다가 육윤엽은 두 사람의 선물도 준비해 왔다.그는 허 아주버님한테 비싼 브랜드 시계를, 허 아주머니한테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비싼 보석 세트를 선물로 줬다.두 사람은 한참 거절하다가 끝내 심유진의 설득에 못 이겨 선물을 받았다.양쪽 부모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아이들과 같이 설을 보내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두 분과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그들이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태준과
심유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육윤엽과 김욱을 데리러 가야 했다. 그녀는 저녁밥을 먹은 후 방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잘 준비를 했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그때 허태준은 별이를 재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심유진은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켰다.“저 지금 너무 걱정돼요.”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뭐가 걱정돼요?”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일 저의 아버지가 여기에 오시잖아요... 만약 어머니와 아버님과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심유진은 내일 육윤엽과 허태준의 부모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생각만 해도 머리가 뻐근했다.“아버님은 현명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말아요.”허태준은 심유진을 다독였다.“아버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눈치 보게 하는 분은 아니잖아요.”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태준 씨가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던데요?”허태준은 마른기침하며 핑계를 둘러댔다.“그것도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허태준은 이미 겁에 잔뜩 질려 육윤엽이 없어도 감히 그의 나쁜 말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은 이를 이미 알아차렸다.“아무래도 오빠한테 전화해서 신신당부해야겠어요.”그녀가 충전 케이블을 뽑자 휴재폰 충전이 중단되었다.허태준은 다급하게 그녀를 뜯어말렸다.“두 분 이미 잠에 드셨을 거예요. 할 말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때 해도 늦지 않았어요.”심유진은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긴. 그렇긴 하네요.”허태준은 심유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됐어요. 얼른 자요.”허태준은 방안의 불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뒀다.“내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쪽잠을 잘 시간도 없을 거예요.”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태준을 쳐다봤다.그녀는 갑자기 장난꾸러기같이 웃었다.“저 잠 좀 재워주지 않을래요? 아무 이야기를 해
“네.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심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챙기고 허태준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내일 아침 제가 데리러 올게요. 설날이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거예요.”육윤엽은 거절 대신 한가지 요구를 말했다.“그럼 너 혼자와.”심유진은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육윤엽은 변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아버지가 다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심유진은 투덜거렸다.“아직도 태준 씨를 싫어하시는 거였어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띠었다.“우리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죠.”허태준은 육윤엽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심유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뭐 아버지가 저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고 태준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이 마냥 귀여웠다.“그럼 제가 마음이 급했다면 어쩔 생각이에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심유진을 놀렸다.“저는...”심유진은 육윤엽의 태도를 바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천천히 하죠. 천천히 해!”육윤엽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결국 자포자기하며 외쳤다....심유진과 허태준 별장으로 돌아오자 허 아주머니는 적잖게 놀란 동시에 조금 심술이 났다.“너희 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왜 사돈이랑 더 같이 있어 주지 않고!”허 아주머니는 물어보면서 허태준을 탓했다.“사돈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니야!”심유진은 허태준의 편을 들어줬다.“태준 씨가 모시고 싶지 않아서 온 건 아니에요. 저의 아버지와 오빠가 오랜 비행으로 잠을 못 자서 많이 피곤해하셨어요. 대꾸할 맥도 없어서 저희를 내쫓으셨어요.”“아... 그랬구나.”육윤엽의 거친 성격을 잘 몰랐던 허 아주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럼 어쩔 수 없지.”심유진과 허태준이 밖에 나갔다가 온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