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염무현은 양희지가 나타나기 몇 분 전에 이미 그 자리에 와 있었다. 전날 오후에 서운혁이 깡패들을 데리고 우씨 가문에 침입해 강제로 사채를 줘서 돈을 강탈하려는 일 때문에 서씨 가문을 가만히 놔둘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서경철을 두들겨 패서 교훈을 주고 굴복시키려 했다.내일 월요일이니 우씨 삼촌의 대학 강의하는 데만 영향이 없게 하려는 거였다. 그리고 서씨 가문과 공씨 가문의 갈등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본인과 상관없는 일이기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는데 서씨 가문이 먼저 그를 건드려 분노하게 만들었다.비록 양희지는 전처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염무현은 그녀에게 완전히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필경 염라대왕의 여자였었기에 다른 사람의 괴롭힘을 받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이제 서운혁과 서운범에게 모두 중상을 입혔으니, 원수는 이미 맺어진 것이다. 두 차례의 일이 겹쳐서 서씨 가문은 이제 반드시 철저하게 없애 버려야지 아니면 더 큰 화를 불러올 것이다.그런데 염무현은 양희지가 이곳에 나타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전에 그녀가 서운범을 대하는 태도로 봤을 때 서경철과 절대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위층 고급스럽고 위풍이 넘치는 사무실에 서경철이 어두운 얼굴로 소파에 널브러져 앉아 있고 테이블에는 호박색의 양주가 있었는데 눈빛에는 영락없이 분노가 쌓여 있었다. 양희지를 보는 순간 서경철은 그녀의 아름다운 미모에 놀랐다. 그는 음탕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당신이 양희지야? 역시 얼굴은 예쁘고 몸매도 죽이네. 내 아들이 눈독을 들일 만했네. 그런데 내 아들은 당신 때문에 죽을 뻔했어.”양희지의 예쁜 얼굴은 순식간에 하얘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드님은 지금 어떤가요?”서경철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지금 나한테 묻는 거요? 아주 철저하게 폐인이 됐소! 말해 보시오, 왜 나를 찾아왔는지?”양희지는 심호흡하고 진심을 담아 말했다.“제가 아드님의 모든 치료비를 책임질게요. 물론 그 이후의 모든 비용도 부담할 용의가 있으니 부디 자비를 베풀어서 염무현 씨를
“아무도 감히 와서 내 일에 간섭할 수 없을뿐더러, 설사 간섭한다 해도 아래층 애들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또 경찰이 여기까지 들이닥칠 때쯤이면 우리 일은 다 끝났을 거야.”말을 마치고 서경철은 책상 서랍을 열어 하늘색 알약이 든 상자를 꺼내 양희지 앞에서 전부 입에 넣었다.“하하하, 이 약이 있으면 내가 충분히 널 재미있게 해줄 수 있어.”양희지는 후회했다. 그녀는 자기가 일을 너무 간단하게 생각했다는 걸 깨닫고 머릿속으로 어떻게든 여기에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녀가 겁에 질려 돌아서서 도망가려고 하자 서경철이 소리쳤다.“제 발로 찾아왔으면서 어딜 도망가려고 해? 나 북파두목의 영역이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맘대로 갈 수 있는 곳인 줄 알아?”서경철은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큰 손으로 양희지의 머리를 잡아당겨서 거칠게 소파 쪽으로 끌고 와서는 술잔을 들고 그녀의 입에 부어 넣었다.“내가 흥분제를 먹었으니, 너도 먹어야지. 난 당신 같은 얼음 미녀가 술에 취해 교태를 부리는 게 좋아. 하하하!”양희지가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몸부림쳤지만, 나약한 여자가 어찌 덩치 크고 힘센 서경철을 당해내겠는가, 양주 한잔에서 거의 절반 이상이 목으로 넘어가자 사레에 걸려 눈물까지 흘렀다.서경철은 흥분한 상태였지만 아직 약효가 발휘하려면 몇 분 정도 더 걸리기에 당장 덮치지 않고 그사이에 서해시 제일 미녀 대표를 잘 괴롭혀 주려고 했다. 술 한 잔을 다 먹이고 나서 서경철은 부족했는지 아예 술병을 가져왔다.그때 건물 밖에서 조윤미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경찰에 전화하고 있었다.“빨리 오세요. 지금 저의 대표님 상황이 급해요. 뭐요? 10분이 걸린다고요? 그때 도착하면 이미 늦는단 말이에요.”조윤미는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며 또 전화했다.“남도훈 씨, 저의 대표님 큰일 났어요. 빨리 와서 살려주세요. 지금 천하 그룹에 있어요.”조윤미의 말을 다 듣더니 남도훈의 분노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천하 그룹? 거기는 서경철의 회사잖아요. 저는..
조윤미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조급해할 때쯤, 공혜리가 김범식과 함께 히스턴 호텔에 도착했다. 공규성이 서씨 가문과의 전쟁을 허락하지 않았기에 공혜리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어 직접 염무현에게 사과하려고 찾아갔다.호텔 로비에서.“염무현 씨는 어디 가셨어요?”공혜리의 얼굴이 굳어졌다. 염무현이 서운범을 폐인으로 만든 상황에서 이 밤에 나가 다니면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에 불안했다. 로비 매니저가 벨보이를 불러서 상세한 상황을 물었다.“손님은 고급 택시를 타고 떠났습니다. 제가 문을 열어드리면서 기사님이 손님한테 목적지를 확인하는 걸 들었는데 천하 그룹이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염무현이 로열 스위트룸에 투숙한 귀빈이기에 벨보이도 특별히 주의했었다.역시 뭐가 두려우면 뭐가 온다고 공혜리는 다급해졌다.“김 팀장님, 당장 부하들을 데리고 천하 그룹으로 가요.”김범식은 다급하게 말렸다.“아가씨, 잘 생각하셔야 해요. 제 부하들만 데리고 섣불리 쳐들어가면 바로 실패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을 구하지도 못하고 우리까지 잘못될 수 있습니다.”공혜리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이를 악물었다.“염무현 씨가 잘못되면 우리 아버지도 죽어요. 무슨 말인지 몰라요?”김범식의 표정이 순식간에 엄숙해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네요. 모두 나를 따라와.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염무현 씨를 구해야 해.”천하 그룹 대표 사무실.양희지는 서경철의 상대가 안 됐기에 연거푸 술을 삼키게 되었고 머리가 어지러워졌는데 끝내 몸부림칠 힘도 없이 얼굴은 빨개졌고 몸은 나른해졌다. 지금 그녀는 무르익은 복숭아처럼 온몸으로 또 다른 유혹을 발산했다.서경철은 갑자기 눈이 붉어지더니 체내에서 욕구가 솟구쳐서 주체할 수 없었다. 그는 한 손으로 양희지의 목을 졸라 꼼짝 못 하게 하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옷을 찢었는데 순간 눈처럼 하얀 피부가 드러났다. 양희지는 화가 치밀어 오르고 또 목의 경동맥이 압박받아 기절했다.“잘됐네. 체력도 아낄 수 있겠어. 나중에 깨워줄게!”서경철은
“윙...”밖에서 빨간 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운 종소리가 건물 전체에 울려 퍼졌다. 밖에 있던 경호원들은 순식간에 사무실 쪽으로 모여들었는데 맨 앞에 있는 건 4명의 살기를 품은 건장한 남자들이었는데 몸집이 신속하고 고대 무술가만이 가줄 수 있는 강력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그 뒤에는 8명이 있었고 그 뒤로도 수많은 부하들이 모여들었다.잠시 후, 사무실 밖은 물샐틈없이 포위되었다.“4대 천왕과 8대 금강만 들어오고 나머지는 밖에서 대기해.”서경철은 명령을 내리고 얼굴에는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내 아들의 십여 명의 경호원들이 너의 상대가 안 될 정도로 싸움을 잘 한다며? 오늘 여기에 100명 가까이 있는데 혼자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것 같아?”고대 고수들도 1명이 10명을 상대하는 건 보통 현상이었지만, 1명이 100명까지 상대하는 건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인원수도 많겠지만 또 4대 천왕과 8대 금강과 같은 강자까지 있는데 이 12명은 모두 해외에서 고용한 용병과 무법자 출신으로 무자비하기로 소문이 났는데 그들의 손에는 수많은 사람의 피가 묻어 있다.이들은 서경철이 공씨 가문을 상대로 사용하려는 가장 큰 카드였기 때문에 눈앞의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이는 2명 정도로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준비를 많이 했네.”염무현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러자 서경철은 더욱 득의양양해졌다.“하하하, 무섭지? 공혜리가 눈이 멀었거나 머리가 어떻게 됐나 봐, 너 같은 놈이 어디가 좋다고? 걱정하지 마, 너의 시체는 꼭 공혜리 앞에 가져다줄게. 그년의 표정도 보고 싶으니까.”염무현은 두려운 기색 대신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잘 됐어. 한꺼번에 정리할 수 있겠어.”서경철이 깜짝 놀랐다.“뭐라고? 건방진 놈! 나 생각 바꿨어. 저 자식 목숨만 붙여놔! 양희지는 너를 살리려고 부탁하러 오고, 넌 양희지를 구하러 오고 둘이 관계가 좋은가 봐? 오늘 네 놈 앞에서 양희지를 뭉개버릴 거니까 잘 지켜봐. 하하하!”4대 천왕은 동
생사부와 같은 의술을 가졌다고 하는 것이 바로 사람들이 염라대왕 염무현에 대한 최고의 찬사다. 그 말인즉 지옥의 왕이라 할지라도 그를 어찌하지 못한다는 말인데. 염무현이 살리려고 하면 한발을 지옥의 문에 들여놨다고 해도 다시 끌어올 수 있다는 뜻이다.하지만 염무현의 신분을 아는 사람은 몇 명 안 된다. 염무현이 있는 곳에서는 생과 사를 모두 염무현만이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살라고 하면 살 수 있는 것이고 따라서 그가 죽이고 싶은 사람은 그 누가 와도 살릴 수 없을 것이다.세간에서는 염무현에게 황금 침이 있고 그 황금 침과 뛰어난 의술로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는 것만 알았지, 그에게 은침도 있다는 건 알지 못했는데 은침은 사람의 목숨을 거두는 무기였다.현재 서경철의 히든카드였던 4대 천왕과 8대 금강 12명은 염무현이 마음만 먹으면 곧바로 목숨을 잃을 것이다. 그들은 꼼짝 못 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셈이다.그 순간 사무실 밖에 있던 서경철의 부하들도 충격을 금치 못하고 쥐 죽은 듯 조용했다. 4대 천왕과 8대 금강의 실력이 어떤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들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12명은 그들을 아는 사람으로 하여금 벌벌 떨게 만들었는데 최근 서경철을 따라서 수많은 무자비한 일들을 저질렀는데 한 사람당 수십 명의 목숨을 쥐고 있었다. 서씨 가문에서 그들의 지위는 서경철과 그의 아들 다음으로 높았다. 아무나 내놔도 그 위협은 하늘을 찔렀는데 거만하기 그지없는 서운범도 그들을 보면 아주 공손하게 아저씨라고 부르며 존경했다.그런 12명이 힘을 합쳤는데도 평범하기 그지없는 청년을 이길 수 없다니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다면 아예 믿지 않았을 것이다.염무현 앞에서 12명은 미처 움직일 틈도 없이 바닥에 꽂힌 나무로 되어버렸다.“너... 너, 너 대체 뭐 하는 놈이야?”서경철은 어찌나 당황했는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말까지 더듬었는데 조금 전의 거만함과 여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의 경험상 오늘 제대로 걸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밖에서 많은
그의 말에 적어도 열몇 명은 놀라서 자리에 주저앉았다.아래층에서 남도훈이 스포츠카를 몰고 달려왔다.이 상황을 피할 수 없다면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편이 훨씬 나았다. 양희지가 결혼했던 과거도 받아들인 남도훈이었으니, 다른 남자에게 몹쓸 짓을 당한 것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이럴 때야말로 여자가 가장 나약한 순간이다. 관심의 눈빛, 간단한 위로 몇 마디면 양희지는 분명 크게 감동하고 앞으로 그에게 성과 마음을 다할 것이다.“도련님, 오셨어요!”조윤미가 급히 마중을 나갔고 남도훈은 급 연기에 돌입했다.“윤미 씨 전화 받고 바로 달려왔어요. 오는 길에 아버지에게 전화해 방법을 찾아보라고 했어요.”“방법이 있을까요?”조윤미가 급히 물었다.방법이 있을 수가 없었다!하지만 남도훈은 뻔뻔하게 말을 지어냈다.“서해 시 전체에서 서경철을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초대 지하세계의 왕인 경태 삼촌이라고 하셔서, 전화 한 통 넣어달라고 부탁했어요.”감옥살이하는 것도 아니고, 허풍은 누구나 떨 수 있었다.당시 공규석과 서경철이 어려웠을 때, 경태 삼촌이 그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이유로, 두 사람은 늘 경태 삼촌을 고마워하고 존경하고 있었다.“그럼 너무 잘됐네요. 역시 중요한 순간에는 도련님밖에 없어요. 저희 양 대표님이 도련님을 알게 된 건 정말 천운이에요. 염무현 그 쓰레기 입에서 나오는 말은 진실이 하나도 없어요!”조윤미가 중얼거리고 있는데, 문 앞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그가 안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양희지였다!“어떻게 저 자식이?”남도훈은 화들짝 놀랐다.‘멀쩡하게 천하 그룹에서 걸어 나온다고? 어떻게 이럴 수 있지?’서경철은 염무현과 피맺힌 원한이 있었으니 절대 쉽게 염무현을 용서할 수 없었고, 더욱이 양희지를 데려가게 내버려 둘 리도 없었다.염무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아직 멍한 상태인 조윤미에게 양희지를 맡기고는 간단히 몇 마디 하려는데, 조윤미가 갑자기 흥분하며 소리쳤다.“도훈 도련님, 우리 대표님을 구해주셔서 너무
남도훈의 표정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네 아버지가 뭐라 했는지 어디 한번 말해봐.”염무현이 비웃으며 말했다.남도훈은 고개를 빳빳이 세우더니 여전히 뻔뻔하게 말했다.“아버지가 경태 삼촌에게 전화해서 희지 씨를 풀어줬다고 하네.”“거짓말. 어서 진실을 말하지 못해?”염무현은 이렇게 뻔뻔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한 번도 아니고, 번번이 남의 공을 가로채면 앞으로 들통나는게 두렵지도 않을까?조윤미가 불쑥 나섰다.“염무현 씨,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도훈 도련님의 공이 아니면 설마 당신 덕이겠어요? 그저 운이 좋아 대표님을 위층에서 데려온 것뿐이면서. 도훈 도련님 아버지의 도움이 없었다면, 당신은 이미 위에서 죽었을 거예요!”“도훈 도련님에게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말을 왜 요상하게 해요. 정말 인간 됨됨이가 이상하네요! 게다가 이 일은 당신 때문에 일어난 일이잖아요. 하마터면 우리 양 대표님을 해칠 뻔해 놓고, 무슨 자격으로 여기서 그런 말을 하는 거죠?”남도훈은 너그러운 척하며 손을 내저었다.“그만 해요, 됐어요. 저는 희지 씨를 구하려던 거지 이 자식을 구하려던 게 아니었어요. 그저 운이 좋아 덕분에 살아난 것뿐이니, 저도 이 자식 감사 인사 따위는 필요 없어요.”조윤미는 더 흥분해서 말했다.“들었죠? 이게 바로 남자의 도량이에요. 무현 씨와 도련님 사이의 이 거대한 차이가 눈에 보이시나요? 조금의 염치라도 있다면 고맙다고 인사하세요.”양희지마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염무현, 너 진짜 너무 했어!”“내가 너무해?”염무현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양희지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너 진짜 왜 이렇게 변한 거야? 전에도 별로 훌륭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사리 분별은 하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속이 좁아터져서 염치도 없는 사람이 된 거야? 너무 실망이야.”설명하려던 염무현은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겨우 몇 마디 했다고 토라진 거예요? 양 대표
하지만 너무 순조로웠다.의혹을 품은 채 그들은 위층으로 올라갔다.엘리베이터에서 막 나왔을 때 김범식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밖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아가씨를 보호해!”순간 모든 사람이 우르르 몰려들더니 공혜리를 가운데에 에워쌌다.인원수로 따지면 공혜리 쪽은 절대적으로 밀리는 상황이었고, 상대방의 땅에서 이렇게 돌진하는 것은 스스로 그물에 뛰어드는 격이었다.김범식의 경계심 가득한 얼굴에는 걱정이 앞섰다. 일단 시작하면 조금의 이득도 볼 수 없는 싸움이었다.그런데 더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상대방의 백여 명의 사람들은 제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자세히 살펴보니 하나같이 겁에 질린 듯 얼굴이 하얗게 상기된 채 온몸을 부르르 떨었고, 심지어 몇몇 사람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왔어요?”사무실에서 염무현의 목소리가 들렸다.공혜리는 화색이 돌더니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사람들을 급히 밀어내고 그에게 달려갔다.함정일까 봐 두려웠던 김범식은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막았지만, 공혜리가 재빠르게 피했다.“휴!”김범식은 한숨을 쉬고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염무현이 나타난 이후로 공혜리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와 관계된 일이라면 공혜리는 이성을 잃고 말았다.예전에는 매사에 냉철했고, 뛰어난 지능을 가져 아버지 공규석 못지않게 모든 면에서 뛰어난 그녀였다.언젠가 이 모든 후과를 감당해야 할 날이 올 것이다.지금의 공혜리는 빙산처럼 차가운 얼음공주가 아니라, 연애에 정신이 팔린 보통 여자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김범식은 속으로, 공혜리가 염무현을 좋아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더 이상 생각할 겨를도 없이, 눈앞의 광경에 놀라 또 한 번 멍해졌다.“이거 뭐야... 서씨 가문의 4대 천왕, 8대 금강, 그리고 서경철은 대체 왜 이러고 있어?”김범식은 기가 막힌 표정이었다.먼저 도착한 공혜리도 경악하고 말았다.이 순간, 그녀는 마침내 둘째 삼촌 공규석의 근심을 알게 되었다.