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병실로 돌아왔을 때 두 사람 사이에 분위기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심유진은 기억을 부분적으로 찾은 허태준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비록 허태준은 신유진과 과거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으나 심유진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 과거는 심 유진이 가장 피하고 싶은 주제였다. 심유진은 입을 가리며 하품을 하는척 했다.“저 좀 졸려요.”심유진이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썼다.“전 좀 잘 테니까 일 보세요.”허태준은 당연히 심유진이 지금 핑계를 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여기에서 물러 설 수밖에 없었다.“네, 그럼 쉬세요.”허태준이 N시티로 온 목적은 두 개밖에 없었다. 하나는 심유진을 보기 위해서이고 하나는 육윤엽과 협상하여 허태서와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후자는 이미 어제 해결했기에 허태준이 여기에 남아 있었던 것은 심유진 곁을 지키면서 더 많은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였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을 봐서는 심유진은 한동안 그를 피할 것만 같았다. 허태준은 심유진에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주기로 했다. 병원에서 한동안 지낼 줄 알았기에 허태준은 많은 일들을 미뤘었다. 그러기에 호텔로 돌아와서 허태준은 바로 비서에게 연락하여 미룬 일들을 다시 처리하기 시작했다. 회사 직원들도 갑작스러운 일정 변동에 앓는 소리를 냈다. 기나긴 회의가 끝나고 비서가 허태준에게 말했다.“대표님, 태하그룹에 아드님이 다음 주 토요일에 결혼을 한대요. 청첩장이 사무실로 도착을 했는데 참석하실 겁니까?”허태준은 이 이름을 들은 지도 한참 된 것 같았다. 몇 년간 회사가 계속 하락세를 유지하다가 올해 정재하가 나씨네 집안 딸에게 장가를 가고 나서야 조금 상황이 나아진 것 같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형민에게서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나씨네 집안은 정재하를 별로 탐탁지 않아 한다고 했다. 가정배경을 제외하고 정재하 이 사람만 놓고 본다고 해도 그는 학벌이 출중한 것도 아니고 심연희와의 과거도 있으니 좋은 사윗감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 씨네 집 딸은 무
경비는 그 부부는 며느리를 찾으러 왔다고 했고 그들이 말하는 며느리는 이름이 신유진이었다고 했다. 아파트 경비가 매우 삼엄했기에 비록 입주민 중에 심유진이라는 사람이 있었어도 경비는 그들을 들여보내지 않았다. 여기에서 며느리가 나오기까지 기다리던지 아니면 며느리가 경비실에 전화를 해서 확인이 끝나면 들여보내 주겠다고 했지만 그 부부는 그 어느 방법도 맘에 들어하지 않았고 그냥 억지를 부렸다. 결국 경비는 경찰에 신고할 수밖에 없었고 경찰이 그들을 데려갔다. 허태준은 인상을 찌푸렸다. 당시 조건웅네 집안사람들은 사영은이 준 배상금을 들고는 본가로 돌아갔고 그후 다시는 소식이 없었기에 허태준도 그들을 더 이상 관심 하지 않았다. 근데 이렇게 많은 세월이 지난 뒤에야 또 나타날 줄은 몰랐다.“심유진은 왜 찾는 거지?” 허태준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여형민은 허태준이 눈앞에 있지 않아도 그의 차가운 시선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그건 나도 모르지.”아무리 여형민이라 하더라도 그 짧은 시간에 모든 걸 알아낼 수는 없었다. “근데 듣기로는 아파트에 찾아오기 전에 킹 호텔에도 갔었다나 봐. 거기에서도 난리를 쳤대.”“나 내일 아침에 돌아갈게.”허태준은 귀국한다는 소식을 별이와 김욱에게만 알려줬다. 그는 잠시 일이 있다고만 했지 구체적인 사정은 설명하지 않았다. 허태준은 항상 회사일로 바쁜 사람이었기에 다들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다. 김욱은 허태준을 공항까지 데려다줬다. 허태준은 김욱에게 파일 하나를 건넸다.“이것 좀 심유진 씨에게 전달해 주세요.”파일 안에는 종이 몇 장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알겠습니다.”김욱이 말했다.“조금 있다가 가져다 드릴게요.” 허태준은 일찍 길을 떠났기에 김욱이 그를 데려다주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여덟 시도 안 됐다. 심유진은 어젯밤에 제대로 자지 못했기에 오늘은 조금 늦게 일어났다. 김욱이 도착했을 때는 심유진이 금방 일어나서 양치를 하고 있을 때였다.“왜 이렇게 빨리 왔어요?”심유진은 치약 거품을 입에 머금은 채로
허태준이 경주에 도착했을 때는 당지 시각으로 새벽이었다. 매니저는 허태준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통지를 받고 일찌감치 차를 몰고 와 기다리고 있었다. 장장 열두 시간 비행을 끝마치고도 허태준은 전혀 힘든 기색 없이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는 시차에 적응할 새도 없이 회사로 갔다. 그동안 밀린 업무도 이미 대부분 처리했다. 매니저는 운전을 하면서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했다.“사실 이렇게 급하게 회사로 가실 필요 없어요. 집에 가서 좀 더 쉬시지.”허태준은 손을 저으며 필요 없다고 말했다. 매니저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허태준은 휴대폰으로 메일함을 확인했다. 심연희의 상황이 업로드되고 있었다. 사영은은 1인 병실이 아니었기에 심현희는 의자에 앉아 있거나 간호사가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사영은 침대에 누워 있기도 했다. 그녀는 경찰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수경이 협박을 했었기 때문이었다.“내 말대로 안 하면 바로 경찰에 넘겨버릴 거야. 한평생 감옥에서 살게 할 수도 있어.”병원에 도착한 후에도 시현이는 자신의 진짜 신분을 알리지 않은 채 간병인이라고만 했다. 간호사들 모두 그녀의 신분을 조금 의심했다. 심씨네 집 안에서 사영은의 의료비도 제대로 내지 않는데 간병인을 무슨 돈으로 구했을까? 게다가 심연희 지금 상태를 봐서는 간병인이라기보다는 환자 같았다. 병원에서 언제 의료비를 낼 거냐고 심연희에게 물을 때마다 심연희는 모른 척하며 집안사람들과는 친하지 않고 연락 방식도 없다고만 했다. 간호사들도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메일을 보낸 부하가 허태준에게 물었다.“대표님, 신고할까요?”심연희는 현재 범죄자였기에 신고를 한다면 고의살인이라는 이런 엄격한 형벌은 그녀를 감옥에서 평생 썩게 하기 충분한 조건이었다. 허태준은 메일을 보며 잠깐 고민하다가 답장했다.“조금 더 기다리세요.”적어도 다음 주 토요일 까지는 기다려야 했다. 문제를 하나 해결하고 나니 더 큰 문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여형민과 통화를 마치고 그는 바로
허태준은 두려웠다. 비록 심유진과 다시 만난 후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심장이 또 빨리 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조씨네 집안사람들이 심유진을 찾는 이유는 아마 돈 때문일 것이다. 그들에게서 그런 대우를 받고 그들의 뻔뻔함을 겪은 심유진이 그들에게 어떤 태도를 취할지는 허태준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하지만 그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만약 이미 세상을 뜬 조건웅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면 심유진이 마음이 약해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비록 심유진에 대해 다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몇 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그녀에 대해 꽤 파악할 수 있었다. 심유진은 아무리 독한 말을 하고 차갑게 대한다 하더라도 마음은 따뜻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허태준은 심유진이 다른 사람에게 따뜻하게 대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허태준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조건웅은 이미 죽은 사람이니 더 이상 심유진을 괴롭혀서는 안 됐다. 두터운 자료들이 파일에서 쏟아져 나와 책상에 떨어졌다. 허태준은 가장 위에 놓인 이력서에 붙여진 사진을 주목했다. 사진 속의 남성은 예전에 부하가 조씨네 집안사람들에 관한 자료를 줬을 때 본 적이 있었다. 허태준은 그 사람이 조건웅의 동생 조건이라는 것을 알아봤다. 예전에 그 자료를 받을 때만 해도 조건이는 대학생이었다. 성적은 계속 학년 삼등을 유지했고 매년마다 고액의 장학금까지 받으며 학생회, 동아리 등에서도 활약을 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봤을 때 조건이는 형보다 더 출세할 가망이 있었고 조건이의 집안도 조건이를 유일한 희망으로 여겼다. 하지만 조건이는 인성이 좋지 않았다. 대학교의 학생회는 선후배 관계가 엄격했고 조건이는 회장이라는 직책을 얻은 후에 더욱 의기양양 해졌다. 그러니 주변에 다른 친구들 중에는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사람들은 취직을 하고 나서도 큰 발전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의 이력서가 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대학원을 졸업한 후 조건이는 화려한 이력서를 등에 업고 유명한 대기업에 입사할 기회를
조씨네 집안사람들은 돈도 없고 능력도 없고 인맥도 없었다. 예전에는 아들 둘이 잘 나서 많은 진척들이 관계를 다지려고 찾아오긴 했으나 그들은 자기 자식이 대구에서 좋은 일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하거나 돈을 빌려 달라고 하기도 했다. 조씨네 부부는 체면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이었으나 돈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에 돈을 빌려 달라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돌려보냈다. 하지만 일자리를 구해 달라고 한다면 그건 돈이 필요한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조건웅에게 부탁하여 대신 구해주곤 했다. 심지어는 심유진마저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 진척들을 도와 로열 호텔에 일자리를 마련해 줬다.아들들이 돈을 잘 버는 것이 아니었다면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집안이었을 것이다. 특히는 조건웅 어머니가 종종 말을 함부로 하며 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샀기에 사실 그들 집안사람들을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가끔 그 집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사실은 그냥 집안 사정이 어떤지 구경을 하러 오거나 사업에 관한 얘기를 하러 올뿐이었다. 조씨네 부부는 자신들을 도와줄 사람을 찾지 못 하자 결국 전 며느리를 찾아왔다. 그들은 그동안 사영은의 요구에 따라 심유진을 다시는 찾지 않았기에 심유진이 뭘 하고 지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예전처럼 대구에 로얄호텔로 찾아갔다 두 사람은 로열 호텔을 막론하고도 대구에서 유명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보안인원들은 그들을 보자마자 밖으로 내쫓았다. “심 매니저님은 여기 안 계십니다. 그만 가주세요.”하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다. 그들 모두 심유진의 지시를 받고 자신들을 내쫓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심유진이 호텔에 드나드는 것을 마주치지 못 하자 그들은 그제야 심유진이 정말 이곳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각종 수단을 동원하고 나서야 그들은 심유진이 경주의 로열호텔로 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심유진이 경주에 갔다니... 그곳은 로열호텔의 모든 고위급 간부들이 다 모
허태준은 모든 자료를 다 확인했다. 그는 두터운 자료들을 내려놓고 전화를 걸었다. “회사에 조건이라는 사람이 이력서가 온 적 없는지 확인해 봐. 상대방은 재빨리 답변을 했다. 원재금융 쪽에서 이력서를 받았다고 합니다. 원재금융은 C Y 그룹 산하의 금융 서비스 회사였다. 조건이는 금융을 전공했으니 당연히 금융 회사에 지원했을 것이다. 허태준이 책상을 톡톡 두드리면서 잠깐 생각했다.“취업시키세요.”조건이가 일자리를 얻고 싶어 하니 허태준은 그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그 집안사람들이 잠깐이나마 조용해질 수 있다면 말이다. 순식간에 토요일이 됐다. 이른 아침부터 여형민이 허태준의 집문을 두드렸다. “준비 다 됐어? 떠나도 돼?”허태준은 아직도 잠옷을 입은 채로 거실에서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허태준은 한 손에 커피 잔을 들고 한 손에는 휴대폰을 든 채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입꼬리를 올린 채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었다. 여형민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알아차릴 수 있었다.“별이랑 얘기하고 있어?”허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별이는 이제 아는 단어가 점점 많아져 허태준과 문자를 할 때도 타자를 꽤 잘했다. 하지만 아직 어리기 때문에 틀리게 쓴 글씨가 있거나 하면 허태준은 하나하나 시정해줬다. 여형민이 허태준을 가볍게 때렸다. “내일 이어서 얘기하면 안 돼? 이미 늦었어. 빨리 떠나야 돼.”허태준은 드디어 여형민을 쳐다보며 말했다.“내가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빨리 갈 필요 있어?”청첩장에는 11시 반이라고 적혀 있었고 허태준의 집에서 식당 까지는 반 시간도 안 걸렸다. “난 일찍 가야 하잖아. 오늘 같이 가주겠다며.”여형민이 원망에 가득 찬 눈빛으로 허태준을 바라봤다.“한 입으로 두 말하기 없기야.”나씨네 집안 큰 사위로써 여형민은 일찍 결혼식장에 도착해야 했다. 이런 자리에서는 완벽한 부부 행세를 하자고 나은희와 이미 약속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은희와 단둘이 있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편했다. 그러니 여형
“너 아직도 나은희 무서워하니?”허태준이 비웃었다. 여형민은 창피한지 얼굴이 빨개졌다.“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일어나.”여형민이 호통을 쳤다. 허태준은 궁금했으나 더 이상 묻지 않았다.“좋아하면 그냥 좋아한다고 해.”허태준이 여형민의 등을 두드렸다.“어차피 결혼도 한 사이인데 예전에 일은 그냥 잊어버려.”여형민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허태준은 그가 또 과거의 일들을 떠올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나도 좋아하고 상대방도 나를 좋아하는 이런 관계는 찾기 쉽지 않아.”허태준은 여형민에게 이런 진지한 얘기를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하지만 자신도 겪었던 일이니 간절히 원하는데 얻지 못하는 그 아픔을 알고 있었다. 비록 나은희의 예전 행동들은 용서할 수 없었지만 그녀의 사정에 공감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은희도 벌 받을 만큼 받았어. 정말 그 사람한테 마음이 간다면 그냥 잘 지내봐. 사랑이라는 건 한번 놓치면 다시 돌아오지 않아.”마치 그와 심유진 사이의 관계와 같았다. 만약 처음 만났을 때부터 조금 더 주동적이고 용감하게 다가갔더라면 이렇게 오래 헤매지도 않았을 것이다. 여형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씨네 집안은 경주에서 알아주는 집안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여형민네 집안과 혼담이 오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은희는 여형민과 결혼할 때 여형민 의 의견에 따라 결혼식을 성대하게 올리지 않고 집안사람들끼리 간단하게 한 끼 식사를 하는 것으로 끝냈다.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던 것은 나씨네 집안에서 계속 아쉬워하던 일이었다. 근데 이제 작은 딸이 결혼을 하니 전에 그 아쉬움을 채울 기회가 온 것이다. 그들은 큰 예식장을 빌려 한 달 전부터 설계를 시작했다. 신부의 요구로 예식장은 핑크색과 흰색을 주제로 동화 속에 들어온 것처럼 몽환적인 분위기로 꾸며졌다. 경비도 일반 호텔보다 훨씬 삼엄했다. 여기저기 무장한 경찰들이 깔려 있었다.오늘 결혼식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니 혹여나 결례를 범할까 봐 결혼식장에
예식장에서 나은희는 최종점검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깔끔한 흰색 정장을 입고 하이힐을 신었는데 마침 어깨까지 오는 긴 생머리가 자연스럽게 나풀거리며 크고 반짝이는 귀걸이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나은희를 보자마자 여형민의 시선은 그녀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허태준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가만히 그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나은희는 한 손에 무전기를 든 채 조금 삐뚤게 설치된 조명을 가리키며 직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허태준이 일부러 여형민에게 물었다.“저쪽으로 갈까?”여형민이 드디어 고개를 돌렸다.“아니, 아무 데나 앉아있자.”“나은희가 세 번이나 전화했다며. 그렇게 급히 찾은 걸 보니 무슨 일이 있는 거 아닐까?”“어차피 나 보고 뭔가 도와 달라고 하는 건 아닐 거야. 우리가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열심히 할 필요가 있어?”여형민과 알고 지낸 세월이 있는 만큼 허태준은 여형민의 생각을 단번에 읽어 냈다.“왜, 결혼식 올리고 싶어 졌어?”허태준이 살짝 눈을 흘겼다.“애초에 결혼식을 안 올리겠다고 한 사람은 나은희가 아니라 너잖아. 근데 이제 와서 기분 나빠하는 건 좀 아니지 않아?”여형민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그저 허태준을 째려볼 뿐이었다.“너 왜 나은희 편들어?”허태준이 손을 저었다.“아니, 난 그냥 맞는 말을 할 뿐이야.”여형민은 이를 악물었다.“꺼져.”훤칠한 남성 둘이 입구에 이렇게 오래 서 있으니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나 은희는 일에 집중하다가도 직원들의 시선을 따라 그쪽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보자 나은희가 웃으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하이힐을 신은 데다가 바닥은 닦은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물기가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나은희는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주위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때 허태준은 한 사람이 신속하게 나은희 쪽으로 달려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허태준은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여형민은 나은희를 품에 안았다. 드라마 한 장면 같은 상황에 주위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나은
하은설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시간 없어, 빨리 가자! 너 기다리다 네 남편 목 빠지겠네!”심유진은 빨리 걷기 위해 두 손으로 얼른 웨딩드레스를 들어 올렸다.“응, 그래.”화창한 날씨에 황금빛 햇살이 꽃잎 사이로 레드카펫을 비추고 있었다.심유진은 아름다운 이곳에서 머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온실 문 앞까지 걸어왔다.온실 대문 앞에는 육윤엽이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별이의 손을 잡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별이는 심유진의 등장에 잡고 있던 육윤엽의 손을 떼고 그녀에게로 달려왔다.“엄마, 오늘 천사 같아요!”심유진도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웃었다.“고마워, 우리 별이!”오늘 결혼식의 화동인 별이는 정장 차림에 작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앙증맞은 손에는 형형색색의 꽃잎이 들어있는 바구니가 들려있었다.온실 안에서 곧이어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육윤엽은 심유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가자.”심유진은 애써 웃고 있지만 눈물이 맺힌 육윤엽을 보고 갑자기 꼬끝이 찡해졌다.하은설은 그녀가 울려고 하자, 옆에서 한마디 했다.“참아, 울면 안 돼! 카메라가 돌고 있는데 화장 번지면 안 예쁘잖아.”심유진은 쏟아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패딩 점퍼를 벗어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넸고 육윤엽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별이도 앞에 서서 두 사람의 보폭에 맞춰 걸어가면서 바구니 속의 꽃잎들을 한 웅큼씩 집어서 하늘로 흩뿌렸다.신부의 등장에 하객들은 잇달아 박수를 쳤고 심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허태준은 예식장 단상 앞에서 자신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오는 심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결혼식장이 크지 않은 탓에, 육윤엽과 심유진은 2분도 안 되어 예식장 단상 앞까지 걸어왔다.행복함에 싱글벙글하던 허태준은 육윤엽이 굳은 얼굴로 헛기침을 몇 번 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아버님.”육윤엽은 심유진을 한 번
육운영과 김욱은 블루 항공이 설 연휴에도 쉬지 않은 탓에 경주에서 이틀을 보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다만 심유진은 보름 정도 되는 설 연휴 중 절반 시간을 허씨 가문의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인해 많은 공공장소가 문을 닫은 상황이라 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육운영과 김욱은 짧은 휴가가 끝난 뒤, 업무에 복귀했다.별이도 설 연휴가 끝난 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허태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이의 유치원 픽업을 위해 일부러 허태준과 심유진이 사는 동네에 집까지 샀다.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 블루 항공 경주 지사의 재건축도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김욱은 몇 명의 핵심 직원들을 경주 지사 쪽으로 파견시켜 심유진과 함께 회사 초반 운영을 하도록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의 운영은 정상 궤도에 올랐고 일부 본사의 업무도 경주 지사 쪽으로 넘어왔다.회사가 눈코 뜰 새 바빠지자, 심유진은 5월 예정이었던 결혼식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허태준이 결혼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알기에 바쁜 일정 속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디자이너들을 만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면서 결혼식 준비를 했다....5월이 되자, 모두의 예상대로 코로나는 국내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퍼졌다.블루 항공은 다행히 코로나가 N시티에서 유행하기 전, 대부분의 부서를 이동한 상황이라 큰 타격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성그룹과의 협업을 통해 국내의 여러 의료기기 공장을 설립하고 마스크 등 의료 물자를 전 세계로 운송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반면 모어 항공은 블루 항공과의 소송에서 패한 뒤, 입소문이 나쁘게 퍼져서 고객들을 블루 항공에 뺏긴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이번 사건의 주역이었던 마리아는 집에서 쫓겨났다는 소문까지 돌았다.모든 일이 잘 풀리는 중, 심유진과 허태준의 결혼식 날도 다가왔다.심유진은 결혼식 날이면 해방감이 들 줄 알았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잠을 설쳤다....YT 그룹이 부
허아주머니는 특별히 심유진을 위해 아침밥을 남겨두었다.심유진은 허아주머니의 정성에 감동했고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허태준과 별이는 그녀가 아침을 다 먹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때마침 허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만두가 가득 담긴 도시락통을 허태준에게 건넸다.“자, 이거 잊지 마.”“고맙습니다.”허태준은 심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떠나도 될까요?”심유진은 어젯밤의 일로 토라져서 답도 하기 싫었지만, 허아주머니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짧게 답했다.“네, 가죠.”그녀는 답을 하고 나서 별이의 손을 잡고는 허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허태준도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으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허태준이 별이에게 미리 증조할아버지를 뵈러 간다고 말했고, 별이는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폭풍 질문을 던졌다.“증조할아버지는 왜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빠인 건가요?”“증조할아버지는 무서워요?”“증조할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만두를 먹을 수 있어요?”...허태준은 별이의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대답했다.그동안 심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볼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허태준은 냉랭한 심유진의 태도에 어젯밤 자기의 행동이 과한 것 같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허태준은 그녀가 거부할수록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하는 자기를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허태준은 어젯밤 생각에 몸이 반응해 오면서 또 피가 끓기 시작했다....허태준은 별이를 안고 묘지 입구에서 산 꽃다발을 무덤 앞에 놓았고, 몸을 굽혀 물티슈로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냈다.“할아버지, 저 왔습니다.”심유진도 허태준의 할아버지를 보자,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무덤을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심유진은 사진 속의 자상한 노인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할아버지, 저 기억하세요? 태준 씨 아내 심유진이에요.”그러고는 별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심유진이 혼자 방에서 나오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질문 세례를 했다.“태준이는? 왜 같이 내려오지 않았어?”“아빠는 어디 있어요? 불꽃놀이 시켜준다고 저랑 약속했단 말이에요.”심유진은 방에서 나오면서 침착하게 둘러댔다.“샤워하고는 피곤하다고 일찍 잠들었어요.”어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고 김욱만이 그녀를 몇 초 동안 주시했다.별이는 실망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아빠 미워! 오늘 같은 날 왜 이렇게 빨리 주무시는 거죠?”심유진은 그런 별이가 사랑스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피곤해서 일찍 잠들었어. 내일 아빠가 우리 별이랑 같이 불꽃놀이 해주실 거야,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그녀의 말이 끝나고 허태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세뱃돈을 심유진과 별이에게 건넸다.허아주머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심유진은 허아주머니에게 다가가더니 뜨겁게 포옹했다.“어머님, 고마워요.”허아주머니는 심유진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우리 유진이는 너무 착해.”이어 육운엽과 김욱도 세뱃돈을 건넸고, 별이는 많은 세뱃돈을 받은 것에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늦은 시간 탓에 몇몇 어른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때마침 허아주버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지.”심유진도 별이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허태민, 너도 이제 자야지.”별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한 손에는 두툼한 돈봉투를 꼭 쥐고 다른 한 손은 심유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심유진은 별이를 재운 뒤에도 허태준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아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으로 향했다.다들 잠들었는지 온 집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심유진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그녀가 켜놓았던 무드등조차 꺼져 있어 칠흑같이 어두웠다.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방안으로 끌어당겼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고 할 때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더니 발끝으
“새해 복 많이 받아요.”왜인지 심유진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왜 그래요?”허태준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불꽃놀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심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완전 좋았어요!”“근데 왜 우는 거예요?”허태준은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심유진이 울면 허태준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너무 감동적이어서요.”심유진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훌쩍거렸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해를 보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사랑하는 사람...”허태준의 입꼬리가 점점 귀에 걸리더니 심유진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저도 사랑해요, 유진 씨.”그는 머리를 숙이고 심유진의 이마에 키스했다.심유진은 허태준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히 그를 밀어냈다.하지만 워낙 세게 껴안아 밀어 지지 않았다.“모두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심유진은 이성을 잃은 허태준을 일깨워 줬다.김욱은 그녀가 잠에서 깬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불꽃 쇼도 끝난 상황에 허태준과 위에 오래 무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심유진은 그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다. 허태준은 그녀를 화나게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알기에 그녀를 놓아줬다.“잠시 후에 꼭 보충해야 해요.”허태준은 위협적으로 말했다.“어떻게 때울까요?”심유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서둘러 내려가지 않았다.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허태준의 턱으로부터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다.“이러면 돼요?”심유진은 허태준의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웃음치며 그를 유혹했다.“아니면 이렇게?”그녀는 허태준의 몸을 어루만지며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허태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 빛났고 몸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하지만 그는 꾹꾹 참으며 인내심 있게 심유진의 다음 유혹을 기다렸다.“우리... 스릴 넘치게 놀아 볼래요?”심유진은 허태준의 턱을 잡으며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그녀는 마치 섹시한
설날에 모처럼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니 저녁이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그들 모두 약주를 하자 허 아주머니는 육윤엽과 김욱을 모두 집에 못 가게 막았다.아침 일찍 일어나 쉴 새 없이 바빴던 심유진은 저녁이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허 아주머니는 피곤해하는 심유진을 발견하고 먼저 올라가서 쉬라고 했다.하지만 심유진은 주먹을 꽉 쥐며 졸음을 떨쳐내려 애썼다.“조금만 더 버텨볼게요.”심유진은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기도 전에 잠에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먼저 자고 싶지 않았다.올해 그녀는 더 이상 떠돌이 처지가 아닌 가족과 함께였기에 더욱 이 소중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허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극구 말렸다.“먼저 올라가서 눈 붙이고 있어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기 전에 깨워줄게요.”허태준은 심유진이 무슨 마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졌다.허태준이 말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별이 마저도 심유진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며 잠을 권했다.결국 심유진은 그들의 의견을 꺾지 못하고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하품하며 침실로 향했다....“유진아! 심유진! 빨리 일어나! 12시야!”누군가 심유진의 뺨을 툭툭 치면서 깨웠다.심유진이 눈을 뜨자 눈앞에는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김욱이 있었다.심유진은 김욱의 손을 치우고 그를 세게 때렸다.복수를 마친 심유진은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왜 오빠가 날 깨우러 온 거야? 태준 씨는?”“아래층에 있어. 별이가 태준 씨를 놔주지 않아서 내가 올라왔지.”김욱은 방금 맞은 곳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우지 않는 건데.”“오빠가 먼저 날 때렸잖아! 내 탓 하지 마!”심유진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지금 몇분이야?” 김욱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말했다.“11시 59분이야. 이미 카운트 다운 시작됐어.”“이렇게 빨리?”조금만 잔줄 알
심유진은 생각을 되짚어보고는 문득 허태준이 유럽으로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하지만 허태준은 허택양의 일을 처리하러 유럽으로 가는 거라 핑계를 댔었다.“허태준은 너보다도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어.”육윤엽은 코웃음 치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너는 참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 생각밖에 안 하네.”“아이참...”심유진은 헛웃음 지으며 이를 꼭 깨물었다.그녀는 이미 들킨 바에 모든 사실을 다 털어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사실, 저와 태준 씨 이혼한 적 없어요. 저 이미 6년 전에 태준 씨와 결혼 했었어요.”허태준은 이 사실을 육윤엽한테 말한 적 없었다.심유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윤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너희 둘...”육윤엽은 가슴을 쥐어 잡고 괴로워했다.심유진과 김욱은 급히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요? 심장이 아파요?”육윤엽은 심유진의 뒤통수를 공격한 후에야 표정이 온화해졌다.그의 손이 너무 매웠는지 심유진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앞으로 또 이런 중요한 일을 숨겼다간 더 아프게 때릴 줄 알아.”육윤엽은 험상궂은 얼굴로 겁을 주었다.심유진은 뒤통수를 쥐어 잡으며 대답했다.“다시는 안 숨길게요!”허태준의 부모님은 육윤엽과 김욱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이 별장에 들어서서부터 허 아주머니는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내오며 쉬지도 않고 대접했다.육윤엽은 젠틀하게 허태준의 부모님을 대했다. 아무래도 오는 길에 심유진을 실컷 욕한 덕분일 수 있다.게다가 육윤엽은 두 사람의 선물도 준비해 왔다.그는 허 아주버님한테 비싼 브랜드 시계를, 허 아주머니한테는 경매에서 낙찰받은 비싼 보석 세트를 선물로 줬다.두 사람은 한참 거절하다가 끝내 심유진의 설득에 못 이겨 선물을 받았다.양쪽 부모님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이번에 여기에 온 것은 아이들과 같이 설을 보내고 싶어서 이기도 하지만 두 분과 결혼식에 대해 상의하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그들이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허태준과
심유진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육윤엽과 김욱을 데리러 가야 했다. 그녀는 저녁밥을 먹은 후 방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잘 준비를 했다.하지만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그때 허태준은 별이를 재우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심유진은 이불을 들춰 몸을 일으켰다.“저 지금 너무 걱정돼요.”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헝클어진 채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뭐가 걱정돼요?”허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내일 저의 아버지가 여기에 오시잖아요... 만약 어머니와 아버님과 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죠?”심유진은 내일 육윤엽과 허태준의 부모님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생각만 해도 머리가 뻐근했다.“아버님은 현명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말아요.”허태준은 심유진을 다독였다.“아버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눈치 보게 하는 분은 아니잖아요.”허태준의 말에 심유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태준 씨가 아버지 눈치를 많이 보던데요?”허태준은 마른기침하며 핑계를 둘러댔다.“그것도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요.”허태준은 이미 겁에 잔뜩 질려 육윤엽이 없어도 감히 그의 나쁜 말을 하지 못했다. 심유진은 이를 이미 알아차렸다.“아무래도 오빠한테 전화해서 신신당부해야겠어요.”그녀가 충전 케이블을 뽑자 휴재폰 충전이 중단되었다.허태준은 다급하게 그녀를 뜯어말렸다.“두 분 이미 잠에 드셨을 거예요. 할 말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갈 때 해도 늦지 않았어요.”심유진은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하긴. 그렇긴 하네요.”허태준은 심유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됐어요. 얼른 자요.”허태준은 방안의 불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뒀다.“내일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쪽잠을 잘 시간도 없을 거예요.”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태준을 쳐다봤다.그녀는 갑자기 장난꾸러기같이 웃었다.“저 잠 좀 재워주지 않을래요? 아무 이야기를 해
“네.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심유진은 들고 온 가방을 챙기고 허태준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내일 아침 제가 데리러 올게요. 설날이어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을 거예요.”육윤엽은 거절 대신 한가지 요구를 말했다.“그럼 너 혼자와.”심유진은 멈칫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역시 육윤엽은 변하지 않았다.“알겠어요.”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는 아버지가 다 받아들인 줄 알았어요.”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심유진은 투덜거렸다.“아직도 태준 씨를 싫어하시는 거였어요.”허태준은 심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를 띠었다.“우리 천천히 해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죠.”허태준은 육윤엽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심유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왔다.“뭐 아버지가 저를 막 대하는 것도 아니고 태준 씨가 괜찮다면 저도 괜찮아요.”허태준은 그런 심유진이 마냥 귀여웠다.“그럼 제가 마음이 급했다면 어쩔 생각이에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심유진을 놀렸다.“저는...”심유진은 육윤엽의 태도를 바꿀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천천히 하죠. 천천히 해!”육윤엽과의 부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으니 그녀는 결국 자포자기하며 외쳤다....심유진과 허태준 별장으로 돌아오자 허 아주머니는 적잖게 놀란 동시에 조금 심술이 났다.“너희 둘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왜 사돈이랑 더 같이 있어 주지 않고!”허 아주머니는 물어보면서 허태준을 탓했다.“사돈께서 멀리서 오셨는데 잘 모셔야 할 것 아니야!”심유진은 허태준의 편을 들어줬다.“태준 씨가 모시고 싶지 않아서 온 건 아니에요. 저의 아버지와 오빠가 오랜 비행으로 잠을 못 자서 많이 피곤해하셨어요. 대꾸할 맥도 없어서 저희를 내쫓으셨어요.”“아... 그랬구나.”육윤엽의 거친 성격을 잘 몰랐던 허 아주머니는 머쓱하게 웃었다.“그럼 어쩔 수 없지.”심유진과 허태준이 밖에 나갔다가 온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