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en은 차를 멈추지도, 디즈니로 가지도 않았다. 그는 차를 돌려서 심유진의 집으로 향했다. “데려다 줄게요. 아니면 걱정될 것 같으니까.” 그는 부드러운 태도로 말했지만 그 단호한 말투가 거절할 수 없게 만들었다. Freddy는 한참을 울었지만 누구도 달래주는 사람이 없었다. 평소에 항상 따뜻하게 대해주던 심유진마저 가만히 있으니 Freddy는 정말 무서웠다. 가는 내내 Freddy는 혼자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별이와 심유진의 눈치를 봤다. 별이는 화를 내고 나서는 혼자 조용히 창밖만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심유진도 가만히 앉아서 멍을 때렸다. Allen의 시선을 느낄 새도 없었다. 반시간정도 지나서 심유진의 집 앞에 도착했다. 차가 멈추자마자 심유진은 정신을 차리고 안전벨트를 풀었다. “유진 씨...” Allen이 조심스럽게 불렀지만 심유진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나중에 얘기해요.” 심유진이 차에서 내렸을 때 별이는 이미 내려서 심유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별이는 아무 말 없이 심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 심유진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녀는 작은 손을 감싸 쥐었다. “집에 가자.” 심유진은 물기를 머금은 목소리를 감추려고 노력했다. 오늘은 하은설이 쉬는 날이었다. 아침에 심유진이 별이를 데리고 나갈 때까지도 그녀는 자고 있었다. 그들이 돌아올 때쯤에는 마침 배가 고파서 주방에서 시리얼이라도 먹으려고 하는 중이었다. 출입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자 하은설은 주방에서 고개를 내밀어 쳐다봤다. 별이와 심유진이 서있는 걸 보고 하은설은 깜짝 놀랐다. “왜 다시 왔어?” 별이는 입술을 꽉 깨물더니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갔다. 하은설은 굳게 닫힌 방문을 바라보며 걱정돼서 심유진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저래?” 심유진은 주방으로 들어가서 우유를 전자레인지에 데웠다. “뜻밖의 일이 생겨버려서.” 심유진이 토스트빵을 자르면서 얘기하자 하은설이 깜짝 놀라서 물었
별이는 간지럼을 많이 탔기에 허리 쪽에 손이 닿으니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심유진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불을 걷고는 별이를 품에 안았다. 별이의 얼굴에 눈물자국이 가득했다. 심유진은 마음이 너무 아파서 숨이 쉬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심유진은 별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울지 마.” 심유진도 목소리가 떨려왔다. 볼에 뜨거운 액체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별이는 그제야 심유진의 품에 얼굴을 파묻은 채 마음 편히 울기 시작했다. 별이는 한 번도 이렇게 마음껏 큰소리로 울면서 울분을 쏟아낸 적이 없었다. 심유진도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렀다. “별아...”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목구멍에 막혀서 나오지 않았다. “울지 마...” 하은설은 계속 방 안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상황이 심상치 않자 얼른 뛰여왔다. “왜 그래!” 하은설은 눈앞의 광경에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둘 다 왜 울고 있어?” 심유진은 별이의 등을 토닥거리며 혹시 울다가 숨이 넘어가기라도 할까 봐 걱정했다. “그만 울어 별아.” 심유진은 하은설에게 대답해 줄 겨를이 없었다. 둘 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하은설이 그제야 가까이 다가갔다. 하은설은 휴지를 뽑아서 눈물을 닦아주고는 아침밥을 가리키며 말했다. “더 울다가는 다 식겠다.”별이는 이미 얼굴이 퉁퉁 부어있었다. 며칠 전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하은설은 별이의 볼을 감싸고 마음 아파하며 말했다. “별아, 그만 울어. 이모가 마음이 너무 아프다.” 하지만 별이는 여전히 울먹였다. “대체 무슨 일인데?” 하은설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상사 아들이 괴롭혀?” 하은설이 소매를 걷으며 말했다. “내가 당장 가서!”심유진이 하은설을 말렸다. “그런 거 아니야.” “근데 별이 왜 울어.” 하은설은 믿지 않았다. 심유진은 별이를 내려놓고는 휴대폰을 꺼냈다. “아빠 보고 싶어? 영상통화 할래?” 별이는 잠깐 멈칫하다가
허태준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출장 갈 일이 생겨서.” “이렇게 늦게요?” 심유진은 다시 국내 시간을 확인했다. 확실히 새벽 한 시였다. 허태준은 비행기표 가격을 따지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 돈을 아끼려고 일부러 저녁 비행기를 골랐을 리는 없다. 게다가 지금 vip휴게실이 아닌 일반 대기실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쪽이 날씨가 안 좋아서 자꾸 이륙이 늦어지네요.” 허태준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근데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요?” “제가 아니라요...” 심유진이 별이를 비췄다. “별이에요.” 허태준 얼굴을 보자 별이가 드디어 울음을 그쳤다. 별이는 눈물을 닦아냈다. 그 모습을 보자 허태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왜?” 허태준이 다급히 물었다. “누가 괴롭혔어?”별이가 고개를 저으면서 아직 물기가 어려있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대답했다. “괴, 괴롭힘 당한 거 아니에요.” 눈가나 코가 모두 빨개진 모습이 억울한 토끼 같았다. 허태준은 여전히 표정이 안좋았지만 목소리만은 따뜻하게 말했다. “근데 왜 울어?” “Freddy가 전 아빠가 없대요.” 별이는 허태준에게 억울함을 다 털어놓았다. 별이의 말을 들은 모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허태준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하은설이 먼저 화를 냈다. “Freddy? 그 상사 아들 말하는 거지? 주소 불러, 당장 찾아갈 테니까.” 심유진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으라는 눈치를 줬다. 하지만 하은설은 그 눈짓을 잘못 이해한 것 같았다. “사직까지 한 마당에 상사가 뭐가 무서워. 별이가 이런 소리를 듣는데 가만히 있을거야?” 하은설은 한번 분노하면 쉽게 진정이 되지 않는 상황이라 심유진은 난감했다. “별아, 아빠랑 천천히 얘기해. 엄마는 이모랑 밥 먹고 올게.”심유진은 하은설을 끌고 거실로 나갔다. 심유진은 방문을 닫고는 일부러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Freddy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그리고 이미 사과받았어. 일은 잘 처리했
“응?” 하은설의 수상한 웃음에 심유진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만약 별이가 대표님과 얘기하고 나서 기분이 나아지면 좀 속상하지 않겠어? 방금 네가 한참을 달랬을 때는 아무 소용도 없었잖아.”하은설이 일부러 심유진을 자극했다. 심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은설은 심유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별이가 대표님이 자기 아빠인 걸 알게 되면 이 가정에서 네 입지가 너무 곤란해 지는 걸?”심유진이 참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무슨 소리야 우리 아들을 뭘로 보고!”별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무조건 자신일 거라고 심유진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반시간 정도 지나서 별이가 심유진의 휴대폰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별이는 이제 울음을 완전히 그쳤다. 눈이 팅팅 부어 있는 모습이 웃겠지만 심유진은 웃음을 참았다. “통화 다 끝났어?”심유진이 별이를 품에 안았다.“응.”별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아빠가 Freddy의 말은 신경 쓰지 말래. Freddy는 바보래.”심유진이 정색하며 말했다.“비록 Freddy가 별이를 속상하게 한 것 맞지만 그래도 바보라고 뒤에서 욕하면 안 돼. 그건 예의가 없는 행동이야. 알겠어?”“하지만 아빠는 Freddy처럼 상황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는 건 바보라서 그렇다고 했어.” 별이가 당당하게 반박했다.“난 Freddy처럼 함부로 얘기하고 다니지 않을 거야.”심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나도 아빠 있어.”별이는 심유진에게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 자기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난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아빠 있어. 아빠가 이제 시간 되면 Freddy랑 같이 디즈니에 가자고 했어. 별이 아빠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게 해 준다고.”심유진은 갑자기 머리가 아팠다. 이대로 가다가는 별이가 제2의 허태준이 될 것만 같았다. 상상만 해도 무서웠다. 하지만 의기양양한 별이의 표정을 보니 함부로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디즈니 여행 계획이 무산되자 심유
심유진은 킹 호텔 직원들이 모인 채팅방에 들어가 봤다. 어떤 부서든지 직급이 어떻든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호텔을 조사한대요. 저희는 어떡해요?”하지만 누구도 확실한 답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절망스러워하는 분위기였다. 모두가 부 지배인의 소식을 물었지만 부 지배인은 답장이 없었다. 심유진은 예전에 같이 일했던 매니저에게 소식을 물었다.“킹 호텔을 임시 폐업한다면서요.”“총 지배인님?”매니저는 심유진의 문자를 받고 흥분해서 잘못 본 건 아닌지 몇 번이나 확인했다. “드디어 나타나셨네요!”심유진은 순간 조금 미안한 감정이 들어 다시 인사말을 보탰다.“잘 지내고 있죠?”“아니요. 잘 못 지내요.”매니저는 답장 속도가 매우 빨랐다.“어제 갑자기 호텔을 조사할 거라고 사람들이 찾아왔어요.”“소방서에서 저희 호텔에 소방 안전 위험이 있다고 했어요. 저희 해석은 듣지도 않고 모든 사람을 호텔에서 내쫓고는 압류 수색 딱지를 붙였어요.” “전 아직까지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모르겠어요.”“부 지배인님이 일단 집으로 가서 연락을 기다리라고 했는데 아직까지 아무 소식이 없어요”“하루가 지났는데 메일도 안 왔어요. 전화해도 메일을 보내도 받는 사람이 없네요.”“지금 회사가 어수선해요.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매니저가 눈물을 흘리는 이모티콘을 여러 개 보냈다. 심유진은 매니저한테서 적지 않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호텔은 오늘 갑자기 조사를 시작했고 소방서에서는 태도가 매우 강압적이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이에 관해서 호텔 측은 통지를 받은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직원들의 물음에 대답을 해 줄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서서히 심유진의 머릿속을 파고드는 생각이 있었다. 그녀는 허태준에게 문자를 보냈다.“경주 킹 호텔 임시 폐업, 혹시 당신이 한 일이에요?”킹 호텔은 국내 기업은 아니었지만 본사가 워낙 크다 보니 경주에서도 알아주는 호텔이었다. 그러니 소방 관련 문제가 생긴다 하더라
“빈 말이 아니라 정말 부지배인님은 총지배인님이랑 비교가 안 돼요.” “이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한마디 해석도 없이 잠적한 거 봐요.””진짜 실망이에요.” 허태준이 킹 호텔을 건드린 건 아마 유경원 때문일 것이다.유경원이 사라진 것도 허태준과 연관이 있을 거라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심유진은 유경원을 위해서 해석해 줄 생각이 없었다.“부 지배인님 빼고 호텔 사무는 누가 관리 하고 있어요?”그녀가 매니저에게 물었다. 매니저가 몇 명 관리인들의 이름을 댔다.“그 사람들한테 일단 연락해 봐요. 이렇게 큰일이 생겼으면 본사도 이미 알아차렸을 테니 곧 방법이 생길 거예요. 너무 조급해하지 마요.”“알겠습니다.”매니저가 몇 분 뒤에 다시 문자를 보냈다.“차장님이 이미 본사에 연락했대요.”차장은 채팅방에도 등장하여 위로의 말을 건네며 직원들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직원들은 여전히 초조해하고 있었다. 심유진이 기사 댓글들을 살펴보고 있는데 매니저에게서 다시 문자가 왔다.“그래서 지배인님은 대체 언제 돌아오시는 거예요? 저희 부서는 지배인님이 돌아오시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어요.” 심유진은 자신이 이렇게 환영받을 줄은 몰랐다. 매니저의 말투를 보아하니 유경원과 비교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좋은 지배인이었는지를 다들 다시 한번 느낀 것만 같았다.“근데 부 지배인이 그렇게 일을 못 하던가요?”심유진은 뒤에서 다른 사람 얘기를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정말 궁금해서 하는 질문이었다. 심유진이 봤을 때 유경원은 일을 정말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아무리 본사에서 파견한 직원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높은 지위에 오래 머무르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예전에는 좋았죠. 근데 지배인님이 회사를 나가고 나서부터 사람이 완전히 변했어요.”“전처럼 다정하지도 않고 조금만 실수해도 욕부터 했다니까요.”“지배인님을 따르던 사람들 중에 회사를 나간 사람들이 많아요. 사직당한 사람도 있고 더 이상 버티지 못해서 자기 발로 나간 사람도 있고요.”“빚만
별이와 하은설은 공원에서 실컷 놀고 둘이서 손을 잡고는 행복하게 웃으며 걸어 나왔다. 심유진은 미리 준비하고 있던 따뜻한 커피와 우유를 건넸다. 근데 별이의 등은 이미 땀에 젖어있었다.“엄마! 아주 재밌어!”별이는 종달새처럼 재잘재잘 공원 내부 곳곳을 다 소개했다. 심유진은 열심히 들어 주면서 리액션해줬다. 별이는 기분이 많이 나아진 것 같았다. 어제의 속상한 감정은 이미 다 잊은 것처럼 보였다. 점심을 먹은 식당은 심유진이 예약한 것이었다. 가장 잘 팔리는 메뉴는 햄버거와 감자튀김이었는데 이건 별이가 좋아하는 메뉴였고 심유진은 자주 사주지 않는 메뉴들이었다. 하은설이 심유진에게 농담을 던졌다. “혹시 대표님한테 아들의 사랑을 뺏기기라도 할까 봐 위기의식이 느껴진 거야?”심유진이 하은설을 째려보면서 말했다. “조용히 해.”하은설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별이의 손을 잡았다.“얼른 도망가자. 너네 엄마 화나서 이모 때릴지도 몰라.”별이는 뛰면서 심유진의 눈치를 살폈다. 심유진은 얼른 웃음을 지었다.“이모가 거짓말하는 거야. 엄마가 왜 사람을 때리겠어.”심유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보탰다.“근데 아빠는 잘 때릴걸.”하은설은 너무 웃겨서 넘어질 뻔했다.심유진은 이런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감자튀김만 몇 개 집어 먹고는 말았다. 심유진은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있었는데 분명히 문자 오는 사람이 없었지만 몇 분마다 한 번씩 휴대폰을 확인했다. 허태준은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 별이와 통화를 한 지 5시간이나 지났는데 말이다. 별이의 말에 따르면 그때 허태준은 곧 비행기에 올라탈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5시간이면 경주에서 어디를 가든 국내에서는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혹시 해외로 출장을 가는 걸까?CY그룹은 굉장히 큰 과학기술 집단이니 여러 나라들과도 합작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해외로 출장을 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심유진이 긴 한숨을 쉬었다. 더 이상 휴대폰을 보지 않기 위해 심유진은 아예 휴대폰을 가방 안에
심유진과 별이 모두 어이없다는 듯 하은설을 쳐다봤다. “흥!” 하은설은 가방을 들고일어나면서 말했다. “화장실 좀 다녀 올게.” 하은설이 볼일을 보고 손을 씻는데 검은 머리에 황색 피부를 가진 아시아인 한 명이 손을 씻고 있었다. 미국에서 오래 지내면서 하은설은 아시아인만 보면 왠지 모를 동질감이 들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시기도 다 지나버렸기에 아시아인을 만나도 눈길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 남성은 유달리 하은설의 눈길을 끌었다. 원인은 간단했다. 패스트푸드 가게에 정갈한 정장 차림에 넥타이까지 하고 오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심지어 구두까지 반짝반짝 닦은 상태였다. 하은설은 호텔에서 일하면서 많은 vip손님들을 모셨었다. 이 남성의 복장은 딱 봐도 원단이나 설계가 최상급이었다. 절대 보통인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이 이 가게에 있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남성은 손을 깨끗하게 씻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는 거울을 통해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하은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눈이 마주치기 전에 하은설이 얼른 시선을 피했다. 뭔가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하은설은 침착한 척 손을 씻었다. 차가운 물도 부끄러움에 달아오른 몸의 체온을 낮춰줄 수가 없었다. 남성은 휴지로 손을 닦고 나서도 자리를 뜰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은설은 얼른 손을 씻고는 물기를 툭툭 털고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근데 그때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주?” 하은설은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얼굴이 홍당무우처럼 달아올랐다. 그 사이 남성은 어느새 하은설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제야 하은설은 그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짙은 눈썹, 높은 코, 길게 째진 눈... 부드러움과 강인함이 동시에 존재하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왠지 익숙한 얼굴이었다. “왜 아무 말도 없어요?”남성이 웃으며 말했다. “요즘 공주들은 말을 못 하나? 아까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하은설은 더 이상 이 상황을 버틸 수가
하은설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시간 없어, 빨리 가자! 너 기다리다 네 남편 목 빠지겠네!”심유진은 빨리 걷기 위해 두 손으로 얼른 웨딩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응, 그래.”화창한 날씨에 황금빛 햇살이 꽃잎 사이로 레드카펫을 비추고 있었다.심유진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온실 문 앞까지 걸어왔다.온실 대문 앞에는 육윤엽이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별이의 손을 잡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별이는 심유진의 등장에 잡고 있던 육윤엽의 손을 떼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엄마, 오늘 천사 같아요!”심유진도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 우리 별이!”오늘 결혼식의 화동인 별이는 정장 차림에 작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앙증맞은 손에는 형형색색의 꽃잎이 들어있는 바구니가 들려있었다.온실 안에서 곧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육윤엽은 심유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가자.”심유진은 애써 웃고 있지만 눈물이 맺힌 육윤엽을 보고 갑자기 꼬끝이 찡해졌다.하은설은 그녀가 울려고 하자, 옆에서 한마디 했다.“참아, 울면 안 돼!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화장 번지면 안 예쁘잖아.”심유진은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패딩 점퍼를 벗어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넸고 육윤엽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별이도 앞에 서서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면서 바구니 속의 꽃잎들을 한 웅큼씩 집어서 하늘로 흩뿌렸다.신부의 등장에 하객들은 잇달아 박수를 쳤고 심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허태준은 예식장 단상 앞에서 자신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오는 심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결혼식장이 크지 않은 탓에, 육윤엽과 심유진은 2분도 안 되어 예식장 단상 앞까지 걸어왔다.행복함에 싱글벙글하던 허태준은 육윤엽이 굳은 얼굴로 헛기침을 몇 번 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아버님.”육윤엽은 심유진을 한 번
육운영과 김욱은 블루 항공이 설 연휴에도 쉬지 않은 탓에 경주에서 이틀을 보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다만 심유진은 보름 정도 되는 설 연휴 중 절반 시간을 허씨 가문의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공공장소가 문을 닫은 상황이라 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육운영과 김욱은 짧은 휴가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했다.별이도 설 연휴가 끝난 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허태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이의 유치원 픽업을 위해 일부러 허태준과 심유진이 사는 동네에 집까지 샀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 블루 항공 경주 지사의 재건축도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김욱은 몇 명의 핵심 직원들을 경주 지사 쪽으로 파견시켜 심유진과 함께 회사 초반 운영을 하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운영은 정상 궤도에 올랐고 일부 본사의 업무도 경주 지사 쪽으로 넘어왔다.회사가 눈코 뜰 새 바빠지자, 심유진은 5월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허태준이 결혼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기에 바쁜 일정 속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디자이너들을 만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면서 결혼식 준비를 했다....5월이 되자, 모두의 예상대로 코로나는 국내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퍼졌다.블루 항공은 다행히 코로나가 N시티에서 유행하기 전, 대부분의 부서를 이동한 상황이라 큰 타격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성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국내의 여러 의료기기 공장을 설립하고 마스크 등 의료 물자를 전 세계로 운송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반면 모어 항공은 블루 항공과의 소송에서 패한 뒤, 입소문이 나쁘게 퍼져서 고객들을 블루 항공에 뺏긴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이번 사건의 주역이었던 마리아는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모든 일이 잘 풀리는 중, 심유진과 허태준의 결혼식 날도 다가왔다.심유진은 결혼식 날이면 해방감이 들 줄 알았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잠을 설쳤다....YT 그룹이 부
허아주머니는 특별히 심유진을 위해 아침밥을 남겨두었다.심유진은 허아주머니의 정성에 감동했고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허태준과 별이는 그녀가 아침을 다 먹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때마침 허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만두가 가득 담긴 도시락통을 허태준에게 건넸다.“자, 이거 잊지 마.”“고맙습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떠나도 될까요?”심유진은 어젯밤의 일로 토라져서 답도 하기 싫었지만, 허아주머니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짧게 답했다.“네, 가죠.”그녀는 답을 하고 나서 별이의 손을 잡고는 허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허태준도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으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허태준이 별이에게 미리 증조할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말했고, 별이는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폭풍 질문을 던졌다.“증조할아버지는 왜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빠인 건가요?”“증조할아버지는 무서워요?”“증조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만두를 먹을 수 있어요?”...허태준은 별이의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대답했다.그동안 심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허태준은 냉랭한 심유진의 태도에 어젯밤 자기의 행동이 과한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가 거부할수록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하는 자기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허태준은 어젯밤 생각에 몸이 반응해 오면서 또 피가 끓기 시작했다....허태준은 별이를 안고 묘지 입구에서 산 꽃다발을 무덤 앞에 놓았고, 몸을 굽혀 물티슈로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할아버지, 저 왔습니다.”심유진도 허태준의 할아버지를 보자,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무덤을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심유진은 사진 속의 자상한 노인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태준 씨 아내 심유진이에요.”그러고는 별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심유진이 혼자 방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질문 세례를 했다.“태준이는? 왜 같이 내려오지 않았어?”“아빠는 어디 있어요? 불꽃놀이 시켜준다고 저랑 약속했단 말이에요.”심유진은 방에서 나오면서 침착하게 둘러댔다.“샤워하고는 피곤하다고 일찍 잠들었어요.”어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김욱만이 그녀를 몇 초 동안 주시했다.별이는 실망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아빠 미워! 오늘 같은 날 왜 이렇게 빨리 주무시는 거죠?”심유진은 그런 별이가 사랑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어. 내일 아빠가 우리 별이랑 같이 불꽃놀이 해주실 거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그녀의 말이 끝나고 허태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세뱃돈을 심유진과 별이에게 건넸다.허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심유진은 허아주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뜨겁게 포옹했다.“어머님, 고마워요.”허아주머니는 심유진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우리 유진이는 너무 착해.”이어 육운엽과 김욱도 세뱃돈을 건넸고, 별이는 많은 세뱃돈을 받은 것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늦은 시간 탓에 몇몇 어른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때마침 허아주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지.”심유진도 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허태민, 너도 이제 자야지.”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를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유진은 별이를 재운 뒤에도 허태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으로 향했다.다들 잠들었는지 온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심유진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그녀가 켜놓았던 무드등조차 꺼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웠다.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방안으로 끌어당겼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더니 발끝으
“새해 복 많이 받아요.”왜인지 심유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왜 그래요?”허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불꽃놀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완전 좋았어요!”“근데 왜 우는 거예요?”허태준은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심유진이 울면 허태준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너무 감동적이어서요.”심유진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훌쩍거렸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사랑하는 사람...”허태준의 입꼬리가 점점 귀에 걸리더니 심유진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저도 사랑해요, 유진 씨.”그는 머리를 숙이고 심유진의 이마에 키스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하지만 워낙 세게 껴안아 밀어 지지 않았다.“모두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심유진은 이성을 잃은 허태준을 일깨워 줬다.김욱은 그녀가 잠에서 깬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불꽃 쇼도 끝난 상황에 허태준과 위에 오래 무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심유진은 그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다. 허태준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알기에 그녀를 놓아줬다.“잠시 후에 꼭 보충해야 해요.”허태준은 위협적으로 말했다.“어떻게 때울까요?”심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서둘러 내려가지 않았다.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허태준의 턱으로부터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다.“이러면 돼요?”심유진은 허태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웃음치며 그를 유혹했다.“아니면 이렇게?”그녀는 허태준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허태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 빛났고 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하지만 그는 꾹꾹 참으며 인내심 있게 심유진의 다음 유혹을 기다렸다.“우리... 스릴 넘치게 놀아 볼래요?”심유진은 허태준의 턱을 잡으며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그녀는 마치 섹시한
설날에 모처럼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저녁이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들 모두 약주를 하자 허 아주머니는 육윤엽과 김욱을 모두 집에 못 가게 막았다.아침 일찍 일어나 쉴 새 없이 바빴던 심유진은 저녁이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허 아주머니는 피곤해하는 심유진을 발견하고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하지만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졸음을 떨쳐내려 애썼다.“조금만 더 버텨볼게요.”심유진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먼저 자고 싶지 않았다.올해 그녀는 더 이상 떠돌이 처지가 아닌 가족과 함께였기에 더욱 이 소중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허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극구 말렸다.“먼저 올라가서 눈 붙이고 있어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기 전에 깨워줄게요.”허태준은 심유진이 무슨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졌다.허태준이 말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별이 마저도 심유진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며 잠을 권했다.결국 심유진은 그들의 의견을 꺾지 못하고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품하며 침실로 향했다....“유진아! 심유진! 빨리 일어나! 12시야!”누군가 심유진의 뺨을 툭툭 치면서 깨웠다.심유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는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김욱이 있었다.심유진은 김욱의 손을 치우고 그를 세게 때렸다.복수를 마친 심유진은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왜 오빠가 날 깨우러 온 거야? 태준 씨는?”“아래층에 있어. 별이가 태준 씨를 놔주지 않아서 내가 올라왔지.”김욱은 방금 맞은 곳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우지 않는 건데.”“오빠가 먼저 날 때렸잖아! 내 탓 하지 마!”심유진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지금 몇분이야?” 김욱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말했다.“11시 59분이야. 이미 카운트 다운 시작됐어.”“이렇게 빨리?”조금만 잔줄 알
심유진은 생각을 되짚어보고는 문득 허태준이 유럽으로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하지만 허태준은 허택양의 일을 처리하러 유럽으로 가는 거라 핑계를 댔었다.“허태준은 너보다도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어.”육윤엽은 코웃음 치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는 참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 생각밖에 안 하네.”“아이참...”심유진은 헛웃음 지으며 이를 꼭 깨물었다.그녀는 이미 들킨 바에 모든 사실을 다 털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사실, 저와 태준 씨 이혼한 적 없어요. 저 이미 6년 전에 태준 씨와 결혼 했었어요.”허태준은 이 사실을 육윤엽한테 말한 적 없었다.심유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윤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너희 둘...”육윤엽은 가슴을 쥐어 잡고 괴로워했다.심유진과 김욱은 급히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요? 심장이 아파요?”육윤엽은 심유진의 뒤통수를 공격한 후에야 표정이 온화해졌다.그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심유진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앞으로 또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겼다간 더 아프게 때릴 줄 알아.”육윤엽은 험상궂은 얼굴로 겁을 주었다.심유진은 뒤통수를 쥐어 잡으며 대답했다.“다시는 안 숨길게요!”허태준의 부모님은 육윤엽과 김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이 별장에 들어서서부터 허 아주머니는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내오며 쉬지도 않고 대접했다.육윤엽은 젠틀하게 허태준의 부모님을 대했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심유진을 실컷 욕한 덕분일 수 있다.게다가 육윤엽은 두 사람의 선물도 준비해 왔다.그는 허 아주버님한테 비싼 브랜드 시계를, 허 아주머니한테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비싼 보석 세트를 선물로 줬다.두 사람은 한참 거절하다가 끝내 심유진의 설득에 못 이겨 선물을 받았다.양쪽 부모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아이들과 같이 설을 보내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두 분과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그들이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태준과
심유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육윤엽과 김욱을 데리러 가야 했다. 그녀는 저녁밥을 먹은 후 방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잘 준비를 했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그때 허태준은 별이를 재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심유진은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켰다.“저 지금 너무 걱정돼요.”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뭐가 걱정돼요?”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일 저의 아버지가 여기에 오시잖아요... 만약 어머니와 아버님과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심유진은 내일 육윤엽과 허태준의 부모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생각만 해도 머리가 뻐근했다.“아버님은 현명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말아요.”허태준은 심유진을 다독였다.“아버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눈치 보게 하는 분은 아니잖아요.”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태준 씨가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던데요?”허태준은 마른기침하며 핑계를 둘러댔다.“그것도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허태준은 이미 겁에 잔뜩 질려 육윤엽이 없어도 감히 그의 나쁜 말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은 이를 이미 알아차렸다.“아무래도 오빠한테 전화해서 신신당부해야겠어요.”그녀가 충전 케이블을 뽑자 휴재폰 충전이 중단되었다.허태준은 다급하게 그녀를 뜯어말렸다.“두 분 이미 잠에 드셨을 거예요. 할 말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때 해도 늦지 않았어요.”심유진은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긴. 그렇긴 하네요.”허태준은 심유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됐어요. 얼른 자요.”허태준은 방안의 불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뒀다.“내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쪽잠을 잘 시간도 없을 거예요.”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태준을 쳐다봤다.그녀는 갑자기 장난꾸러기같이 웃었다.“저 잠 좀 재워주지 않을래요? 아무 이야기를 해
“네.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심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챙기고 허태준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내일 아침 제가 데리러 올게요. 설날이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거예요.”육윤엽은 거절 대신 한가지 요구를 말했다.“그럼 너 혼자와.”심유진은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육윤엽은 변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아버지가 다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심유진은 투덜거렸다.“아직도 태준 씨를 싫어하시는 거였어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띠었다.“우리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죠.”허태준은 육윤엽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심유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뭐 아버지가 저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고 태준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이 마냥 귀여웠다.“그럼 제가 마음이 급했다면 어쩔 생각이에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심유진을 놀렸다.“저는...”심유진은 육윤엽의 태도를 바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천천히 하죠. 천천히 해!”육윤엽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결국 자포자기하며 외쳤다....심유진과 허태준 별장으로 돌아오자 허 아주머니는 적잖게 놀란 동시에 조금 심술이 났다.“너희 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왜 사돈이랑 더 같이 있어 주지 않고!”허 아주머니는 물어보면서 허태준을 탓했다.“사돈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니야!”심유진은 허태준의 편을 들어줬다.“태준 씨가 모시고 싶지 않아서 온 건 아니에요. 저의 아버지와 오빠가 오랜 비행으로 잠을 못 자서 많이 피곤해하셨어요. 대꾸할 맥도 없어서 저희를 내쫓으셨어요.”“아... 그랬구나.”육윤엽의 거친 성격을 잘 몰랐던 허 아주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럼 어쩔 수 없지.”심유진과 허태준이 밖에 나갔다가 온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