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en은 차를 멈추지도, 디즈니로 가지도 않았다. 그는 차를 돌려서 심유진의 집으로 향했다. “데려다 줄게요. 아니면 걱정될 것 같으니까.” 그는 부드러운 태도로 말했지만 그 단호한 말투가 거절할 수 없게 만들었다. Freddy는 한참을 울었지만 누구도 달래주는 사람이 없었다. 평소에 항상 따뜻하게 대해주던 심유진마저 가만히 있으니 Freddy는 정말 무서웠다. 가는 내내 Freddy는 혼자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별이와 심유진의 눈치를 봤다. 별이는 화를 내고 나서는 혼자 조용히 창밖만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심유진도 가만히 앉아서 멍을 때렸다. Allen의 시선을 느낄 새도 없었다. 반시간정도 지나서 심유진의 집 앞에 도착했다. 차가 멈추자마자 심유진은 정신을 차리고 안전벨트를 풀었다. “유진 씨...” Allen이 조심스럽게 불렀지만 심유진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나중에 얘기해요.” 심유진이 차에서 내렸을 때 별이는 이미 내려서 심유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별이는 아무 말 없이 심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 심유진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녀는 작은 손을 감싸 쥐었다. “집에 가자.” 심유진은 물기를 머금은 목소리를 감추려고 노력했다. 오늘은 하은설이 쉬는 날이었다. 아침에 심유진이 별이를 데리고 나갈 때까지도 그녀는 자고 있었다. 그들이 돌아올 때쯤에는 마침 배가 고파서 주방에서 시리얼이라도 먹으려고 하는 중이었다. 출입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자 하은설은 주방에서 고개를 내밀어 쳐다봤다. 별이와 심유진이 서있는 걸 보고 하은설은 깜짝 놀랐다. “왜 다시 왔어?” 별이는 입술을 꽉 깨물더니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갔다. 하은설은 굳게 닫힌 방문을 바라보며 걱정돼서 심유진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저래?” 심유진은 주방으로 들어가서 우유를 전자레인지에 데웠다. “뜻밖의 일이 생겨버려서.” 심유진이 토스트빵을 자르면서 얘기하자 하은설이 깜짝 놀라서 물었
별이는 간지럼을 많이 탔기에 허리 쪽에 손이 닿으니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심유진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불을 걷고는 별이를 품에 안았다. 별이의 얼굴에 눈물자국이 가득했다. 심유진은 마음이 너무 아파서 숨이 쉬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심유진은 별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울지 마.” 심유진도 목소리가 떨려왔다. 볼에 뜨거운 액체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별이는 그제야 심유진의 품에 얼굴을 파묻은 채 마음 편히 울기 시작했다. 별이는 한 번도 이렇게 마음껏 큰소리로 울면서 울분을 쏟아낸 적이 없었다. 심유진도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렀다. “별아...”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목구멍에 막혀서 나오지 않았다. “울지 마...” 하은설은 계속 방 안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상황이 심상치 않자 얼른 뛰여왔다. “왜 그래!” 하은설은 눈앞의 광경에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둘 다 왜 울고 있어?” 심유진은 별이의 등을 토닥거리며 혹시 울다가 숨이 넘어가기라도 할까 봐 걱정했다. “그만 울어 별아.” 심유진은 하은설에게 대답해 줄 겨를이 없었다. 둘 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하은설이 그제야 가까이 다가갔다. 하은설은 휴지를 뽑아서 눈물을 닦아주고는 아침밥을 가리키며 말했다. “더 울다가는 다 식겠다.”별이는 이미 얼굴이 퉁퉁 부어있었다. 며칠 전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하은설은 별이의 볼을 감싸고 마음 아파하며 말했다. “별아, 그만 울어. 이모가 마음이 너무 아프다.” 하지만 별이는 여전히 울먹였다. “대체 무슨 일인데?” 하은설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상사 아들이 괴롭혀?” 하은설이 소매를 걷으며 말했다. “내가 당장 가서!”심유진이 하은설을 말렸다. “그런 거 아니야.” “근데 별이 왜 울어.” 하은설은 믿지 않았다. 심유진은 별이를 내려놓고는 휴대폰을 꺼냈다. “아빠 보고 싶어? 영상통화 할래?” 별이는 잠깐 멈칫하다가
허태준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출장 갈 일이 생겨서.” “이렇게 늦게요?” 심유진은 다시 국내 시간을 확인했다. 확실히 새벽 한 시였다. 허태준은 비행기표 가격을 따지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 돈을 아끼려고 일부러 저녁 비행기를 골랐을 리는 없다. 게다가 지금 vip휴게실이 아닌 일반 대기실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쪽이 날씨가 안 좋아서 자꾸 이륙이 늦어지네요.” 허태준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근데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요?” “제가 아니라요...” 심유진이 별이를 비췄다. “별이에요.” 허태준 얼굴을 보자 별이가 드디어 울음을 그쳤다. 별이는 눈물을 닦아냈다. 그 모습을 보자 허태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왜?” 허태준이 다급히 물었다. “누가 괴롭혔어?”별이가 고개를 저으면서 아직 물기가 어려있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대답했다. “괴, 괴롭힘 당한 거 아니에요.” 눈가나 코가 모두 빨개진 모습이 억울한 토끼 같았다. 허태준은 여전히 표정이 안좋았지만 목소리만은 따뜻하게 말했다. “근데 왜 울어?” “Freddy가 전 아빠가 없대요.” 별이는 허태준에게 억울함을 다 털어놓았다. 별이의 말을 들은 모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허태준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하은설이 먼저 화를 냈다. “Freddy? 그 상사 아들 말하는 거지? 주소 불러, 당장 찾아갈 테니까.” 심유진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으라는 눈치를 줬다. 하지만 하은설은 그 눈짓을 잘못 이해한 것 같았다. “사직까지 한 마당에 상사가 뭐가 무서워. 별이가 이런 소리를 듣는데 가만히 있을거야?” 하은설은 한번 분노하면 쉽게 진정이 되지 않는 상황이라 심유진은 난감했다. “별아, 아빠랑 천천히 얘기해. 엄마는 이모랑 밥 먹고 올게.”심유진은 하은설을 끌고 거실로 나갔다. 심유진은 방문을 닫고는 일부러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Freddy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그리고 이미 사과받았어. 일은 잘 처리했
“응?” 하은설의 수상한 웃음에 심유진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만약 별이가 대표님과 얘기하고 나서 기분이 나아지면 좀 속상하지 않겠어? 방금 네가 한참을 달랬을 때는 아무 소용도 없었잖아.”하은설이 일부러 심유진을 자극했다. 심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은설은 심유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별이가 대표님이 자기 아빠인 걸 알게 되면 이 가정에서 네 입지가 너무 곤란해 지는 걸?”심유진이 참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무슨 소리야 우리 아들을 뭘로 보고!”별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무조건 자신일 거라고 심유진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반시간 정도 지나서 별이가 심유진의 휴대폰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별이는 이제 울음을 완전히 그쳤다. 눈이 팅팅 부어 있는 모습이 웃겠지만 심유진은 웃음을 참았다. “통화 다 끝났어?”심유진이 별이를 품에 안았다.“응.”별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아빠가 Freddy의 말은 신경 쓰지 말래. Freddy는 바보래.”심유진이 정색하며 말했다.“비록 Freddy가 별이를 속상하게 한 것 맞지만 그래도 바보라고 뒤에서 욕하면 안 돼. 그건 예의가 없는 행동이야. 알겠어?”“하지만 아빠는 Freddy처럼 상황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는 건 바보라서 그렇다고 했어.” 별이가 당당하게 반박했다.“난 Freddy처럼 함부로 얘기하고 다니지 않을 거야.”심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나도 아빠 있어.”별이는 심유진에게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 자기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난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아빠 있어. 아빠가 이제 시간 되면 Freddy랑 같이 디즈니에 가자고 했어. 별이 아빠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게 해 준다고.”심유진은 갑자기 머리가 아팠다. 이대로 가다가는 별이가 제2의 허태준이 될 것만 같았다. 상상만 해도 무서웠다. 하지만 의기양양한 별이의 표정을 보니 함부로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디즈니 여행 계획이 무산되자 심유
심유진은 킹 호텔 직원들이 모인 채팅방에 들어가 봤다. 어떤 부서든지 직급이 어떻든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호텔을 조사한대요. 저희는 어떡해요?”하지만 누구도 확실한 답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절망스러워하는 분위기였다. 모두가 부 지배인의 소식을 물었지만 부 지배인은 답장이 없었다. 심유진은 예전에 같이 일했던 매니저에게 소식을 물었다.“킹 호텔을 임시 폐업한다면서요.”“총 지배인님?”매니저는 심유진의 문자를 받고 흥분해서 잘못 본 건 아닌지 몇 번이나 확인했다. “드디어 나타나셨네요!”심유진은 순간 조금 미안한 감정이 들어 다시 인사말을 보탰다.“잘 지내고 있죠?”“아니요. 잘 못 지내요.”매니저는 답장 속도가 매우 빨랐다.“어제 갑자기 호텔을 조사할 거라고 사람들이 찾아왔어요.”“소방서에서 저희 호텔에 소방 안전 위험이 있다고 했어요. 저희 해석은 듣지도 않고 모든 사람을 호텔에서 내쫓고는 압류 수색 딱지를 붙였어요.” “전 아직까지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모르겠어요.”“부 지배인님이 일단 집으로 가서 연락을 기다리라고 했는데 아직까지 아무 소식이 없어요”“하루가 지났는데 메일도 안 왔어요. 전화해도 메일을 보내도 받는 사람이 없네요.”“지금 회사가 어수선해요.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매니저가 눈물을 흘리는 이모티콘을 여러 개 보냈다. 심유진은 매니저한테서 적지 않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호텔은 오늘 갑자기 조사를 시작했고 소방서에서는 태도가 매우 강압적이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이에 관해서 호텔 측은 통지를 받은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직원들의 물음에 대답을 해 줄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서서히 심유진의 머릿속을 파고드는 생각이 있었다. 그녀는 허태준에게 문자를 보냈다.“경주 킹 호텔 임시 폐업, 혹시 당신이 한 일이에요?”킹 호텔은 국내 기업은 아니었지만 본사가 워낙 크다 보니 경주에서도 알아주는 호텔이었다. 그러니 소방 관련 문제가 생긴다 하더라
“빈 말이 아니라 정말 부지배인님은 총지배인님이랑 비교가 안 돼요.” “이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한마디 해석도 없이 잠적한 거 봐요.””진짜 실망이에요.” 허태준이 킹 호텔을 건드린 건 아마 유경원 때문일 것이다.유경원이 사라진 것도 허태준과 연관이 있을 거라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심유진은 유경원을 위해서 해석해 줄 생각이 없었다.“부 지배인님 빼고 호텔 사무는 누가 관리 하고 있어요?”그녀가 매니저에게 물었다. 매니저가 몇 명 관리인들의 이름을 댔다.“그 사람들한테 일단 연락해 봐요. 이렇게 큰일이 생겼으면 본사도 이미 알아차렸을 테니 곧 방법이 생길 거예요. 너무 조급해하지 마요.”“알겠습니다.”매니저가 몇 분 뒤에 다시 문자를 보냈다.“차장님이 이미 본사에 연락했대요.”차장은 채팅방에도 등장하여 위로의 말을 건네며 직원들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직원들은 여전히 초조해하고 있었다. 심유진이 기사 댓글들을 살펴보고 있는데 매니저에게서 다시 문자가 왔다.“그래서 지배인님은 대체 언제 돌아오시는 거예요? 저희 부서는 지배인님이 돌아오시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어요.” 심유진은 자신이 이렇게 환영받을 줄은 몰랐다. 매니저의 말투를 보아하니 유경원과 비교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좋은 지배인이었는지를 다들 다시 한번 느낀 것만 같았다.“근데 부 지배인이 그렇게 일을 못 하던가요?”심유진은 뒤에서 다른 사람 얘기를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정말 궁금해서 하는 질문이었다. 심유진이 봤을 때 유경원은 일을 정말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아무리 본사에서 파견한 직원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높은 지위에 오래 머무르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예전에는 좋았죠. 근데 지배인님이 회사를 나가고 나서부터 사람이 완전히 변했어요.”“전처럼 다정하지도 않고 조금만 실수해도 욕부터 했다니까요.”“지배인님을 따르던 사람들 중에 회사를 나간 사람들이 많아요. 사직당한 사람도 있고 더 이상 버티지 못해서 자기 발로 나간 사람도 있고요.”“빚만
별이와 하은설은 공원에서 실컷 놀고 둘이서 손을 잡고는 행복하게 웃으며 걸어 나왔다. 심유진은 미리 준비하고 있던 따뜻한 커피와 우유를 건넸다. 근데 별이의 등은 이미 땀에 젖어있었다.“엄마! 아주 재밌어!”별이는 종달새처럼 재잘재잘 공원 내부 곳곳을 다 소개했다. 심유진은 열심히 들어 주면서 리액션해줬다. 별이는 기분이 많이 나아진 것 같았다. 어제의 속상한 감정은 이미 다 잊은 것처럼 보였다. 점심을 먹은 식당은 심유진이 예약한 것이었다. 가장 잘 팔리는 메뉴는 햄버거와 감자튀김이었는데 이건 별이가 좋아하는 메뉴였고 심유진은 자주 사주지 않는 메뉴들이었다. 하은설이 심유진에게 농담을 던졌다. “혹시 대표님한테 아들의 사랑을 뺏기기라도 할까 봐 위기의식이 느껴진 거야?”심유진이 하은설을 째려보면서 말했다. “조용히 해.”하은설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별이의 손을 잡았다.“얼른 도망가자. 너네 엄마 화나서 이모 때릴지도 몰라.”별이는 뛰면서 심유진의 눈치를 살폈다. 심유진은 얼른 웃음을 지었다.“이모가 거짓말하는 거야. 엄마가 왜 사람을 때리겠어.”심유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보탰다.“근데 아빠는 잘 때릴걸.”하은설은 너무 웃겨서 넘어질 뻔했다.심유진은 이런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감자튀김만 몇 개 집어 먹고는 말았다. 심유진은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있었는데 분명히 문자 오는 사람이 없었지만 몇 분마다 한 번씩 휴대폰을 확인했다. 허태준은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 별이와 통화를 한 지 5시간이나 지났는데 말이다. 별이의 말에 따르면 그때 허태준은 곧 비행기에 올라탈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5시간이면 경주에서 어디를 가든 국내에서는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혹시 해외로 출장을 가는 걸까?CY그룹은 굉장히 큰 과학기술 집단이니 여러 나라들과도 합작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해외로 출장을 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심유진이 긴 한숨을 쉬었다. 더 이상 휴대폰을 보지 않기 위해 심유진은 아예 휴대폰을 가방 안에
심유진과 별이 모두 어이없다는 듯 하은설을 쳐다봤다. “흥!” 하은설은 가방을 들고일어나면서 말했다. “화장실 좀 다녀 올게.” 하은설이 볼일을 보고 손을 씻는데 검은 머리에 황색 피부를 가진 아시아인 한 명이 손을 씻고 있었다. 미국에서 오래 지내면서 하은설은 아시아인만 보면 왠지 모를 동질감이 들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시기도 다 지나버렸기에 아시아인을 만나도 눈길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 남성은 유달리 하은설의 눈길을 끌었다. 원인은 간단했다. 패스트푸드 가게에 정갈한 정장 차림에 넥타이까지 하고 오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심지어 구두까지 반짝반짝 닦은 상태였다. 하은설은 호텔에서 일하면서 많은 vip손님들을 모셨었다. 이 남성의 복장은 딱 봐도 원단이나 설계가 최상급이었다. 절대 보통인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이 이 가게에 있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남성은 손을 깨끗하게 씻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는 거울을 통해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하은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눈이 마주치기 전에 하은설이 얼른 시선을 피했다. 뭔가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하은설은 침착한 척 손을 씻었다. 차가운 물도 부끄러움에 달아오른 몸의 체온을 낮춰줄 수가 없었다. 남성은 휴지로 손을 닦고 나서도 자리를 뜰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은설은 얼른 손을 씻고는 물기를 툭툭 털고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근데 그때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주?” 하은설은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얼굴이 홍당무우처럼 달아올랐다. 그 사이 남성은 어느새 하은설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제야 하은설은 그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짙은 눈썹, 높은 코, 길게 째진 눈... 부드러움과 강인함이 동시에 존재하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왠지 익숙한 얼굴이었다. “왜 아무 말도 없어요?”남성이 웃으며 말했다. “요즘 공주들은 말을 못 하나? 아까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하은설은 더 이상 이 상황을 버틸 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